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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古傳幻談 - 예로부터 전해진 기이한 이야기

비밀서가

  • 윤채근|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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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호부터 한국 고전 텍스트에 현대적 상상력을 가미해 판타지 팩션으로 풀어내는 ‘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을 연재합니다. 필자인 윤채근 단국대 교수는 우리 고전문학 속에 감춰진 진실을 현대적 맥락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펼쳐왔습니다.
  • 매달 한 편의 주옥같은 우리 고전을 도발적이면서도 참신하게 풀어가는 작업을 흥미롭게 지켜봐주시길….
이건 무의식이란 악마가 벌인 기억과 망각의 변덕스러운 변주에 관한 이야기다. 오랜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은 고향인 경기도 마재 여유당에서 저술로 소일하며 살고 있었다. 평화롭게 끝날 것 같았던 그의 삶은 사망하기 한 해 전인 1835년, 예기치 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문제는 그의 유별난 호기심이었다.

조선어 어휘집 ‘아언각비(雅言覺非)’를 교정하며 자료 부족에 시달리던 그는 문득 한 인물을 떠올렸다. 한양 돈의문 밖 책 거간꾼 조통술이었다. 신통한 기억력으로 각종 분야 서책 목록을 꿰고 있는 그라면 정약용이 필요로 하는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정약용이 유배 가기 전 이미 고령이던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조통술은 조신선으로도 불렸다. 무슨 신선술을 익혀서가 아니라 나이를 먹지 않는 신기한 재주 때문이었다. 오랜만의 한양 나들이를 헛수고로 만들지 않으려면 그의 생존 여부부터 확인해봐야 했다. 그리하여 1835년 을미년 봄, 정약용은 한양 이화방에 살던 먼 처족 윤시춘을 통해 조신선의 근황을 탐문했다. 놀랍게도 조신선은 살아 있었다. 정약용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일처리가 분명하고 주도면밀하기로 정평이 난 윤시춘을 의심하긴 어려웠다. 그로부터 정약용의 관심은 온통 조신선에게로 모아졌다.



열다섯에 처음 만난 조신선

조신선을 처음 만난 건 정약용이 열다섯 살 되던 1776년 병신년 봄이었다. 선망하던 성균관 관람을 마치고 마포나루로 가기 위해 창덕궁 돌담길을 걷던 소년 정약용 앞으로 산더미 같은 책갑들을 지게에 지고 걸어오는 6척 장신의 사내가 있었다. 정약용은 그가 저 유명한 책쾌(冊儈) 조신선임을 바로 알아봤다. 책 구경이나 하자는 꼬마 선비의 간청에 못 이겨서라기보다 짐을 부리고 곰방대나 한 모금 빨 욕심에 조신선은 궁궐 담장 아래 주저앉았다. 그 당시 그는 50대로 보였다. 그런데 윤시춘이 최근에 만났다는 조신선 역시 50대로 보였다고 했다. 불사신이 아닌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약용은 한양 지인들에게 연통해 조신선에 대해 문의했다. 정보를 종합하면 이러했다. 조신선이 한양 서책가에서 최초로 목격된 건 병자년, 즉 1756년인데 그는 그때 이미 50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이후 20여 년을 한결같은 얼굴로 살아가는 그를 사람들은 신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윤시춘을 제외하고 조신선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홍문관 정자(正字) 이세필로, 시점은 경진년인 1820년이었다. 경진년 이후 조신선은 외부 활동을 거의 끊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희귀본을 납품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최초로 목격됐을 때의 조신선 나이를 쉰 살이라 가정하면 그의 현재 나이는 129세였으며 그 가운데 50대 얼굴로만 79년을 산 셈이었다. 생각할수록 괴이쩍고 신비로웠다. 혼란에 빠진 정약용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기억을 복구하려 노력했다. 이상하게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어지간한 단권 서책을 한 식경 안에 암기할 수 있는 그였지만 몇 차례 만나지도 않은 조신선과의 마지막 대면은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었다.


서른아홉 기억 속 조신선

조신선을 만나보기로 결심한 1835년 늦봄 어느 초저녁, 강가를 산책하던 정약용은 벼룩나물 사이에 핀 노란 씀바귀꽃을 꺾다가 갑자기 조신선과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해냈다. 처음에 그는 너무 통쾌해 콧노래를 흥얼댔다. 그러다 기억이 차츰 안정되며 제자리를 잡아갔고 자신이 왜 그토록 해당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는지 자명해졌다. 그건 그러니까 경신년, 한때 천주교도였던 그에게 익숙한 서력(西曆)으로는 1800년이었다. 정조께서 승하하신 해였다.

정조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넉 달 지난 가경 경신년 가을밤, 정약용은 남몰래 돈의문 밖 조신선의 책방을 찾았다. 종이이불로 몸을 감싸고 서고 귀퉁이 좁은 침상에 누워 있던 조신선은 머리맡 등잔대 위 호롱에 불을 켜고 일어나 앉아 갑자기 들이닥친 정약용을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갸름한 얼굴에 관운장처럼 검붉고 풍성한 수염을 한 그는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 듯했다. 정약용은 상대를 바라보지 않은 채 짧게 물었다.

“그 책, 다시 돌려주실 수 있소?”
부탁받은 책명을 확인한 조신선은 무릎에 두 팔을 깍지 끼고 한참을 망설였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갈색 눈빛이 정약용을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서고 뒤편으로 걸어간 조신선이 정약용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서고 뒤엔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작은 서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가를 옆으로 밀자 직사각형 통로가 나타났다. 큰 덩치를 간신히 입구로 밀어 넣은 조신선은 이내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엔 라틴어 성서가 들려 있었다.

씀바귀꽃이 있는 현실로 되돌아온 정약용은 저물어가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기억은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경신년 밤의 기억은 철저히 봉인된 것이었다. 아니, 전남 강진에서 겪은 고되고 파란만장한 유배 생활 속에 절로 잊혔는지도 몰랐다. 정조의 죽음은 그의 젊음과 활기를 한꺼번에 앗아갔고 노년의 그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정약용은 한강 양화진으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랐다. 양화진에서 돈의문 밖 조신선이 운영하는 책사(冊肆)에 이를 동안 그는 정조와 관련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우울했고 그냥 돌아가버릴까 수없이 망설였다. 그러다 그는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책사는 규모가 조금 확장됐고 예전엔 없던 점원이 보였다. 그는 내실로 안내되어 조신선을 기다렸다.

발음이 약간 어눌해져 있었지만 조신선은 먼 옛날 정약용과 처음 마주쳤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품위 있고 예의 바른 그의 행동은 옛 고객을 대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신선의 표정 속엔 추억이 없었다. 순간 상대가 가짜일지 모른다는 불안이 정약용에게 엄습했다. 정약용이 물었다.

“경신년 마지막 만난 날을 기억하시오?”
조신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약용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책도 기억나시오? 나전어(羅甸語)로 쓰인.”
대답 대신 조신선은 한참 동안 정약용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깊게 한숨을 몰아쉰 그가 붉은 수염을 쓸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억을 못하고 있는 건 당신 같군요. 따라오십시오.”



일흔넷에 다시 만난 조신선

조신선은 35년 전 경신년 가을밤에 그랬듯이 정약용을 데리고 서고 뒤편 작은 서가 앞으로 다가갔다. 서가를 옆으로 밀자 직사각형 통로가 나타났다. 오래 고여 있던 둔탁한 공기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정약용은 전율했다. 그는 자신이 감쪽같이 파묻어둔 기억의 유물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중요한 날의 기억을 깡그리 청산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직사각형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조신선이 시렁 위 등잔에 불을 붙이자 제법 큰 밀실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먼저 눈에 띈 건 벽에 만들어진 정교한 감실(龕室)들이었다. 감실마다 관이 안치돼 있었다. 그중 하나 앞으로 다가선 조신선이 정약용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날 당신에게 성서를 돌려준 건 이분이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관을 쓰다듬으며 정약용은 눈을 감았다. 경신년 가을밤, 그는 천주교도이기를 포기하기로, 배교하기로 결심했더랬다. 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삶은 파국에 직면해 있었고 빠른 배교만이 그나마 살길이었다. 배교의 그날 밤, 그는 라틴어 성서를 되찾으러 조신선을 방문했던 것이다. 현재의 조신선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날 이곳에 들어왔었습니다. 이분과 제가 함께 있었고. 기억하십니까?”

그랬다. 그날 정약용은 두 명의 조신선과 마주했었다. 아니, 관 속에 누워 있는 여러 조신선과 마주했었다는 게 더 정확하리라. 그들은 30년 주기로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전임과 신임이 오랜 시간 공존하도록 설계된 엄격한 현지화 과정을 거친 그들은 붉은 수염 속에 정체를 감추고 한 인물로 살아왔던 것이다. 정약용이 말했다.

“기억하오. 이분이 했던 말도 기억하오. 강인한 기억은 쉬운 망각 때문에 가능하다.”

기억의 천재였던 정약용은 동시에 망각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건 초인적인 암기력과 외국어 학습 능력을 갖춰야 했던 선교사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예수회에 보고서를 작성할 때를 제외하면 과거를 잊은 완벽한 조선인으로 살았으며 외모조차 조선인을 닮아갔다. 조신선이 물었다.

“이제 와서 왜 오신 겁니까? 그 성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정약용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도려냈다 되찾은 과거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고 내부의 무언가가 완강히 기억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뒤 조신선과 작별하고 책사를 나설 때 젊은 점원이 다가와 그에게 지팡이를 건넸다. 정약용은 무심결에 라틴어로 감사를 표했고 놀란 표정의 상대도 라틴어로 대답했다. 정약용은 거의 고개를 들지 않던 점원의 얼굴을 그제야 주의 깊게 바라봤다. 조선의 바람에 풍화되어 밋밋해진 젊은 서양인의 얼굴에 미래의 조신선이 숨어 있었다.

저물녘, 양화진 인근 객점에 여장을 푼 정약용은 계속 라틴어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라틴어로 말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기억의 폭풍이 그를 휘몰아 열다섯 살 때의 창덕궁 담장 아래로 데려갔다. 처음 본 조신선의 외모는 특이했지만 그렇다고 서양인 같지도 않았다. 소년 정약용에게 흥미로웠던 건 상대가 구사한 이질적인 조선어 억양이었다. 그런 섬세한 감각은 언어의 천재에게만 허락된 재능이었고, 그는 조신선의 정체를 즉시 알아챘다. 조신선은 서양어에 엄청난 흥미를 보인 어린 천재에게 헤어지기 직전 자신의 라틴어 성서를 선물했다. 정약용의 기억은 이 지점에서 다시 좌초됐다.

다음 날 마재로 돌아가는 여객선 위에서 졸고 있던 정약용은 자신이 왜 이 시점에서야 조신선을 만나려 했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건 ‘아언각비’ 때문이었다. 조선어 어휘를 정리하던 그의 무의식 속에 낯선 라틴어 어휘를 배우던 기억이 슬쩍 끼어들었고 그게 망각의 늪에 가라앉아 있던 조신선을 불러낸 것이다. 그는 혼신을 다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자 했다. 어릴 때 받은 라틴어 성서가 어째서 다시 조신선 손에 있었던 걸까? 그 성서를 왜 다시 돌려받으려 했을까? 정조께서 승하하신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었던가?

마재로 돌아온 정약용은 여유당으로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강가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러다 그는 또다시 씀바귀꽃을 봤다. ‘아언각비’가 실마리였다면 씀바귀꽃에도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석양을 마주하고 사념에 잠겼다가 마침내 가장 밑바닥에 방치되어 있던 기억을 떠올렸고 천천히 강변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씀바귀꽃 아래 봉인된 기억

규장각에 근무하던 젊은 시절, 정약용은 놀랍도록 호학한 정조에게 자신을 서학으로 이끈 라틴어 성서를 진상했다. 천주교에 빠져 있다는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리던 그로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동이었다. 정조는 한동안 정약용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독대가 있던 날, 정약용은 선비의 신념으로 천주교를 믿을 권리를 허락받았다. 정조는 정약용의 믿음을 허용했다. 대신 정조는 서학을 활용해 거대한 개혁을 완수할 사명도 그에게 부여했다.

천주교도 가운데에는 정약용이 속했던 남인이 많았다. 기득권자들인 노론에게 이들은 가장 위험한 저항세력이었다. 무자비한 탄압이 잇따랐고 남인들은 끝까지 서학을 수호한 신서파(信西派)와 노론에 붙어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공서파(攻西派)로 쪼개졌다. 남인 내부 실정에 밝은 공서파는 노론보다 두려운 대상이었다. 정약용은 자신의 라틴어 스승이던 조신선, 또 그가 이끄는 지하조직과 모든 인연을 끊었다. 대신 노론과 최후의 대결을 준비하던 정조의 팔다리가 됐다.

정조는 화성 천도를 통해 기성 관료들을 거세하고 그들의 간섭 없이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고자 했다. 정약용은 그런 왕을 모시고 서양의 과학기술과 평등사상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했다. 하지만 너무 무모한 계획이었다. 정조는 수구세력에 가로막혀 길을 잃었다. 어느 날 정조는 라틴어 성서를 숨길 것을 명했고 개화의 비밀스러운 상징이던 책은 원래 주인인 조신선에게 되돌아갔다.
씀바귀꽃은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여유당 앞 강변은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정약용은 멀리 정조가 누워 있는 건릉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속삭였다.

“레퀴에스카트 인 파케!”

이번엔 조선어로 속삭였다.

“평화롭게 잠드소서!”

경신년 가을밤, 라틴어 성서를 되찾은 정약용은 건릉을 향했더랬다. 정조 사후 그와 그의 형제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어쩌면 장렬히 순교해야 할 시점이었다. 정약용은 배교를 택했다. 그는 주님과 더불어 주군마저 가슴에 묻고 개혁가로서 이승의 소임을 더 이어가기로 결심했었다. 그리하여 그의 삶에 기적처럼 펼쳐졌던 두 번의 은혜를 잊기 위해, 배교와 배덕으로 이루어진 망각의 강을 건너기 위해 성서를 파묻어야만 했다. 어두운 건릉 한가운데 서서 그는 주군에게 속삭였었다. Requiescat in pace! 그의 기억과 함께 성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매장됐다. 어쩌면 조선 최초의 개화군주가 될 뻔했던 왕이 잠든 건릉의 씀바귀꽃 아래.




※각설 : 개혁군주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다산 정약용은 정조가 사망한 직후인 1801년, 역모를 꾀했다는 구실로 천주교도에게 가해진 정치적 탄압 사건인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1818년 해배돼 남양주시 여유당으로 귀환한 그는 관직을 단념한 채 평생 저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 작품은 해배 후 노년의 정약용이 지은 ‘아언각비’라는 어학서와 ‘조신선전’이라는 산문 그리고 젊은 시절 천주교도로서의 그의 이력을 결합한 팩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조신선의 정체와 개화군주로서의 정조 이미지는 상상력에 기초한 소설적 가설이다.
고전환담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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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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