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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특집

권력을 추구하되 탐하지 않는다

22년 만남 통해 지켜본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

  • 허문명 |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권력을 추구하되 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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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박근혜 대통령 경제멘토 김종인 선대위원장 전격 영입.’

1월 14일 오후 스마트폰에 문자메시지가 뜨는 순간 기자는 눈을 의심했다. 불과 한 달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이제 정치고 뭐고 신물이 난다”고 했는데 다시 정치를 한다니. 게다가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사람이 어떻게 야당 선대위원장을 맡을 수 있나.

며칠 뒤(1월 19일)에 있을 그와의 점심 약속은 취소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연말에 새해 인사차 정한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 당사에 처음 출근했다”면서.



더민주당 첫 출근 날

2시간에 걸친 이날 대화는 그의 ‘돌발 행보’에 대한 배경 설명이 주를 이뤘다. 문재인 당시 더민주당 대표가 3일 동안 집을 찾아왔으며, 그의 진정성과 정성에 먼저 마음이 흔들린 부인이 “저렇게 진심 어린 얘길 하는데 웬만하면 받아주시면 어때요?”라고 했다는 말도 했다. 일부 언론에서 오래전부터 문재인 부부와 깊은 관계였다는 내용이 보도됐지만 “그건 낭설”이라고 했다.



이날 만남엔 가까운 지인 서너 명이 동석했는데 “야당을 최소한으로라도 살리지 않고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안철수 신당(국민의당)이 막 출범한 직후라 더민주당 의원들의 탈당 러시가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박영선 의원이 잔류냐 아니냐를 저울질 중이라는 얘기가 뉴스로 다뤄질 때였다. 김종인(이하 직함 생략)이 말했다.

“안철수가 탈당하기 일주일 전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민주당에 들어갈 때는 다 포용해서 대통령후보가 되겠다는 생각 아니었나.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신중하게 때를 기다려라’고 조언했다.”

당시 안철수 의원이 뭐라고 답했는지 물어봤다.

“그 사람은 본래 가타부타 이야기를 안 하는 사람이다(웃음). 난 그의 행동이 너무 나쁘다고 본다. 오로지 자기가 대통령 나가는 것만 머릿속에 있다. 나중에 윤여준(전 환경부 장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안 의원이 민주당에 들어간 뒤 ‘내가 민주당을 먹었습니다’ 했다는 거야. 근데 막상 들어가보니 이상하게 돌아가거든. 총선은 다가오지, 자기가 데려온 20여 명을 국회에 내보내야 하는데 여의치가 않지, 그래서 자기 기반을 닦으려고 탈당한 거야.”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정치란 그렇게 잔머리를 굴려서 하면 안돼. 대의를 좇아야지. 자기가 야당을 분열시켜놓고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냐고.”



비상한 기억력

그는 야당이 뭉쳐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되짚어보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중단 이후 공개적으로 꺼낸 그의 ‘야당 통합’ 발언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더민주행(行)을 결정했을 때부터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다.

친노(親盧) 패권주의 청산 문제도 화제가 됐다. 그는 “그게(친노) 어떤 조직이나 시스템이 있는 건 아니다. 기준을 세워 정리해나갈 것이다. (그 사람들이) 똘똘 뭉쳐 저항하면 내가 그만두면 되는 거지. 하지만 별것 아니다. 그렇게 못할 거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를 지금껏 만나오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조부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에 관한 것이다. 그는 부친이 일찍 타계해 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가인은 전북 순창 출신으로 청년 시절에 의병활동을 했고 일본 메이지(明治)대 법학부를 나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정치활동도 했는데 민정당(1963년 가인이 옛 민주당 인사들 중심으로 만든 정당) 대표를 맡았다.

그는 이날도 조부가 자신의 지금 나이인 77세 때 창당해서 동분서주하던 얘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조부가 그때 그렇게 에너지를 쓰지 않았더라면 1, 2년이라도 더 사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대목에선 어쩌면 자신도 비슷한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불어닥친 운명의 소용돌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비장함까지 느껴졌다.

20년 넘게 지켜본 김종인은 정치감각이 뼛속 깊이 각인된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조부의 심부름을 하면서 당대 쟁쟁한 정치인들을 두루 만났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자랐으니 평생 정치 현장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청년 YS(김영삼)가 지역구를 달라고 쫓아다닌 얘기에서부터, 야당 통합 협상 때 집에서 조부가 좌장이 되어 3당 지도자들이 협상했지만 깨진 사연 등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김종인은 1940년생, 만 76세이지만 에너지가 넘친다. 매일 체육관에 나가 운동하며 관리한 덕분인지 언뜻 보면 60대 같다. 그 나이에 체구도 그렇게 건장하고 기억력도 그만큼 좋은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는 자유당 시절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주요 역사적 사건과 정치 일정을 날짜까지 세밀하게 기억한다. 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 만남까지 날짜와 장소, 대화 내용을 적시하기에 한번은 의심이 가서 그가 언급한 날짜를 찾아봤는데 정확하게 맞았다.



‘대통령감 될 만한 사람’

김종인을 처음 만난 것은 정운찬 전 총리의 소개를 통해서다. 1994년 말 경제부 기자로 한국은행을 출입하던 어느 날 정운찬 당시 서울대 교수가 “대통령감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나가보니 그가 앉아 있었다.

당시 그는 하는 일도, 소속된 곳도 없이 자유롭게 살던 야인(野人)이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만두고 1992년 14대 민자당(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지만 이듬해 9월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돼 1994년 대법원에서 의원직 상실 판결을 받았다.

밥집 구석진 자리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소탈한 성품이 첫 만남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때 기자는 한국 경제에 대한 진단에서부터 한국 정치사 분석과 대안을 막힘없이 설파하는 그에게 많이 놀랐다. ‘대통령감’이라던 말이 허언(虛言)만은 아니었다.

이후 시간 날 때마다 그의 사무실(서울 종로구 부암동 대륙문제연구소)을 찾았다. 책상에는 늘 ‘이코노미스트’ ‘타임’ 등 외국 잡지와 신문, 책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야인으로 살면서도 이런저런 세상사에 대한 관심, 한국 경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는 “독일 경제학자 뢰프케가 ‘나라가 잘되려면 법관, 기자, 대학교수가 제 기능을 해야 한다’고 했다”며 언론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당시  기자생활 4, 5년차이던 나를 통해 요즘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대학 동기동창들을 대거 불러내 그와 저녁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대기업 샐러리맨, 박사과정 연구원, 영화감독 지망생 등 직업도 다양했는데 김종인은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젊을 적 경험을 들려주면서 격의 없이 어울렸다. 함께 노래방에까지 간 것도 기억이 난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그의 사무실이 붐비기 시작했다. 초유의 국난 앞에 선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에게서 해법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이가 많아졌다. 그해 김대중(DJ) 대통령이 당선되자 그를 경제부총리로 등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진보·개혁 성향의 경제학자들도 거들었다. 하지만 그는 입각하지 않았다. 훗날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재정경제부 장관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대통령이 내게 최대한 자율성을 줘야 하며 따라서 경제팀도 내가 꾸려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입각 제의는) 당연히 없던 일이 됐다. 그 사람들이 아마 속으로 ‘한 자리 주면 고맙다고 하면서 낼름 받아야지…’ 했을 거다.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고(웃음).”


청와대 왕따 수석

그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초기 조각 때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됐다. 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그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당시 김종인은 “솔직히 말해 처음엔 ‘깜’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차츰 ‘이런 사람이라면 한국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고 털어놨다.

김종인은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는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노 후보가 당내 경선만 통과하면 된다고 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 후보에게 ‘용의주도’를 강조했다. 결국 그가 대통령이 됐다. 노 대통령은 후보시절 기자들에게 “김종인을 총리로 꼽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는데 막상 대통령이 되자 달라졌다. 이와 관련해 김종인의 말을 들어보자.

“당선 후 한 달쯤 지났나, 나를 청와대로 불러 독대를 했다. 노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당신을 쓰고 싶은데 너무 친미(親美)여서 곤란하다는 주장이 주변에 많다, 미안하다’고 하더라.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권력의 생리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말을 해주면서.”

그는 역대 대통령 중에서 노태우 대통령 얘기를 자주 했다. 최근까지 병문안을 종종 다녀왔다.

“대선후보 시절 경제자문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는데 당선 직후 ‘청와대에 들어와 곁에서 도와 달라’ 하길래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근데 주변에서 ‘김종인은 골치 아픈 사람이다. 대통령 말도 안 들을 것’이라는 소리를 한 모양이다. 그러더니 대뜸 보건사회부 장관을 시키는 게 아닌가. 1년 반쯤 지나서 경제가 요동을 치고 국정이 뒤죽박죽 상황이 되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 묻더라. 준비해간 처방을 분야별로 보고했다. 보고가 끝나자 자료를 넘기라고 했다. ‘안 된다’고 거절했다. 대통령이 그걸 비서진과 내각에 ‘검토하라’고 넘기면 죽도 밥도 안 될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청와대 경제수석 제의를 받은 것이 그즈음이라고 한다. 일주일 후 대통령을 다시 만나 “믿고 맡기신 이상 경제에 관한 한 간섭을 말아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대통령도 내게 몇 번이나 청와대에서 일하자고 했다가 이런저런 말에 흔들려 ‘부도’를 낸 적이 있어선지 그때는 ‘약속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정말 간섭하지 않고 다 맡겼다. 재벌들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 처분도 그렇게 해서 가능했다. 재벌 회장들이 대통령에게 내 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그런 말들을 내게 일절 전하지 않았다. 이후 내가 북방외교를 하며 소련과의 수교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짓자 어느 날 외무장관에게 ‘앞으로 한소, 한중, 한미 외교는 경제수석과 협의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런 상황이니) 물론 나는 청와대 내부에서 왕따였다(웃음).”

김종인은 현장을 잘 안다. 대기업 총수들도 거의 다 만나봤고 중소기업인도 많이 만난다. 그래서 지금도 대기업 오너들의 장단점과 지배구조를 다 파악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말 요즘 경영권 다툼 중인 모 그룹 얘기가 나왔는데, 기자는 그가 해당 그룹 대주주의 장단점, 가족관계, 기업 성장사, 지배구조, 재무구조까지 막힘없이 설명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민심을 읽는 비결

기자는 예나 지금이나 그를 ‘박사님’이라고 부른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학교수(서강대), 장관(보건사회부), 청와대 경제수석, 국회의원(4선)에 여야를 넘나들며 선대위원장, 비대위원장을 지낸 그의 경력은 다채롭고 화려하지만 기자는 ‘박사’라는 호칭이 더 좋았다. 직함이란 늘 바뀌기 마련이기에 기자는 그를 직함보다는 ‘인간 김종인’으로 대하고 싶었다. 그도 이런 마음을 알고 있는 듯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독불장군’이라고 말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자신의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과는 화합보다는 충돌을 택한다. 그럼에도 일흔 후반의 그가 야당의 ‘대장’ 자리에까지 온 비결은 무엇일까.

첫손에 꼽을 만한 것은 그의 놀라운 민심 파악 능력이다. 그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예상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될 때에는 기자와 내기도 걸었는데 결국 기자가 졌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서도 “박근혜 후보가 크게 이기진 못해도 1.5~2%포인트차로 이긴다”고 했다. 박 후보의 새누리당 경선 때도 득표율을 1%포인트 오차범위 내로 맞혔다. 그는 “내가 독일 통일도 맞힌 바 있다”며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1990년 5월 독일 본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국회의장과 부의장을 만나서 ‘너네 곧 통일되겠다’고 했더니 다들 웃기는 소리라 하더라. 그런데 그해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비스마르크가 생전에 ‘신의 발걸음 소리가 널리 퍼지는 소리를 들을 때를 포착하라’고 했다. 지도자들은 ‘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종인은 ‘민심의 발걸음 소리’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촉’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서울(박원순)을 빼고 인천, 경기, 부산, 대구에서 모두 새누리당이 됐다고 여당이 한창 들떠 있을 때에도 그는 기자에게 “여당이 이겼다고 좋아하는데, 서울과 충청권 표심이 야(野)로 돌아섰다는 게 중요하다”면서 “이런 민심을 읽어야 한다. 선거 분석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집권할 수가 없다”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예민한 촉’은 오랜 정치 현장 경험과 방대한 독서가 바탕이 됐겠지만, 기자는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그의 의지가 그런 감각을 만든 게 아닌가 한다. 그는 자주 “대한민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라고 말한다. 동북아에서 가장 작은 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민주화,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지도자들보다는 국민의 힘 덕분이라면서.



재벌의 탐욕 체감하다

하지만 김종인의 가장 큰 매력은 가진 자보다 가지지 못한 서민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남다른 데 있는 듯하다. 차가운 머리에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사회의 ‘주류 중의 주류’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서민들이 잘살아야 한다. 가진 사람들은 어떤 정권이 와도 상관없지만 서민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가 ‘양극화’를 화두로 삼은 것은 무려 10여 년 전이다. 1987년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게 된 것도 청와대에서 경험한 재벌들의 탐욕이 앞으로 더 커질 것이고 이들을 제어할 룰이 없다면 나라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하기야 탐욕을 제어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이고, 그늘에 사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 정치의 의무일 것이다.

그는 자기를 꾸밀 줄도 모르고 남한테 붙을 줄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대 대선후보들이 그를 찾은 것은 그가 늘 시대에 맞춰 준비돼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해법도 갖고 있고, 일을 맡으면 해내는 실행력이 있으니 말이다.

오랜 기간 야인으로 지내던 그는 2004년 17대 총선 직전 새천년민주당에 전격 입당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요직을 거친 그가 DJ가 만든 당에 들어간다니 다들 충격을 받았다. 그를 영입한 사람은 당시 당 대표이던 조순형 의원이다.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과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의 덫에 걸려 100석 이하로 무너지리란 비관적 전망이 많았는데, 전권을 쥐고 선거전에 뛰어든 박근혜 대표의 “살려달라” 호소에 유권자들은 121석을 안겨줬다.

민주당은 9석밖에 당선시키지 못했지만 김종인은 비례대표 상위번호(2번)를 받아놓은 터라 자연스럽게 국회에 입성한다. 기자가 “왜 민주당에 가느냐”고 묻자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대통령감을 찾으러 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전방위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여야를 넘어 개혁 성향 의원들을 모아 ‘조화로운 사회를 위한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어떤 저녁 자리에 불러 갔더니 노회찬 씨(국회의원이 되기 전)가 있었다. 지금은 정의당 대표가 된 그가 더민주당의 김종인 영입 직후 트위터에 ‘더민주 오랜만에 예뻐 보인다. 한국의 보수가 김 박사 정도의 노선이라면 이 나라는 훨씬 좋은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반긴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김종인과 정운찬

2007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정치권엔 ‘정운찬 대망론’이 번지고 있었다. 언론들도 서울대 개교 사상 처음으로 직선제 총장 4년 임기를 무사히 마친 정 전 총장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주변에서도 그에게 자꾸 출마를 권유했다. 서울대 총장 출마를 망설이던 정운찬에게 출마를 권유해 당선을 도울 정도로 그와 가까웠던 김종인은 그가 총장직에서 퇴임하자 본격적으로 정치 입문을 제의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선 ‘이명박 대세론’이 형성된 가운데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는 이렇다 할 후보가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김종인은 2007년 3월 언론 인터뷰에서 아예 대놓고 정운찬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인간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역사에서 하나의 ‘별의 순간’이 있고 정운찬이라는 개인에게 그 순간이 도래했다. 그 ‘별의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치면 역사의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밖에 없다. (…)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절대적인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내 몸 상처 입을까 재는 사람은 안 된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확신을 갖고 정치에 덤벼들어야 한다.”

하지만 정운찬은 그로부터 한 달 뒤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해 김종인의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김종인이 그렇게 충격 받은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몇 달간은 전화기도 꺼놓고 아예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몇 달 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정운찬’이라는 이름을 꺼내기도 싫어했다. 본래 사람에 대해 공개적으로 욕하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기도 했지만, 워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보니 자신이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하며 기대한 사람의 갈팡질팡 행보는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빗나갔음을 인정하는 것이어서 그랬을 듯싶다. 김종인은 정 전 총장이 이명박 정권에서 국무총리에 이어 동반성장위원장까지 맡으면서 ‘세종시 반대’ 깃발을 들자 “사람이 변했다”는 말까지 공개적으로 했다.

이후 몇 년간 통 만나지 않던 두 사람의 극적 조우를 목격한 것은 지난해 4월 김종인의 모친상 때였다. 아산병원 빈소에 있던 기자는 조문을 온 정 전 총장을 먼발치에서 봤다. 이후 김종인에게서도 “정 전 총장이 며칠 전 사무실로 한번 찾아와 만났다”는 말을 들었다.  



다시 부는 ‘김종인 풍파’

김종인에게 정운찬 이상으로 내상(內傷)을 크게 입힌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서는 그가 수차례 언론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듯 17대 국회의원 시절, 소속 정당은 달랐지만 당시 박 의원이 독일 방문 때 한독친선협회장이던 김 의원에게 방독에 필요한 조언을 요청해 와 이에 응하면서 시작됐다. 그후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 의원이 패했을 때 김 의원이 먼저 위로차 점심 초대를 했다.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낙담하지 마시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정계 입문 15년 만에 총리가 됐다. 박 대표도 5년 뒤인 2012년이면 국회의원 입문 15년이 되니 시기도 적당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려면 복지정책을 어떻게 내놓을지가 중요하다. ‘부자 정당’이라는 한나라당의 이미지를 깨지 못하면 대통령이 될 수없다.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는 MB(이명박)와는 각을 세워야 차기 주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진다. 세종시 문제에선 물러서지 말라.”

마침내 2011년 12월 27일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꾸린 비대위원에 좌장 격으로 선임되면서 김종인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그가 얼마나 이슈를 몰고 다니며 주목을 받았는지는 꼭 40일 뒤인 이듬해 2월 5일자 이기수 경향신문 정치부장이 쓴 ‘권력을 좇는 자유인’이란 글에 잘 나와 있다.

‘김종인이 여의도에 나타난 날부터 정치는 격해지고, 빨라지고, 바람과 구름이 일었다. 그는 결기와 독설을 쏟아냈다. 정치의 중심에 정책을 세웠고, 상식으로 세상을 말했다. 따로국밥, 난파선이던 집권당엔 ‘김종인 풍파’가 그치지 않았다.’

김종인의 뚝심과 카리스마는 종종 마찰과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비대위원을 하면서도 몇 차례 사퇴 소동을 빚었다. 박 위원장을 향해서도 “(그를) 상당히 믿었던 부분이 희미해졌다. 선거를 앞두고 좀 불안해하는 것 같다”며 ‘돌직구’를 던졌다. 그럼에도 박 위원장은 기어이 그를 다시 붙잡아 공동선대위원장 겸 정책위원장을 맡겼다.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김종인은 “선거 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 한 통 못 받았다”고 했다.

그가 다시 침잠한 것은 그 무렵부터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렸고, 만나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언론 인터뷰도 극도로 기피했다. 기자가 사무실에 찾아가면 “경제민주화니 뭐니 다 잊었고 이제 관심도 없다” “좀 쉬어야겠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만 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2013년 말 새누리당을 탈당해버렸다.

6·4 지방선거가 있는 2014년에 접어들자 그는 돌연 독일로 출국했다. 3개월 체류를 마치고 돌아온 후 만났을 때 “한국이 이대로 가면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이 올 게 틀림없다. 근본적으로 생각을 다시 해야 한다”고 했다.



大欲無欲

당시 기자는 장시간 그와 나눈 대화를 ‘동아일보’에 실었는데, 박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과 서운함을 표정이나 말에서 확연하게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그가 독일에 머물 당시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해 공식석상에서 마주쳤는데도 “안녕하시냐”는 간단한 눈인사만 했다는 일화도 전했다. 당시 기사에는 싣지 못했지만 그는 대통령을 향해 “정말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국민에게 마치 경제민주화가 될 것처럼 말했는데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한때 내가 과욕을 부렸다. 앞으로 더는 누구 자문도 안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2015년이 흘러가고 2016년 새해 벽두가 되자 느닷없이 제1 야당의 대장으로 등장한 것이다. 여의도는 다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불교에 ‘대욕무욕(大欲無欲)’이란 말이 있다.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큰 욕심은 욕심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자는 김종인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했다. 그는 절대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한다. 권력은 일을 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정치인에 대한 혐오감이 높지만 그래도 그는 ‘정치는 국회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감각을 지녔다.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는 안철수에게 국회의원을 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2012년 펴낸 책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서문에 “시간을 쪼개 글을 쓰고 탈고하는 과정에서 자주 할아버지 말씀을 떠올렸다”며 이렇게 썼다.

‘세상에 권력과 금력, 인연 등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유혹하며 정궤(正軌)에서 일탈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는가. 만약 내 마음이 약하고 힘이 모자라서 이런 유혹들에 넘어가게 된다면 인생으로서 파멸을 의미할 뿐이다.’(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1954년 3월 20일 법관 회동 훈시)

박근혜 정권을 만든 김종인이 박근혜 정권의 심판자로 나섰다. 한국 정치사 초유의 대반전 드라마가 시작됐다. 김종인의 운명, 그가 이끄는 야당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4·13 총선이 정말 재미있어졌다.





신동아 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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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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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추구하되 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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