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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예로부터 전해진 기이한 이야기

불과 모래의 기억

  • | 윤채근 단국대 교수

불과 모래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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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가 공저한 ‘쿠쉬나메’에 실린 왕 즉위식 삽화. 이란 골레스탄 왕궁박물관에 소장된 것이다. [사진제공 청아출판사]

이희수,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가 공저한 ‘쿠쉬나메’에 실린 왕 즉위식 삽화. 이란 골레스탄 왕궁박물관에 소장된 것이다. [사진제공 청아출판사]

651년 가을밤 샤아드 앗 살림이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피루즈를 만난 건 기적이었다. 이제 그 기적이 낳은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할 참이다. 당시 부왕 야즈데게르드 3세가 이슬람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다 끝내 살해됐다는 비보를 접한 피루즈는 망명 왕자 신분을 더는 유지할 수 없었다. 당 황실은 그를 버렸다. 떠돌이 유민 집단의 일개 족장으로 전락한 왕자는 자신을 피신시키며 부왕이 했던 당부의 말을 떠올렸다. 

“피루즈야. 성스러운 불꽃처럼 살아남으라. 해가 떠오르는 동쪽에서 위대한 제국을 부활시킬 힘을 얻어 반드시 돌아오라.” 

장안 서문 이방인 구역에서 눈물로 날을 지새우던 왕자 앞에 홀연 샤아드 앗 살림이 나타났을 때 왕자는 상대가 이슬람 정복자들이 파견한 암살자가 아닐까 의심했다. 왕자의 의심을 풀기 위해 샤아드는 아주 길고 긴 자신의 모험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왕자님. 저 역시 페르시아 출신으로서 차라투스트라를 믿는 자입니다. 성스러운 사원으로 가서 세상의 동쪽 끝 바실라 왕국에서 겪은 일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두 사람은 페르시아 골목 맞은편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배화교 사원 안으로 들어섰다. 제단 가운데 놓인 둥근 향로 속에서 타오르던 지혜의 불꽃이 샤아드의 주름진 얼굴을 환히 비추자 왕자는 상대가 생각보다 늙은 자임을 깨달았다. 이윽고 기도자들을 위한 양탄자에 꿇어앉아 진실의 서약을 하고 샤아드가 해준 이야기는 아름답고도 황홀한 것이었다. 



587년 유서 깊은 도시 수사에서 태어난 샤아드는 페르시아 국교인 배화교의 독실한 신자였다. 그는 사원에서 불을 다루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년이 된 샤아드는 입안에 불을 머금었다 뿜어내는 재주로 수사 제일의 성전에 고용됐고 사람들은 그를 불의 사람이라 불렀다. 꽤 큰돈을 벌게 된 불의 사람은 악의 감옥인 육체를 벗어나 불꽃처럼 순수한 지혜에 도달한 성자 차라투스트라를 따라 영혼의 순례를 결심했다.

영혼의 순례

샤아드는 정처 없이 사막을 걸으며 하늘의 별에 진리를 보여달라고 빌었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유성이 갈 곳을 알려주었다. 무작정 서쪽을 향해 걷던 그는 비잔티움 제국 코앞에 있던 접경 도시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 무역의 요충지였던 안티오키아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의 소굴로 유명했지만 페르시아 배화교도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기독교와 배화교 사이의 차이를 찾지 못해 기꺼이 기독교도가 된 샤아드는 불붙은 곤봉 다섯 개를 동시에 돌리는 기술로 유명해졌다. 

동로마인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이 깨진 건 605년이었다.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는 지중해 동남 해안을 수중에 넣은 기세를 몰아 보스포루스 해협의 칼케돈까지 진격했고 이에 격분한 비잔티움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안티오키아의 페르시아인들을 모조리 추방해버렸다. 피난민 대열에 뒤섞여 아라비아 사막을 전전하던 샤아드는 약무아탄이라는 소그드 출신 상인과 사귀는 행운을 잡았다. 약무아탄은 중국에서 호상(胡商)이라 불리던 네스토리우스파 동방무역상이었다. 그가 속삭였다. 

“형제 샤아드여. 장사꾼에겐 못 믿을 종교가 없지. 우리 소그드 사람들은 본래 불교도라네.” 

소그드 상인들을 따라 그들의 고향인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에 도착할 즈음 샤아드는 세 개의 종교를 동시에 믿는 최초의 페르시아인이 되었다. 그는 중앙아시아 네스토리우스파 교도가 하듯 삭발했지만 페르시아 전통을 지키기 위해 수염은 길렀고 불교도들처럼 채식은 하되 유목민들이 권하는 양고기는 먹었다. 

615년 여름 그는 페르시아에서 친 혹은 히타이라 부르던 중국을 처음 방문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이라는 신흥 왕조가 들어서는 격변기에 놓여 있던 그곳에서 샤아드는 티베트와 장안을 오가며 차와 소금을 팔았다. 다시 큰돈을 거머쥐게 된 그는 자신이 처음 순례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없는 무력감에 빠진 샤아드는 하늘의 별에 또 한 번 운명을 맡겨보기로 했다. 이번엔 유성이 동쪽으로 떨어졌다.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유랑하던 샤아드는 대륙이 끝나는 낯선 항구에서 신라라는 나라의 상인들과 조우했다. 페르시아인들처럼 머리에 멋진 깃털 장식을 한 신라인들은 유창한 중국어로 자신들의 아름다운 도시에 대해 속삭였다. 설렘으로 가슴이 부푼 샤아드는 지혜를 찾는 자신의 여정이 마침내 끝나간다고 확신했다. 630년 봄, 그는 페르시아인들이 바실라 왕국이라 부르던 꿈의 땅 신라의 왕경에 발을 디뎠다.

신라 공주와의 만남

경북 경주 첨성대. [사진제공 문화재청]

경북 경주 첨성대. [사진제공 문화재청]

모든 재산을 자신이 번 땅에 나눠주고 온 샤아드는 도로 무일푼 신세였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불의 사람 샤아드는 온몸에 불을 붙이는 묘기로 서라벌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불을 마음대로 다루는 서역 승려에 관한 소문은 돌고 돌아 반월이란 이름의 성에 살던 공주에게까지 흘러들어갔다. 공주의 이름은 덕만(德曼). 두 사람은 늦여름 초승달 뜬 밤에 동궁의 월지(月池)라는 연못가에서 처음 만났다. 놀랍게도 공주가 소그드어로 물었다. 

“나의 외할아버지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께선 소그드 분이셨어요. 덕분에 난 그곳의 말을 할 줄 알지만 이렇게 써보긴 처음이랍니다.” 

별이 맺어준 인연에 숨이 멎은 샤아드는 꽃향기에 취한 나비가 공중을 부유하듯 연못가를 따라 춤추며 공주의 아름다움과 덕성을 찬미했다. 중년에 접어든 공주에겐 남편이 있었지만 둘의 사랑을 방해할 순 없었다. 밀회를 나누던 어느 날 공주가 말했다. 

“불과 모래의 땅에서 온 사랑이시여. 그대를 왕실에 소개해야겠어요.” 

샤아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지혜의 문을 열어주신 은인이시여. 그대 덕분에 제 가슴속에선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나이다. 하지만 미천한 저는 왕자가 아닙니다.” 

슬픔에 잠긴 공주는 탄식했고 그녀를 달래려 샤아드는 불붙은 곤봉을 돌렸다. 타오르는 곤봉들이 차례로 하늘로 솟구쳐 원을 이뤘고 불의 고리 사이로 달이 빛났다. 공주는 웃었다. 

“우주에 사랑의 불꽃을 옮기시는 분이시여. 저는 곧 이 나라의 여왕이 되어야 해요.”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불의 사람으로 살겠나이다.” 

“당신을 계속 곁에 둘 방법을 찾아보겠어요.” 

벌꿀처럼 달콤했던 그들의 사랑은 덕만 공주가 여왕이 된 632년 중지됐다. 반란 세력과 투쟁해야 했던 여왕은 635년이 되어서야 당나라로부터 신라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사이 서라벌의 불의 사람으로 살던 샤아드는 지귀(志鬼)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정식 신라왕이 된 여왕은 그를 위해 영묘사(靈妙寺)를 짓게 하고 절이 완공되자 수시로 지귀를 만나 불이 만들어준 인연을 이어갔다. 배화교의 악신 아리만의 암흑물질이 아니라면 세상 그 무엇도 두 사람의 환희의 불꽃을 꺼지게 할 수 없었다. 

독실한 불교도이자 배화교도였던 여왕은 지귀와의 사랑을 영원히 기념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영묘사와 더불어 반월성 북쪽에 작은 배화교 제단도 짓도록 명했다. 별자리 관측에 뛰어난 페르시아 출신 샤아드가 배화교 명절인 동지의 일출선을 따라 제단 위치를 잡았기 때문에 배화교 제단과 여왕이 기거하던 반월성 그리고 훗날 여왕이 묻힐 무덤은 동지에 떠오르는 태양의 각도에 맞춰 배열되었다. 

“첨성대라 부르겠어요, 이 제단의 이름.” 

완성된 제단을 바라보며 여왕이 속삭였다. 여왕을 시종하던 지귀 샤아드가 대답했다. 

“별들은 하늘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입니다. 이 제단은 지상의 불꽃으로 영원히 하늘을 비추며 저 우주에 있을 누군가를 초대할 겁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지혜로운 영혼을 부르게 될 겁니다.” 

첨성대 위로 빛나던 별들은 평소보다 더 밝게 빛나며 두 연인의 행복을 기원했건만 인간의 병은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조차 어쩌지 못해 여왕은 647년 반월성 침전에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시호는 배화교의 종지인 삼선(三善), 즉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을 의미하는 ‘선덕(善德)’으로 정해졌다. 연인을 잃은 샤아드는 자신이 기거하던 영묘사에서 선덕여왕의 영혼을 위해 마지막 불꽃 공연을 한 뒤 조용히 바실라 왕국을 떠났다. 이 신비로운 페르시아인에 대한 기억은 서라벌 사람들에게 전해져 여왕을 사랑했던 불의 신 지귀 이야기가 되었다. 

샤아드의 말이 여기에서 멈추자 감동한 피루즈 왕자가 물었다. 

“이제 그대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 

여왕에 대한 추억으로 눈물을 글썽이던 샤아드가 대답했다. 

“고향인 수사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마침 왕자님께서 이슬람 침략자들에게 쫓겨 장안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찾아뵌 것입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

넓은 세상을 떠돌다 장안이라는 꼭짓점에서 기적적으로 해후한 두 사람은 밤새워 대화를 이어갔다. 그날 밤 피루즈 왕자의 운명이 정해졌다. 며칠 뒤 왕자는 페르시아 유민들을 이끌고 동방의 바실라 왕국으로 떠나며 샤아드의 앞날을 축복했다. 

“지혜롭지만 사랑을 잃은 샤아드 앗 살림. 나는 바실라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 언젠가 크테시폰의 궁궐로 돌아가 아버님의 것들을 되찾을 것이다. 그때 살아 있어 다오.”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이게 전부냐고? 물론 이게 끝은 아니다. 늙었지만 여전히 용감했던 샤아드는 불굴의 의지와 소그드의 옛 친구들 도움으로 고향 수사에 도착했다. 그는 폐허가 된 성전을 다시 짓고 그곳에서 바실라 이야기를 하며 102세까지 살았다. 그는 끝내 이슬람교도가 되진 못했지만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았으며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나와 관계된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영어로 하킴 이란샨 아불 카이라 발음되는 12세기 이란의 위대한 필사자가 고대 구전 서사시를 기록하며 페르시아 왕자 아브틴과 신라 공주 프라랑의 사랑 이야기를 남겼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서사시 모음집의 제목은 ‘쿠쉬나메’로 현재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진 경위를 설명하겠다. 

1997년 겨울 나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낯선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자랄 마티니라는 이란의 학자였는데 하산 자무드라는 페르시아 고대종교 연구자를 대동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매우 드물게 이란 고대문학을 전공한 나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자랄과 하산은 우리 집에 머물며 대영박물관 컬렉션 사이에서 발견한 놀라운 페르시아 문학작품에 대해 얘기했고 내 운명이 그 순간 정해졌다. 

7세기에 나라를 잃은 페르시아 왕자가 바실라로 불린 신라에 망명해 그곳의 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둘 사이에 태어난 혼혈 왕자 페레이둔이 페르시아로 돌아가 왕국을 되찾는다는 이야기는 나의 혼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연구년에서 복귀해 서울로 돌아온 나는 경주를 오가며 페르시아 문화의 흔적들을 뒤졌다. 그리고 1998년 자무드 박사가 한국을 방문해 테헤란의 자랄 교수가 현대 이란어로 옮겨 출간한 ‘쿠쉬나메’를 내게 선물했다. 

그런데 자무드 박사는 공인되지 않은 ‘쿠쉬나메’의 외전 한 권을 더 보여줬다. 제목도 없는 필사본은 이란의 배화교도 사이에 전승된 한 불의 명인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렇다. 바로 샤아드 앗 살림이라는 수사의 배화교도가 102세로 영면하기 전까지 쉬지 않고 말한 바실라 공주와의 사랑 얘기였다. 여러 판본 중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책을 내게 보내 신라와의 관계 진위를 물은 인물은 자랄 마티니였다. 

나와 자무드는 끈질기게 책을 검토해 샤아드 앗 살림이 실존인물이라면 신라 진평왕 때 울산을 통해 경주에 입국한 페르시아 상인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쿠쉬나메’의 아브틴 왕자의 모델이 된 인물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아니라 샤아드여야 했다. 놀라운 발견에 자무드와 난 서로를 얼싸안았다.

황금보검의 비밀

경북 경주 괘릉에 있는 페르시아 무인 조각상. [사진제공 생각의나무]

경북 경주 괘릉에 있는 페르시아 무인 조각상. [사진제공 생각의나무]

자무드가 출국하기 전 우리는 경주로 향했다. 영락없는 페르시아 무인인 경주 괘릉의 석상 앞에서 자무드는 넋을 잃었다. 우리는 반월성을 거쳐 선덕여왕릉도 천천히 거닐었다. 샤아드가 여왕을 처음 만났을 동궁의 연못 월지에선 말할 수 없는 감개에 젖어들었다. 나는 그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물건이 있었다. 1973년 경주 계림로 건설 현장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이었다.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역사관에서 원형 복원 중이던 보물 제635호. 기묘하게도 635년은 영묘사와 첨성대가 건축된 해이기도 했다. 

황금보검을 마주한 자무드는 낮게 신음하며 속삭였다. 

“이건 배화교를 믿던 페르시아 왕실의 의장용 보검입니다. 세 개의 보석은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오랜 의문이 풀린 감흥에 눈을 감은 나는 천년이 넘도록 이어진 어떤 억센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자무드가 박물관 큐레이터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황금보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리는 오후 늦게 영묘사 터를 방문했지만 학교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무드의 요청으로 황금보검이 발굴된 장소를 찾아보았다. 대로가 된 발굴 추정지엔 아무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위로하듯 말했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무용극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무용극 '바실라'의 한 장면. [사진제공 정동극장]

“한국이 IMF 사태로 어지럽습니다. 나중엔 꼭 표지석이 들어설 겁니다.”

쓸쓸해진 우리는 마지막 방문 장소로 정해둔 첨성대를 향했다. 이야기를 따라 무질서하게 경주를 이동하며 여러 번 지나친 곳이었지만 자무드는 크게 감탄했다. 나는 여전히 황금보검을 생각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실 보검이 어쩌다 그 장소에 묻히게 됐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첨성대 앞에 나란히 서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자무드와 나는 그게 651년 장안에서 사라진 피루즈 왕자의 흔적일 거라고 짐작해보았다.

※ 페르시아와 신라 사이의 교류를 증명하는 유물은 경상도 각지에서 다수 출토되어왔다. 이 글은 대영박물관 컬렉션에서 발견된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와 경주에서 출토된 페르시아 황금보검을 소재로 여러 사실을 직조해 엮은 팩션이다. 장안으로 망명한 왕자 피루즈가 새로 들어선 이슬람 왕국과 제휴한 당에 의해 버림받은 건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진평왕 때 울산을 통해 페르시아와 아랍 상인들이 출입한 자취는 다양한 유물과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페르시아 아브틴 왕자와 신라 공주 프라랑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쿠쉬나메’를 출간한 자랄 마티니 교수는 실존 인물이지만 샤아드 앗 살림과 하산 자무드는 가공인물이다. 지귀 설화는 ‘삼국유사’ 등에 남아 있는데 영묘사를 태운 불귀신에서 선덕여왕을 사랑한 화마로 이미지가 변화했다. 첨성대, 반월성, 선덕여왕릉이 동지 일출선을 따라 건축된 건 확인된 사실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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