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호

추적

최대 수혜자, 나집 절반의 성과, 김정은 한국 외교 뭐 했나

북한-말련 ‘김정남 외교戰’ 막후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입력2017-04-27 2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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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3일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일성 장손(長孫) 김정남 시신이 3월 30일 북한으로 넘겨졌다. ‘쿠알라룸푸르의 굴욕’이라는 일각의 평가와 다르게 이번 사건 최대 수혜자는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다. 나집 총리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국적 여성에게 살해된 ‘북한 외교여권 소지자 김철’의 시신을 ‘김철의 아내 리영희’의 요구에 따라 방부 처리해 북한에 넘기면서 평양의 국가 테러를 증명할 핵심 증거가 인멸됐다.

    김정남 시신과 함께 주(駐)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에 은신하던 암살 용의자 3명도 베이징을 경유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중국은 “국제관례에 따라 인도주의 차원에서 시신 경유에 필요한 협조를 했다”고 발표했다(3월 31일 중국 외교부).



    아무 일 없었던 듯…

    말레이시아는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화학무기로 살인을 저지른 북한에 피해자의 시신을 넘겨주고 용의자를 출국시킨 것에 덧붙여 이번 사건으로 중단된 비자면제협정 재개 검토도 덤으로 얹어줬다. 그렇다면 왜 최대 수혜자가 나집 총리일까. 조선신보(조총련 기관지)는 4월 2일 “이번 사건에 조선 측이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았음이 확인됐다”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조선에 대한 국제적 혐오감을 조성하려고 2월부터 대대적인 깜빠니야(캠페인)를 벌여온 세력들은 이번 사건이 조선과 말레이시아의 국교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고 떠들어댔으나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도리어 두 나라의 관계를 사건 이전으로 원상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진전을 지향해나가기로 했다.”



    나집 총리도 “북한에 억류된 인질의 안전한 귀환과 말레이시아의 주권 수호라는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됐다”면서 “북한과 단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 이복형 김정남이 신경성 독가스인 VX에 노출돼 사망한 게 확인됐으며 서방으로 망명한 아들 김한솔이 3월 8일 공개된 유튜브 영상에서 “내 아버지가 며칠 전 살해당했다”고 밝혔는데도 국가 테러 수사는 종료됐으며 북한과 말레이시아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이전 관계로 되돌아갔다.

    한국 언론이 “남은 건 북한-말레이시아 단교뿐”이라고 보도하던 때 정보 소식통은 “나집 총리가 말레이시아 국내 정치에서 이득을 보고, 북한 외교가 승리하는 형태로 사태가 일단락되고 있다”면서 “김정남 살해 사건 수사가 북한이 원하는 대로 미궁에 빠진 채 종결되는 수순을 밟는다”고 전했다. 해외에 체류하는 북한 외교관들과 접촉해온 이 소식통의 분석대로 사태가 전개됐다.


    말련은 북한의 友邦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외교전 막후를 들여다보기에 앞서 평양이 살해 장소로 말레이시아를 점찍은 이유부터 살펴보자.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44년간 우방으로 지내왔다(북한이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됐다고 여기기 십상이나 수교국이 161개국에 달한다). 말레이시아 헬프대가 김정은에게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2013년 10월 3일), 김정남 피살 5일 전인 2월 8일에는 북한-말레이시아 정부 간 상호협력 각서도 체결됐다.

    김정은이 헬프대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2013년 10월부터 김정남이 피살된 올해 2월까지 북한 언론이 공개한 두 나라 간 교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정일 회고 말레이시아 위원회 결성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경축 말레이시아 위원회 결성 △태양절(김일성 생일) 경축 말레이시아 위원회 결성 △김일성 회고 말레이시아 위원회 결성 △김정은 노작 연구 토론회 말레이시아에서 진행 △김정일 추모위원회 말레이시아에서 결성 △노동당 창건 경축 말레이시아 준비위원회 결성 △전승절(휴전협정일) 경축 행사 말레이시아에서 진행 △백두산 위인들의 업적 토론회 말레이시아에서 진행.

    말레이시아는 전통적으로 비동맹 외교노선을 견지해왔다. 북한 처지에서 말레이시아는 ‘친(親)북한’ 국가다. 북한 주민이 비자 없이 입국하는 나라는 현재 39개국으로 마카오, 캄보디아, 몽골, 이집트, 모잠비크, 탄자니아, 우간다 등이다. 싱가포르와도 비자면제 협정을 맺었으나 2016년 1월 4차 핵실험 이후 파기됐다.

    김정남이 거주하던 마카오는 북한 공작원이 무비자로 오갈 수 있으나 중국 영토다. 중국은 북한의 맹방(盟邦)이지만 자국 영토에서 벌어진 국가 테러를 용납할 나라가 아니다. 북한 처지에선 우방이면서 공작원이 비자 없이 오갈 수 있고 테러 대상을 유인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가 김정남을 살해할 최적지였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중국이 김정남을 정권 교체 카드로 만지작거렸을 수 있다”면서 “김정은이 그것을 알고 불안감 탓에 암살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중국이 김정남과 그 가족의 신변을 보호해왔지만 사건 당일에는 동행하지 않았다”고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밝혔다. 앞서의 정보 소식통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재발급 여권 받아가라”

    “북한이 살해 장소로 말레이시아를 선택한 것은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두 나라 간 관계가 좋았던 게 영향을 미쳤다. 사건을 무마시킬 수 있으며 공작원의 북한 복귀도 수월할 것으로 본 것이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의 해외공작 조직이 와해됐다. 첩보조, 실행조가 마카오에서부터 김정남의 동선을 24시간 따라붙을 수 없다. 김정남의 외교여권 만기일이 다가와 재발급이 필요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재발급된 여권을 받아가라고 김정남에게 요구했고, 김정남이 대사관에 들러 여권을 수령한 직후부터 따라붙은 것이다.”

    소식통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북한 외교관들에 따르면 2월 13일 김정남이 피살된 직후 평양과 쿠알라룸푸르의 합의가 이뤄졌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북한대사관에 당신네 외교여권 소지자가 공항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통보하면서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고, 북한대사관은 화장해 넘겨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합의가 마무리됐는데 말레이시아 당국이 뒤집었다는 것이다.”

    통신사 로이터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당국은 주(駐)말레이시아 한국대사관에 김정남 사망 소식을 통보했다.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을 혼동해 벌어진 일이라고 로이터는 보도했는데, 앞서의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외교관들은 평양에 다음과 같은 취지로 보고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김철의 시신을 넘겨주기로 한 당초 합의를 뒤집었다. 비리 의혹으로 퇴진 압력을 받는 나집 총리가 국내 정치에서 국면을 전환하고자 국제적 휘발성을 이용하고 있다.”



    지지층 결집 이뤄내

    말레이시아 당국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북한 여권 소지자 김철’의 시신을 화장해 북한대사관에 넘겨주기로 한 합의를 뒤집고 한국대사관에 알린 것이라면 북한 처지에선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북한은 ‘김철’의 시신을 부검 없이 인도하라고 요구했고, 말레이시아는 부검을 강행하면서 외교전이 벌어졌다. 3월 4일 말레이시아가 북한대사를 추방했으며 사흘 뒤에는 북한이 말레이시아인의 출국을 금지했다.

    나집 총리는 비자금 조성 및 리베이트 수수 의혹으로 퇴진 압박에 시달렸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에서 6억8100만 달러를 기부금으로 받은 것과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 시 잠수함을 도입하면서 프랑스 방위산업체 탈레스로부터 측근이 1억4200만 달러를 리베이트로 받은 의혹에 시달렸다. 국영투자기업 1MDB에서 수십억 달러의 나랏돈을 빼돌려 비자금으로 조성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까지 나서 “개인적 용도로 돈을 챙겼다”면서 “퇴진해야 한다”고 비난할 만큼 사퇴 압력이 거셌으나 나집 총리는 김정남 살해 사건을 활용해 안팎의 공격을 잠재웠다. 평양을 꾸짖으면서 북한대사를 추방해 강한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어떤 압박이나 협박도 받지 않겠다”면서 엄정한 수사를 강조해 부패 이미지를 희석하고 지지층을 결집했다.

    올해 조기 총선을 치러 정권을 재창출해 집권을 연장하려는 나집 총리가 국내 정치에 김정남 사건을 활용한다고 본 북한이 말레이시아인 9명을 ‘인질’로 삼는 벼랑 끝 대응에 나서자 나집 총리는 태도를 바꿨다. 국민의 안전 귀환이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하면서 ‘자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지도자’라는 이미지까지 얻고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사태를 봉합했다. 



    ‘설득 외교’ 제대로 했나

    북한은 상처 가득한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당초 계획대로 ‘김철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위장하는 데 실패해 화학전에나 사용하는 맹독성 물질로 살인테러를 자행하는 집단이라는 점이 만천하에 알려졌으나 말레이시아와의 외교전에서 사망자가 ‘평범한 시민 김철’이라는 거짓 주장을 사실상 관철시켰다. “김철은 자연사했으니 두 나라 사이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사건 이전으로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합의도 받아냈다. 김정은은 정적(政敵)이 될 수 있는 김정남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국가 테러라는 사실을 입증불가하게 만들었다.

    한국 외교가 김정남 시신이 북한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어떤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을까. 설득 외교를 제대로 벌였는지 의문이다. 외교부가 전방위로 설득 외교에 나서고 대통령권한대행이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격을 갖춘 형태로 국가 테러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는 등 적극적 외교 노력을 벌였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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