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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사랑보다 슬픈 기억 눈물보다 진한 독백

‘남자가 사랑할 때’와 전북 군산

  • 글·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김성룡 | 포토그래퍼

사랑보다 슬픈 기억 눈물보다 진한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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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만나는 수많은 적산가옥 풍경은 관광의 맛있는 눈요기이자 일제 수탈기의 피눈물 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런 양면을 함께 흡수하는 것을 가리켜 역사라고 한다. 군산은 역사의 오묘한 산증인 같은 도시다.

‘신파 멜로 조폭 드라마’라는, 사실은 가장 상투적인 장르만을 결합한 영화치고 ‘남자가 사랑할 때’는 ‘답지 않게도’ 큰 그림, 곧 풀 쇼트를 즐겨 사용하는 영화다. 아마도 그것은 감독의 예술적 욕심이었을 것이다. 신파 영화는 사실 클로즈업 기법을 많이 쓴다. 우는 연기가 많고 캐릭터의 표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자가 사랑할 때’는 종종 그것을 포기하고 반대로 간다.

예컨대 종종 치매기를 보이는 아버지를 경찰서에서 간신히 찾아낸 후, 온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 말이다. 정신이 약간 없는 아버지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걸어가면, 그 옆으로 며느리 미영과 손녀딸 송지(강민아)가 터덜터덜 걸어간다.

그 뒤로는 영일, 태일 형제 둘이 티격태격 뒤따라간다. 동생은 형에게 “너 같은 인간도 형이냐?”고 하고, 형은 동생에게 “이 새끼야, 너 언제 형 대접 제대로 해봤어?”라며 박박댄다. 그 모습을 카메라는 옆에서 트래킹(tracking)으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따라간다. 이상하게도 평화롭게 보이고 달이 떠 있다. 이 가족도 어떤 면에서는 행복한 것이 아니냐고 자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지금은 식구 모두 같이 있는 거 아니냐며.

태일에게 극단적 배신감을 갖고 떠났던 호정이 태일을 다시 만나는 장면도 풀 쇼트로 처리됐다. 그 장면, 별것 아닌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을 많이 울린다. 태일은 이제 죽어간다. 자기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 호정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호정은 우연한 기회에 그걸 알게 됐다.



태일은 해성식당(군산시 금암동 1-21)에서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소주를 마신다. 그가 거기 있을 것을 예견한 호정은 바쁘게 발길을 옮긴다. 둘은 해성식당을 옆으로 두고 멀찌감치 서로 마주친다. 거리감 때문에 말을 나눌 수가 없다. 그래도 안다. 태일은 호정이 왜 왔으며, 호정은 태일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태일은 비죽비죽 울기 시작하고 호정은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가로등은 이들의 머리 위에서 그늘진 빛을 던지며 둘을 포근히 감싼다. 둘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깝게 다가서 있음을 안다.

사랑은 그렇게 멀리 있는 듯 가까운 데서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는 법이다.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이문세의 노랫말처럼 더 슬프고 외롭고 힘든 법이다. 풀 쇼트의 예술은 그 점을 가감 없이 설명해낸다. 이 영화에서 풀 쇼트는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해내는 데 매우 중요한 기법으로 사용된다.

사랑보다 슬픈 기억 눈물보다 진한 독백

12월 4일, 초겨울부터 눈이 많이 쌓인 군산 거리.

마냥 쌓이는 눈처럼

‘남자가 사랑할 때’를 보면서 실컷 울고 나면 군산에 가고 싶어진다. 치매기로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태일은 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아버지, 그 여자 참 착한 애야. 자기 아버지 죽어갈 때 병 수발 다 하고 그랬어. 그런 여자한테 어떻게 나까지 돌보라고 하겠어. 나 같은 놈을 말이야. 그렇게 못하겠더라고. 그러니까 나 죽으면 아버지가 그 여자 좀 잘해줘. 아버지, 내 말 알아들어?”

라면을 꾸역꾸역 먹으며 독백으로 이 장면을 연기하는 황정민은 진실로 사람들을 라면 모양으로 꾸역꾸역 울린다. 그러나 이 장면 역시 황정민보다, 그 얘기를 무표정하게 듣는 아버지 남일우의 뒷모습이 압권이다. 그동안 얼굴을 잘 비추지 않던 원로배우 남일우는 이 영화에서 자신이 극중 인물처럼 세상일에 대해 안 듣는 척, 사실은 모든 것을 듣고 살아왔음을 알려준다.

그렇게 모르는 척하지만 사실 마음으로 울고 있을 이 여위고 늙은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며 가슴을 자꾸 때린다. 언제나 그렇지만 안으로 집어삼키는 눈물이 더 견디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일까.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다시 한 번 군산에 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다시 군산을 떠날 때는 노래를 바꿔보는 것이 좋다. 이때는 ‘When a man loves woman’이 제격일 것이다. 마이클 볼튼의 느끼한 목소리보다는 퍼시 슬레지의 호소력 넘치는 원곡이 좋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해야 사람이 되는 법이다. 요즘 남자들은 진정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가. 군산에 폭설이 내렸다. 올해는 서해안 항구에 눈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눈처럼, 남자들의 진정한 사랑이 쌓여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중국음식점 ‘빈해원’

3대가 이어온 이국적 공간


사랑보다 슬픈 기억 눈물보다 진한 독백

장미동 중국음식점 빈해원은 중국계 출신 가족이 3대째 함께 경영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저건 분명 세트일 거야” 했는데 놀랍게도 현지 촬영으로 진행된 것이 있는가 하면, “저건 분명 어디 현지 촬영일 거야” 하면 어김없이 세트 촬영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영화미술 분야가 정교해졌다는 얘기다.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도박장 겸 조직의 본거지로 쓰이는 중국음식점은 영락없이 인공 세트로 보인다. 일상에서 저런 중국음식점을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완벽하게 실제 중국음식점에서 촬영됐다. 군산의 명물로 꼽히는 ‘빈해원(濱海園)’이 바로 그곳이다.

군산시 장미동 21-5번지. 긴 회랑으로 크고 길게 이어진 중앙 홀과 그 옆으로 별실이 죽 배치돼 있는 것이 보통 중국음식점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천장은 건물 3층 높이는 족히 돼 보여서 웬만한 영화 촬영의 필요조건인 조명 높이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도록 돼있다. 마치 영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제작된 건축물처럼 느껴질 정도. 이곳에서 ‘남자가 사랑할 때’ 외에도 ‘빛과 그림자’ 같은 각종 TV 드라마 촬영이 수시로 이어진 건 그 때문이다.

빈해원은 ‘바다가 가까이 있는 동산’이라는 의미로 실제로 항구가 가까이에 있다. 빈해원은 1952년 개점했다. 1942년 중국 산둥에서 살던 소진동, 왕정 부부는 흘러흘러 한국에 정착해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호떡집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고 1·4 후퇴 때 목포나 부산으로 피란을 갈 요량이었으나 그만 배가 고장을 일으켜 난파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 배가 간신히 해안에 도착한 곳이 바로 군산이다. 배 안에는 소진동 부부 같은 중국인이 많았는데 결국 이들 중 90%가 군산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군산 항구 근처에서 작은 국밥집을 열었다. 음식 솜씨가 남달라서인지 국밥집은 금방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는데 소복산과 소복자가 그들이다. 딸 소복자는 왕조석이라는 남자와 결혼했고, 아들 소복산은 주숙금이라는 여자를 얻었다.

두 부부, 다섯 아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모여 살았으며 국밥집에 사람들이 자꾸 몰려들자 사위인 왕조석의 제안으로 지금 이곳 장미동에 있는 일본식 가옥을 사들여 중국음식점으로 개조했다. 장미동은 한자로 ‘藏米洞’이다. 쌀을 저장하는 동네라는 의미다. 당시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나는 쌀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얼마나 많이 반출됐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장미동 빈해원은 그 숱한 세월 동안 세 번 개축돼 지금의 형태가 됐다. 일본식 가옥은 중국식 전통가옥 형태와 섞이게 됐다. 한국식도 끼어들었다. 딸 부부는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아들 부부는 다섯 아이를 낳았다. 이들은 함께 아이를 기르며 살았다. 사위는 음식점의 카운터 일을 맡아 가게를 키웠고, 아들은 주방을 포함한 모든 노동을 맡았다. 지금은 아들의 큰아들인 소란정(62)-형민의(60) 부부가 음식점을 경영한다. 이들은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아들과 딸은 모두 군산을 떠났다. 빈해원 가족 경영은 이번 3대가 마지막이 될 공산이 크다.


신동아 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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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김성룡 |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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