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단 선배에게서 들은 김동리 선생의 일화가 떠오른다. 당시 부인이던 소설가 서영은 선생이 밤새 소설을 쓰느라 끙끙대고 있자, 주무시다가 잠에서 깨어난 동리 선생께서 ‘자네 뭘 그리 끙끙대고 있나’라고 물었다. 서영은 선생이 소설이 잘 풀리지 않아 괴롭다고 했더니, 동리 선생이 물 한잔 마시고 나서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하셨다고 한다.
“할 이야기가 없어서 그런 거야.”
이 일화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할 이야기가 없다는 건 쓸 문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없는데 쥐어짜려고 하니 힘들고 고단하다. 그것이 창작의 과정이라고, 고통이라고 위안을 하긴 하지만, 그 고통이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 아닐까. 바로 톨스토이와 괴테 같은 문학의 거장들이 보여준 거대한 세상이다. 천의무봉의 세계. 저절로 흘러나와 강이 되고 산이 되는 그런 문학의 거봉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문학은 비우는 것
문학은 담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마음 그릇에 가득 찬 이야기를 비우는 게 소설이고, 영혼에 차오르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시다. 설명할 것이 많아 할 말이 많으면 덜어내는 것이 수필이다. 문학은 빈 그릇이 될 때 그 가치가 가장 빛난다.
작가가 돈과 명성, 문학적인 성취에 눈이 멀어 자꾸 무엇인가를 담으려고 할 때 누추해지는 것이다. 장자의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와, 목마른 물고기-학철부어(·#28088;轍·#39826;魚)-에게 내일 강물을 끌어다주는 것보다 당장 물 한 컵 쏟아 부어주는 게 문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학은 역시 쓸모 있는 그릇이다. 사람들에게 빈 그릇을 선물하는 것이다.
선생은 이제 할 말이 별로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황금찬 시인학교’의 수강생이 되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선생의 말씀을 듣는 자세로 바뀐다. 저널리스트로 선생을 만난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후배 시인으로 선생을 바라보았다. 선생은 달항아리처럼 둥근 미소를 짓는다. 그래, 이제 아주 단순하게 가자.
그날, 간헐적으로 들려주신 시에 대한 이야기다.
“시를 쓴다는 건 말이야. 식당에서 굶은 자식에게 누가 점심 한 그릇 사 주는 기분이란 말이야, 그런 기분으로 시를 쓰면 좋겠어요.”
“아이고, 이놈의 나이야, 내가 마지막 시집 낼 때까지만 멀리 가 있거라.”
“시인이 말이야, 천재가 반드시 이익이 된다고 할 수 없어요.”
“97세에 이렇게 거지 같은 시라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거….”
“나이가 참 무서운 겁니다. 요즘엔 자꾸 잊어버려요.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아. 나이가 참 무서워. 나이에게는 당할 수가 없어. 시도 나이를 먹나봐요, 허허.”
“내 첫 시집이 ‘보리고개’인데, 생각해보니 100년 전 일 같아요. 살아온 세월을 기억해보면요. 눈물 나는 것밖에는 없어. 고생들 참 많이 했어요. 김구용 시인은 말이야, 나보고, 친구여, 우리 언제나 소주 한잔 맘 놓고 먹을 날이 오겠나…라면서 울었어요.”
너무 아름다우면, 죽는다
선생이 살아오면서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있을 법하다. 기억이나 추억도 자아에 의해 적당히 변용되기 마련이다. 2015년 7월 현재 선생의 기억은 우선 전쟁부터 떠올렸다. 나는 선생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내가 1군단 사령부 종군작가로 있었어. 그때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썼지요. 내가 시를 쓰면 붓글씨를 쓰는 정훈병이 크게 옮겨 적었지. 그러곤 담벼락이나 대문 같은 데다가 붙여놓았어. 그 시를 지나가는 군인이나 피난 가던 민간인들이 보고 울었어. 군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야. 흥남부두 철수할 때는 미군 배에 우리 민간인들이 타고 왔는데, 화물선이어서 그랬는지 화장실 시설이 부족해서 배 위에다 그냥 볼일들을 봤단 말이야. 생각해보라고, 그게 사람이 사는 거냔 말이야. 그렇게들 살아남았단 말이야. 참 눈물겨운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문인뿐 아니라 인생 100세에 얼마나 많은 인연이 선생을 지나가고 다가왔을 것인가. 가난한 동네에 일도 많고 탈도 많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