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텐트의 제왕에서 자원봉사 전도사로, 라제건 동아알루미늄 회장

[사람 속으로]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5-12-07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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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도가 제조업을? 텐트 폴로 세계시장 석권한 마스터

    • 아웃도어 라이프를 개척한 헬리녹스 체어

    • 한국 걸스카우트 운동의 선구자 어머니가 물려준 봉사정신

    • 무역에 한국의 미래를 건 아버지와 ‘깨닫는 집’

    • 쌀독 채우는 일과 쌀독 나누는 일을 평생 함께 한 부부

    라제건 동아알루미늄 회장은 무게는 줄이고 강성은 늘린 획기적인 알루미늄 소재를 개발해 전 세계 프리미엄 텐트 폴 시장의 90%를 석권했다. 홍태식 객원기자

    라제건 동아알루미늄 회장은 무게는 줄이고 강성은 늘린 획기적인 알루미늄 소재를 개발해 전 세계 프리미엄 텐트 폴 시장의 90%를 석권했다. 홍태식 객원기자

    “제건아, 너는 이다음에 건축을 하면 좋겠다.”

    “왜요?”

    “공간을 만드는 걸 좋아하고 창의적이잖니.”

    어린 제건은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먼 훗날 자신이 건축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공부든 뭐든 잘하는 든든한 세 명의 형(제민·제훈·제관)을 둔 자유분방한 막내였다. 공부는 뒷전이고 취미로 시작한 피아노와 가야금에 몰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막내의 재능을 꿰뚫어보았다. 강요하지 않고 기다리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공부를 할 것이고 결국 제몫을 해내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겠다는 아들과 경영학을 권하는 아버지가 충돌했을 때 연세대학교에는 학사편입 제도가 있으니 역사와 경영 둘 다 전공하면 된다고 중재한 것도 어머니였다. 

    라제건(71) 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인천 주안국가산업단지에 동아알루미늄을 창업해서 10여 년 만에 전 세계 프리미엄 텐트 폴 시장의 90%를 석권했다. 어느 날 그가 집 마당에 자신이 만든 작은 텐트를 설치해 놓자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제건아, 네가 결국 건축을 하는구나.”

    “에이, 텐트가 무슨 건축이에요.”

    “너만큼 집을 많이 짓는 건축가가 또 있니?”

    텐트는 야외에서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이동식 집이다. 라제건은 텐트 폴 제조로 출발했지만 끊임없이 소재를 혁신하고 디자인을 개발하다 보니 어느새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텐트 구조 전문가가 됐다. 지금까지 그가 설계한 텐트 모델만 3000개가 넘는다. 전부 그의 머리와 손에서 나온 디자인이다. 

    업계에서 라제건은 ‘텐트의 제왕’(2022년 미국 아웃도어 잡지 ‘아웃사이드’ 2월호 기사 제목이기도 하다)이자 ‘전설적인 텐트 디자이너 제이크 라(제이크는 그의 영어 이름이다)’로 통한다. 힐레베르그, 노스페이스, 마운틴 하드웨어, MSR, 몽벨, 빅 아그네스 등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들뿐만 아니라 미국 육군까지 동아알루미늄에서 제조한 텐트 폴을 사용한다. 동아알루미늄은 독보적 기술력으로 25년 넘게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그가 설계한 텐트에는 ABJL(Architecture by Jake Lah)을 공개하는 것이 불문율이 됐다. 그래야 더 시장에서 신뢰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다. 

    텐트 한 동에서 시작된 가족의 역사 

    올해 라제건 회장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경희궁1길 333)에 있는, 자신이 나고 자란 집터에 또 하나의 집을 지었다. 이번엔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4층짜리 집이다. 각당 신관이라는 문패도 달았다. 

    2025년 9월 완공된 각당 신관(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라제건 회장은 자원봉사자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1960년대에 선친이 지은 집을 허물고 그 터에 신관을 세웠다. 앞쪽 건물이 2010년에 완공한 각당복지재단 본관이다.

    2025년 9월 완공된 각당 신관(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라제건 회장은 자원봉사자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1960년대에 선친이 지은 집을 허물고 그 터에 신관을 세웠다. 앞쪽 건물이 2010년에 완공한 각당복지재단 본관이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간 어머니는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걸스카우트(당시 명칭은 대한소녀단)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던 시절, 젊은 여성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나중에 어머니가 될 소녀들이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미군에게 불하받은 텐트 한 동을 가지고 걸스카우트 운동을 시작해 평생을 자원봉사에 바치셨습니다.”

    10월 23일 열린 각당 신관 개관식에서 그가 목이 메어 부른 어머니는 바로 ‘한국 걸스카우트 운동과 자원봉사의 대모’ 김옥라(1918~2021) 여사다. 1952년 피란지에서 대한소녀단 중앙연합회 간사장에 임명된 김옥라는 미국의 걸스카우트 본부와 영국에 있는 세계걸스카우트 본부에 편지를 써서 전쟁 중인 대한민국에 걸스카우트가 활동하고 있음을 알렸다. 각지에서 격려의 편지와 후원금이 도착했다.  

    전쟁이 끝나자 세계본부에서 파견된 강사들이 체계적인 걸스카우트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그중 중요한 활동이 캠핑이었다. 한강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야외 화장실을 만들고 요리하는 것도 훈련의 한 부분이었다. 어느덧 한국에서도 1급 지도자들이 배출되고 연령대별 조직이 갖춰지자 구호가 필요한 곳을 찾아가고,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개설하는 등 본격적인 봉사활동에 돌입했다. 한국은 1957년 걸스카우트세계연맹 준회원국이 됐고, 1963년 정회원으로 승격했다. 유엔 가입도 하지 못한 나라(1991년 한국과 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에서 한국걸스카우트가 먼저 세계 기구 정회원이 된 것이었다. 

    한편 김 여사는 신학 공부를 계속하며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를 이끌었고, 1981년 미국 하와이에서 세계감리교 여성연합회 회장에 당선됐다. 한국 여성이 세계 기구 회장으로 선출된 최초 사례였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라익진(1915~1990) 박사였다.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의 여성을 들어 쓰시려는 것이니 받으시오. 내가 협력하겠소”라며 아내를 격려했다. 라 박사는 1947년 무역협회 설립에 참여했고 체신부 차관, 상공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동아무역, 동아스포츠, 동아컴퓨터, 한국정보서비스 등을 창업한 유능한 경영자이기도 했다. 

    “협력하겠다”는 약속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평생 모금하느라 애써 온 아내에게 “이제 내가 지원할 테니 당신은 봉사에 전념하라”고 했고, 1986년 체계적인 자원봉사자 교육을 위해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를 만들며 법인 설립에 필요한 3억 원을 선뜻 내준 것도 라 박사였다. 관공서에 가서 “자원봉사 단체를 등록하러 왔다”고 하면 “자원봉사가 뭐요?”라고 되묻던 시절이었다. 이것이 지금의 각당복지재단이다. ‘깨어나는 집’이라는 뜻의 ‘각당(覺堂)’은 라익진 박사의 호다.

    라제건 회장은 어머니 김옥라 여사의 뒤를 이어 2015년 각당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아내 오혜련 여사는 2021년부터 각당복지재단 회장으로 실질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가 세우고 어머니가 일군 재단을 막내아들과 며느리가 이끌어가고 있다. 홍태식 객원기자

    라제건 회장은 어머니 김옥라 여사의 뒤를 이어 2015년 각당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아내 오혜련 여사는 2021년부터 각당복지재단 회장으로 실질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가 세우고 어머니가 일군 재단을 막내아들과 며느리가 이끌어가고 있다. 홍태식 객원기자

    아버지가 세우고 어머니가 일군 재단,
    아들이 지은 깨어나는 집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가 활동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각당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은 가족들에게만 충격이 아니었다. 든든한 우군이 사라지자 재단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다. 몇날 며칠 눈물로 지새던 김옥라 여사에게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죽음을 공론화하자.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가 만들어졌다.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사무실로 쓰던 오피스텔을 임대 주고 그 수익으로 재단을 꾸려나가셨습니다. 그때는 집 거실이 곧 재단 사무실이었어요. 그때부터 독자적인 회관을 마련하는 것이 어머니의 오랜 염원이었죠. 20년쯤 지나 어머니는 자택 부지 일부를 뚝 떼어 재단에 내주시더니 제게 회관을 지어달라고 하셨습니다.”

    라 회장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재단의 ‘키다리 아저씨’가 됐다. 지난 30여 년간 회사 평균 매출액의 0.64%, 순이익의 4.61%를 사회에 환원해 왔다. 그 기부금의 대부분이 각당복지재단으로 들어갔다. 재단 설립 24년 만인 2010년 9월 각당복지재단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첫 회관을 마련했다. 생전에 김옥라 여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넷째는 사람이 너그럽죠. 온 세계에 대해서 관대해요. 세계를 보려고 하고요. 그런 넓은 마음이 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제가 혼자 살기가 힘들어서 제건이가 미국 출장 간 사이에 막내며느리 혜련이(오혜련)에게 들어와서 함께 살자고 했지요. 그래서 같이 살죠. 재단이 20년쯤 됐을 때 사무실을 만들자고 해서 땅은 제가 내놓고 건물을 넷째가 지었어요. 우리 집터가 300평이에요. 제가 100평을 각당복지재단에 기증했어요. 사무실 건물 지하가 강당이고, 꼭대기가 상담실인데, 거기서 지금껏 교육받은 사람이 몇만 명 돼요. 가운데 정원이 정말 예뻐요. 저는 아주 마음이 풍성하고 좋아요. 앞으로도 두 부부가 자기 가정일처럼 생각하고 복지재단을 키워주려니 생각하고 있죠. 만족해요.”

    2015년 김옥라 여사는 재단 이사장 자리를 넷째에게 물려주고 은퇴했지만 남은 할 일이 있었다. 각당복지재단은 자원봉사 교육뿐 아니라, 한국 최초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운동을 법제화하고 이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앞장섰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통해 죽음 준비 교육과 함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애도심리상담 전문가를 양성해 왔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에서 자원봉사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해온 만큼 이들이 활동할 공간은 늘 아쉬웠다. 김옥라 여사의 생전 마지막 사업은 각당복지재단 본관 옆에 신관을 짓는 일이었다. 

    “1966년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어머니는 평생을 사셨는데 막상 허물려 하니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엔 흔쾌히 그리 하라 하셨어요. 대신 기존 집 일부 석재와 벽돌을 신관 건축에 이용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어머니는 백 살이 돼도 항상 미래를 보고 사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각당복지재단 신관은 이름 그대로 ‘영감이 깨어나고, 생각이 자라며,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간’이 됐다.

    2020년 7월 라제건 회장이 한국자원봉사협의회 상임대표를 맡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네가 이제 데뷔했구나”라고 했다. 1994년 설립된 자원봉사협의회는 125개 회원과 250여 개 협력단체가 활동하고 있는 자원봉사단체 총괄 기구다. 아들과 함께 자원봉사의 미래를 설계하던 어머니는 신관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2021년 8월 30일 10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거인이셨던 어머니가 남긴 뜻을 계승하는 일은 이제 ‘너그러운 넷째’의 어깨 위에 놓인 유업이 됐다. 2022년 라제건 회장은 한국걸스카우트연맹 부총재에 선출됐다. 70년 전 어머니가 눈물로 일군 밭을 아들이 또 가꾸게 된 셈이었다. 이번에도 어머니가 옳았다. 

    문과 출신이 제조업을? 동아알루미늄 창업기

    1986년 말, 아버지는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제건을 불러들였다. 둘째 형 제훈과 함께 동아무역주식회사 일을 도우라고 했다. 아버지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으면서도 그는 제조업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마침 미국에서 화살 관련 사업을 하던 큰형이 고강도 알루미늄 시장에 대해 귀띔했다. 화살 제조의 핵심은 고강도 알루미늄 튜브 기술에 있는데 이스턴이라는 미국 업체가 이 시장을 독식하고 있으니 도전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눈이 번쩍 띄었다. 알루미늄 튜브 공장을 창업하기로 마음먹고, 동아알루미늄(DAC·Dongah Aluminum Corporation) 간판을 내건 것이 1988년 여름이었다.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르려면 엔지니어링에 기반을 둔 제조업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주위의 반대가 엄청났습니다. 사업이 의욕만 가지고 되는 줄 아느냐, 문과 출신이 무슨 제조업을 하느냐, 그 돈이면 차라리 강남에 건물 짓고 지하에 사우나 들여라. 그러면 매일 골프 치면서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고강도 알루미늄 소재를 연구하다 보니 텐트 폴 제조에 눈을 돌리게 됐다. 당시는 캠핑이 대중화되지도 않았고, 아웃도어 문화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텐트 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텐트 폴은 철보다 강도가 두 배나 더 높은 고강도 알루미늄을 튜브 형태로 압출(壓出)한 뒤, 이를 원하는 사양으로 가늘게 늘이는 인발(引拔) 공정을 거쳐 열처리로 완성한다. 하지만 회계로만 숫자를 보던 문과생 출신 사장이 생산 공정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동갑내기 처남인 오준호 카이스트 교수와 백홍구 연세대 재료공학과 교수를 가정교사로 두고, 국내외 알루미늄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입시를 치르듯 공부했다. 그 무렵 그의 머릿속에는 이 사업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이 튀어나왔다.  

    “텐트 폴을 구매하는 텐트 제조업체에는 무엇이 중요한가?”

    “텐트 제조업체에 텐트를 주문하는 브랜드에는 무엇이 중요한가?”

    “텐트를 사용하는 소비자에게는 무엇이 중요한가?”

    알루미늄 텐트 폴 제조로 시작한 라제건 회장은 끊임없이 소재를 혁신하고 디자인을 개발해 세계적인 텐트 구조 전문가가 됐다. 그가 손으로 그린 초기 스케치들.

    알루미늄 텐트 폴 제조로 시작한 라제건 회장은 끊임없이 소재를 혁신하고 디자인을 개발해 세계적인 텐트 구조 전문가가 됐다. 그가 손으로 그린 초기 스케치들.

    더 가볍게 더 강하게, 폴 하나로 텐트 시장 판도 바꾸다

    11월 11일 오후 각당 신관을 찾아갔을 때 라제건 회장은 긴 막대자 형태의 압출재와 새끼손가락만 한 카라비너 형태의 텐트 고리 샘플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이언으로 만든 이 고리는 묵직하고 튼튼해 보이지만 강도가 30kg이 채 안 나와요. 알루미늄으로 만든 이 작은 고리는 강도가 300kg이에요. 무게는 3분의 1밖에 안 되고 강도는 열 배나 높잖아요. 무슨 차이일까요? 소재도 중요하지만 시중에서 흔히 보는 고리와 디자인이 달라요. 힘을 받는 부위가 다르게 설계돼 있거든요.”

    텐트 메이커들의 숙원은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텐트를 생산하는 것이다. 캠핑 마니아들의 바람은 운반하기 좋고 설치와 해체가 간편한 텐트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텐트 폴이 달라져야 했다. 초기 패밀리 텐트(높이 2m 내외의 가옥형 대형 텐트)는 무거운 스틸 프레임을 사용하다 보니 무게가 30~40kg에 달해 설치도 운반도 어려웠다. 알루미늄 폴을 사용하면 무게는 3분의 1로 줄일 수 있지만 강성도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것을 개선할 수 있을까? 

    라 회장이 이런 고민에서 출발해 만든 신소재가 ‘DA17’이다. 일본의 텐트 메이커들이 DA17을 사용한 텐트로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너도나도 DA17만 찾았다. DA17 폴은 순서를 기다려야만 물량을 공급받을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동아알루미늄이 텐트 폴 제조에 뛰어든 지 5년여 만에 얻은 성과였다.

    DA17 텐트 폴은 텐트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전에는 메이커들이 제공하는 규격에 따라 텐트 폴을 만들어 납품했다면, 이제는 텐트 폴 제조업체가 공급망의 중심이 됐고, 텐트 폴에 맞는 텐트 모델을 제안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직선형 스틸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가옥형 패밀리 텐트가 곡선형의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라 회장의 다음 도전 상대는 백패킹 텐트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이스턴의 폴이었다. 이동하며 사용하는 백패킹 텐트는 가벼울 뿐 아니라 보관과 이동이 용이해야 했다. 이스턴보다 가볍고 이스턴보다 강한 것을 찾던 중 폴을 짧게 접어서 보관하기 위해 생기는 마디의 연결 부위가 전체 폴 무게의 30% 이상 된다는 데 착안했다. 이 부위의 무게를 줄여주는 ‘페더라이트(featherlite)’를 개발했더니 시장이 열광했다. 텐트의 경량화를 넘어 ‘초경량’ 시대가 열렸다. 동아알루미늄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합금 물질 TH72 시리즈를 개발해 페더라이트의 버전을 점점 더 고도화하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을 위해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 설치한 지름 8m의 코스모스 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을 위해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 설치한 지름 8m의 코스모스 돔.

    최근 개발한 지름 12m짜리 초대형 텐트.

    최근 개발한 지름 12m짜리 초대형 텐트.

    최근 라 회장의 관심사는 초대형 텐트다. 2017년 열린 ‘캠핑 앤드 피크닉 페어’에서 지름 8m, 높이 3.6m로 성인 35명이 빙 둘러앉을 수 있는 크기의 ‘코스모스 돔’을 선보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성인 몇 명이 20분 정도면 텐트 하나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02년 월드컵 때 만든 축구공 텐트의 지름이 4m였는데 그때도 어마어마하다고 했어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성화 봉송을 위해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 설치할 텐트를 주문받아 만든 게 지름 8m짜리였죠. 이후 9m, 10m 차츰 커져서 최근 지름 12m짜리까지 만들어보았습니다. 100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예요. 물론 아직은 ‘성공’이라 할 단계는 아닙니다. 제가 성공이라고 하는 기준은 일반 사용자 수준에서 설치와 해체가 가능해야 하고, 그 시간은 두 사람이 30분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왜 셸터(shelter)라고도 하는 초대형 텐트 개발에 몰두할까. 

    “야외 활동을 가로막는 주요 요인은 비, 햇볕, 바람이에요. 예를 들어 유럽은 수시로 내리는 비가 문제고, 호주는 피부암을 일으킬 만큼 강한 햇살이 문제죠. 야외에서 행사를 치르기로 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낭패잖아요. 만약 누구나 설치하기 쉬운 대형 텐트가 있으면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더워도 추워도 안심하고 언제든지 야외 모임을 할 수 있죠. 요즘은 햇살은 쏟아지고 바람은 막아주는 텐트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초대형 텐트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합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완공 30주년 기념 행사에 선보인 헬리녹스 ‘체어원 라지’ 의자. 접으면 한 손에 쥘 만큼 작고 가볍지만 성인 두 명이 앉아도 될 만큼 튼튼한 의자로 각광을 받으며 행사에 사용된 의자 1000개가 완판됐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완공 30주년 기념 행사에 선보인 헬리녹스 ‘체어원 라지’ 의자. 접으면 한 손에 쥘 만큼 작고 가볍지만 성인 두 명이 앉아도 될 만큼 튼튼한 의자로 각광을 받으며 행사에 사용된 의자 1000개가 완판됐다.

    ‘앉는 것이 믿는 것’ 아웃도어 라이프를 디자인하다 

    라제건 회장은 인터뷰 도중에 보여줄 게 있다며 사용하던 테이블을 뒤집더니 조립식으로 연결된 다리를 쓱 빼들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연결 부위는 시간이 흐르면 공차(公差) 때문에 다리가 덜렁덜렁 흔들리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알루미늄을 꽂아놓으면 이처럼 부드럽게 넣고 뺄 수 있을 뿐 아니라 흔들리지도 않죠.”

    그는 텐트에만 머물지 않았다. 아웃도어 라이프에서 텐트 다음으로 중요한 게 뭔지 생각했다. 의자였다. 무게 850g의 초경량 의자, 성인 남성 두 명의 몸무게(145kg)를 지탱하지만 접으면 신발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 그런데도 엉덩이를 붙이면 일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편안했다. 의도치 않게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수유 의자’로 소문이 난 것도 이런 기능성 덕분이었다.

    2012년 ‘헬리녹스’라는 브랜드로 출시한 ‘체어원(Chair One)’ 의자는 출시 이후 오랫동안 아마존에서 캠핑 의자 1위를 했고, 루이비통·슈프림·나이키 등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하며 ‘캠핑 의자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지금까지 120만 개가 팔린 초대형 스테디셀러다. 

    “비, 바람, 햇빛이 해결되면 사람들은 더 많은 활동을 야외에서 하고 싶어집니다. 그때 필요한 게 의자죠. 캠핑 의자에 앉아 자연을 즐기며 와인 한 잔을 마시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다음엔 의자 높이에 맞는 테이블이 필요하고, 그다음엔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침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 2월 헬리녹스는 새로운 캠핑 의자 ‘체어원 리(re)’를 선보였다. 이름은 리뉴얼이지만 완전히 다른 의자라는 게 라 회장의 설명이다. ‘체어원’은 초경량에 집중했지만 ‘체어원 리’는 무게를 조금 늘리더라도 착좌감을 개선하는 데 집중했다. 라 회장은 긴 설명을 하지 않았다. 헬리녹스의 슬로건 ‘Sitting is Believing(앉는 것이 믿는 것)’을 들려줄 뿐이다. 

    더 편한 캠핑의자에 대한 집념으로 2025년 선보인 ‘체어원 리’. 라 회장이 직접 의자를 들고 기능과 디자인을 설명하고 있다.

    더 편한 캠핑의자에 대한 집념으로 2025년 선보인 ‘체어원 리’. 라 회장이 직접 의자를 들고 기능과 디자인을 설명하고 있다.

    쌀독을 채우는 일, 쌀을 나누는 일을 함께 한다는 것

    “기업활동이 주로 쌀독에 쌀을 채우는 일이라면 사회복지와 자원봉사는 쌀독의 쌀을 필요한 곳에 배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쌀독에 누군가 쌀을 채우지 않으면 그래서 쌀독이 비어 있으면 아무리 쌀이 간절히 필요해도 나눠줄 쌀이 없습니다. 저는 쌀독에 쌀을 채우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왔고, 제 어머니께서는 제가 채워드린 쌀독의 쌀을 정말로 소중하게 아껴가며 나눠오셨습니다. 이제 그 두 가지 책임을 함께 지게 되었습니다.”

    2020년 10월 21일 제13차 전국자원봉사 콘퍼런스에서 한국자원봉사협의회 라제건 상임대표가 ‘왜 자원봉사인가’라는 제목으로 한 기조연설의 일부다. 올해 2월까지 만 4년 반의 상임대표 임기를 마치고 내려왔지만 지속 가능한 자원봉사를 위해 봉사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시민사회 속에 들어가 자생력을 갖춰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기업은 돈도 있고 사람도 있고 인프라도 있으니까 당연히 기부하고 봉사해야지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기부하는 기업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더러 ‘텐트 폴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텐트의 왕이 됐냐’고 묻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대부분의 업자들이 어떻게 하면 내 제품을 더 팔아서 더 많은 이익을 남길까 궁리할 때 저는 소비자가 무엇을 필요로 할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것이 영리와 비영리의 아름다운 만남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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