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회사형 인간’에서 ‘가정적 인간’으로

늘어난 ‘은퇴 준비기’에 할 일

  • 김동엽 |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이사 dy.kim@miraeasset.com

    입력2015-07-21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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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형 인간’에서 ‘가정적 인간’으로
    먼저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 도입이 근로자에게 미치는 재무적인 영향을 보자. 근무기간이 늘어난 만큼, 평생 동안 벌어들이는 생애소득이 늘어날 것이다. 일하는 동안 국민연금을 계속 납입하기에 나중에 받는 노령연금도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퇴직급여도 늘어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근로자가 어떤 퇴직급여제도에 가입하고 있는지에 따라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 퇴직급여제도는 크게 퇴직금제도와 퇴직연금제도로 나뉜다. 퇴직연금제도는 회사가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급여형(DB)’과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으로 나뉜다.

    DB형 퇴직연금은 손해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손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퇴직금제’와 ‘DB형 퇴직연금제’ 가입자다. 이 두 가지 방식에서 근로자가 받는 퇴직급여는 퇴직하기 직전 평균임금에 근속연수를 곱해서 산정한다.

    가령 DB형 퇴직연금제도에 가입한 홍길동 씨는 현재 55세로 이달 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퇴직 직전 평균임금은 월 500만 원이고 재직기간은 20년이다. 이 경우 퇴직급여로 1억 원(500만 원×20년)을 받게 된다.



    이번에는 홍길동 씨의 회사가 정년을 60세로 5년 연장하면서 늘어난 근무기간 동안 매년 전년 대비 임금을 10%씩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가정하자. 이렇게 매년 임금이 10%씩 줄어들면 60세가 됐을 때 평균임금은 월 295만 원이 되고 재직기간은 25년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그가 받는 퇴직연금은 7381만 원(295만 원×25년)이 된다. 5년 더 일했는데도 퇴직금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홍길동 씨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퇴직금을 ‘중간정산’ 하는 방법이 있다. 2012년 7월 이후 퇴직금 중간정산은 원칙적으로는 금지됐지만 몇 가지 예외를 인정한다. 그중 하나가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퇴직금 수령액이 줄어드는 경우다. 중간정산을 하면 퇴직급여에서 퇴직소득세를 떼고 남은 금액만 받게 된다. 이때 퇴직급여를 다시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이체하면 퇴직소득세를 돌려받을 수 있다.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는 기업 중에는 DC형 퇴직연금제도를 함께 도입한 다음, 근로자로 하여금 DB에서 DC로 갈아탈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기도 한다. DC형 퇴직연금은 기업이 매년 발생한 퇴직급여를 근로자 명의의 계좌로 이체한 뒤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게 하는 제도. 현행 법에서는 근로자가 1년 근무할 때마다 회사로 하여금 1달치 급여를 DC 계좌로 이체하도록 하고 있다. 근로자는 DC 계좌로 이체된 퇴직급여를 운용할 금융상품을 직접 고르고 운용에 따른 책임도 진다.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근로자에겐 퇴직연금제도를 DB에서 DC로 갈아타는 것이 유리한 걸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홍길동 씨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당시 퇴직연금을 DB에서 DC로 갈아탔다고 가정하고 60세 때 퇴직급여를 계산해보자.

    우선 55세 때 이미 발생한 퇴직급여 1억 원이 DB에서 DC 계좌로 이체된다. 그리고 56세부터 60세까지 임금이 줄어드는 동안에도 매년 한 달치 임금에 해당하는 퇴직급여가 홍씨의 DC 계좌로 이체된다. 그러면 5년 동안 홍씨의 DC 계좌에서 아무런 수익이 나지 않았다고 해도 60세 때 퇴직급여는 1억2549만 원이 된다. 만약 홍씨가 5년 동안 연평균 3% 정도의 수익을 내면 1억4141만 원을 받을 수 있다.

    퇴직자들이 경제적 어려움만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퇴직은 소득 단절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단절도 가져온다. 농경사회에서는 인간관계가 주로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맺어졌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 농사를 그만둔다 해도 그동안 맺은 인간관계가 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다르다. 잠자는 곳과 일하는 곳이 분리되면서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일터를 중심으로 맺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처럼 야근에다 주말 근무를 마다하지 않으니 집 주변이나 지역사회에서 인간관계를 맺을 틈이 없다. 그런데 퇴직이란 회사에서 맺은 인간관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인간관계는?

    좀 더 실감 나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금 스마트폰을 꺼낸 다음 ‘연락처’에 전화번호가 몇 개나 있는지 보라. 적게는 수백 개, 많게는 1000개가 넘는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을 것이다. 저장된 전화번호를 3가지 집단으로 분류해보자. 첫 번째 집단은 가족과 친척이다. 두 번째 집단에는 친구, 동호회나 동창회 등에서 알게 된 사람의 전화번호를 모아 정리한다. 그리고 직장동료나 비즈니스 관계로 알게 된 사람을 세 번째 집단으로 분류한다.

    분류가 끝났으면 세 번째 집단에 해당하는 전화번호를 모두 삭제한다. 이것이 바로 은퇴다. 그리고 남은 전화번호 중에서 최근 통화 빈도와 통화시간을 살펴보면, 자신의 정년퇴직 후 인간관계가 어떨지 예측할 수 있다. 첫 번째나 두 번째 집단과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오랫동안 통화했는가.

    최근 일본에서는 ‘단카이 몬스터’라는 책이 화제가 됐다. ‘단카이(團塊)’란 1947년에서 1949년 사이에서 출생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를 일컫는데 680만 명쯤 된다. 단카이 세대는 전후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주역이다. 하지만 ‘회사형 인간’으로만 살다보니 가족이나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퇴직한 다음에도 직장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단카이 몬스터’에 정년퇴직한 직장 상사가 전 직장을 방문해 후배들에게 호통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압권이다. 선배니까 들어주기는 하지만 이를 달가워할 후배가 몇이나 될까. 우스갯소리 같지만 최근 일본에서는 은퇴한 직장 상사가 전 직장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업무 지시를 하는 정신병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고 한다.

    ‘회사형 인간’에서 ‘가정적 인간’으로
    job, career, vocation

    은퇴한 남성 대부분이 귀농(歸農)을 고집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이들은 회사를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따라서 퇴직한 뒤에는 어디에 살든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전업주부인 이들의 아내는 집과 지역사회를 주변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아내 처지에서는 귀농하면 지금껏 맺어온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단절될 수밖에 없다. 귀농하려는 남편에게 아내가 “그렇게 좋으며 혼자서 가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년 연장으로 얻은 시간은 매우 소중하다. 짧게는 1~2년에서 길게는 5년 이상 되는 기간을 잘만 활용하면 ‘회사형 인간’에서 ‘가정형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우선 회사를 중심으로 맺어진 인간관계의 중심축을 차츰 집과 지역사회 쪽으로 옮겨와야 한다.

    임금피크제로 월급은 줄어들지만 그 반대급부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많아졌다. 그동안 야근과 주말근무로 빼앗기던 시간을 활용해 거주지 주변에서 동호회 활동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내들은 그런 남편들의 지역사회 데뷔를 응원해야 한다. 본래 지역사회 인간관계에 강한 것은 아내들 아닌가.

    일에 대한 마음가짐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일이라고 하면 ‘돈’과 ‘직위’를 먼저 생각한다. 정년 연장과 함께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업장 근로자들이 힘들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이 키운 후배들보다 월급도 적고 경우에 따라 그들로부터 업무지시를 받아야 할 때도 있다. 선배랍시고 후배들에게 조언이라도 할라치면 후배들은 이를 고맙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간섭으로 여긴다. “내가 왕년에…”라고 얘기해봐야 후배들에겐 ‘꼰대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다보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일을 단순히 돈과 직위의 등가물로 보는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매일매일이 공휴일이면 행복할까. 일본의 ‘가토제작소’라는 회사는 최근 ‘60세 이상만 고용합니다’는 광고를 냈다. 생산설비는 늘리지 않고 생산량을 늘리려면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데, 젊은 직장인들은 주말까지 일하려고 하지 않기에 그런 채용광고를 낸 것이다. 채용면접 때 고령자에게 “토요일과 일요일에 근무해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보면 “우리한테는 매일매일이 토요일과 일요일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답이 돌아온다고 한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일은 돈이나 직위뿐만 아니라 ‘시간관리’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가 활동에도 균형 필요

    은퇴 후에 일하려면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한다. 영어에는 일을 뜻하는 단어가 여럿 있다. 20~30대 젊은이들은 직장 또는 일자리를 뜻하는 ‘job’을 많이 쓴다. 40~50대 중년이 되면 이직이 잦아지면서 경력이라는 의미를 가진 ‘career’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다 60세가 넘어가면서 천직, 소명이란 뜻의 ‘vocation’이나 ‘calling’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일이 단순히 돈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퇴직 후의 시간을 일만 하면서 지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정년 연장으로 늘어난 근무 기간에는 은퇴 후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준비도 해야 한다.

    우선 정적인 여가활동과 동적인 여가활동 간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 건강할 때는 몸을 움직이면서 하는 등산이나 사이클처럼 활동적인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졌을 때도 즐길 수 있는 여가활동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수많은 시간을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보면서 지내야 한다.

    정년을 앞둔 직장인에게 퇴직 후 하고 싶은 여가활동이 뭐냐고 물으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답이 ‘해외여행’과 ‘등산’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201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앞으로 하고 싶은 여가활동으로 ‘여행’을 꼽은 사람은 44%나 됐지만, 실제로 주말이나 휴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들여다보면 66%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보면서 지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좀 오래된 통계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돈이 많이 드는 여가활동과 돈을 별로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여가활동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은퇴 후 사진촬영을 취미로 즐기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처음 동호회에 가입해서 사진을 배울 때는 즐거웠는데 경제적 부담이 갈수록 커졌다고 했다. 전문가용 카메라 가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한 번 들어가는 비용이니까…’ 하고 여겼다. 하지만 사진을 찍으러 여기저기 여행도 다녀야 하고 전시회도 열어야 했다. 경력이 쌓일수록 더 좋은 카메라를 갖고 싶어졌다. 이래저래 경제적 부담이 커지면서 결국 취미활동도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안정적 착륙, 새로운 이륙

    곧게 뻗은 활주로. 인생을 비행기에 비유한다면 지금 당신은 ‘착륙’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륙’을 준비 중인가. “샐러리맨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처럼, 50대로 접어든 직장인은 비행속도를 서서히 줄이고 고도를 낮추면서 ‘정년’이라는 육지에 안전하게 착륙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이번 비행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러기에는 남은 인생이 너무 길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 산다. 박유성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지금 50대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베이비붐 세대 남성이 97세까지 생존할 확률이 43%나 된다고 한다. 쉰 살이라고 해야 겨우 인생의 반환점을 돈 것에 불과하다. 비행기를 벌써 격납고에 넣어둘 순 없단 얘기다.

    그래서 50대는 바쁘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안전한 ‘착륙’을 준비해야 하지만 새 일과 인생을 찾아 새로운 ‘이륙’도 준비해야 하기에. 정년 연장으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 후반의 삶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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