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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사과 베어 문 듯 사각사각 쇠울음 울리고

필사(筆寫)의 귀환, 만년필 예찬론

  • 박종진 | 만년필연구소장, ‘펜후드’ 회장 jj990509@hanmail.net

풋사과 베어 문 듯 사각사각 쇠울음 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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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사과  베어 문 듯 사각사각  쇠울음  울리고

1993년 워터맨사 카탈로그에 등장한 초기형 만년필 ‘스트레이트 홀터’ 의 구성 부품. 펜촉을 제외하고 모두 4개의 간결한 부품으로 이뤄졌다.

초기 만년필이 등장한 1800년대 초반은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때다. 기계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만년필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져 마치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무기처럼 생긴 것들이었다. 잉크를 저장해 늘 가지고 다니며 쓸 수 있는 형태도 아니었다.

1883년 미국 뉴욕에서 보험업에 종사하던 L E 워터맨(Waterman)은 인류 최초의 실용적 만년필이라 할 ‘휴대용’ 만년필을 고안해냈다. 워터맨은 펜촉을 제외하고 간결한 4개의 부품으로 만년필을 구성했다. △뚜껑 △몸통(잉크 저장) △그립(손으로 잡는 부분) △피드(feed·펜촉에 잉크 공급)가 그것이다. 워터맨 이후 비로소 더 이상 흔들거나 밸브를 열거나 누르는 예비 동작 없이, 뚜껑을 열자마자 바로 쓸 수 있게 됐다. 또 필기 도중 잉크가 울컥 쏟아지는 일도 더는 없게 됐다.

워터맨 만년필의 초기 모양은 깎지 않은 연필과 비슷한, 간결한 원통형이었다. 그러나 이후 휴대하기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상의 또는 안주머니에 꽂을 수 있는 클립이 추가됐다. 워터맨 만년필은 만년필이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1910년대 이전까지 만년필 중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평가받는다.

워터맨의 대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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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펜촉은 사진과 같이 두 갈래로 나뉘며 그 사이로 잉크가 흐른다. 뾰족한 펜 끝(펜포인트)과 가운데 뚫린 구멍(벤트홀) 사이의 갈라진 부분을 ‘슬릿’이라고 한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물은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處衆人之所惡)’는 구절이 있다. 워터맨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성질, 즉 모세관 현상에서 힌트를 얻어 안정적인 잉크 공급이라는 만년필의 ‘난제’를 풀 해법을 찾아냈다.



1884년 특허 등록된 워터맨의 잉크 공급 장치 피드는 손가락 두 마디 길이에 연필 굵기의 절반 정도 되는 단 한 개의 부품으로 이뤄졌다. 워터맨은 여기에 폭 1mm가량의 굵은 홈을 끝까지 파고 세 줄의 가는 홈을 내어, 공기는 위로 가고 잉크는 좁고 낮은 곳으로 흐르게 해 필기 중에 잉크와 공기가 서로 다투지 않는 절묘한 배치를 고안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통조림에 든 액체를 컵에 따른다고 가정해보자. 통조림에 구멍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뚫어야 한다. 한 구멍으로는 액체가 흘러나오고, 다른 구멍으로는 공기가 들어가게 해야 보다 쉽게 액체를 따를 수 있다.

워터맨이 고안한 이 원리는 지금도 활용된다. 그 역사가 100년 넘은 명가(名家)에서 만든 만년필이나, 문구점에서 몇 천 원에 살 수 있는 만년필 모두 원리 면에선 동등하다.

만년필 펜촉의 끝은 이리도스민, 즉 이리듐을 비롯해 단단한 경도를 가진 여러 개의 백금속 합금으로 제작된다. 이것이 다 닳았을 때 펜촉의 생명은 끝이 난다.

인류는 결코 부식되지 않는 펜촉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금(gold)으로도 촉을 만들어봤지만 금의 무른 성질 때문에 쉽게 마모됐다. 그래서 1800년대 초반에는 금으로 만든 펜촉 끝에 단단한 루비나 다이아몬드를 붙여봤는데, 글씨를 쓸 때 만년필이 흔들리게 돼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됐다. 1830년경 영국에서 금으로 만든 펜에 이리도스민을 붙이는 데 성공했고, 이 기술이 미국을 거쳐 1910년대 동아시아에까지 전파됐다. 지금도 별 차이 없는 방식으로 펜촉을 만들고 있다.

한 만년필 회사의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만들어진 펜촉은 매일 1000자씩, 10년을 쓸 수 있다. 만년필 한 자루로 총 365만 자를 쓸 수 있는 것. 성경이 약 130만 자로 구성됐다고 알려졌으니, 만년필 하나로 성경을 세 번 정도 쓸 수 있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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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 만년필연구소장, ‘펜후드’ 회장 jj9905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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