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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산둥성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魯 - 호방하고 의리 있는 이웃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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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력이 된 식민 유산

청말에는 의화단운동이 산둥에서 시작됐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산둥 출신 장군이 많아 군내 산둥 인맥이 산둥방(山東幇)이라고 불렸다. 산둥인은 평화로울 땐 성실한 일꾼이었다. 청대 베이징은 급수 시설이 좋지 않아 물장수가 많았는데, 대부분이 산둥인이어서 “산둥인이 장사 안 하면 베이징 우물물 모두 마르리”라는 노래가 있었다. 동북3성 개발 전에는 많은 산둥인이 그곳으로 이주해 황무지를 개간했다. 영국은 홍콩을 통치할 때 남부 중국인보다 체격 좋고 규율이 잘 잡힌 산둥인을 홍콩 경찰로 많이 채용했다.

칭다오 여행 중에 만난 항저우 사람은 “칭다오가 항저우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다”고 했다. 중국인은 자기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특히 항저우는 “하늘엔 천당, 지상엔 항저우가 있다”고 할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항저우에서 온 사람이 이토록 칭다오를 칭찬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작은 어촌 마을 칭다오가 항저우 사람들을 감탄시킬 만큼 변한 것은 독일 덕분이다. 빌헬름 2세는 중국으로부터 칭다오를 99년간 할양받고 대대적으로 개발했다. 중국 공략을 위한 핵심 군항이자 무역항으로 만들려는 야심 찬 계획에서였다. 붉은 지붕, 화강암 벽의 독일 고전 건축물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칭다오에 온 캉유웨이는 “붉은 기와에 푸른 나무, 파란 바다에 쪽빛 하늘, 중국 제일이로다(紅瓦綠樹,碧海藍天,中國第一)”라고 찬사를 보냈다.

칭다오와 독일의 인연은 뿌리 깊다. 독일이 1903년 세운 칭다오 양조장은 중국의 대표 맥주 ‘칭다오 맥주’가 됐고, 비스마르크 병영은 중국해양대학교가 됐다. 개혁 · 개방 시기 칭다오의 한 중소기업은 독일 립헤르(Liebherr)사와 합작해 냉장고를 만들었고, 훗날 립헤르의 중국식 발음으로 이름을 고쳤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백색가전 회사 하이얼이다.



“칭다오에선 홍수 날 염려가 없어요.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금세 빠져나가죠. 옛날에 독일인들이 지어놓은 하수도는 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답니다. 독일인들이 100년 전에 지은 건물도 여전히 튼튼해요. 그런데 중국인이 지은 건물은 입주하기도 전에 금이 가고 무너진다니까요.”

대만 지식인 우샹후이는 칭다오 여성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칭다오 사람이 독일에 느끼는 친근함은, 대만인이 일본에 느끼는 친근함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굴욕적인 역사로 식민지가 됐지만, 식민 유산은 훗날 저력이 됐다. 강제 개항된 중국 조계 항구의 특성을 칭다오 역시 갖고 있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인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산둥성을 방문해 이곳이 자기 조상의 고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노(盧)씨가 강태공의 강(姜)씨에서 나온 성씨라는 의미였지만, 중국 언론은 “나무의 키가 1000척을 넘어도 잎사귀는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樹高千尺落葉歸根)”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산둥과 한국의 인연을 희극적으로 보여준 일화다.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산둥 술집들, 고풍스러운 건물과 현대화된 상점이 혼재하는 칭다오, 1970년 중국에서 설계·건조한 최초의 구축함인 지난함(중국해군박물관), 칭다오 바닷가(왼쪽부터).

‘인천광역시 칭다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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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이 1934년 세운 성 미카엘 성당. 칭다오 구시가지의 랜드마크다.

산둥과 한반도는 역사의 첫 단계부터 질긴 인연을 맺었다.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고 하지만 사실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 그런데 고조선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증명해준 것이 바로 산둥이다. 기원전 7~6세기에 쓰인 ‘관자(管子)’에 제나라가 고조선과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이 최소한 기원전 7~6세기에는 외국과 교역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양자 교역의 역사가 얼마나 뿌리 깊은 지도 보여준다.

그럴 수밖에. 백령도와 산둥 청산터우(成山頭)의 거리는 불과 180km다. 서울~전주 간 직선거리와 비슷하다. “인천에서 닭이 울면 산둥인이 잠에서 깬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산둥과 한국은 서로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세계에 퍼진 화교의 상당수는 푸젠과 광둥 출신이지만, 한국의 화교는 산둥 출신이 많다. 1944년 통계에 따르면 조선 화교의 약 90%가 산둥 출신이다.

산둥은 우리 식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배추김치와 짜장면은 산둥에 빚을 지고 있다. 배추는 산둥이 원산지이고, 단어 자체도 중국어 ‘바이차이(白菜)’에서 파생됐다. 짜장면이 인천부두에서 일하던 산둥 노동자의 끼니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역으로 한국인도 산둥에 많이 산다. 칭다오에서 우연히 한국인 한 사람을 만났다. 10년째 칭다오에서 살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칭다오에선 한국인 만나기도 쉽고 한국 간판도 많이 볼 수 있네요”라고 말하자, 그는 말했다. “인천광역시 칭다오구죠”

산둥은 중국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동북3성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조선족이 사는 지역이다. 2013년 현재 중국에 거주하는 35만 명의 한국인 중 8만 명(23.8%), 조선족 222만 명 중 20만 명(9.2%)이 산둥에 산다. 그만큼 교역도 활발하다. 2012년 기준, 한국의 중국 성 · 시별 직접투자 누계액 비중에서 산둥은 22.1%를 차지해 1위인 장쑤(22.3%)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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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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