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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한국의 부장들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김건희 객원기자 | kkh4792@hanmail.net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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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부하 중심으로 돈다”


S그룹 L부장은 “팍팍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게 큰 부담”이라며 “여기(부장)까지 오는 것도 고단했는데, 지금은 더 고단하다”고 하소연했다. PR 담당인 그는 12월까지 평일 점심·저녁 약속이 잡혀 있고, 주말에는 접대성 골프·등산을 해야 한다.

“과거 부장들은 ‘팔로 미(Follow me,나를 따르라)’를 외치며 조직의 단합과 동일체 정신을 강조했지만 요즘 그렇게 했다가는 직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회식도 사전에 일정을 맞추고, 1차만 가볍게 하고 끝낸다. 가끔 ‘본전 생각’이 날 때도 있지만, 개인 중심의 사고를 하는 신입사원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휴가철이나 연휴 때면 외국에 나가고, 몇 년 되지 않은 차를 바꾸는 등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신입사원을 보면 ‘나도 확 질러볼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알 수 없는 미래를 떠올리곤 지갑을 닫는다. 우리는 현실적이지만 후배들은 즉흥적이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지를 수 있어 부럽기도 하다.”(D그룹 J부장)

“우리 회사는 매주 수요일을 ‘가정의 날’로 정해 5시 반 퇴근한다. 회사는 이날 회식이나 동호회 활동 등으로 직원들이 소통하는 시간을 갖거나 가족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라고 말하지만, 정작 부장들은 수요일이 부담이다. 가끔 모임을 하자고 해도 후배 직원들은 개인 약속, 운동, 학원 간다며 ‘쌩’하니 나간다.”(L그룹 S부장)

P그룹 C부장은 ‘후배 눈치 보기’는 참을 만하지만 ‘치고 올라오는’ 직원들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고 했다.

“선배 부장들은 스마트폰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몰라도 이미 배운 지식과 정보만 가지고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했지만 지금의 부장은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 회사는 분기별로 MBO(목표관리) 관련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신세대 직원들은 웹과 SNS를 활용해 ‘그럴싸한’ 보고서를 만드는 데 능숙하지만, 우리 세대는 그런 감이 떨어진다. 보고서 작성할 때마다 후배 직원들에게 ‘부탁’을 한다. 예전처럼 ‘계급’으로 눌러서 일을 시키면 금방 소문이 난다. 지금까지 집은 아버지를, 회사는 부장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막상 부장이 되고 보니 집은 자녀를, 회사는 부하직원을 중심으로 도는 것 같다.”



대기업 부장을 향한 고루한 시선도 불편하다. H그룹 S부장(1969년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세대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이어서 ‘575세대’(195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 대학을 다닌 50대) 부장과는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부장을 달고 나니 어디를 가든 ‘꼰대’ 취급을 받아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억울하다. 선배들에게 하소연하면 ‘그게 나이 먹었다는 증거’라고 하더라.”

“살림 팍팍하긴 마찬가지”


한국의 부장들은 우리 정치 지형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는 40대가 대부분이다. 대개 안정된 중산층인 만큼 그들의 정치 성향도 보수적일 거라고 여겨지지만, 의외로 진보로 기운 부장이 많았다.

“우리 또래 부장들은 심정적으로 진보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대기업에 다니는 생활인이기에 투표할 때 많은 것을 고려한다. 먹을거리를 만들어보겠다고 글로벌 기업 전쟁에 뛰어드는 우리를 정치권이 밀어주는커녕 반미(反美), 반세계화, 반자본주의에 앞장서는 듯한 행태를 보이면 야당에 투표하려다가 머뭇거린다. 그러니 대개 ‘이 사람만 안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네거티브 보팅’을 한다. 차선책을 택하는 거다.”(D그룹 J부장)

부장이 되면 살림이 좀 펼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히려 더 빠듯해졌다는 이도 많았다. 연봉(세전)이 1억여 원인 K부장의 자산은 약 4억5000만 원. 매달 650만 원의 급여를 손에 쥔다. 월급봉투가 얇진 않지만 매달 들어가는 돈이 적지 않다. 유치원생과 초등생 자녀의 학비(60만 원), 공과금을 포함한 생활비(250만 원), 전세대출상환금(180만 원), 부모님 용돈(60만 원)으로 550만 원이 들어간다. 여기에서 용돈과 개인연금을 들어내면 통장 잔고는 이내 바닥을 드러낸다.

“대기업 부장이라고 해도 팍팍하게 사는 건 비슷하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고정 지출을 빼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집을 사지 않고 자식들에게 유산도 안 물려주기로 합의했다. 노후를 희생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싶진 않다. 무리해서 빚을 내면 결국 아이들한테 짐이 된다. 능력이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 지원하겠지만 퇴직 후엔 아이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게 할 것이다.”

L부장도 “내 삶의 ‘평수’를 줄이면서까지 자식을 위해 살진 않겠다”고 했다. 그는 퇴직 후 퇴직금과 노후자금을 탈탈 털어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킨 선배들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한 선배는 집을 줄여서 아들 신혼집 전세자금을 마련해줬는데, 아들 내외가 명절 때 와서는 ‘집이 좁아 잘 곳이 마땅찮다’며 밥만 먹고 갔다며 씁쓸해했다.”

고참급 부장들은 다가올 ‘그날’을 생각해 보통 두 가지 길을 고민한다고 한다. 하나는 계열사 임원으로 가는 길인데, 자리가 한정적이다 보니 임원 승진하는 것만큼이나 경쟁이 치열하다. 또 다른 길은 거래처 임원으로 가는 것인데, 하도급업체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라 대기업 출신을 임원으로 채용할 여력이 되는 회사가 많지 않다.

적고 좁은 길


그렇다고 섣불리 창업을 엄두 내기도 어렵다. 국세청의 전국 사업자 통계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개인사업자는 582만9000명으로 2009년 말보다 95만5000명(19.6%) 늘었다. 연령대는 50대(32.1%), 40대(28.5%), 60대(16.1%) 순이었다. 창업을 선택한 이들 역시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 매년 평균 96만 명이 신규 사업자로 신고하고 약 80만 명이 폐업한다.

S그룹 L부장은 “대기업 부장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혜택 받은 사람으로 보지만, 재취업과 관련해선 까막눈”이라며 “기업체 부장들의 경험을 살리는 동시에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부장 재취업 교육’을 국가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5년 겨울, 한국의 부장들은 ‘생(生)의 전쟁’ 중이다.

신동아 201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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