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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증거조사 절차

  • 정재민|전 판사·소설가

냉정과 열정 사이 -증거조사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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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조사-낭독과 열람 사이

증거조사는 말 그대로 판사가 증거를 조사하는 것이다. 법정영화 속에 흔히 나오는, 증인을 놓고 검사와 피고인 측이 신문을 하며 공방을 벌이는 장면도 증거조사의 하나다. 증거조사를 하는 목적은 판사가 어떤 사실이 있었는지에 대한 심증을 형성하기 위해서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자백하면 증거조사 절차가 짧게 끝나지만 부인하면 길어진다. 따라서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인정하는지 여부는 판사, 검사, 변호인에게 초미의 관심사다.

피고인이 부인하면 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일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심리적 긴장도 고조된다. 판사는 중요한 쟁점을 놓칠까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말할 때에도 어느 한쪽으로 심증이 치우쳐 보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한다.

형사재판에서 입증 책임을 일방적으로 지고 있는 검사는 대부분 증거를 주도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증인이 어디 사는지 모르거나 소환해도 나오지 않으면 검사가 증인을 찾거나 법정에 데리고 나와야 한다. 증인이 법정에 나올 때를 대비해서 질문지(증인신문 사항)를 미리 작성해서 재판부에 제출해야 한다. 그 각각의 질문에 대해 증인의 예상 답변을 생각해보고 대비해야 한다. 증인을 신문하는 일 자체도 육체적으로 힘들다. 검사가 직접 몇 시간이고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면 변호인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무죄변론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유죄판결은 통계상 98%에 육박한다. 증거는 종류에 따라 조사 방법이 다르다. 증인에게는 신문한다. 사진의 경우에는 본다. 증거물이 있다면  제시한다. 서류에 대해서는 낭독한다. 낭독한다는 것은 가령 진술조서의 경우 검사나 법원사무관이 진술조서에 적힌 문답을 모두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의외였다. 서류는 당연히 눈으로 읽는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서류를 낭독하는 이유는 방청객을 포함한 다른 사람이 그 내용을 듣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재판은 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이다. 독일 법정에선 실제 모든 문서를 낭독한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에선 모든 서류를 그렇게 낭독하는 법정은 없다. 대부분 기록이 수백 쪽 이상인데 언제 다 읽겠는가. 그래서 법은 예외적으로 열람이 적절할 때에는 열람하도록 규정한다. 열람이란 눈으로 읽거나 훑어보는 것이다. 열람도 법정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하루에 수십 건을 재판하는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그래서 판사는 대개 법정에서는 대강 훑어보고 본격적인 열람은 사무실로 돌아와 판결문을 쓰면서 한다. 판사가 수시로 야근하면서 하는 일이 바로 이 열람이다.





증인신문-소나기와 가랑비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증거조사 절차

잭 니콜슨(왼쪽)과 톰 크루즈 주연 ‘어 퓨 굿 맨’ (1992)[동아 일보DB]

증인신문은 증거조사의 꽃이다. 증인을 불러놓고 검사와 변호인이 번갈아 신문한다. 물론 판사도 물어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판사, 검사, 변호사가 질문을 던지다 보면 증언이 풍부해지고 신빙성도 드러난다.

멋진 증인신문은 법정영화의 백미를 이룬다. 중학생 때 감명 깊게 본  영화 ‘어 퓨 굿 맨’의 명장면도 증인신문이다. 젊고 패기 넘치는 법무관(톰 크루즈)이 군사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온 해병대 대령(잭 니콜슨)에게 도발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자존심 강한 대령이 화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치며 법무관을 훈계하는 과정에서 그만 자기가 부하의 고문을 지시했다고 실토하고 만다.

다른 법정영화나 드라마에도 이런 장면이 곧잘 등장한다. 검사나 변호사가 격정적으로 변론과 질문을 해대면 궁지에 몰린 피고인이나 증인이 마침내 입을 열고 실토하는 식이다. 그러나 현실의 법정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한번 거짓말을 시작하면 끝까지 우기는 것이 보통이다. 경험이 적은 검사나 변호사 중에서 화가 나서 격한 어조나 날카로운 표현으로 증인을 압박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것은 규정상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소송 전략으로도 좋지 않다.

노련한 검사나 변호사는 한 방의 질문으로 제압하려고 덤비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기본에 충실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피고인이나 증인이 안심하고 거짓말을 계속 키워나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다가 틈틈이 작은 의심의 흠집을 낼 수 있는 질문들을 차분하게 던진다. 그 질문에 피고인이나 증인이 계속 거짓말을 해도 더 이상 진실을 추궁하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거나 재판장을 슬쩍 쳐다보거나 대답을 한 번 더 확인할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그런 흠집이 몇 차례 반복되면 판사 스스로 의심을 키워나가다가 결국 그 피고인이나 증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 마치 무술의 달인이 손가락으로 상대의 급소를 슬쩍 눌러놓으면 상대가 별것 아닌 줄 알고 돌아서서 걸어가다가 털썩 쓰러져 죽는 것같이. 주의할 것은 이것은 뉘앙스를 잘 읽어내는 노련한 판사에게만 통하는 비법이라는 점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   -증거조사 절차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신동아 201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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