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정체성 잃고 통일 포기 중국 영향력 탈피가 관건

몽골 분단에서 한반도를 본다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입력2015-08-19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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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성 잃고 통일 포기 중국 영향력 탈피가 관건
    칭기즈 칸 공항에 내려 입국 심사를 받는데 출입국 담당관이 영어로 뭔가를 더 적으라고 했다. 입국서류 기입란에 다 적었기에, “뭘 더 쓰라는 것이냐”라며 버텼더니 전화번호를 적으란다. “호텔 이름은 이미 적었다. 전화번호까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더니 “다른 전화번호라도 적으라”고 했다. “다른 게 무엇이냐”고 했더니, 뭐라 대답하는데 주변이 시끄러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왓(what), 왓?”을 서너 번 반복했더니, 한국어로 “몽골에 있는 친구 분 전화번호라도 적으시라고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진즉에 한국어로 할 것이지. 몽골에는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많다. 취업과 학업 등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몽골인이 3만 명이 넘기 때문이다. 한류의 영향으로 몽골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선 2000명 정도가 매년 한국어를 공부한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몽골은 국토 면적이 한국(남한)의15.6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훨씬 적다. 지난 3월 300만 명을 넘어섰다. 몽골 정부는 300만째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의 부모에게 아파트를 제공하며 ‘마(魔)의 300만’ 돌파를 자축했다. 경제성장을 이루려 할 때는 산아제한정책을 펴는 것이 보편적인데, 몽골은 인구 증가에 중점을 둔다. 적은 인구 탓에 시달린 역사의 아픔 때문이리라. 몽골 정부는 500만 명은 돼야 ‘종속(從屬)’을 초래하는 저성장에서 탈출해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붉은 영웅‘ 울란바토르

    울란바토르는 서울과 베이징(北京)처럼 깊은 역사를 가진 수도가 아니다. 따라서 전시용으로 만들어놓은 게르를 제외하곤 몽골을 상징하는 문화재를 보기 어렵다. 정주(定住)문화가 아니어서 유적이 많이 남지 않은 탓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수도라면 어느 정도 유적이 있게 마련인데 울란바토르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몽골인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졌을 때 청으로부터 독립했다고 본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몽골인이 공산 정부를 세운 1921년 독립한 것으로 본다. 이는 우리가 1945년 8월 15일을 독립(광복), 1948년 8월 15일을 정부 수립으로 나눠 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정부 수립 3년 뒤인 1924년 수도로 정한 곳이 울란바토르다. 그전까지 울란바토르는 니슬렐후레로 불렸다.

    몽골은 다민족 국가인데 다수는 ‘할하 몽골인’이 차지한다. 그래서 국호도 ‘몽골’로 삼았다. 할하 몽골인은 1636년 니슬렐후레에 라마불교의 중심 사원인 ‘다 후레’를 짓고 종교 행사를 이어왔다. 종교 중심지를 수도로 삼은 것이다. 정치나 경제 중심지가 아닌 종교 중심지를 수도로 삼은 데는 피맺힌 몽골의 역사가 얽혀 있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란 뜻이다. 1992년 몽골은 민주공화국으로 변신했다. 그런데도 공산주의 냄새가 폴폴 나는 울란바토르를 수도 이름으로 유지하는 것은 그들의 역사의식 때문이다. 사람들은 몽골이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화됐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중국과 부대끼며 살아온 몽골은 지난 세기 초 갑작스럽게 소련(공산 러시아)을 만나며 한순간에 중국과 이별했다. 선조가 만들어준 몽골 문자를 버리고 러시아의 키릴 문자를 도입할 만큼 친소 노선을 걸었다. 이유는 중국이 진저리나게 싫어서였다.

    몽골인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질문 중 하나가 “칭기즈 칸은 중국인이냐, 몽골인이냐”다. 이 질문을 받으면 그들은 핏대부터 올린다. 한국의 반일(反日)감정 이상으로 몽골인은 중국을 싫어하고 무시하려 한다. 그러나 과거의 한국이 일본에 그러했듯이, 몽골은 중국에 단단히 멱살을 잡혔다. 이것이 고민이기에 몽골은 지금 미국 한국 일본 등에 기대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붐비는 몽-중 철도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하는 철도는 베이징과 모스크바로 연결된다. 두 철도 가운데 붐비는 쪽은 어디일까. 과거에는 몽-러 철도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절대적으로 몽-중 철도다. 울란바토르에는 전체 몽골인의 45%인 130여만 명이 산다. 몽골은 소비재 산업이 발전하지 못했다. 따라서 많은 생필품을 수입하는데, 그 핵심 루트가 몽-중 철도다.

    베이징에서 출발한 열차는 1박2일 만에 울란바토르로 들어오는데, 이 열차에 생필품이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떠나 울란바토르로 오는 기차는 그렇지 않다. 이유는 러시아 쪽엔 이렇다 할 항구가 없고, 생산되는 물품도 적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은 세계로 열린 항구를 많이 가졌고 ‘세계의 공장’인지라, 몽골이 요구로 하는 생필품을 무한정 공급할 수 있다.

    정체성 잃고 통일 포기 중국 영향력 탈피가 관건
    베이징발 철도에 어느 나라 물품이 많이 실릴지는 ‘가격’이 결정한다. 몽골은 경제력이 약하기에 싼 제품을 선호한다. 따라서 중국산 저가품이 가장 많이 실리고, 이어 고급품으로 인식된 ‘메이드 인 코리아’ 물품이 실린다. 중국은 몽골산 지하자원이 필요하다. 그러하니 생필품을 싣고 온 베이징발 화차는 몽골에서 지하자원을 가득 싣고 돌아간다. 그래서 몽-중 노선은 항상 북적인다.

    현실이 이러하니 몽골은 중국과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 베이징발 열차가 하루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울란바토르 시장에서 품귀 현상과 사재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건만 몽골인의 대중 자주의식은 도도하기 그지없다.

    이는 역사의 필연이기도 하다. 그렇게 싫어하는 중국을 대국으로 만들어준 것이 몽골인과 몽골인의 친구이자 원수이기도 한 만주인이기 때문이다. 몽골인과 만주인은 베이징을 중국의 수도로 만들어줬다.

    12세기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족이 중국 대륙에 있던 송(宋)나라를 공격해 남쪽으로 밀어냈다. 남쪽으로 밀려간 송나라를 ‘남송(南宋)’이라고 한다. 그러한 금나라를 칭기즈 칸의 몽골이 무너뜨렸다. 몽골은 남송도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때 유교에 젖었던 남송인이 결사항전했다.

    그런 까닭에 중국을 통치하게 된 몽골은 남송인을 강하게 차별했다. 몽골인이 최고이고, 서양인처럼 눈동자에 색깔이 있어 색목인(色目人)으로 부르는 중앙아시아인이 두 번째, 세 번째는 양쯔강 이북에 있던 한인(漢人), 마지막이 남송인을 가리키는 남인(南人)이었다.

    베이징은 고대에도 중요 도시로 여겨졌지만, 심장부는 아니었다. 그때의 중국 중심부는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이 있는 중원(中原) 지역이었다. 춘추전국시대 베이징은 ‘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계는 전국7웅이던 연(燕)나라가 수도로 삼았기에 ‘연경(燕京)’으로 불리기도 했다.

    베이징을 수도로 만들어주다

    그리고 1000여 년이 지나 베이징이 주목받게 됐다. 933년 요(遼)나라를 세운 거란족이 베이징 지역을 ‘남경(南京)’으로 명명한 것. 5경 제도를 유지한 요나라는 지금 내몽골자치구의 파림좌기를 ‘상경’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 상경에서 보면 남쪽에 있기에, 베이징을 남경(南京)으로 부른 것이다.

    1125년 여진족의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며 베이징 지역을 차지한 뒤엔 ‘중도(中都)’로 바꿔 불렀다. 금나라 역시 5경 제도를 운용했다. 금나라는 그들이 일어난 흑룡강성 아성(阿城)시를 ‘상경’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가 후대에 중도로 천도했다. 베이징은 금나라 시절 부(副)수도였다가 수도가 된 것. 그러한 베이징을 완벽한 수도로 올려준 것이 원나라다.

    원나라를 세우기 전 몽골족은 울란바토르 남서쪽 350여 ㎞ 떨어진 곳에 있는 카라코룸을 수도로 삼았다. 이 때문에 실크로드를 따라온 마르코 폴로도 카라코룸에 장기간 머물렀다. 몽골제국 즉, ‘대몽골’은 칭기즈 칸(1대)-오코타이(2대)-구육(3대)-몽케(4대)를 ‘대칸(大汗)’으로 부르며 이어지다, 5대가 들어설 시점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동생인 아릭부케(‘아리크 부카’로도 부른다) 세력으로 나뉘었다.

    몽골은 ‘말자(末子, 막내아들)상속’ 제도를 유지했기에, 아릭부케가 정통을 있게 됐다. 형인 쿠빌라이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세력이 약해진 아릭부케는 1264년 항복했다. 승리한 쿠빌라이는 1267년 중도성(城)을 불태우고, 그 북쪽에 새 성을 만들어 ‘대도(大都)’로 명명하고 수도로 삼았다.

    1271년 그는 국호를 대몽골에서 ‘대원(大元)’으로 바꿨다. 그에 따라 중심도 카라코룸에서 베이징(대도)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원을 명(明)이 무너뜨렸다. 명은 남쪽에서 일어났기에 지금의 난징(南京)을 ‘남경’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가, 3대 황제인 영락제 때 대도를 ‘북경(北京)’으로 고쳐 부르며 천도했다.

    그러한 명을 만주족이 세운 청(淸)이 붕괴시켰다. 선양(瀋陽) 인근에서 일어난 청은 랴오양(遼陽)을 ‘동경(東京)’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가 북경으로 천도했다. 이러하니 베이징은 만주족(금, 청)과 몽골족(원)이 수도로 만들어줬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경영한 원나라는 11대 황제(대칸)인 순제(順帝)가 나라를 이끌던 1367년 반란을 일으킨 한족(漢族) 주원장 세력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았다. 견디지 못한 순제 세력은 대도를 버리고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커스커텅기(克什克騰旗)인 응창부(應昌府)로 수도를 옮겼다. 사가(史家)들은 그때부터 중국 역사는 주원장이 만든 명(明)나라가 주도한 것으로 본다. 응창부로 천도한 원을 아웃사이더로 보고 ‘북원(北元)’으로 부른다.

    카라코룸으로 간 奇황후의 아들

    그러한 순제의 여러 부인 중 한 명이 고려인 기황후였다. 둘 사이에는 ‘아유시리다라’란 아들이 있었다. 1370년 순제가 죽자 아유시리다라가 황제(소종, 昭宗)가 됐다. 소종은 카라코룸으로 수도를 옮기고, 1372년 침입해온 명나라 군을 대파했다. 1378년 소종이 사망하자 배다른 동생인 토구스 테무르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는 명나라 군대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피살됐다. 그의 죽음으로 북원은 더욱 쇠락했다.

    그러한 북원을 대체한 것이 ‘몽골의 사촌’ 격인 ‘오이라트’ 세력이었다. 오이라트는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척박한 서(西)몽골과 바이칼호 인근에서 살아왔다. 그러한 오이라트를 칭기즈 칸의 큰아들 조치가 정복했기에, 조치의 후손들이 오이라트의 칸(왕)이 되었다. 그러나 거주는 하지 않는 형식상의 지배였다. 실권은 군 사령관이라는 뜻을 가진 오이라트의 부족장 ‘타이시’가 행사했다.

    오이라트가 부각될 무렵 명의 지도자가 영락제였다. 남경에 있던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영락제는 먼저 베트남을 치고 1410~1424년 사이 5차례에 걸쳐 고비 사막까지 진격했다. 이 공격으로 카라코룸이 초토화됐다. 몽골인들은 영락제의 공격으로 카라코룸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몽골의 역사서는 영락제를 원 순제의 아들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오이라트가 ‘타이시’인 에센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나, 1449년 ‘위대한 보복’을 했다. 명나라의 정통제가 지금의 산시(山西)성 다퉁(大同)까지 진격해 오자, 그곳을 습격해 정통제를 사로잡은 것. 명나라는 토목보(土木堡)로 부르던 곳에서 이 사건을 당했기에, 이를 ‘토목보지변(土木堡之變)’으로 적는다. 중국 처지에서 토목보지변은 상당히 창피한 사건이기에 중국 사서들은 이 일을 상세히 서술하지 않는다.

    곤란해진 명나라는 정통제의 이복동생을 새 황제(경태제)로 내세워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1452년 에센은 허울만 남은 북원의 타이슨 대칸을 살해하고 북원의 대칸에 올랐다. 그러나 1454년 에센이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 북원은 대칸을 내지 못하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이 혼란은 1475년 칭기즈 칸의 핏줄을 이어받은 만도르가 대칸에 등극하면서 해소됐다.

    만도르 대칸의 부인(황비)이 몽골 역사에서 유명한 여걸(女傑)인 ‘만투하이’다. 만도르는 만투하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재위 3년 만인 1478년 사망했다. 유일하게 남은 칭기즈 칸의 핏줄은 만도르의 인척인 여섯 살 소년 ‘다얀’이었다. 칭기즈 칸의 핏줄이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다얀을 대칸으로 올렸다.

    北元의 여걸 만투하이

    그때 만투하이는 31세였다. 만투하이는 양자 뻘인 다얀을 키우며 수렴청정을 하다 42세가 된 1481년, 17세의 다얀과 결혼했다. 25년 연상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실상의 양자와 결혼해 다시 황비가 된 것. 만투하이는 다얀과의 사이에서 일곱 남매를 낳아 칭기즈 칸 혈맥을 부활시켰다. 만투하이는 다얀에게 ‘몽골제국 부활’을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이 때문에 북원은 오이라트를 물리치고 다시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만투하이가 부활시킨 북원은 다얀-만투하이의 손자인 알탄 대칸 시절인 1550년(경술년) 명의 수도인 북경을 포위했다. 중국은 이 패배를 ‘경술의 변(庚戌之變)’으로 부르며 부끄러워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은 참전했다. 군사학의 중요한 명제 가운데 하나가 ‘두 개의 전선을 갖지 말라’이다. 한정된 국력을 분산하지 말라는 뜻인데, 명은 이를 어겼다. 조선 전선과 북원 전선을 동시에 운용한 것이다.

    그러한 때 요동(만주)에서 누르하치가 일어났다. 1559년생인 그는 20대 중후반인 1586년쯤 반명(反明) 노선을 분명히 하며 친명(親明) 노선을 따르는 만주족을 공격해 통합에 나섰다. 그러나 명은 북원 및 왜와의 전쟁에 여념이 없었기에, ‘제3의 적’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 누르하치는 학자들로 하여금 몽골 문자를 토대로 만주 글자를 만들게 했다. 명과 다른 길을 간다는 의지를 더욱 분명히 한 것이다. 1601년엔 기동부대 ‘8기(八旗)’의 전신인 ‘4기(四旗)’를 만들었다.

    1604년 북원에서 다얀-만투하이의 7세 손인 릭단이 대칸에 즉위했다. 릭단은 라마불교를 받아들여 몽골인을 하나로 묶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누르하치의 힘과 운이 어디까지 뻗칠지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 누르하치의 흥기를 본 북원에서는 반명(反明) 노선을 걷는 누르하치와 손잡을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일었는데, 릭단은 거절했다. 그러자 북원은 친(親)-반(反) 누르하치파로 나뉘어 내란에 들어갔다.

    1612년, 동부 몽골에 있는 친누르하치 부족이 누르하치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1616년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잇는다며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에 대해서는 일곱 가지 원한인 ‘7대한(七大恨)’을 발표하는 것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1618년부터 요동에 있는 명나라 군을 공격했다.

    임진왜란 참전 이후 국력이 약해진 명은 ‘최후의 한 수’를 사용했다. 몽골 세력이 친-반 누르하치로 나눠진 것에 주목해, 반누르하치의 선봉인 릭단 대칸에 접근해 매년 수만 냥의 은화를 준다는 조건으로 동맹을 맺기로 한 것. 원수와의 동맹이 결정적인 실수가 된다는 것을 릭단 대칸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1618년 릭단은 명나라 군을 공격하는 누르하치 군을 공격했다가 대패했다.

    明과 동맹 맺은 北元

    보복에 나선 명나라는 1619년 4개 방면으로 누르하치 군을 공격했다가 ‘사르후’라는 곳에서 대패했다(사르후 전투). 그러자 릭단을 따르던 몇 안 되는 몽골 부족들이 친누르하치파 쪽으로 이탈했다.

    친누르하치파의 주장은 호르친부였다. 호르친부는 칭기즈 칸의 동생 하사르의 후손이다. 1624년 호르친부를 필두로 친누르하치의 몽골부족이 후금처럼 8기(몽골8기)를 만들어 대명(對明) 전선에 참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릭단은 이들을 공격했으나 후금의 역습을 받아 대패했다.

    1626년 누르하치가 죽자 대권을 잡은 홍타이지는 이듬해(1627) 친명노선을 고집하는 조선을 공격해 굴복시켰다(정묘호란). 그러자 릭단 밑에 있던 몽골부족들이 대거 릭단에 반란을 일으켰다. 견디지 못한 릭단은 1631년 다시 호르친부 등을 공격했으나 또 실패했다.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한 친누르하치 세력은 1632년 홍타이지 군과 함께 릭단을 공격했다. 이를 막아내지 못한 릭단은 청해(靑海)성 지역으로 도주해 죽고(1634), 그의 아들 에제이가 뒤를 이었다.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홍타이지는 조선을 다시 공격해 항복시키고(병자호란), 한 달 뒤 에제이를 공격해 항복시키고 대원 제국의 옥새와 대칸 지위를 받아냈다.

    칭기즈 칸 제국이 사라진 것이다. 그여세를 몰아 이자성의 난으로 이미 황실이 무너진 명을 공격해 북경도 점령했다(1644년). 대륙을 석권한 청나라는 그들에 협조한 몽골족과는 혼인을 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그렇지 않은 몽골족(북원 세력)은 철저히 탄압했다. 호르친부의 탈퇴로 잉태된 몽골족의 분할이 가시화된 것이다.

    청나라는 칭기즈 칸 직계는 모두 죽였다. 그렇게 북원이 무너질 때(1636) 칭기즈 칸 정신을 잇고자 하는 할하 몽골인들이 ‘니슬렐후레’에 라마불교의 중심사원인 ‘다 후레’를 짓고 종교 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몽골의 부흥을 비는 작은 노력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할하 몽골인을 거센 기질을 가진 오이라트 족의 일파인 중가르 족이 경멸했다. 갈단 칸(왕)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가르족은 청에 굴복한 할하 몽골인과 청을 공격했다. 중가르 군은 시베리아에 있는 러시아의 도시들을 습격하고 화약 기술자들을 잡아와 화포무기를 만들게 한 다음 이것을 들고 청나라 군대와 싸웠다.

    청나라도 총력을 기울였다. 80여 년간 계속된 이 전쟁은 1758년 건륭제가 이끄는 청나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청나라는 중가르를 4개 부족으로 나눠 서로 싸우게 함으로써 몽골족의 재건을 막았다. 몽골족은 더 이상 나라를 갖지 못했다. 일부 중가르인들이 볼가강 하류까지 도망쳐 ‘칼묵’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러시아에 굴복해 지배를 받게 됐다.

    몽골의 레닌과 스탈린

    1911년 쑨원이 신해혁명을 일으키자 비로소 몽골인들은 독립을 모색했다. 하지만 그들 힘만으로는 부족했기에 1917년 공산혁명을 일으킨 러시아에 기댔다. 그때 큰 역할을 한 이가 수흐바타르와 초이발산이다.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수흐바타르는 역전(驛傳)마차의 마부를 하다, 신해혁명으로 몽골이 독립하자 군에 들어가 기관총 부대 소대장을 했다. 제대한 뒤에는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植字工)을 하다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1920년 초이발산과 함께 몽골 인민당을 만들어 정부를 세우기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1921년 그는 인민의용군을 이끌고 공산 러시아군과 함께 중국군을 물리치고 니슬렐후레(울란바토르)에 인민정부를 세웠다. 인민정부에서 (1921년 7월 10일) 국방부 장관을 하다 30세(1929년)에 죽었다.

    초이발산이 그 뒤를 이었다. 초이발산은 공산주의자답게 종교를 탄압했다. 라마불교 사제와 신자 3만 명 이상을 살해하고 사원을 파괴했다. 그러한 악행과 독재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련과 협력해 몽골을 점령하고자 하는 일본군을 물리친 공이 있다(1939년 할힌골 전투 승리. 일본은 ‘노몬한 사건’이라고 한다). 몽골에서는 요절한 수흐바타르를 레닌, 장기 집권을 한 초이발산을 스탈린에 비유하는 이가 많다.

    수흐바타르가 인민정부를 세운 몽골은 반누르하치-북원 계열의 거점이 있던 곳이다. 중국이 ‘외몽골’로 부르는 지금의 몽골 공화국 지역이다. 호르친부 같은 친누르하치 세력은 참여시키지 않았다. 청나라에 협조해 몽골을 공격한 호르친부 등은 신해혁명에도 불구하고 독립할 뜻이 없었다. 이들이 살아온 곳이 바로 ‘내몽골’이다.

    1932년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1936년 내몽골도 차지할 생각으로 내몽골을 ‘몽강국(蒙疆國)’으로 만들어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켰다. 그러나 1945년 패전하면서 중국에 돌려주었다.

    하지만 수흐바타르와 초이발산에 의해 독립한 몽골은 중국에 ‘반환’되지 않았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8월 폭풍작전’으로 만주국과 몽강국을 접수해 중국에 넘겨줬으니, 중국은 소련이 인정한 몽골 독립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를 재확인하기 위해 1946년 초이발산은 국민투표를 실시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몽골인의 뜻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인정했으나, 국민당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국과 대만은 몽골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한다. 중국은 정부가 내는 지도에 몽골을 외국으로 그린다. 그러나 대만 정부가 발행하는 지도는 몽골을 내몽골자치구와 함께 수복해야 할 중국으로 묘사한다.

    공산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은 초이발산은 한때 내몽골과의 통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정부가 강력히 반발하자 바로 포기했다. 이것이 몽골인들이, 몽골 국적을 가진 몽골인과 중국 국적을 가진 내몽골인으로 나눠진 내력이다.

    내몽골자치구의 면적은 (외)몽골의 90% 남짓이다. 몽골은 평균고도가 해발 1500m이지만 내몽골은 1000m 정도다. 비는 내몽골에 더 많이 온다. 이 때문에 인구는 300만 대 2380만으로 내몽골이 훨씬 많다. 자연 조건이 더 좋은 곳에 사는 몽골인들은 중국인이 되고, 칭기즈 칸의 정신을 잇자는 독립파는 척박한 땅에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몽골인은 내몽골인을 중국인보다 더 싫어한다. 반대의 이유로 내몽골인도 몽골인을 무시한다.

    둘은 같은 언어를 쓰지만 문자는 다르다. 내몽골인은 고유의 몽골 문자로 표기하나, 몽골인은 러시아 키릴문자로 적는다. 몽골은 중국과 거의 내왕하지 않고 지내다가 1992년 민주화하면서 ‘중국+내몽골’을 만나게 됐다. 개방의 결과는 ‘중국에 대한 종속’이었다. 그러자 자신감을 가진 내몽골인들도 몽골을 찾게 되었다. 역사적인 감정을 의식한 탓인지 그들은 중국인 가이드를 내세워 설명을 듣는다고 한다.

    ‘이승만’은 있으나 ‘박정희’가 없다

    몽골은 발전을 하고 싶은데 기술자가 없으니, 인건비가 싼 중국 기술자를 불러들인다. 그런데 몽골인들은 중국 기술자 밑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중국 기술자의 지시를 받아 허드렛일을 하는 것은 북한에서 온 노동자들의 몫이 됐다. 현재 몽골에는 북한 근로자 2000명 정도가 일한다. 종속을 감수하며 개방을 했는데 기술과 자본이 쌓이지 않는 것이 바로 몽골의 고민이다.

    몽골에는 ‘이승만(수흐바타르와 초이발산)’은 있었으나, ‘박정희’가 없는 것이다. 반면 우리에게는 대제국을 만들 ‘칭기즈 칸’이 없었다. 한국은 독립 후 개발독재를 거쳐 민주화 시대로 진입했으나, 몽골은 개발독재 없이 바로 민주화 시대로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몽골은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박정희’를 매우 궁금해한다. 전체 인구의 1%가 넘는 3만 명 이상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3만여 명은 100% 노동연령층이고 가장이 대부분이라 몽골 경제에 기여하는 비중이 높다. 몽골인은 전쟁을 치르고 세계 4대강국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고속성장을 하고 민주화까지 이룬 대한민국의 성공 비법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기자는 몽골이 몽골과 내몽골로 영원히 갈라서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어떤 지도자를 내세우느냐,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은 뒤바뀐다. 지금 내몽골은 심각한 중국화의 길로 들어섰다. 자치구의 2380만 인구 가운데 몽골인은 17%도 되지 않는 400만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몽골인은 몽골어보다 중국어를 쓰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길 정도다.

    내몽골인보다 더 심각하게 정체성을 잃은 것이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다. 만주족은 1068만 명이나 살지만, 만주어를 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도 중국은 몽골인과 만주인의 부활을 두려워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는 이유는 우리 역사인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뿐 아니라 금과 청을 세운 만주인의 역사를 흡수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몽골의 역사를 흡입하기 위해 ‘북방(北方)공정’을 한다. 북방공정의 골자는 ‘내몽골인이 중국인이니, 몽골의 역사도 중국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칭기즈 칸을 중국에 속한 위대한 장수로 그려놓는다. 그러나 몽골에는 북방공정을 반박하는 학자가 없다.

    깊어가는 몽골의 고민

    여름철 한-몽 항공편은 매우 붐빈다. 한국에서는 울란바토르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이들과 초원에서 말을 타고 밤에는 쏟아지는 별을 보고자 하는 관광객이 밀려들어가고, 몽골에서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교류자 가운데 몽골 사례에 비추어 한반도 통일을 생각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우리도 몽골-내몽골인처럼 영구 분단의 길을 걷는 건 아닐까.

    내년 몽골은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를 개최한다. 독립 이후 최대의 국제행사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새 공항을 짓고 있다. 이 공항과 울란바토르를 잇는 최초의 고속도로도 닦고 있다. 한국이 서울올림픽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듯, ASEM 정상회의를 계기로 몽골은 종속을 끊어내고 고속성장을 할 것인가. 북방공정을 무너뜨리고 내몽골과 통일하는 대장정에 나설 것인가. 귀국하는 밤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찾은 칭기즈 칸 공항은 ‘세계를 정복한 대칸’ 칭기즈 칸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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