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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로 만난 이순신과 조선

목마구민(牧馬救民)으로 선순환 경제모델 개척

이순신의 진중(陣中) 경영

  • 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goldagebook@naver.com

목마구민(牧馬救民)으로 선순환 경제모델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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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에 눈뜬 ‘이단아’들

이지함은 ‘3대 창고’ 개발론과 해외통상과 광산 개발 등을 주장했다. 3대 창고란 ‘도덕·인재·백용(百用·재화) 창고’이다. 백용창고 개발론은 토정 경제사상의 핵심이다. 육지와 바다의 자원을 적극 개발해 국부를 증진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쳐다보지도 않던 분야가 이지함에겐 새로이 개척해야 할 신세계로 보였다.

훗날 박제가는 “토정이 일찍이 외국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해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 한 적이 있다. 그의 식견은 탁월하여 미칠 수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지함의 백용창고 개발론이 조선에서 실행됐다면 조선도 콜럼버스처럼 신대륙의 한 부분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혹은 서구 열강처럼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지함의 문제의식은 쪼그라들었지만 율곡 이이에게 이어졌다. 이이는 당대의 조선을 중년의 위기에 이른 ‘중쇠기(中衰期)’라 보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국가의 잘못된 정책과 양반들로 인해 백성이 생업을 잃고 국가는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백성의 삶을 위한 재화(生財)와 백성 살리기(活民)가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관직에서 벗어나 있으면 대장간을 세우고 호미를 만들어 팔았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신 고위층 출신이 공업과 상업에 종사해 생계를 유지한 유일한 사례다. 하지만 그도 이지함처럼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에 막혔다.



이이 이후로는 임진왜란 당시의 최고 경세가이자 이순신의 멘토인 류성룡이 있다. 류성룡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그의 인재 발탁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그는 율곡 이이 이후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론과 실천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의 ‘징비록(懲毖錄)’에는 풍전등화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한 다양한 경제사상과 개혁론이 나온다. 이지함의 해양 개척론에 비하면 한계가 있지만, 조선 경제사상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기에 그가 추진한 둔전(屯田)과 소금 전매정책, 압록강 중강진의 국제무역은 대표적인 경제개혁 정책이다.

둔전은 국경지역의 군사들이 방어를 하면서 동시에 농사를 지어 자체적으로 군량을 확보하게 한 정책이다. 류성룡은 명나라 군대에 공급해야 할 군량과 조선 군대의 군량 확보, 농사를 짓지 못해 떠도는 백성들의 생계를 위해 서해의 섬과 육지 곳곳에 둔전을 설치했다. 류성룡이 양민인 신충원(辛忠元)을 발탁한 것도 신충원이 둔전을 개간해 조령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전쟁 중 창설한 훈련도감 직업 군인들의 급료도 둔전으로 조달케 했다.

그가 제안하고 실시한 소금 전매사업도 주목할 만하다. 황해도의 섬에 백성을 정착시켜 소금을 굽게 하고 이를 풍년이 든 육지에 팔아 생계를 잇게 했다.

중강진 무역도 전례가 없는 경우다. 조선과 중국의 무역은 조공무역이라 별도의 공·사무역은 없었다. 류성룡은 기근이 심해지자 중강진에 국제무역시장을 열고 조선의 면(棉)과 중국의 곡식을 교환케 했다. 이 같은 전시(戰時) 경제정책들은 전쟁 후반기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무력화했다. 이후 조선은 과거로 회귀했고, 조선의 개혁적 경제사상은 실학파의 등장 때까지 미뤄졌다.

전쟁 기간 이순신은 군사 지휘관이자행정가, 경영자로 활약했다. 그가 관할지역에서 실시한 군민(軍民)경영은 매우 혁신적이다. 둔전 사업, 소금 전매사업, 시장 활성화 등은 류성룡이 추진한 정책들과 거의 일치한다.

둔전은 이순신이 1587년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만호 시절 이미 경험한 것이었다. 그는 함경도의 녹둔도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기도 했다. 전쟁 발발 후 이순신은 류성룡의 둔전 정책에 교감해 한산도 인근의 국영 목장(牧場)에 둔전을 실시해 군량을 확보했다.

“섬이 시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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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군 고금도(왼쪽)와 신지도(오른쪽)를 잇는 장보고대교(2017년 개통 예정) 조감도. 장보고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고금도에서 이순신은 해로통행첩 제도를 실시해 백성을 안정시키고 군량을 확보했다.

처음 이순신이 둔전을 제안하자 조정에서는 반대했다. 그는 “나랏일이 어렵고 위태로우며 백성들이 살 곳을 잃었으니,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에게 나라의 목장이 있는 섬에서 농사를 짓게 해 전투용 말을 키우고 백성들도 구하자(牧馬救民)”고 주장한 끝에 조정의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이순신의 이른바 ‘목마구민(牧馬救民)론’이다.

이순신은 머릿속으로만 가능성을 검증하지 않았다. 조정이 둔전을 승인하자 그는 먼저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늙고 병든 군사들을 농사 인력으로 활용했다. 그들에게 둔전을 설치할 섬의 토질이 농사에 적합한지 검증케 한 뒤 군사들을 적극적으로 투입해 농사를 짓게 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영남에서 피난와 떠도는 백성들을 섬에 안착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이순신의 둔전은 현대 경영자들처럼 철저한 계획과 계산을 바탕으로 한 결과물이었다. 그는 둔전으로 군량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정착시켜 군사도 확보할 수 있었다.

류성룡이 중강진 국제무역을 제안할 즈음인 1593년 이순신은 섬진강 기슭에 시장을 열어 재화가 유통되게 했다. 1597년 명량대첩 이후 고금도로 진을 옮겼을 때도 시장을 열었다. 윤휴(1617~1680)에 따르면 “섬 안이 시장이 됐다(島中成市)”고 할 정도로 활성화했다.

신경(申炅·1613~1653)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이순신이) 집을 지어 피난민들에게 팔아 살게 하니, 섬 안에서는 피난민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라고 번성한 광경을 묘사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도 이순신의 고금도 진영에 대해 “군대의 위세가 강성해져 남도 백성들 중 공(公)에게 의지해 사는 자가 수 만 호에 이르렀고 군대의 장엄함도 한산진보다 열 배나 더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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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goldageb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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