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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의 지혜를 옮긴다 핀셋으로 한 글자씩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전쟁’ 현장을 가다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선현의 지혜를 옮긴다 핀셋으로 한 글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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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코드’를 찾아라

이처럼 실록을 번역하려면 해당 분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번역 작업은 더욱 고될 수밖에 없다. 번역은 역사를 추적한다. 기자는 이곳 연구원들을 만나면서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를 떠올렸다. 루브르 박물관 큐레이터 자크 소니에르가 남긴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과 소피 느뷔. 시온 수도회와 오푸스 데이가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두고 벌이는 사투! 고전번역원의 ‘번역 전사(戰士)’들도 시간 속에 숨은 코드를 찾는다. 조상의 지혜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정영미 조선왕조실록 번역팀장은 “문집류 번역은 머릿속 지식과 사전으로 했다면, 실록 번역은 정치사, 법전, 제도, 문화 등을 다 알고 정확한 맥락을 이해해야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재번역’이라 해도 사실상 첫 번역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북한은 우리보다 앞선 1983년 ‘리조실록(李朝實錄)’을 완간했는데, 한자어를 순한글로 풀어 쓴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현종실록에 나오는 ‘설문과정시 취박태상등팔인(設文科庭試 取朴泰尙等八人)’을 우리는 “문과 정시(文科庭試)를 시행하여 박태상(朴泰尙) 등 8인을 뽑았다”라고 번역했지만, 북한은 “문과 과거시험을 대궐 뜰에서 보이고 박태상 등 8명을 뽑았다”라고 풀이했다. ‘설기청제우사문(設祈晴祭于四門)’을 우리는 “기청제(祈晴祭)를 사대문(四大門)에서 설행(設行)하였다”로, 북한은 “네 군데의 성문에다 비 개이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번역했다. 기청제는 입추가 지나도 장마가 계속될 때 비가 그치기를 비는 제사다.

‘연산군일기’의 한 줄 해석에서 생겨난 영화 ‘왕의 남자’, ‘중종실록’에서 힌트를 얻은 드라마 ‘대장금’, 광해군일기의 보름치 기록에 상상력을 보탠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같은 문화 콘텐츠도 이들 연구원의 ‘핀셋’에서 처음 비롯된 셈이니, 우리 고전과 기록유산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명량’이 관객 1700만 명을 동원하고 역사 드라마가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지만, 이런 성과를 가능하게 한 고전 번역 현실은 초라하다.



내년이면 서울 진관동 SH공사 부지에 신청사를 짓게 돼 고전번역원의 50년 숙원사업은 성취한 듯 보이지만 문제는 인력이다. 당대 제도나 정치 등 역사학적 배경지식을 갖춘 번역자를 양성하고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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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사명감, 낮은 처우

현재 번역 사업에 참여한 위촉 역자들은 주로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다. 주부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200자 원고지 1장당 평균 1만4000원을 지급한다. 1년 평균 원고지 1800장 분량을 번역하는 것으로 단순 계산하면 연봉은 2500만 원 정도다. 고급 역자에게는 조금 더 얹어준다. 정영미 팀장은 “번역을 빨리 하라고 하는데, 인력은 태부족”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번역을 위한 연수과정이 최단 5년 걸리고, 그 후 2, 3년 집중 교육을 통해 경험을 쌓아야 비로소 전문역자가 됩니다. 역자 한 명을 키우는 데 10년 걸리는 셈이죠. 역자들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을 대학원대학교로 바꾸고, 번역료를 인상하는 등 처우를 개선해야 인재들이 이 분야로 진출할 겁니다.”

지금은 고전번역교육원에서 7년 과정의 전문 번역과정을 수료해도 학위를 받을 수 없다. 번역 전문가 대부분은 일반대학원에 진학해 학위를 별도로 따야 한다. 정 팀장은 이런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켜진 사무실에서 검색어를 입력하면 ‘좌라락~’ 펼쳐지는 조선왕조실록은 찜통 번역실에서 옛 문헌 속 한 자, 한 자를 핀셋으로 집어 옮겨놓은 연구원들의 노력과 한숨의 결과물이다. 극단적인 기우(杞憂)일 수 있지만,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고전을 중국어로 옮겼다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인터뷰

“번역원은 인문학 씨앗 만드는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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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학(60) 한국고전번역원장은 “고전번역원은 인문학의 씨앗을 만드는 공장”이라며 “품종 좋은 씨앗을 만들어야 꽃도 잘 피고 열매도 잘 맺듯, 한국 인문학 부흥을 위한 우량 씨앗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인문학 부흥 씨앗을 널리 퍼뜨려야 할 텐데.

“고전 번역을 통해 제대로 된 씨앗을 만들어 널리 퍼뜨려야 한다. 심지 않은 씨앗은 읽지 않은 책과 같다. 번역을 하는 것도, 대중서를 출간하는 것도 현대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고전은 ‘내일로 가는 옛길’인 만큼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이 쉽게 고전을 접한다면 평생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고전은 선현들 지혜의 정수이지만 딱딱하고 지루하다는 선입관을 갖는 이가 많다.

“중요한 지적이다. 고전 번역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우리 고전에 나타난 효(孝), 우정, 배려 등을 주제별로 선별, 이야기책으로 엮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육부 수탁사업으로 고전 대중서를 내고 고전 강의를 하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조선왕조실록 대중교양서도 연말에 출간할 예정이다. 요즘 같은 경쟁 사회에선 고전을 통한 인성교육이 더욱 절실하다. 인성교육은 부모가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따르게 하는 게 중요하다.”

-대중이 완역된 승정원일기를 만나려면 5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당초 98년 걸린다는 것을 그나마 50년으로 줄였다. 국민이 세계기록유산인 승정원일기를 최대한 빨리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원문을 보고, 비전문가는 번역본을 보면 된다.”

-번역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나도 (번역원) 밖에 있을 때는 번역원이 국가예산 받아서 편하게 번역하는 줄 알았다. 여기 와서 보고 깜짝 놀랐다. 1년 번역료가 중소기업 신입직원 연봉에도 못 미친다. 사명감을 갖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고전번역원 번역 인력이 50여 명에 불과해 번역 작업의 상당량을 대학과 연구소 등에 위탁하고 있다. 번역의 질을 높이려면 위탁 기관 수를 줄이고, 필수 번역 인력을 늘려야 한다. 현재 비학위 과정인 고전번역교육원을 20명 정원 규모의 고전번역대학원(석 · 박사과정)으로 개편해야 번역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50년 숙원사업인 신청사 건립을 취임 9개월 만에 해결했는데.

“지금까지 알고 지낸 모든 분을 다 만나고 다녔다(웃음). 읍소(泣訴)도 하면서 부탁드렸다. 힘들었지만, 기획재정부와 교육부에서 우리 현실을 이해해줬다. 신청사는 총 사업비 197억 원을 들여 2017년 상반기 완공 목표로 서울 진관동 SH공사 부지 2975㎡에 건립한다. 현재의 구기동 청사는 비좁아서 번역교육원, 성과평가실, 특수고전번역실이 별도 건물을 임차해 쓰고 있다. 이 때문에 연구원들이 고전 자료 3만5000권이 소장된 현재의 본원을 오가야 하고, 연구원 간 협력 번역도 어려운 형편이다.

신청사 부지만큼 추가 공간도 확보해놓았는데, 공사비가 없어 일단은 빈터로 비워둬야 한다. 인문학 부흥에 동참하는 기관이나 기업이 함께하면 좋겠다.”

-‘신동아’가 5월호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을 인터뷰했는데, 그는 ‘지식향연’이라는 인문학 중흥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인문학 전도사를 자처한다.

“신세계의 인문학 프로젝트는 미래, 결국은 사람을 보고 시작한 것 같다. 바람직한 일이다. 인문학을 중시하는 기업이 신청사 부지 옆에 ‘인문학 전당’ 같은 건물을 지어 번역원과 함께 인문학 부흥에 나섰으면 좋겠다.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남북 공동 번역사업을 제안했는데, 성과는 있나.

“북한은 이미 1983년에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했다. 북한 사회과학원 산하 민족고전연구소에 100∼150명의 연구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분단 이후 학술교류가 없어 수준과 실태는 잘 모른다. 지난해 북한도 좋다고 해서 공동번역 양해각서(MOU)를 교환하기로 했고, 최근에는 지리서인 ‘함경도지’와 ‘평안도지’를 각각 번역하기로 합의했다. 북한도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선생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분들의 고전을 함께 번역하고 남북 청소년을 위한 민족고전문고를 간행하면 민족공동체 의식도 키우고 같은 한민족임을 실감할 수 있다. 남북관계 개선의 작은 물꼬는 틔울 수 있다고 본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인 이명학 원장은 수업을 재미있게 진행하는 교수로 유명하다. TV 강연과 특강을 통해 고전과 한자 대중화에 앞장섰고, 성균관대 티칭 어워드(2011), SBS 대학 100대 좋은 강의상(2012), 교육과학기술부가 제정한 제1회 대한민국 스승상(2012) 등을 수상했다. 성균관대 사범대학장 시절에는 다문화가정백일장(2회)을 비롯해 중국(7회), 몽골(1회), 중앙아시아(6회)에서 한글 백일장을 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4월부터 한국고전번역원장을 맡고 있다.


신동아 201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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