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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손자 교육법까지 챙긴 ‘꼰대 할아버지’

義 위해 죽은 이항복

  • 백승종 | 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손자 교육법까지 챙긴 ‘꼰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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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건대, 양구현 아전들이 네게 원망을 품고 처벌을 바란다고 하는구나. 극히 무례한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정상 더는 그곳에 머물지 못할 형편이거든 말이다. 설사 도주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서둘러서 꼭 빠져나와야 한다. 알겠느냐. 이 결정은 현장에서 직접 형편을 판단할 수 있는, 네 스스로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그는 아들에게 ‘신변에 위협을 느끼거든 양구를 벗어나라. 나중에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너는 무사히 내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며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 뒤 사건은 별 탈 없이 해결돼 아들은 양구에 계속 머물렀다.  

이듬해인 1613년(광해 5), 이항복은 손자의 교육 문제로 큰아들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교육 문제에 관한 이항복의 태도는 요샛말로 ‘꼰대’나 다름없었다.

“시아(時兒, 이름 미상)가 곧 ‘사략(史略)’을 뗀다고. 내 마음에 위로도 되고 다행스럽구나. 그런데 책은 한 번 쓱 보아 넘기기만 하면 안 되느니라. 숙독하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손자가 그 책을 다 뗐다 해도, 다른 책을 펼치게 하지 말고 두고두고 되풀이해 읽혀라. 50~60번을 반복해 읽은 뒤라야 다른 책을 봐도 괜찮다.”

손자 교육법까지 챙긴 ‘꼰대 할아버지’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이항복 집터 ‘필운대(弼雲臺)’. ‘필운’은 그의 호 중 하나다. [사진제공·종로구]

손자 공부에 잔소리

‘사략’을 마친 뒤엔 또 어떻게 할지, 그에 관해서도 할아버지는 생각이 많았다. 문과에 급제하지도 못한 큰아들의 실력을 의심했기 때문일까.



“만일 ‘사략’을 숙독했다면, ‘통감(通鑑)’은 굳이 읽힐 필요가 없다. 그러면 ‘논어(論語)’를 읽혀야 할 텐데, 그 공부는 또 그 나름으로 주의점이 있을 것이다.”

이항복은 손자의 공부에 관해 장기적인 방침을 이미 마련해뒀던 모양이다. 그는 큰아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시아가 7권이나 되는 책(‘사략’)을 읽었으면, 문리는 조금 트였겠구나. 당장 시사(詩詞)를 읽히고, 글쓰기[述作]를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리는 있어도 글쓰기에 서툴러, 결국 서궤(書櫃, 책장)처럼 쓸데없는 공부로 끝나고 말 것이다. 절실히 경계하고 경계하라.”

이참에 이항복은 손자를 서울로 데려다가 자신이 직접 지도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이런 중대한 교육 문제를 아들과 차분히 상의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듯, 사실상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사략’을 숙독하고 나면, 시아를 데려와야 하겠다. 여기서 내가 시도 가르치고 글쓰기도 가르칠 것이다. 다른 대가들의 책도 다 가르치고 싶다. 한 가지 책을 끝내면, 네게 보내 시아가 부모를 만나고 여기서 배운 것을 숙독하게 하자. 숙독이 끝나면, 또 이리로 와서 다른 책을 배우게 하리라. 절반은 서울에 머물고, 절반은 시골에 있게 하는 것이 시아에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항복의 정성스러운 지도에도 시아의 학문은 끝내 열매를 맺지 못했다. 아마도 시아는 요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씨 집안의 명예를 빛낼 아이는, 한참 뒤에 태어난 이시현(李時顯)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

이시현이 태어나기도 전, 이항복은 불귀의 객이 됐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로 조정에선 대북파의 세력이 강해졌다. 그들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마저 폐위할 것이었다. 이항복을 비롯한 몇몇 인사가 ‘폐모론’을 반대했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1617년(광해 9) 겨울, 이항복은 폐모론에 반대한 죄로 귀양길에 올랐다. 연로한 그는 중풍까지 앓아 반신불수가 됐다. 그럼에도 집권 세력은 무리한 유배 명령을 집행했다. 이듬해 여름, 이항복은 북청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유배를 떠날 때 이항복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다. 그는 상을 치를 옷가지를 챙기고 나서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나라를 잘못 섬겨 이런 죄를 얻었구나. 내가 죽거든 조의(朝衣, 관복)로 염(殮)을 하지 말고 심의(深衣, 선비의 웃옷)와 대대(大帶, 선비의 큰 허리띠)만 쓰라.”

정치적 파탄은 계축년(1615년, 광해 5)에 시작됐다. 대북파가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 일가를 몰살하고, 여덟 살짜리 영창대군에게 ‘역적의 괴수’라는 죄명을 씌웠다. 이항복은 거세게 반대했다. 장유는 그때의 정황을 차분히 기술했다.

“소인배가 기세를 떨쳐 다가올 재앙을 예측할 수 없었다. 두 명의 대신이 밤에 공(이항복)을 찾아와 회유하고 협박하였다. 그래도 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들과 조카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족의 안위부터 살펴주소서!’라고 애원하자, 공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훈계하였다. ‘나는 선조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재상이 되었다. 이제 늙어 죽을 목숨에 불과하다. 어찌 뜻을 굽히고 임금을 저버려 스스로 명의(名義)를 무너뜨릴까 보냐.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너희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북청에서 이항복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자, 광해군은 그의 관작(官爵)을 되돌려줬다. 이항복의 후손들은 대대로 명가의 전통을 이어 여러 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사도세자를 애써 보호한 이종성도 그의 후손이고, 신흥무관학교로 유명한 이회영·이시영 형제도 그러했다. 정녕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부러지지 않는 법인가. 

백 승 종


손자 교육법까지 챙긴 ‘꼰대 할아버지’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신동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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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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