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가득 채운 동료의식
▼ 돌발 상황에 대비한 훈련도 했을 텐데요.
“에볼라 진료의 첫째 수칙이 ‘의료진 안전’입니다. 매일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숙지하고 마음속으로 수차 시뮬레이션을 한 뒤 진료에 임하죠. 우리 팀원에게 가장 강조한 것도 그 부분이에요. 그럼에도 피치 못할 상황이 발생한 거죠.”
▼ 치료제가 없는 상태에서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했습니까.
“대증요법과 함께 당시 전 세계에서 시도되고 있던 최신 치료법 등을 활용했습니다. 에볼라에 감염되면 초기엔 열이 나고 토하는데, 심해지면 출혈을 일으키고 쇼크에 빠져 결국 사망에 이릅니다. 열이 나면 해열제를 투여하고 구토억제제를 쓰고, 수액을 정맥주사하고 출혈이 심하면 수혈하는 식이죠.”
▼ 시에라리온에 발을 디뎠을 때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시에라리온에 갈 때 150석 규모의 비행기를 탔는데 거의 모든 승객이 세계 각국에서 온 의료진이었어요. ‘사명감을 안고 에볼라 환자를 치료하러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에 깊은 동료의식을 느꼈습니다. 그 광경이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걸어서 7~8분 거리인 숙소와 치료센터를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면서 24시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 달을 보내고 국내 의료진 10명은 무사히 한국 땅을 밟았다. 공항에서 그들을 기다린 건 ‘격리시설’로 데려갈 버스였다. 바이러스 잠복기를 거쳐 ‘음성’ 판정이 날 때까지 일반인과 접촉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국제사회 노력에 동참
▼ 입국해서 곧바로 가족을 못 만났죠?
“가족이 공항에 마중 나왔는데, 못 보고 나중에 격리시설에서 만났어요. 공항에서 1차 몸 상태를 검사받고 격리시설로 이동해 정부 관계자들과 미팅을 한 다음, 또다시 검사를 받았어요. 특별한 이상 증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며 간단한 환영 행사를 했어요. 그 후 가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돌아와서 병이 난 사람은 없었나요.
“격리시설에 있는 동안 한 분은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고생했고, 한 분은 설사하고 배가 아파서 고생한 것 외에 특별히 아픈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도 건강한 편이었고요. 다만 평소 잘 줄지 않던 몸무게가 5㎏ 빠져 있었습니다.”
▼ 긴급구호대 파견 경험이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
“에볼라가 유행한 나라들 자체 힘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서 여러 나라가 에볼라 종식을 위해 함께 노력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노력에 동참했다는 점이 의미가 크죠. 덕분에 국가 이미지도 좋아졌고요. 의료진이 실제로 진료를 해봄으로써 감염관리와 치료 등 의학적 측면에서 경험을 축적했다는 것도 큰 소득입니다. 에볼라 치료센터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볼 수 있었던 점도 의미가 있죠. 개인적으로는 감염병센터 의사로서 국가가 하는 일에 자원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신종 감염병은 실시간으로 옮겨 다닌다. 신 센터장은 신종 감염병에 대해 철저한 대비와 국가적 차원의 ‘고도격리시설’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도격리시설에서 가장 중요한 게 감염병 환자와 의료진의 출입 통로가 구분된 입원 시설을 갖추는 거예요. 환자가 안전하게 격리돼 치료받을 수 있는 넓은 병실, 의료진이 보호복과 보호장구를 탈·착용하기 편리한 공간, 환자에게서 나온 의료폐기물을 완전 멸균할 수 있는 시설, 환자 진단을 위한 검사 시설 등을 다 갖춘 시설이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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