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노래가 있는 풍경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 젖은 계곡

하덕규 ‘한계령’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 젖은 계곡

3/3
김재규의 길, 김수근의 휴게소

한계령(寒溪嶺)은 이름처럼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고개다. 한계령의 본디 이름은 오색령이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 군생활을 한 지금의 중장년층에게는 ‘김재규로(路)’로 알려졌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가 이 일대 4개 사단을 거느린 군단장으로 있던 1971년 군단 예하 1102 야전공병단을 동원해 난공사 끝에 그해 12월 27일 눈보라 폭풍 속에 개설한 도로이기 때문이다.

이후 한동안 김재규로, 오색로로 불리다가 지금은 한계령으로 통일돼 불린다. 그래서 지금도 한계령 정상에는 당시 군단장 김재규를 기리는 준공 기념비가 칼바람에 외롭게 서 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날씨에 볼펜 잉크마저 얼어붙었다. 글이 써지지 않은 무서운 날씨다. 겨울 산행이 금지돼 정상으로 가는 계단은 철문에 굳게 잠겼다. 국립공원 사무소의 도움으로 찾아본 고개 정상의 위령탑 겸 준공기념비에는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고갯길을 만들다 발파 사고로 죽어간 병사들의 이름이 커다란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증오심에 가득 찬 일부 탐방객이 김재규 이름을 정으로 찧어 놓아 그의 이름 자리에는 흔적만 남아 비감함을 더한다. 망자의 이름까지 정으로 쪼아버릴 정도의 극단적인 증오감에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달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네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노래 ‘한계령’과 더불어 한계령을 빛나게 하는 또 하나는 한계령휴게소다. 김수근의 작품으로 굳이 무슨 무슨 건축대상 등 화려한 수상이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는 순간 대한민국 최고의 휴게소 작품임을 느낄 수 있다. 철골구조에 자리한 목재건물 전체가 모두 그을린 양 검은색으로 배치돼 배경이 되는 설악의 아름다움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절제와 관조미의 극치인 휴게소 안은 조악한 기념품과 어묵 파는 공간으로 변해 있다. 어디 나직이 앉아 ‘달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을 바라보며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을 느낄 최소한의 여유조차 없는 소란함, 그 자체다. 유려한 외관만 보고 실내는 찾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깨 떠미는 겨울산

외설악 한계령 아랫동네가 바로 오색약수다. 약수터 입구에 오색초등학교가 있다. 정 시인은 학교 관사에 산다. 이 학교는 정 시인의 아이 2명과 친척아이 2명을 포함해 전교생이 모두 6명인 초미니 학교다. 하지만 교장, 담임교사, 전담교사, 행정실장, 주무관 등 교직원만 무려 8명이라는 설명은 듣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한다.

한겨울 설악을 찾는 이는 많지 않다. 겨울 저녁은 너무 빨리 왔고 펜션과 식당은 칼바람에 움츠린다. 눈 덮인 계곡의 겨울나무들은 외롭고, 나무들이 부르는, 아무도 듣지 않는 겨울 노래가 휘파람처럼 들린다. 노래방이 없던 시절,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나는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땅에서 피할 수 없는 게 노래 순서다. 폭탄주에 반쯤 취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를 부르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덜컥 나왔다. 그땐 내가 지금보다 많이 순수했나 보다. 그러나 회식자리는 일순간 고요해지고 많이 취한 사람은 더욱 취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지금은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 스물한두 살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눈시울이 젖어 온다. 그때로 돌아가면 행복할 수 있을까. 어둠에 물든 산은 내게 내려가라며 어깨를 떠민다. 겨울 한계령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차창에는 중년이 된 한 청년이 가만히 노래를 부른다. 아,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신동아 2015년 1월호

3/3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관련기사

목록 닫기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 젖은 계곡

댓글 창 닫기

2021/05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