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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격전장을 가다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정학적 요충지’ 오키나와의 분노

  • 전계완 | 시사평론가,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저자 jke68@daum.net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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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 떠도는 1만 조선인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쟁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 살아 돌아간 사람은 거의 없다.[사진제공·전계완]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평화공원의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묵념하는 한국 관람객.[사진제공·전계완]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학대를 피해 탈주한 조선 출신 일본군의 기록을 최초 보도한 지난 4월 1일 류큐신보.[사진제공·전계완]

‘조선 출신 일본병사가 부대 내 학대를 피해 탈주’.

4월 1일 오키나와의 유력지 ‘류큐신보(琉球新報)’는 1면 머리기사로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미군 심문 기록을 공개했다. 전쟁 직후 일본 군인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는 조선인 출신 병사였다. 도쿄제국대 학생이던 가네마야 요시오(한국명 ‘김영오’로 추정)는 전쟁 발발 엿새 전 부대 내 학대를 피해 탈주했고, 미군에게 생포됐다.

이 신문은 당시 일본군의 이민족(조선인, 오키나와인) 차별이 군 내부에 만연했고, 지금까지 구두 증언으로만 전해지던 것이 기록으로 처음 확인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당시 일본이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외친 것이 허구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 기사에서 보듯, 미군은 물론 일본군도 전쟁 가해자였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공원 중앙광장에는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이 있다. 종전 50주년이던 1995년, 오키나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을 국적과 무관하게 새겨 넣었다. 23만8000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누구도 이것이 전쟁 희생자 모두라고 믿지 않는다. 조선인 희생자 1만 명 중 여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500명이 채 안 된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한 날, 200여 명의 일본 해상자위대 신입대원이 단체로 현장을 찾았다. 히로시마 출신의 한 여성 교관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는 해상자위대원으로 갓 입대한 젊은이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오키나와는 미국 식민지가 됐다. 모든 것이 파괴됐고 57만 주민 중 3분의 1이 죽었다. 남은 것은 굶주림과 질병뿐이었다. 토지 강제수용, 저항 주민 수용소 감금, 사유재산 몰수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식민의 고통에 난민이 겪는 상실감이 더해졌다. 미국은 대규모 군사시설을 만들었고 사용료도 지불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런 미군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비극에 이은 굴욕의 역사가 시작됐다.  



슬픈 유리공예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평화의 초석 주변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해상자위대 신입 대원들.[사진제공·전계완]

유리공예가 대표적이다. 별다른 지하자원이 없는 이 땅에서 주민들은 미군이 버린 콜라병, 맥주병을 모으고 이를 녹여 컵이나 그릇을 만들었다. 이를 미군과 관광객들에게 팔았다. 전통주 아와모리(泡盛)의 화려한 술잔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류큐 왕국의 후예들에게 오키나와를 돌려달라’는 운동이 벌어졌지만,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1972년 미국은 미군기지의 반영구적 사용을 조건으로 오키나와를 일본에 넘겼다. 이후 오키나와는 40여 년을 다시 ‘일본국 일원’으로 존속하고 있다.

오키나와에는 본토와 달리 천황의 흔적이 없다. 혼슈(本州)나 규슈(九州)에서 천황 또는 황족이 옷깃만 스쳐가도 온갖 표석을 세우고 이를 자랑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천황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기 때문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1975년 황태자 시절에 이곳에서 화염병 테러를 당했고, 오키나와 출신 가수는 1990년 천황 초청행사에서 ‘천황의 통치는 천년만년 이어진다’는 내용의 국가(國歌)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다.  

지금도 오키나와는 일본 정부를 향해 목청을 높이고 있다. 물론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지만, 미군 신기지 건설과 오키나와 역사 왜곡에 단호히 맞서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몸부림이다. 일본 정부 눈에 안 보이는 차별과 냉대는 ‘한 나라, 다른 민족’의 공존이 빚어낸 비극이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우익 정권이 집권을 이어가는 한 오키나와의 본질적 문제는 미래 지향적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  

류큐 왕국은 1429년 통일국가를 이룬 뒤 명나라, 일본, 조선 등과 중계무역을 하면서 번성했다. 450년 동안 왕조가 유지됐지만, 1879년 일본 귀속 이후 한 번도 자립과 자강의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패배와 절망의 역사를 썼다.



지정학적 요충지의 운명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류큐 왕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슈리죠(首里城)의 정전. 왕의 집무실이었다. [사진제공·전계완]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평화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의 평화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하는 극악무도한 행위인 전쟁을 겪지 않는 것이 이들에겐 진정한 평화다. 침탈의 역사, 식민의 역사, 죽음의 역사에서 이들에게 꼭 필요한 평화는 살육만은 피하는 최소의 평화다. 오키나와의 이런 목소리는 거대한 힘이 작용하는 국제사회에서는 한낱 메아리일 뿐이다. 동북아시아엔 강대국 간 충돌의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국가 간 군비 경쟁은 한계선을 넘어섰다.

오키나와를 통해 우리는 ‘지정학적 요충지’의 비극을 되새겨야 한다. 열강의 충돌 중간 지점에 끼어 있기만 하면 그저 중간에 위치할 뿐 균형자로서의 힘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각축 속에 원심력과 구심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국가적 에너지를 키워나가야 한다. 오키나와 평화기념 공원에 이런 문구가 있다.

‘일찍이 류큐의 조상은 평화를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역 관계를 맺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며 평화와 우호의 가교이다. 평화는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던 류큐 왕국은 후대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




신동아 201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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