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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古傳幻談 | 예로부터 전해진 기이한 이야기 |

살인자를 쫓는 밤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살인자를 쫓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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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명을 받아 김홍도가 그린 ‘규장각도’(1776년). 이 글의 주인공 이덕무는 1779년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기용돼 1793년 숨질 때까지 14년간 규장각에서 근무했다. [윤채근 제공]

정조의 명을 받아 김홍도가 그린 ‘규장각도’(1776년). 이 글의 주인공 이덕무는 1779년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기용돼 1793년 숨질 때까지 14년간 규장각에서 근무했다. [윤채근 제공]

정조 재위 13년째 되던 1790년 겨울은 몹시 추웠다. 희미한 달빛을 받은 창덕궁 전각은 살짝 내린 눈에 덮여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규장각 우측에 자리 잡은 검서청에서 처남 백동수(白東修)를 기다리던 이덕무(李德懋)는 피곤에 겨워 자주 졸았다. 서자 출신으로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된 지 벌써 11년, 지천명을 코앞에 둔 그는 기이한 혼란에 사로잡혀 부쩍 더 늙은 기분이었다. 그는 왕을 의심하고 있었다. 

등잔불 심지를 자르고 외알 안경을 코에 걸친 그가 형조로부터 넘겨받은 기록을 다시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시신 검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서류 묶음을 펼쳐 초검에서 삼검에 이르도록 뭔가 오류가 있지 않은지 살폈다. 수백 번을 들여다봐도 오류 따윈 없었다. 살인은 한 사람에 의해 같은 시간대에 이뤄졌고 찌른 각도나 솜씨 또한 일관됐다. 따로 공범이 존재하긴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검서청 입구 쪽에 인기척이 일었다.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壯勇營)의 창검술 교관 백동수는 왕명으로 이덕무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는 중이어서 창덕궁 출입이 자유로웠다. 두 사람은 밀담을 나누기 위해 금천(錦川) 쪽으로 낸 누마루인 동이루(東二樓)로 서둘러 이동했다. 금천 너머 홍문관 쪽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백동수가 겉옷 오른팔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강진에서 막 도착한 길이요. 근데 매부, 이 상처를 보오.” 

백동수의 오른 팔뚝에 칼이 세로로 지나며 낸 듯한 상흔이 보였다. 피부 아래를 가르지 않아 큰 출혈을 일으키진 않았음에 분명했다. 



“천하의 백동수를 이리 벨 자가 조선에 있단 말인가?” 

싱긋 웃은 백동수가 옷을 내리며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라도 강진 구석에 그런 칼잡이가 숨어 살 리 있소? 이건 장용영 솜씨요. 내가 가르친 놈들이었어.” 

놀란 표정의 이덕무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신음처럼 속삭였다. 

“장용영 무관들이 처남을 강진까지 따라가 습격했다? 그렇다면 이는 필시….” 

침묵에 잠긴 두 사람은 동이루 아래로 흐르는 금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백동수를 먼저 퇴청시킨 이덕무는 사색에 잠겼다. 그가 백동수를 강진으로 밀파한 목적은 단 하나,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은 김은애(金銀愛)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 해 전 5월, 강진 탑마을의 18세 유부녀이던 김은애는 처녀 시절부터 자신을 끈질기게 무고해온 동네 노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문제는 이 사건의 기괴한 처결 과정이었다.

탐정 이덕무

넓은 소매 안에 지필묵을 넣고 두꺼운 누비솜옷을 걸친 이덕무는 검서청을 나선 뒤 미끄러운 규장각 앞 전돌길을 조심스레 걸어 출입문으로 향했다. 교정 업무를 맡은 각신(궐내각사 소속 신료) 서너 명이 눈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잽싸게 금호문(金虎門)을 나오며 수문장청 경비병들과 맞닥뜨렸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왕은 그의 개인적 수사를 이상한 방식으로 방해했지만 추가 제재 조치를 취하진 않은 것 같았다. 광화문 앞 의정부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마침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기다리는 정본당(政本堂)에 도착한 그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안으로 들어섰다. 

정승들 집무실인 정본당 안채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던 채제공은 앞자리에 앉는 상대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며 물었다. 

“이 검서도 참 끈질긴 사람일세. 뭘 더 알고 싶어 이러나?” 

잠시 뜸을 들이던 이덕무가 강진을 다녀온 백동수 얘기를 꺼내자 책을 덮은 채제공이 비로소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벌였군. 주상의 뜻을 거스를 순 없네. 이미 사면령을 내리셔서 김은애를 다시 잡아들일 수도 없어. 그냥 묻어버리세.” 

“재심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좌상 영감. 소신에게 사건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해 널리 알리고 내각(규장각)에도 보관하라는 명을 내리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주상이십니다. 청사에 남을 기록이온데 어찌 소홀히 처리하겠습니까?” 

담뱃대를 입에 물고 길게 한 모금 빤 채제공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자네의 지나친 호기심이 자칫 주상의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어. 물론 이 사건은 이상해. 그래서 나도 여러 차례 사면 불가를 주청했지 않았는가? 형조의 판결도, 의정부의 건의도 다 묵살하신 분일세. 그리고 백 초관(哨官)을 공격한 게 진정 장용영 쪽이라면, 그건 이 문제를 더 파고들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일세. 멈추게.” 

의정부를 나선 이덕무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경복궁 쪽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는 처남이 사는 남산 아래 장흥방을 향해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왕의 행동은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규장각 안에서 가장 엄밀하고 깐깐한 자신에게 사건 기록을 맡기고도 중립적으로 서술한 초고를 올리면 곧바로 수정하라는 어명이 내려오곤 했다. 진정 왕이 바라는 건 무엇일까?

‘김은애 사건’

1년 전인 1789년 윤5월 26일 초경 무렵, 강진 탑마을의 김은애는 처녀 시절부터 자신에 관한 거짓 소문을 퍼뜨려온 같은 동네 안 노파 집에 침입해 노파를 난자했다. 무고의 내용인즉슨 그녀가 처녀 시절부터 안 노파 시댁 쪽 소년과 밀통하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평소 허언증이 심하던 노파는 창기 출신에 자식도 없었으며 남편의 삯일로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신세였다. 정숙한 양갓집 규수에겐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지만 살해 수법이 잔학하며 치밀했다. 

사건을 처음 접한 강진현감 박재순(朴載淳)은 김은애의 어미를 의심했다. 강한 힘으로 베이고 찢긴 시신 상태로 볼 때 작고 유약한 은애의 짓으로 보기 힘든 데다 어미와 노파 사이엔 채무관계도 있었다. 하지만 피로 범벅이 된 은애의 옷과 달리 그녀 어미의 옷에선 많은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목격자들에 따르면 노파를 살해한 은애는 추문을 퍼뜨리는 데에 공모한 노파 시댁 쪽 소년 최정련(崔正連) 집을 향해 곧장 달려가고 있었다고 했다. 이 두 번째 살인을 중간에 막은 인물이 바로 은애 어미였다. 틀림없이 공범이 있을 것으로 여긴 현감이 은애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지만 그녀는 자복하지 않았고 별다른 추가 증거물도 찾을 수 없었다. 

공범이 없다고 확신한 현감은 은애를 동정해 관찰사 윤행원(尹行元)에게 사건을 보고하며 사실을 다소 미화했다. 윤행원도 공범을 의심해 아홉 차례나 추가 신문을 진행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단독 범행으로 결론을 낸 그는 즉시 은애를 처형해야 했지만 망설였다.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매력이 있었고 사건은 윤상(倫常)을 지키기 위해 감행한 절개 있는 행동이란 명분도 갖추고 있었다. 처형은 이듬해로 미뤄졌다. 

이듬해인 1790년 경술년, 원자가 태어나는 경사가 있자 특사 대상 사형수 명단을 올리라는 어명이 내려왔다. 그사이 바뀐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은 김은애 사건을 더욱 아름답게 포장해 조정에 올렸고, 6월 내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옥안(獄案)을 심리하던 왕에게 이 사건이 눈에 뜨이는 순간 잔인한 살인은 대단한 절행으로 뒤바뀌어 칭송되기에 이르렀다. 왕은 은애를 방면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 일을 미담으로 기록해 삼남 지역 방방곡곡에 알리라고 명했다. 검서관 이덕무와 왕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수사관 백동수

규장각의 복원된 검서청. 오른쪽 난간이 설치된 누마루가 동이루다. [윤채근 제공]

규장각의 복원된 검서청. 오른쪽 난간이 설치된 누마루가 동이루다. [윤채근 제공]

장흥방 집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이덕무를 본 백동수는 반색하며 주안상을 준비했다. 주당인 두 사람은 연거푸 잔을 비워댔다. 음률과 의학에 두루 밝은 백동수는 조선 최고의 책벌레 이덕무에게 썩 잘 어울리는 처남이었고, 같은 서자로서 젊은 날의 지독한 가난을 함께 견딘 동지이기도 했다. 술기운이 돈 백동수가 말했다. 

“김은애 말이요. 잘 살고 있었소. 남편과 행복해 보이더란 말이지.” 

팔짱을 낀 채 남산을 바라보던 이덕무가 웃으며 물었다. 

“그 남편, 김양준(金養俊)이란 자는 만나보지 못했다고?” 

고개를 끄덕인 백동수가 씁쓸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그러기 직전 놈들이 들이닥쳤으니까. 객점 마당에서 세 녀석과 칼을 섞었는데, 아까 말했다시피 내 조금 방심했었지. 팔뚝을 베여 칼을 놓쳤는데도 그냥 조용히 사라집디다. 떠나라는 경고였던 거지. 주상이 왜 그런 것 같소?” 

이덕무가 한 잔 더 들이켰다. 그가 보기에 범인은 김양준이었다. 칼의 달인 백동수에 따르면 범인은 반드시 한 명이어야 했고 힘이 강해야만 했다. 안 노파는 늙었지만 완력이 은애보다 두 배는 셌다. 다양한 저항흔을 고려할 때 잠들었다 당한 건 결코 아니었고 심한 격투를 벌였음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시신에 난 깊은 상처는 남성의 힘으로도 벅찬 것이었다. 

“처남 말이 맞았던 거야. 김양준이 아내 옷을 입고 노파를 살해한 거지. 그리고 서로 옷을 갈아입고 연극을 한판 벌인 거네. 영리한 자들이야.” 

이덕무가 말을 마칠 때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곁말 한 마리를 더 몰고 나타난 자는 후배 검서관인 박제가(朴齊家)였다. 이덕무는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청나라에서 돌아왔단 얘긴 들었네, 박 검서. 원임(原任) 어른께서도 무탈하신가?” 

원임이란 왕을 도와 규장각을 설계하고 창설했으며 오랫동안 직제학으로서 조직을 이끌던 서호수(徐浩修)를 지칭했다. 규장각을 상징하던 서호수에게 왕은 원임직제학(原任直提學)을 제수해 업적을 치하했다. 소론이던 서호수는 노론으로부터 왕을 보위하는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지만 서로 협력해야 했던 남인 채제공과는 알력을 빚고 말았다. 덕분에 정계를 떠나 있던 그를 다시 불러들인 왕은 청 황제(건륭제)의 팔순 생일을 축하하는 만수절(萬壽節) 사은부사(謝恩副使)로 파견했다. 박제가는 금년 5월에 출발한 이 사행단의 수행원이었다.
 
6개월여의 여정을 마치고 막 귀국한 사행단은 왕에게 복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터였다. 다급한 표정의 박제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말했다. 

“어서 규장각으로 갑시다. 원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놀라는 이덕무를 말에 태운 박제가가 앞장서 말을 몰며 이덕무를 돌아보고 외쳤다. 

“형님도 참 고집이 심하십니다. 몇 개월을 못 참고 일을 벌이시오?” 

박제가가 한 말의 속뜻을 미처 다 헤아리기도 전에 두 사람은 창덕궁에 당도했다. 이덕무는 착잡했다. 규장각 뜰 분위기가 이번엔 이상하게 을씨년스러웠다. 모든 게 불안하게 느껴졌다. 집무실 문을 열기 전 술기운을 떨쳐낼 겸 규장각 뒤편 향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크게 들이켰다.

혜경궁의 은밀한 초대

정조가 1795년 8일간에 걸쳐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거행한 주요 행사를 병풍에 그린 ‘화성능행도병’ 8폭 중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폭에 담은 ‘봉수당 진찬연’.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당으로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정조가 1795년 8일간에 걸쳐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거행한 주요 행사를 병풍에 그린 ‘화성능행도병’ 8폭 중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폭에 담은 ‘봉수당 진찬연’.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당으로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서호수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역학과 천문지리학은 물론 각종 측량기술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계산가였고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런 서호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오랜 사행으로 수척해진 얼굴엔 병색도 완연했다. 

“이 검서. 번암공을 만났다지?” 

서호수의 목소리는 갈라지기까지 했다. 번암은 채제공의 호였다. 

“네. 원임 어른. 김은애 사건의 전모를 알아야겠기에 문의드리고 왔습니다.” 

잠시 눈을 감았던 서호수가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분노한 그가 야무지게 한 마디씩 끊어가며 말했다. 

“우리 존재 목적이 뭔가? 주상을 수호해 태평성대를 여는 걸세. 누가 우리 편이고 적인지는 알아야 않겠나? 번암이 어떤 자인가? 탕평의 명분으로 저 자리에 앉아 있지만 두루뭉술한 인간일세. 믿을 수 없는 자야.” 

이덕무는 등에 소름이 돋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머릿속은 하얘져 어떤 생각도 해낼 수 없었다. 서호수는 자신이 부재한 동안 벌어진 김은애 사건 처결 과정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채제공이 말한 역린이란 단어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바깥 뜨락에서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호수가 문을 열자 가마 두 대가 대기해 있었다. 앞쪽 가마에 먼저 올라탄 서호수가 두 검서관에게 뒤쪽 가마에 타라고 손짓했다. 

가마는 검서청 뒤 운한문(雲漢門)을 지나 봉모당(奉謨堂)을 거쳐 책고(冊庫) 옆 은행나무 숲을 통과했다. 신료는 지나갈 수 없는 후원 비밀통로로 우회해 창경궁 궐역에 들어선 두 대의 가마는 자경전(慈慶殿) 앞에서 멈췄다. 왕의 모친 혜경궁 홍씨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가마 밖으로 나서던 이덕무는 마침내 근자에 벌어진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혜경궁 홍씨는 문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겨울누비옷 세 벌을 궁녀들을 통해 하사했다. 무한한 의미가 담긴 옷이었다. 옷을 받아 든 이덕무는 하례를 올리고 나서 불충을 용서해달라고 세 차례 외쳤다. 답은 없었지만 자경전의 모든 불빛이 꺼진 것으로 답이 돌아왔다. 알았으니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선물을 받아 든 세 사람은 다시 가마 안에 몸을 숨긴 채 규장각으로 은밀하게 이동했다. 가마 안에서 몸을 웅크린 이덕무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은혜를 저버리고 잠시나마 왕을 의심한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 탓이었다. 그는 왕이 폭군 기질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하고 넘겨짚었다. 의심이야말로 그의 삶을 지탱해온 힘이었다. 한데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신과 남편의 명예를 위해 살인마저 감행한 김은애는 남편인 사도세자를 잃고 아들인 금상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모든 모욕을 겪어낸 혜경궁 홍씨의 다른 모습이었다. 따라서 김은애의 석방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도 오랜 세월 숨죽이며 은인자중해야 했던 혜경궁 홍씨가 이제 세상 밖으로 당당히 나설 것임을 예고하는 왕의 전교이자 선포였던 셈이다.

※김은애 사건 관련 서술은 사실에 입각해 있다. 1789년 전남 강진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1790년 원자 탄생을 기념해 조정에서 시행하려던 특별사면의 심리 대상에 포함됐다. 원자는 훗날 순조가 된다. 침식을 잊고 사건들을 심리한 정조는 김은애에게 각별히 주목해 사면 조치하고 검서관 이덕무에게 이를 기록하도록 하교했다. 이 기록이 이덕무 문집에 ‘은애전’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잔혹한 살인범이었던 김은애에 대한 사면은 영의정 채제공을 필두로 많은 반대를 낳았다. 남편 김양준을 진범으로 확신한 백동수가 강진으로 탐문을 나가는 장면은 여기에 착안한 허구다. 그러나 그가 이덕무와 더불어 1790년 ‘무예도보통지’(10월 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 결정)를 간행한 것과 정조의 총신이던 서호수와 채제공이 불화를 빚은 것, 그리고 서호수·박제가·유득공이 1790년 5~12월 만수절 사행을 다녀온 것은 사실이다. 다만 ‘무예도보통지’는 창경궁 앞 어영청 인근에 있던 장용영 내영에서 주로 저술돼 6월에 편찬 완료됐으며 ‘은애전’ 역시 같은 6월에 탈고됐다. 이덕무가 자경전의 초대를 받는 마지막 장면은 허구지만 정조는 이 시점부터 혜경궁 홍씨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계획을 빈틈없이 진행해 1795년 수원 화성능행에서 어마어마한 회갑연을 개최한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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