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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미술관

앤디 워홀 부른 ‘북유럽 체육관’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앤디 워홀 부른 ‘북유럽 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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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모를 구두 작품

메레 오펜하이머,‘My Nurse’, 1936

메레 오펜하이머,‘My Nurse’, 1936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을 거닐다 보면 당혹스러운 작품 하나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는 이 미술관이 첨단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성의 하이힐 한 켤레를 끈으로 꼭꼭 묶어서 은쟁반 위에 얹어놓은 작품. 오펜하이머(Meret Oppenheimer·1913~1985)의 ‘나의 간호사(My Nurse)’다. 구두 바닥이 많이 닳은 것에서 짐작하건대 실제 신고 다니던 구두임에 틀림없다. 1913년에 마르셀 뒤샹이 남성 변기통을 뜯어 작품이라며 전시한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은 1936년에 처음 만들어졌으니, 뒤샹의 변기보다 23년 뒤에 나왔다. 여기 전시된 것은 이 미술관이 그녀의 첫 회고전을 개최한 1967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독일 태생의 스위스 여성작가다. 11세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아버지가 군의관으로 입대해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 외갓집으로 가서 자랐다. 스위스 시절부터 예술에 눈뜬 오펜하이머는 18세 때 프랑스 파리로 가서 예술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초현실주의운동의 일원이 되었고, 장 아르프(Hans Arp)와 알베트로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로부터 초현실주의 전시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후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어울리며 고유의 예술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1937년 스위스 바젤로 돌아와 돈을 벌 목적으로 수익사업에 참여했다가 예술 인생에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1954년까지 장기간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친구들과의 교류를 줄였고 작품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에 와서야 다시 활기 있게 작품 활동을 개시했고, 1960년대 들어서는 스위스 베른, 이탈리아 카로나, 프랑스 파리 등에 작업실을 두고 왕성하게 활동했다. 

첫 회고전은 1967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1970년대 들어서는 여권운동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는데, 스스로는 여권운동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1996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미국의 주요 미술관 중 처음으로 그녀의 전시회가 열렸다. 



‘나의 간호사’와 더불어 뉴욕 MoMA가 소장한 ‘오브제, 모피로 된 아침식사(Object, Fur Breakfast)’ 등이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찻잔에 모피를 입힌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이상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런 작품들이 앞으로 100년 후에도 명작으로 계속 인정받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이 이런 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은 이 미술관이 얼마나 첨단을 달리는지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스웨덴국립미술관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늘어나는 소장품을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새롭게 수집되는 동시대 작품은 전시할 공간도, 보관할 공간도 부족했다. 이에 1908년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이 소원은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40년 넘는 세월이 흐른 1950년, 스콜드(Otte Skold)가 국립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로 부임하면서 새 미술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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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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