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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비자금 신고 ‘불처벌’이 ‘증세 없는 복지’ 묘책?

국세청 vs 검찰청 조세전쟁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해외 비자금 신고 ‘불처벌’이 ‘증세 없는 복지’ 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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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단에 중국 시진핑 주석의 일가가 들어 있었다. 한국의 유력 인사들도 있었다. 그러자 각 나라에서는 그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일었다. 정보의 세계를 아는 이들은 “그러한 정보는 CIA가 간접적으로 ICIJ에 제공했다고 보아야 한다. CIA도 비밀계좌를 개설했다고 해야, 정보를 입수한 ICIJ가 흥분해서 크게 보도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폭로돼야 CIA가 블랙 머니를 추적한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조세피난처 국가들도 다른 나라들과 조세정보교환협정을 맺게 했다. 2, 3년이 지나면 거의 모든 조세피난처가 세계 여러 나라와 이 협정을 맺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나라의 보호를 받는 택스 헤이븐이 아니면 더 이상 검은 돈을 숨겨주기 어려워진 것이다.

신고하면 형사처벌 안 해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기에 이런 식으로 조세피난처를 뒤엎어왔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그런 힘은 없기에 교묘한 수를 찾아냈다. 검은 돈에 대한 추적은 미국에 맡기고, 이익을 챙기기로 한 것.

지금 한국이 그러하듯 과거 유럽 국가들도 불황으로 세금이 계획대로 걷히지 않아 고민했다. 그러다가 자국인들이 스위스 은행에 넣어 두었을 돈에 주목했다. 그 돈은 커미션 리베이트 킥백(kick back) 뇌물 등으로 번 것일 테니 신고하지 않은 소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금주만 찾아내면 형사처벌함과 동시에 탈루 금액에 따른 과태료나 벌금, 누진으로 가산될 소득세를 징수해 부족한 세수를 채울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돈은 ‘스위스 것’에서 ‘그 나라의 것’으로 전환되니, 그 나라는 외환보유고가 늘게 된다. 보유한 외화가 많아지면 신용등급이 올라가니 그 나라의 경제는 좋아진다. 이런 까닭에 불처벌을 조건으로 자진신고를 유도해 세수를 채워보려고 했는데, 이것이 9·11 이후 택스 헤이븐을 압박하는 미국의 조치 덕에 큰 성과를 보게 됐다.

미국의 압박을 받은 택스 헤이븐들이 자국과 조세정보교환협정을 맺어 자국에 ‘계좌 개설자 명단’을 통보하면, 예금주는 명예를 지켜야 하는 인생 말년에 세금을 추징당하고 ‘콩밥’을 먹을 수 있다. 유럽 15개국은 택스 헤이븐에 돈을 넣어둔 예금주들의 이러한 두려움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기간을 정해놓고 그 기간 안에 해외에 있는 계좌를 신고하면, 세금은 추징하지만 형사처벌은 면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불(不)처벌을 전제로 세금 환수 방안을 시도한 것인데, 이를 ‘앰네스티 조치(Amnesty Scheme)’라고 한다. 스위스와 국경을 맞댄 이탈리아는 2001년 이 제도를 처음 시행했다. 그리고 2009년 세 번째로 단행해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이탈리아는 2010년의 세수 적자가 37억 유로(약 5.5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추진했는데, 자진 신고한 금액이 무려 1000억 유로(약 150조 원)에 달했다.

그 덕분에 이탈리아 국세청은 과태료와 벌금 세금으로 50억 유로(약 7.5조 원)를 확보해 단숨에 재정적자를 해소했다. 이탈리아의 전체 외환보유액도 1000억 유로 증가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발 늦게 이를 따라 한 나라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저성장을 반복하며 ‘일본식 장기 불황’에 접어든 한국이다. 지난해 한국의 세수 적자는 11조 원인데, 3년 연속 세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해외에 있는 한국 자산에 대한 과세를 규정한 ‘국제 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나 조세정보교환협정을 맺은 나라가 없었기에 이 법은 유명무실했다.

한국 기업들은 상당한 돈을 조세피난처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에 대한 통계는 누구도 잡지 못하는데, 2012년 영국의 ‘조세정의네트워크’라는 단체가 “한국 기업이 조세피난처에 넣어둔 돈은 7790억 달러(당시 환율로는 약 880조 원)로,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라고 밝혀 이목을 끌었다(이 단체도 CIA로부터 정보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880조 원은 대한민국 국가 예산의 2.5배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이 돈이 들어온다면 한국은 단숨에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니 국세청은 불처벌을 전제로 한 앰네스티 조치를 시행하자고 했으나, 검찰청에서 반대 의견이 나왔다. 검찰은 “무조건 사면은 안 된다. 불법으로 외화를 도피시킨 것은 횡령이나 배임을 한 것이니, 그에 대해서는 징벌을 가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해외에 숨은 880조

합의에 실패한 국세청은 그러나 미국의 압박으로 조세피난처가 불안해지는 상태를 활용해 ‘불처벌’을 명문화하지 않은 앰네스티 조치를 적용해보기로 했다. 2010년 ‘국제 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에 ‘해외에 있는 금융계좌는 신고해야 한다. 신고하지 않고 갖고 있다가 적발되면 처벌한다’는 조항을 삽입한 것이다. 이 조항은 2011년 발효됐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2011년 11조, 2012년 19조, 2013년 23조, 2014년 24조, 도합 77조 원이 신고된 것이다. 이 신고분에 대해 국세청은 세금과 과태료만 추징하고 그 소득원이 어디인지는 추적하지 않았다. 그러니 위법을 해서 그 돈을 벌었다는 시비가 나올 수 없어 검찰도 수사하지 않았다. 지난 4년간 한국은 조용히 앰네스티 조치를 시행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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