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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놀 줄 모르는 한국인, 유전자를 바꿔주마”

오지 캠핑 즐기는 87세 ‘진짜 자연인’ 박상설

  • 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놀 줄 모르는 한국인, 유전자를 바꿔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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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더라고요. 아, 이제 죽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죽기 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평소 하고 싶었던 걸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혼자 외국 구경을 갔습니다. 때마침 88서울올림픽이 끝난 뒤라 우리나라에도 해외여행 바람이 불었거든요. 그때도 여관이나 호텔엔 묵지 않고 캠핑을 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용감하게 차부터 빌렸죠.”

배낭여행에 텐트 치고 생활할 거면서 왜 차를 빌렸느냐고 물었더니, 그럼 텐트까지 든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떻게 걸어 다니느냐고 되묻는다. 듣고 보니 그렇다. 자연이 좋아 자연을 찾아간 것이지 딱히 사서 고생을 하러 간 것도 아닌데 괜한 선입관 때문에 그의 여행에 멋대로 사족을 붙이고 있었다.

“그래도 첫날부터 죽을 고생이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안 죽더라고요. 분명 의사는 1년을 못 산다고 했는데 자꾸 증세가 호전되는 겁니다. 그래서 알았죠. 아, 내 병은 걸으면 되는 병이구나. 물론 지금도 어지럽고 힘이 들 때가 있어요. 완치가 안 되는 병이거든요. 그런데도 몸은 아프기 전보다 더 건강해졌어요.”

살림의 고수, 여행의 달인

그는 여느 캠핑족이 즐겨 먹는 인스턴트식품이나 통조림 음식엔 관심이 없다. 캠핑 다닐 때도 주식은 누룽지와 양파 두 가지 정도이고, 평소 식사도 직접 만든 음식으로 최대한 간소하게 먹는다. 건강을 위해 이것저것 과하게 챙겨먹는 게 되레 더 해롭다는 게 지론. 김치며 식혜도 직접 담가 먹는단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도 절대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툭하면 캠핑을 떠나는 자유인의 집인데도 어지간한 똑순이 주부가 아니고선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정갈하다. 서재에 가지런히 꽂힌 책이며 차곡차곡 분류돼 쌓인 자료들, 싱크대에 조르르 올려진 그릇과 컵은 여간 야무진 살림 솜씨가 아님을 보여준다. 방 한쪽에 줄을 세워둔 배낭은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당장 출발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장비를 캠핑 종류별로 채워둔 것들이다.

“놀 줄 모르는 한국인, 유전자를 바꿔주마”

10월 경남 거창중앙고등학교에서 초청 강연에 나선 박상설 씨.

“지금 당장이라도 미국 배낭여행을 갈 수 있어요. 저 가방에 필요한 걸 다 정리해서 넣어놓았거든요. 이번 가을엔 강원 철원군 산골에만 세 번 다녀왔습니다. 기러기가 보고 싶어서요. 기러기 수명이 200년 가까이 된다고 하니 내가 본 기러기들 중엔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가 보았던 기러기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훌쩍 캠핑을 떠날 때면 그는 오롯이 혼자다. 젊고 나이 듦을 떠나 차가운 공기 속에 홀로 있는 것이 쓸쓸하고 외로울 법도 한데 그는 그런 고독을 즐기는 게 좋아 나홀로 캠핑족이 됐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캠핑 가면 힘들다 피곤하다 하는데 왜 그런 줄 아세요? 놀 줄 모르니까 그런 겁니다. 차에다 짐 잔뜩 싣고 가족 전부 데려가서 삼겹살 굽고 연기 피우며 노는 게 캠핑인 줄 잘못 알고 있다, 이 말입니다. 비싼 장비만 경쟁적으로 갖춰놓고 옆집이 가니 나도 가야 되는 게 캠핑인 줄 생각하잖아요. 등산도 마찬가집니다. 여럿이 무리 지어 가서는 산 밑에서 빈대떡에 막걸리 마시며 동료들 험담하고 가족 뒷얘기하는 게 등산이더란 말입니다. 진짜 캠핑을 즐기고픈 거라면 우르르 떼 지어 차를 세워놓고 고기 구울 게 아니라 호젓한 자연을 벗 삼아 책을 읽어야지요.”

그에게 인문학은 사람을 잘 놀 줄 알게 만드는 ‘문화’의 근간이자 자연과 사람, 문화를 잇는 중요한 가교다.

“문화가 대물림되는 걸 문화결정론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엔 과거 살롱 문화라는 게 있었어요. 50세 넘은 귀부인들은 시내에 혼자 나가지 않고 어린 처녀들과 반드시 동행했는데, 항상 인문학 책을 갖고 다녔답니다. 살롱에 앉아 자신이 읽은 책의 주제를 발표하고, 토론을 하는 거죠. 그들은 그런 살롱 문화를 통해 고급 문화를 대물림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안타깝게도 그런 게 없어요.

고급 문화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을 소외시키는 밀실 문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외국에선 캠핑족도 텐트 안에서 조용히 책 보고 자연을 즐기거든요. 본래 캠핑이란 것이 우리처럼 이렇게 소란스럽게 지지고 볶고 하는 게 아닌데 우리에겐 그 문화가 잘못 전달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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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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