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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예로부터 전해진 기이한 이야기

윤영손, 살아남지 못한 자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윤영손, 살아남지 못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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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기념관 소장 집현전 학사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사육신의 주축은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다. [세종대왕기념관 제공]

세종대왕기념관 소장 집현전 학사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사육신의 주축은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다. [세종대왕기념관 제공]

나의 이름은 윤영손(尹鈴孫), 단종의 이모부다. 운명의 날이었던 1456년 6월 1일 단종께선 창덕궁 동쪽 이궁(離宮)인 수강궁(壽康宮) 한 편에 거처하고 계셨다. 상왕의 처소라기엔 침소가 좁고 남루해 들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날 아침은 그렇지 않았다. 거사가 성공해 수양대군 일파를 제거한다면 치욕의 기억이 될 수강궁을 당장 헐어버릴 작정이었다. 거사만 성공한다면. 

상왕의 외삼촌이자 나의 처남인 호조참판 권자신(權自愼)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상왕과 처남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반정 계획을 아뢰고 승낙까지 얻어낸 모양이었다. 처남의 손엔 상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아침 햇살이 주렴 아래로 스며들 무렵 상왕께서 나지막이 흐느끼셨다. 골육끼리 상쟁해 육친을 주벌해야 하는 모진 숙명이 어린 상왕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처남에게 상왕 호위를 부탁하고 수강궁을 나올 무렵 봉보부인(奉保夫人·왕의 유모에게 내려진 종1품의 작호) 이씨가 앞을 막아섰다. 태어난 직후부터 상왕을 기른 이씨는 수강궁과 집현전 사이를 연통해온 상왕의 수족이자 반정 모의의 숨은 전략가였다. 수양에게 한명회가 있다면 상왕껜 봉보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목례하고 빠른 말투로 속삭였다. 

“형조정랑께서 꼭 알아두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의아해하는 내게 바싹 붙어선 그녀의 눈빛에서 비장한 슬픔이 전해졌다. 



“두 가지를 명심하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거사를 미뤄선 아니 됩니다. 미루자는 자가 배신자이니 그자를 먼저 베십시오. 또 하나. 혹 상황이 불리해지면 권 참판과 힘을 합쳐 상왕을 보위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궁궐 밖으로 모셔서 후사를 도모해야 합니다.” 

봉보부인의 간절한 눈빛을 뒤로하고 말에 오를 때 그녀가 한 마디 덧붙였다. 

“꿈이 불길해 걱정됩니다. 모든 일이 틀어진다면 저승에서 다시 뵙지요.” 

그녀의 이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반정이 실패할 수도 있겠다는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준비는 완벽했다. 그해 4월 20일 도착한 명의 사신 윤봉(尹鳳)은 방탕하고 어리석어 조선 정세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참람한 금상을 죽이고 옛 왕을 세운다 해서 조선 내정에 간여할 위인이 아니었다. 6월 1일은 바로 그 윤봉을 위로하기 위해 수양이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에서 연회를 베푸는 날이었다. 역적 수양 일파를 모조리 숙청하는 날이었다. 

창덕궁 대조전 앞뜰에 사열한 숙위군 숫자를 대충 파악한 나는 회랑을 따라 인정전 쪽 출입문으로 이동했다. 연회를 준비하는 궁액(宮掖·궁에 딸려 있는 하인)들이 어깨를 밀치며 지나쳤지만, 그들은 정랑 정도는 눈여겨보지도 않았다. 곧 고위 당상관 나으리들이 나타날 참이었다. 난 그곳에서 별운검(別雲劍)인 성승과 유응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 양옆에서 칼을 쥐고 호위하는 별운검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어 승정원의 까다로운 논의 과정을 거쳐 결정됐다. 좌부승지 성삼문이 이를 주도해 그의 부친인 성승과 반정 병력의 지휘자인 유응부가 최종 낙점됐다. 별운검이 정해지던 날 반정은 이미 반 이상 성공한 셈이었다.

1456년 6월 1일 창덕궁

수양이 당도해 윤봉과 함께 광연전 위층 누대인 징광루(澄光樓)에 올랐다. 한명회와 정인지가 이를 수행했고 아래층 행사 준비는 신숙주가 주관하고 있었다. 때마침 나의 직속 상관이던 형조참판 박팽년이 선정전 쪽에서 올라오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 말을 걸려 했지만 박팽년은 쪽지 하나를 넘겨준 채 다시 숭문당 쪽으로 우회해 쏜살같이 창덕궁을 벗어났다. 뭔가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쪽지에는 ‘행수(行首)’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연회 좌석이 정돈되고 상왕 부부께서 납시어 광연전에 좌정하실 때까지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거사는 중지돼선 안 됐다. 나는 그 가능성을 닫아걸고 성승과 유응부가 당도하길 간절히 기다렸지만 별운검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징광루에 있던 수양과 윤봉이 내려와 상왕께 인사를 올렸다. 풍악 소리가 울려 퍼지며 재인(才人)들의 식전 공연이 시작됐고, 마침내 상황은 자명해졌다. 운검을 폐했던 것이다. 격동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수양의 얼굴을 오래 관찰했으나 다행히 반정의 낌새를 눈치챈 표정은 아니었다. 

창덕궁을 벗어난 나는 경복궁을 향해 말을 몰았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북쪽 신무문을 통해 입궐한 나는 경회루 서쪽을 크게 돌아 집현전에 접근했다. 집현전은 텅 비어 있었다. 맞은편 승정원을 향해 내달리던 나는 익숙한 나인 한 명과 마주쳤다. 봉보부인 이씨의 몸종 아가지(阿加之)였다. 반가운 마음에 아가지의 어깨를 움켜쥐고 무어라 외쳤는데 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아가지가 대답한 말은 지금도 또렷이 떠오른다. 

“쇤네 수강궁으로 빨리 돌아가야 해요. 주상께서 오늘 아침 운검을 파하셨다나 봐요.” 

“누가 그러더냐?” 

“행수 어른이요. 좀 전에 광연전으로 떠나시며 저보고 봉보부인께 알리라 하셔서.” 

수강궁과 집현전을 오가며 전령 역할을 하던 아가지는 재빨리 궐내 각사 회랑 사이로 사라져갔다. 홀로 마주한 승정원은 기분 나쁜 고요 속에 괴괴했다.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집현전 북쪽으로 걸어 경회루를 마주하고 앉았다. 얼마만의 휴식이었던가? 경회루 연못물이 연둣빛으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외로웠고 또한 참담했다.

신숙주를 죽여라

집현전 학사의 절개를 상징하는 성삼문의 필적. [윤채근 제공]

집현전 학사의 절개를 상징하는 성삼문의 필적. [윤채근 제공]

‘행수’는 집현전 부제학을 일컫는 은어였다. 집현전 제학 이상의 벼슬은 모두 명예직이어서 실질적인 조직의 수장은 늘 부제학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부제학을 행수라 부르며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었다. 1456년의 행수는 이개였지만 당시 행수라 하면 집현전의 반정 계획을 주도하고 있던 1454년의 부제학 성삼문을 지칭했다. 박팽년이 건넨 쪽지에 쓰여 있던 ‘행수’도 성삼문을 의미했음에 틀림없었다. 

눈을 감은 나는 직전에 집현전에서 벌어졌을 논의를 상상해보았다. 1453년 부제학을 지낸 박팽년은 비록 선배 행수였으나 맹목적으로 성삼문을 따르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성삼문이 거사 여부를 결정했을 것이다. 성삼문은 과격했지만, 완벽주의자여서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사를 중지시켰을 것이다. 그럼 유응부는? 무장인 유응부는 운검과 관계없이 당일로 끝장을 보자고 주장했을 자였다. 

그런데 박팽년은 왜 그 와중에 나를 찾아와 쪽지를 건넨 것일까? 이젠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그날 반정에 참여한 나와 같은 무사들은 각각 자신이 살해할 인물을 할당받았다. 내가 죽일 인물은 신숙주였다. 집현전 내부 사정에 밝고 한명회만큼이나 눈치 빠른 신숙주는 운검들이 수양의 목을 베기 전이라도 기회만 오면 즉시 제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성미 급한 내가 혹시라도 신숙주를 먼저 벨까 염려한 성삼문이 형조의 직속 상관인 박팽년을 서둘러 파견했을 게다. 행수인 자신이 광연전에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당연히 그게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절호의 기회

집현전 행수 일행이 방금 전 통과했을 경복궁 서문을 나와 창덕궁을 향해 걸으며 나는 봉보부인이 아침에 한 말을 떠올렸다. 거사를 중지시키는 자가 배신자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결정을 보고 실패하면 상왕을 보위한다. 봉보부인이라면 결코 거사를 중지하지 않았을 것이고 누군가 중지하자 했다면 그자를 먼저 죽였을 터였다. 다시 창덕궁에 들어서서 인정전을 지나칠 무렵 나는 갑자기 무섭고도 터무니없는 어떤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건 우연히 마주친 내금위 조방림(趙邦霖)의 눈빛 때문이었다. 

조방림이 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웃었는데 그건 죄수를 처형하기 직전의 낯빛이었다. 처형자들은 곧 목이 떨어질 상대방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죄수들은 물건이나 짐승인 채 죽음을 맞는다. 조방림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계획이 누설됐고 연회 자체가 수양이 조작한 한판의 연극일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급히 광연전 앞뜰에 들어선 나는 배신자가 누굴까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당상관들 좌석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박팽년을 발견했다.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수양의 우측을 찬찬히 살피니 우승지 한명회와 우부승지 조석문(曺錫文)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수양의 우익들로 채워진 해당 줄 끝에 좌부승지 성삼문이 보였다. 

성삼문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절망과 혼란 속에 현기증을 느끼던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유응부였다. 그가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우리는 대조전 동쪽 회랑 모퉁이의 변방(便房·뒷간) 근처로 이동했다. 유응부의 음성은 흥분과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아침나절 갑자기 운검이 폐지되고 성 승지가 거사를 중지시켰소. 뭔가 일이 꼬이고 있어. 아주 불길하오.” 

성삼문의 성정은 나도 아는 바였다. 내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변절자가 있는지, 그게 누구인지, 그자를 당장 어찌해야 할지. 질문들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 할 찰라, 하늘의 뜻이었는지 하필 그 순간 변방을 향해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응부가 재빨리 회랑 반대쪽 문으로 빠져나갈 동안 나는 변방으로 들어가 용변 보는 시늉을 했다. 뒤미처 변방 안으로 따라 들어선 자는 신숙주였다. 전날부터 퇴청하지 못하고 연회 준비를 주관한 그가 짬을 내 머리를 감기 위해 들른 것이다.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를 죽일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성삼문은 왜?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성삼문의 절친이었지만 세조 편에 섰던 신숙주의 전신도. [윤채근 제공]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성삼문의 절친이었지만 세조 편에 섰던 신숙주의 전신도. [윤채근 제공]

관복을 벗은 신숙주가 천천히 상투를 푸는 사이 나는 가만히 허리춤의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다시 생각해도 그건 절묘한 우연이었다. 오래도록 꿈꿔오던 복수를 완벽히 실행할 순간이었다. 물을 받은 나무통에 머리를 숙인 상대 등 쪽으로 조용히 다가가 뽀얀 목살을 바라봤다. 검을 운행해 역적을 참하려 할 순간 변방 문이 벌컥 열렸다. 성삼문이었다. 그는 눈짓으로 나를 제지하며 신숙주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대제학께서 목발(沐髮)하고 계셨군? 윤 정랑 찾으러 왔소. 오호라, 여기 계시군.” 

당황한 나는 신속히 칼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머리를 옆으로 틀어 성삼문을 확인한 신숙주가 다시 머리에 물을 끼얹으며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대제학 타령인가? 자네는 자네 볼일 보게. 난 씻겠네.” 

성삼문은 나를 데리고 회랑 밖으로 나와 광연전 건너편 연못가로 움직였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유 절제사와 변방으로 가시더군. 신숙주도 이리로 움직이기에 불안해서 따라와 봤소.” 

나는 말 없이 그를 노려봤다. 거사 모임이 있을 때마다 신숙주와는 친구 사이지만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큰 소리치던 성삼문이었다. 박팽년이 건넨 쪽지 생각이 났고 혹시 성삼문이야말로 변절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칼집을 쥐고 물었다. 

“운검을 파했을 땐 이유가 있을 거요. 누가 고변이라도 했다면 어쩌오?” 

고개를 저은 성삼문이 칼집을 쥔 내 손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고변은 없을 거요. 나를 믿고 잠시 거사를 미룹시다. 다 생각이 있으니.” 

그때 성삼문을 베고 변방으로 뛰어들어가 신숙주를 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그의 말과 달리 고변은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있었다. 거사에 참여했던 성균관 사예(司藝) 김질(金礩)과 그 장인인 우찬성 정창손(鄭昌孫)이 고변자였다. 이후 벌어진 일은 다들 알 테니 더 거론할 필요 없으려니와 나 역시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다. 아직도 원통하고 후회스러운 건 봉보부인과 한 다짐을 지키지 못한 점이다. 그 생각을 하면 여전히 피눈물을 멈출 수 없다. 

반정에 가담한 주모자들은 의금부 심문을 거쳐 경복궁 사정전 뜰에서 참혹한 추국을 받았다. 다들 꿋꿋이 버텼지만, 그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저마다의 관점으로 역모를 실토했다. 나 역시 모진 국문에 여러 번 혼절했다. 수양은 두 번 친국을 하며 호랑이처럼 발광했고 애꿎은 선비들이 줄줄이 연좌돼 처형됐다. 집현전이 텅 비어버릴 정도였다. 6월 7일이 되자 성삼문은 마침내 죄를 자복하며 상왕까지 끌어들였다. 추국청은 즉시 해체됐고 그날 밤 평화가 찾아왔다. 하늘의 달빛이 참 밝기도 했다. 

반정 주모자들은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채 다음 날 아침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차례로 처형됐다. 6월 8일이었고 사지를 찢어 죽이는 환열형(轘裂刑)이었다. 성삼문은 왜 거사를 중지시켰을까? 그가 변절한 게 아니라면 수양은 왜 운검을 파했을까? 박팽년의 쪽지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이런 의문에 휩싸여 이승을 떠돈다. 만약 반정의 조짐이 성삼문으로부터 처음 새나갔다면 그 통로는 신숙주였을 것이다. 운검을 중지하라 주청한 인물이 바로 신숙주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삼문이 신숙주의 꾀에 넘어갔던 걸까? 6월 1일보다 더 완벽하고 깔끔하게 반정을 성공시킬 수 있는 다른 기회를 신숙주가 넌지시 미끼로 던졌던 건 아닐까? 

수강궁에 진입하기 직전 체포되기까지 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살아남아 상왕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자 처절하게 싸웠다. 내금위 조방림과 대결하다 왼팔을 잃었고 담장을 넘다 등에 두 발의 화살까지 맞았다. 그때 죽었어야 했다. 그때 다 끝내고 소멸했어야 했다. 이 원한의 여정은 언제 끝나려는가? 그대들은 못 보았는가? 그대들이 서울시 청사라 부르는 건물 지하 유리바닥 아래 남아 있는 우리의 혈흔을. 군기감 유적이라 전시된 지면 아래 아직 잠들지 못하고 떠도는 나의 참혹한 영혼을.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1456년 병자년의 반정 모의 정황은 모두 사실에 입각해 있다. 사건의 진행 과정은 상상력을 가미하되 기본적으로 실록의 기사들을 따랐으며 창덕궁 변방에서 신숙주를 살해하려 한 윤영손을 성삼문이 제지하는 장면은 이 사건에 대한 재야 쪽 기록인 남효온의 ‘육신전(六臣傳)’에 근거했다. 운검과 무관하게 당일로 일을 벌이자던 유응부를 만류한 성삼문은 이듬해 봄 왕의 권농행사로 거사 시점을 미뤘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결정적 패착이 됐다. 단종이 머물던 수강궁은 훗날 확장되어 현재의 창경궁이 되었으며 거사 현장이 될 뻔한 창덕궁 광연전은 현재 경훈각이라는 명칭으로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본래 이 층이었고 위층은 본문에서처럼 징광루로 불렸다. 군기감은 현재의 프레스센터에서 서울시 청사에 이르는 주변에 있었고 청사 건축 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이 청사 지하층에 전시돼 있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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