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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전주 한옥마을에서 임권택을 만나다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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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달빛 길어올리기’를 연출할 때의 임권택 감독.

지난 5월 초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 다음 날 콩나물국집 앞에서 지나치듯 만난 노장 임권택 감독의 어깨는 다소 처져 있는 듯했다. 그는 별로 신나 보이지 않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제라는 축제가 오히려 그와 같은 거장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 그는 슬슬 은퇴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화장’은 화장(火葬)과 화장(化粧), 곧 늙음과 젊음, 삶과 죽음, 아내와 연인, 이성과 욕망이라는 두 가지 추를 오가는 사람들의 영원한 불안증을 보여주는 영화다. 무엇보다 임권택 스스로 고민하는 것, 영화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한편 영원히 그 안에 갇히고 싶은 두 가지 욕망의 변주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욕망의 변주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그는 이번 작품을 끝으로 ‘이제 충분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화장’은 그의 은퇴작이 될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또 다른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리고 간격이 좀 더 벌어질 것이다. 은막을 완전히 떠나는 그를 상상하기가 힘들다. 임권택은 임권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당연히 관심을 모으듯, 그 역시 그 반대로 스스로 물러앉기가 힘든 사람이다. 임권택은 영화 없이는 생각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감독이 아닌 임권택을 우리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는 지금 지쳤을 뿐이다. 이해 못할 바가 전혀 없다. 지치지 않았겠는가. 많은 것이 마모되고 뭉툭해졌을 것이다.

영화에서 벗어나기, 혹은 달아나기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전남 고흥 발포해변가.

때때로 영화에서 한 뼘쯤 벗어나는 것은 그래서, 매우 필요한 일이다. 전주 덕진구에 위치한 전일슈퍼 같은 곳에 가면 많은 것을 싹 잊게 된다. 그저 떠들고 마시고 놀게 된다. 전일슈퍼는 전주 명물인 ‘가맥’집의 하나다.



‘가맥’은 ‘가게 맥주’의 줄임말이다. 원래는 구멍가게였다. 그런데 가게 앞 파라솔 아래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안주도 없이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가게 주인이 황태구이를 안주로 내준 것이 화근이었다. 그 맛에 사람들이 자꾸 몰려들었다. 주인은 가게 일보다 맥주를 파는 일이 더 잦아졌다. 그래서 결국 가게 맥줏집이 된 것이, 지금 ‘가맥’이라 불리는 곳들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불법은 아니지만 탈법’인 셈인데 완벽하게 서민들의 공간이다. 호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게 맥주 값 정도로 술집에 온 분위기를 실컷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가맥집에서 흠뻑 취하고 싶어 한다. 세상일일랑 영화일일랑 복잡한 건 다 잊어버리고 마시고 취해버린다.

가맥집의 특징은 모두가 다 아는 사람인 것 같다는 데 있다. 안 그렇겠는가. 좁은 가게 안에서 사람들과 이리저리 둥글게 둘러앉아서 맥주를 마시게 되면 등과 살이 닿는다. 여기서라면 적어도 여야(與野)가 따로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감독과 제작자 혹은 비평가가 따로 놀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인다.

전주에서 나와 정처 없이 발길을 남쪽으로 향했다. 원래는 임권택의 고향 장성으로 가려고 했다. 그때 포토그래퍼 김성룡이 불쑥 말했다. ‘남쪽으로 튀어!’란 영화도 있던데 그냥 남쪽으로 튀시죠? 처음엔 변산반도를 가려고 했다. 전주의 서쪽에는 군산과 부안이 있고 부안 그 안쪽으로 변산해수욕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김성룡이 다시 말했다. 조금 식상한데요. 그래서 둘은 내리 남쪽으로 튀었다. 김성룡은 가장 남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2시간 반쯤 달리니 최남단으로 왔다. 고흥 발포해변, 그리고 당남해변 쪽에 있는 평화로운 농장이었다. 발포해변은 남쪽에 이런 해수욕장이 있을까 싶게 깨끗하고 조용한 해변이다. 북적거리는 전주와 전주영화제를 뒤로하고 반나절의 휴식을 즐기기에 적당한 공간이다. 당남해변의 농장은 무엇보다 바람결에 사색의 시간을 전해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람은 종종 풍경에 마음을 던지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생각만으로 세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전남 고흥 발포해변 항구.

관객의 권리, 감독의 의무

임권택의 영화는 호남 민심의 줄기를 지녔음이 새삼 느껴진다. 그가 태어난 곳 장성을 중심으로 그는 장흥(‘축제’)과 전주 등 서쪽의 위아래를 오가며 영화를 찍었다. 그의 대표작인 ‘서편제’와 ‘천년학’이 그렇지 않은가. 호남 민심이 무섭다고 한다. 특히 요즘이 그렇다고 한다. 그게 또 전국의 민심이라고도 한다. 임권택의 영화들이 사람들의 그런 분노를 다스려줄 수 있을까.

임권택의 영화는 한국적 한(恨)의 정서를 담고 있다. 남북이산가족 얘기를 그린 ‘길소뜸’으로 그는 사람들을 어마어마하게 울리고 한편으로 엄청난 위안을 줬다. 전주와 남쪽 해변을 오가며 갑자기 임권택의 영화가, 그렇기 때문에라도 계속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사람들 마음속에 응어리가 풀리지 않고 맺혀 있는 한 임권택 감독이야말로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건 관객인 우리의 권리이자 감독 임권택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권리와 의무 따위는 별개로 치더라도 어쨌든 우리가 임권택이라는 거성(巨星)을 잃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의 영화를 위해 축배를. 임권택 감독이 늘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

신동아 201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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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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