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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모리스 쿠랑傳 ❷

왕비의 위험한 사생활

  • 윤채근 단국대 교수

모리스 쿠랑傳 ❷

1896년 촬영된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 [문화재청 제공]

1896년 촬영된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 [문화재청 제공]

드 플랑시 공사는 말이 없었다. 테이블 위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사그라질 무렵에서야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쿠랑 통역관. 이건 우리 프랑스와 일본 정부 사이의 문제일세. 조선인 몇 명이 죽었다고 해서 감상적이 될 필요는 없어.” 

고개를 끄덕인 쿠랑은 일어섰다. 공사와 더는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어보였다. 일개 통역관 주제에 정부의 외교 비밀에 접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공사관을 벗어난 그는 박판수와 연관된 인물 중 유일한 생존자인 임달성을 다시 만나려고 운종가로 향했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임달성은 세책방 지하 서고에 숨어 있었다. 그에게서 살인자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겠다고 판단한 쿠랑은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다.


살인자의 비밀

“임. 죽은 자들은 모두 뮈텔 주교님 소개로 누군가를 만났다고 했지?” 



임달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추측이지만 그런 것 같소. 지금 생각해보니 다들 주교님과 연관된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거요. 얘기했잖소? 판수 행수가 죽기 직전 차를 같이 마신 자는 주교님이 보낸 양인이 틀림없었소.” 

“그건 알겠고. 그럼 그 살인자를 왜 만났지? 이유가 있었을 텐데.” 

“판수 행수는 뭔가를 받으러 갔던 거요.” 

“그럼 살해된 다른 세책가들도?” 

임달성은 대답을 오래 망설였다. 쿠랑은 상대가 아주 중요한 어떤 사실을 숨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조선인의 조심스러운 품성을 잘 아는 그는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떨리는 손으로 곰방대에 불을 붙인 임달성이 연기를 길게 내뿜고 말을 시작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엔 한계가 있소.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겠소. 우리 조선은 강해지기 위해 자금이 많이 필요하오. 판수 행수는 돈 때문에 나간 거요. 다른 세책가 행수들도 아마 그랬을 거고.” 

“돈을 받으러 나갔다? 그런데 동료들이 이미 살해당하고 있는데 왜 의심하지 않았지?” 

“내가 범인을 목격하기 전까지 그 누가 노서아인을 의심할 수 있었겠소? 다들 설마하다 당한 걸 거요.” 

쿠랑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팔짱을 낀 그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지금 노서아인이라 했지? 러시아 사람. 그렇지?” 

눈이 휘둥그레진 임달성이 곰방대를 땅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떨궜다. 쿠랑이 다시 말했다. 

“모두 러시아인에게 당한 거야. 임은 이미 그걸 알고 있었던 거고. 자, 다 털어놓는 게 어때? 난 뮈텔 주교 편이 아니니까.” 

잠시 상투를 만지작거리던 임달성이 처량한 눈빛으로 천천히 말했다. 

“우린 오래전부터 노서아인들로부터 은밀하게 자금을 지원받아 왔소. 판수 행수가 그 노서아인과 만날 때도 난 당연히 그런 접선이라 믿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거요. 근데 … 행수가 각혈을 하는 거였소. 그 용의주도한 사람이 맥없이 죽어버리더란 거요. 그러고 보니 다른 행수들 죽음도 노서아인 짓이란 깨달음이 오지 뭐겠소?” 

“그런데 어제 왜 내게 러시아인 얘기를 하지 않았지?” 

“우리가 노서아 자금을 받아온 건 아주 중요한 비밀이요. 쿠랑 통역관도 알아선 안 되는.” 

“그 자금 말이야. 어디로 가는 자금이지?” 

고개를 가로저은 임달성이 입을 닫았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숨을 내쉰 쿠랑은 임달성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비밀 서고에서 몰래 빠져나와 운종가를 가로질러 걸었다. 박판수 조직은 가짜 러시아 자금책에게 몰살당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진짜 자금책을 찾아가 묻는 게 순서였다.


허수아비 왕

러시아 공사관은 프랑스 공사관을 굽어보는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왕과 왕비의 마음을 사로잡은 베베르 공사는 한성 외교가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러시아가 청과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며 대조선 외교전에서 신흥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게 모두 그의 공이었다. 쿠랑의 예고 없는 방문을 기꺼이 수락한 베베르는 접빈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시가를 물고 있었다. 조금 장황한 쿠랑의 질문이 끝나자 벌떡 일어선 그가 창가를 거닐더니 러시아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통역관이 이를 번역했다. 

“러시아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있고 도움을 주고 있음을 감출 이유가 없다. 다만 이번 살인과 우리 러시아는 전혀 무관함을 밝히는 바이다. 정보에 따르면 귀국 뮈텔 주교에게 혐의점이 있으니 그를 먼저 조사하라.” 

쿠랑은 러시아 암살자 배후에 일본이 있다는 사실은 감추고 박판수 조직에 전달된 자금의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물었다. 크게 소리 내 웃던 베베르가 오래 말하고 나서 통역관이 다시 번역했다. 

“드 플랑시 공사에게 묻는 게 빠르겠지만 조선을 아직 모르는 것 같으니 말해주겠다. 조선엔 두 명의 권력자가 있다. 민 왕비와 왕의 아버지 대원군. 왕은 허수아비다. 왕비는 청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벗어났지만 한 나라에 의존하는 바보는 아니다. 아주 영리하다. 그녀는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과 대원군을 수중에 넣고 자신을 견제하는 청에 대항하고자 남편을 조종해 우리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증진시켜 왔다. 민 왕비와 나 베베르는 정치적으로 밀월관계다. 이번 사건은 우리 관계를 훼방하려는 세력 짓이 분명하며 귀국 뮈텔 주교가 간여했다는 사실에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비서에게 손짓한 베베르가 벌떡 일어서 자리를 뜨려고 하자 쿠랑이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민 왕비의 라이벌인 대원군 짓인가?” 

떠나려다 뒤를 돌아본 베베르가 음산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이를 다시 통역관이 번역했다. 

“극단적 수구파인 대원군은 개화파 민 왕비의 후원자였던 일본과 청을 모두 증오했다. 하지만 민 왕비가 두 나라, 즉 일본과 청을 견제하면서 그는 한때 자신의 적이었던 자들과 손을 잡았지. 청, 일본 모두와. 오직 숙적인 왕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여우사냥

1880년대 서울에서 권세를 부린 위안스카이의 25세 때 모습. [동아DB]

1880년대 서울에서 권세를 부린 위안스카이의 25세 때 모습. [동아DB]

러시아 공사관을 나온 쿠랑은 서소문 성곽길을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암살 배후엔 일본 정부가 있겠지만 그 매개 고리로 대원군이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그를 만나야 했다. 

흥인문 부근 옛 훈련도감 터에는 하도감(下都監)이라 하는 신식 군대 훈련장이 있었다. 청에서 파견한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그 자리에 대규모 병영을 건설하고 마치 왕처럼 군림하며 살고 있었다. 대원군은 바로 그곳에서 기거했다. 프랑스 공사관에 들러 관용 마차를 빌린 쿠랑은 급히 흥인문 쪽으로 출발했다. 

하도감은 조선 궁궐에 방불할 만큼 으리으리했으며 위안스카이를 면접하는 것은 조선 왕을 만나는 수준의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했다. 민 왕비와 연관된 문제로 대원군을 인터뷰하겠다는 쿠랑의 요청에 대해 위안스카이는 처음엔 강력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러시아인 암살범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듣자마자 태도가 돌변한 그가 말했다. 

“러시아 녀석들이 일을 저지를 줄 내 진즉 알고 있었다.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대원군이 가담했을 리는 없지만 취조를 허락한다. 나중에 결과를 내게도 꼭 보고하도록.” 

짧은 접견을 마치고 대원군이 묵고 있다는 숙소로 안내된 쿠랑은 너무나 허름한 시설에 무척 놀랐다. 대원군은 두 칸짜리 장교 숙소에 청나라 감시병 한 명과 동거하고 있었다. 쿠랑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대원군이 말했다. 

“난 여기서 거의 유폐 상태요. 운현궁 집으로 갈 때조차 감시병이 따라붙소. 1884년 갑신년 친일 개화파들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청군을 끌어들여 그들을 진압한 게 민자영 그 계집이었지. 표독한 그것이 날 청군의 인질로 넘겨버렸고. 그 후로 힘을 잃고 살아왔소.” 

“하지만 당신은 한양으로 돌아왔고 그녀를 여러 차례 공격한 무리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불란서 양반. 북경에 압송됐던 나를 청군이 왜 한양으로 다시 데려왔겠소? 위안스카이가 그 악녀를 견제하는 데 필요해서가 아니요? 내 쓰임새는 딱 거기까지요. 물론 민씨들의 전횡을 막는 데 나도 뜻을 같이하지만 노서아 것들과의 문제까지는 난 모르오.” 

“그럼 일본 정부와는 협조한 게 없습니까?” 

“가지야마 게이스케(梶山鼎介) 일본 공사가 얼마 전 위안스카이를 만나러 왔소. 나도 배석했지.” 

“그들과 뭘 의논했습니까?” 

“악녀 민자영의 제거. 여우사냥이라고 들어봤소?” 

상대를 말없이 응시하며 쿠랑이 고개를 가로젓자 대원군이 다시 말했다. 

“그년은 조선의 골칫거리요. 청과 일본조차 이를 갈 정도지. 지금 노서아를 뒷배 삼아 버티고 있지만 곧 횡액을 면치 못할 거요.” 

“그렇다면 민 왕비의 제거에 청과 일본이 협력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고개를 지긋이 끄덕인 대원군이 희미하게 속삭였다. 

“여우를 잡는 데까진 그럴 거요. 그러기 위해선 노서아와 여우를 떼어놔야 하겠지.”


조선왕조의 저녁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 [미국 의회도서관 제공]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 [미국 의회도서관 제공]

대원군과의 만남을 마친 쿠랑은 마차를 몰아 남산 아래 왜성대를 향했다. 예장골과 회현방이라 불리는 지역 중간에 위치해 있던 일본 공사관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공사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가지야마 공사는 쿠랑의 방문을 기꺼이 환영했다. 일본식 화과를 잔뜩 차려낸 그는 쿠랑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이미 많은 걸 파악하고 오셨군요. 드 플랑시 공사님의 대학 후배라 들었습니다만. 아무튼 일본과 프랑스는 같은 배를 탄 동지입니다. 서로 이익이 일치하지요.” 

“그런데 궁금합니다. 일본 측에서 굳이 박판수 조직까지 없앨 필요가 있었습니까? 민 왕비에게 흘러드는 러시아 자금만 끊어도 될 것이었는데.” 

쿠랑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가지야마가 군인 출신 특유의 과감하지만 다소 경솔한 어투로 대답했고 곧이어 통역관이 이를 번역했다. 

“그들 박판수 무리는 민자영에게 러시아 자금만 전달한 게 아니지요. 그들은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여우를 영웅으로 탈바꿈시키는 요술 같은 거랄까.” 

“여우를 영웅으로?” 

“쿠랑 통역관께서도 잘 아시지 않나요? 조선의 저급한 소설들 말입니다. 내용은 저품이지만 무지한 조선 백성들은 엄청나게 빠져 있지요.” 

“대중소설 말입니까?” 

“그렇습니다만. 민자영 그 여자는 왕비이면서 실은 여왕이라고나 할까 … 에또 … 요망하기 그지없는 꾀보 여우년이지요. 자기를 우상으로 만들려면 뭘 해야 할지 우리 일본인들만큼 안단 말이지요.” 

“무슨 뜻인지?” 

“한글소설을 만들며 여성 영웅 얘기를 지어 퍼뜨렸다는 말입니다. 박판수가 그런 일을 하는 악역이었습니다. 민자영은 조선의 저명한 옛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 후손입니다. 악녀인 첩 장희빈을 무찌르고 남편 숙종의 사랑을 되찾아온 걸로 유명합니다. 사실이건 아니건 소설로는 그렇지요. 또 뭐 ‘사씨남정기’도 있습니다.” 

“박판수가 민 왕비를 여성 영웅으로 만들고자 책을 출간해왔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방식이 세속에선 꽤 효과가 큽니다. 인기가 실로 대단하지요. 세책 목록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요. 조선인들은 못난 왕보다 영악한 민자영에게 더 의지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이미 그런 형세가 역력합니다. 이걸 그냥 놔둬선 분위기가 아주 곤란해집니다.” 

“박판수는 기독교인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민자영은 종교적으로 매우 깨인 여자입니다. 그런 거 따지지 않고 자기 정치에 필요하면 활용하는 … 여우지요.” 

잠시 숨을 몰아쉰 쿠랑이 다시 물었다. 

“러시아 공사가 가만히 있을까요? 진짜 암살자를 색출하면 우리 프랑스와 일본은 같이 곤욕을 치르게 될 겁니다.” 

뒤틀린 미소를 머금은 가지야마가 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이미 러시아로 돌아갔습니다. 베베르는 절대 체포할 수 없는 곳으로. 뮈텔 주교님만 얌전히 계시면 됩니다. 물론 쿠랑 통역관님은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쿠랑이 일본 공사관을 나올 무렵 해는 이미 져서 사방엔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마차를 프랑스 공사관으로 돌려보낸 탓에 도보로 의금부 방향으로 걷던 그는 문득 왕비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과 흡사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통해 정치를 바꾸려 했다면 매우 지적일 게 분명했다. 쿠랑은 그런 조선 여성이 살아 있기를 그리고 조선이란 매력적인 나라를 유지시키기를 바랐다. 

민 왕비와 은밀히 만나려면 당장 임달성이 필요했다. 쿠랑은 서둘러 그가 은신해 있는 비밀 서고로 향했다. 임달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상황에서 쿠랑이 더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드 플랑시의 짜증난 얼굴도 새삼 떠올랐다. 공사관으로 복귀한 그는 임달성의 행적을 수배했지만 찾아내는 데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쿠랑은 몇 개월 지나 도쿄로 전보돼 한양을 떠날 무렵에야 임달성 소식을 접했다. 임달성은 쿠랑을 찾아 뮈텔 주교의 혐의를 고발하기 직전 러시아 공사를 먼저 방문한 뒤였다. 말하자면 임달성은 베베르의 조언에 따라 쿠랑을 찾아와 사건의 정보를 일부러 흘렸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해 이후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정치적 흥정 카드로 활용됐고 용도 폐기되자 곧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이 애오개 고개에서 발견된 뒤 드 플랑시 공사가 해준 전언에 따르자면 그랬다.


이 이야기는 쿠랑전의 완결판이다. 작품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비극적 사건들, 특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있다. 임달성은 허구 인물이며 명성황후가 세책가 조직과 연합해 소설을 지어 퍼뜨리거나 러시아 자금을 운용했다는 건 가설이다. 독자들이 이 소설을 계기로 19세기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희망해본다.


모리스 쿠랑傳 ❷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19년 8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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