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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위는 ‘중국혁명’의 리허설

“중국은 ‘홍콩 학교’에서 민주화 학습 중”

  • 윤성학 고려대 러시아CIS연구소 교수 dima7@naver.com

홍콩 시위는 ‘중국혁명’의 리허설

  • ● 고교생·대학생 ‘200만 시위’ 주도
    ● 민주화 혁명 에너지 축적
    ● ‘중국 압제로부터 독립 욕망’ 더 크게 분출할 것
    ● 중국 자체를 혐오
    ● 시진핑 굴복시킨 경험
    ● 입법원 폭력 점거로 한계 노출
6월 16일 홍콩 거리에 운집한 시위대. [AP=뉴시스]

6월 16일 홍콩 거리에 운집한 시위대. [AP=뉴시스]

2019년 6월 홍콩은 보여줬다. 거대한 제국, 중국의 양보를 어떻게 받아내는지를. 반대로 시진핑 국가주석 권력은 티베트도 위구르도 아닌 작은 섬나라 홍콩에 약점을 드러냈다. 투쟁과 연대가 베이징을 굴복시킨 것이다. 홍콩은 중국 민주화 혁명의 시작을 보여준다.
 
홍콩 시위의 출발은 단순했다. 베이징의 지배를 받는 홍콩 정부는 중국 등 홍콩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했다. 홍콩인들은 중국 정부가 홍콩의 반중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본토로 송환해 정치적으로 탄압할 수 있다면서 범죄인 송환에 반대했다. 실제로 홍콩에서 민주화 운동을 한 몇몇 인사가 중국에 강제로 납치되거나 행방불명된 적이 있다. 

송환법이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홍콩의 법적 지위를 약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퍼져나가면서 홍콩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6월 9일 103만 명, 6월 16일 마침내 200만 명이 모였다. 홍콩 역사상 최대 시위가 펼쳐졌다. 홍콩 인구가 739만 명(2017년)이니 7명 중 1명꼴로 시위에 합류한 셈이다. 홍콩 시위에 동참하는 국제적 연대 시위가 대만 타이베이, 영국 런던, 미국 뉴욕, 일본 도쿄, 한국 서울 등 세계 20여 도시에서 벌어졌다.


베이징이 무력진압 피한 이유

7월 1일 홍콩 입법원을 장악한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 시위대가 벽에 걸린 홍콩 로고 위에 과거 홍콩 식민지 깃발을 덮고 있다. [AP=뉴시스]

7월 1일 홍콩 입법원을 장악한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 시위대가 벽에 걸린 홍콩 로고 위에 과거 홍콩 식민지 깃발을 덮고 있다. [AP=뉴시스]

홍콩의 우산혁명과 민주화에 소극적이던 기업들도 이번엔 동참했다. 홍콩 소재 여러 기업인협회가 송환법 반대 성명을 냈다. 이들은 송환법이 국제상업도시이자 금융 허브인 홍콩을 중국의 흔한 항구도시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보수 성향인 홍콩의 변호사협회, 종교단체, 교육단체도 이렇게 중요한 법안을 겨우 20일간 의견 수렴만으로 통과시키려 하는 데 분노했다. 

송환법 반대에는 홍콩 원주민뿐만 아니라 외국인 도우미, 심지어 중국 본토에서 온 이주민도 참여했다. 홍콩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도우미들은 “항쟁은 출신을 묻지 않는다”며 시위대에 참여했다. 이번 사태는 홍콩의 일부 친중국파를 제외하고 모든 홍콩인을 단결시켰다. 

홍콩 시민들은 “모든 사람이 이 시위의 주최자”라고 주장한다. 2014년 우산시위는 조슈아 웡과 청년들이 주도했다. 이번에는 수많은 홍콩인이 자발적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서 시위를 홍보했고 조직했고 참여했다고 한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은 동맹 휴학으로 출석을 거부했다. 교사들도 출근을 거부한 채 시위에 참가했다. 홍콩의 쇼핑몰은 문을 닫는 철시 시위를 했다. 홍콩 지하철 기관사들은 ‘준법투쟁’을 내세워 서행 운전을 했으며 버스 기사들은 경적 시위를 했다. 기독교와 천주교 단체들도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2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베이징은 굴복했다. 법안 통과를 강행하려던 계획은 보류됐다. 홍콩 사태가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면 중국 자신도 경제적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현재 홍콩은 중국 경제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한다. 중국 국유기업들은 홍콩 증시에 의존하고 있다. 무력진압과 유혈사태로 홍콩의 금융과 증시가 타격을 받으면 안 그래도 위태로운 중국 경제도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마스크 쓰고 텔레그램 단체방으로 연락

홍콩 시위의 특징은 지도부가 없다는 점이다. 시위 주축 세력인 학생들을 대표하는 집단도 없다. 극우든 극좌든 자신의 깃발과 주장을 외치는 조직조차 발견하기 힘들다. 시위 세력은 특정 지도자나 이념으로 세가 집중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모든 사안을 투표로 결정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끈 전대협 같은 강고한 조직은 찾아볼 수 없다. 

시위대의 주축은 고등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학교, 반 단위로 구성됐다. 경찰이 ‘주동자’를 찾기 어려웠다. 경찰의 추적을 걱정한 시위대는 마스크를 썼고 텔레그램 단체방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오직 나 자신으로 참가하겠다는 자발성은 문제점도 노출했다. 이들은 토론과 모임도 거부했다. 입법원 점거 시위가 이러한 위험성을 보여줬다. 7월 1일 시위대는 한국의 국회의사당 격인 입법원 건물에 진입해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유리창을 깨고 집기를 파손했다. 심지어 의사당 단상에 영국 식민지 시절의 홍콩국기(Colonial Flag of Hong Kong)를 붙였다. 이들은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른 채 파괴에 몰두했는데 이것은 홍콩 정부의 먹잇감이 됐다. 

홍콩 정부는 의도적으로 언론을 데리고 다니면서 입법원 1, 2층의 파손된 현장을 공개했다. 낙서와 파괴된 현장은 홍콩 시위대의 순수성을 훼손시키기에 충분했다. 비폭력 집회에 연대하던 홍콩 단체들이 시위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홍콩 정부를 배후 조종하는 베이징은 홍콩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분열시키고 홍콩의 민주화 세력을 고립시키는 전술을 선호한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홍콩의 기득권층인 중장년층과 본토 이주민만 붙잡고 있으면 홍콩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홍콩 시위대를 소수로 고립시켜야 한다. 입법원 점거 사태는 이러한 목적에 들어맞았다. 

민주화 운동은 길고 긴 고난의 과정이다. 한국도 거의 30년이 걸렸다. 이 과정을 견디기 위해선 운동의 조직화가 중요하다. 조직은 운동의 침체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하다. 또한 운동이 의도하지 않은 사태에 말려드는 것을 제어한다. 의미 없는 폭력 행위를 통제할 권위 있는 조직이 없다는 것은 홍콩 민주화 세력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나라든 한 번의 시위나 정권 교체로 민주화되는 경우는 없다. 1986년 시작된 대만의 민주화도 10년 이상 걸렸다.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홍콩 또한 마찬가지다. 

홍콩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은 2003년 7월 1일이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날을 기념해 홍콩 시민 50만 명이 빅토리아 공원에 모였는데, 이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로 변했다. 50만 집회는 홍콩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시민들의 격렬한 반응에 홍콩 정부는 전면 후퇴를 선언했다. 홍콩 기본법 23조 개정 관련 조치를 무기한 연장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법을 추진한 안보장관은 사퇴해야 했다. 홍콩 시민들은 이때 피플파워(people power)의 위력을 깨달았다. 

2012년엔 행정장관 렁춘잉에 의해 추진된 국민교육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초등학교에 국민윤리 과목을 신설해 홍콩인들을 본토의 충실한 주민으로 만들겠다는 방안에 대해 중·고교생들이 반발하면서 시위의 선봉에 섰다. 이들은 등교를 거부했고 해킹 공격을 시도했다. 젊은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시위에 합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홍콩 정부는 다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콩 민주화의 중심은 시민사회나 정치인들이 아니라 주로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됐다. 

반면 2014년 직선제를 외치는 우산혁명은 실패했다. 홍콩 정부와 베이징은 홍콩 시위를 통제하는 능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폭력적 진압을 가급적 자제하고 시간을 끌면서 시위의 부정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주요 언론이 시위 장기화로 인한 손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시위가 홍콩 경제에 얼마나 부정적인지 부각했다. 초반에 들불처럼 타오르던 시위는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기득권층인 중장년층과 본토 이주민들이 돌아서면서 79일을 끌어온 우산혁명은 실패로 마무리됐다.


“나는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

어떤 나라든 민주화 과정에 특유의 상황이 존재한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안보 문제가 있었다. 태국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국왕이라는 존재가 오히려 민주화의 걸림돌이 된다. 필리핀은 경제가 민주화의 발목을 잡았다. 홍콩은 베이징이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한 제국이 민주화의 가장 큰 장애요인이다. 

홍콩은 제국주의 거래의 산물로 우연히 생긴 도시다. 영국은 홍콩을 지배하면서 아시아의 금융 허브이자 관광과 쇼핑의 도시로 만들었다. 1997년 홍콩을 이어받은 중국은 일국양제 원칙 아래 홍콩을 중국의 자금 조달 시장으로 삼았다. 중국은 당장 홍콩의 돈이 필요하기에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홍콩 독립은 중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다. 중국은 홍콩 독립운동엔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다. 

홍콩 민주화의 난관은 홍콩이 일반적 국가 단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중국이 홍콩을 통제하는 한 홍콩은 어떤 경우든 중국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1984년 협정에서 영국과 중국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되는 홍콩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50년간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기로 했다. 이 50년 체제보장기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벌써 22년이 흘렀고 이제 남은 기간은 28년이다. 홍콩의 일부 법학자들은 “2047년 이후에도 일국양제가 자동적으로 연장 적용된다”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홍콩의 경제적 가치도 줄어들고 있다. 1997년 반환 당시 홍콩은 중국 전체 국내총생산(GDP) 대비 18.4%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3%에도 미치지 못한다. 홍콩에서 가까운 중국의 선전, 광저우, 상하이가 장기적으로 홍콩의 역할을 대체할 것이다. 그럴 경우 중국은 홍콩의 특수한 법적 지위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 

현재 홍콩은 중국 어디에도 없는 참정권,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홍콩인들은 50년간의 1국2체제 약속이 끝나는 2047년 즈음에 중국이 사회주의 정치 시스템을 홍콩에 도입해 홍콩인들의 자유를 박탈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홍콩의 상류층과 중산층 중 상당수는 이미 자신의 재산을 싸들고 미국으로, 캐나다로,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홍콩 사람들은 영국 식민지 시절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홍콩은 영국의 지배를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국제화된 도시가 됐다. 중국 지배하에서 홍콩의 언론 자유나 표현의 자유 수준은 엄청나게 저하됐다. 중국에 비판적인 언론인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언론인들은 중국의 디지털 감시체계에 노출돼 있다. 간접선거는 홍콩 시민들의 주권 행사를 억압하고 있다. 2014년 우산혁명에 참여한 사람 중 몇몇은 몇 년 후에도 기소되고 수감됐다. 

이런 이유로 올해 시위대는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 이들이 착용한 마스크와 고글은 최루탄도 막아주지만 신분 노출도 차단해준다. 시위 현장에서 셀카 촬영이나 얼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행위는 자제된다. 시민들은 시위 현장에 갈 때 교통카드 대신 현금을 쓴다. 또, 이들은 휴대전화에 1회용 유심카드를 끼우고 중국산 애플리케이션을 지운다. 중국산 앱이 문자메시지 같은 개인정보를 빼가는 스파이 노릇을 할까 우려해서다. 보안이 철저한 텔레그램도 주기적으로 지우고 새로 깐다.


홍콩독립파 갈수록 늘어

7월 7일 홍콩 일대 시위에서 ‘홍콩 독립’이라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AP=뉴시스]

7월 7일 홍콩 일대 시위에서 ‘홍콩 독립’이라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AP=뉴시스]

홍콩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중국 문제를 놓고 홍콩 시위대는 둘로 나뉜다. 대다수는 중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민주화와 자율성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은 홍콩의 독립을 주장한다. 최근 들어 홍콩독립파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시위를 주도하는 고교생과 대학생들은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중국의 압제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요구는 홍콩의 젊은 세대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상당수 홍콩인은 이제 베이징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기 선조의 고향인 광둥 지역을 포함해 중국 그 자체를 혐오한다. 반(反)중국 움직임이 가속화하면 홍콩 민주화 세력도 분열될 수 있다. 언젠가는 ‘홍콩 독립’이라는 폭발적 이슈가 터져 나올 것이다. 

이런 상황을 오히려 베이징은 기대할지도 모른다. 중국 주권을 반대하는 세력에게 베이징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시진핑 정권은 ‘홍콩 독립 이슈가 터지면 홍콩 대중이 떨어져나가고 홍콩 민주화 세력이 소수로 고립될 것’이라고 기대하는지 모른다. 이는 베이징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반정부 시위는 정부가 그리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홍콩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현재의 제도나 법으로는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최선은 중국체제를 흔들지 않는 선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이다. 이번에 대규모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홍콩 시민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를 박탈당하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화는 필연적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민주화의 경험이 절대 부족한 나라다. 1987년 톈안먼 사태가 터졌을 때 중국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통제 불능 사태였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화는 갈등을 사전 예방하고 창의성을 격려하면서 매력적인 국가를 만든다. 중국이 민주화의 대척점에 있는 한, 중국몽은 실현되기 어렵다. 

1987년 톈안먼 사태 당시 톈안먼에 모인 학생들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뿐 아니라 반부패와 공정한 경제 발전을 요구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연대는 없었다. 반면, 홍콩 시위는 모든 계층을 묶어냈으며 국제적 연대를 달성했다. 

중국은 1인당 GDP가 1만 달러에 도달한 중진국이다. 성장하는 중국 중산층은 홍콩과 마찬가지로 공산당 일당독재가 자신을 대표하는 것에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경제가 더는 성장하지 못하거나 침체기에 들어서면 중산층은 부패와 감시에 반대하면서 민주화를 요구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홍콩은 다가오는 거대한 중국 민주화 혁명의 시작이다. 중국 대륙의 해방구인 홍콩은 중국 민주화 운동의 학습장인 것이다.


거대한 중국 민주화 혁명의 시작

이번 홍콩 시위에서 베이징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대륙의 중국인들이 홍콩 사람들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기 시작한 점이다. 베이징은 홍콩 시위를 철저하게 차단했지만 중국에서도 소문은 퍼져나갔다. 톈안먼의 비참한 실패를 목격한 중국인들은 홍콩 시위에서 공산당 정부를 굴복시킬 가능성을 봤다. 홍콩의 민주화는 중국의 민주주의 진전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민주화는 홍콩이라는 학교를 통해 지금 학습 중이다. 다가오는 거대한 중국 혁명의 리허설을 그들은 본 것이다.




신동아 2019년 8월호

윤성학 고려대 러시아CIS연구소 교수 dim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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