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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상황엔 ‘핵무장 하겠다’ 中에 명확히 밝혀야”

서진영 사회과학원 원장

  • 이문기|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최악 상황엔 ‘핵무장 하겠다’ 中에 명확히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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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1992년 北 버려…또 버리지 말란 법 없다
  • ●최대한 버티다 北 버릴 가능성 60%라고 봐
  • ●한중수교史는 사드 이전, 이후로 양분될 것
  • ●시진핑 1인 체제? 공산당 몰락으로 가는 길!
서진영(75) 고려대 명예교수는 중국학 개척자다. ‘학계 최고 중국 전문가’로 통했다. 광복군으로 활동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1920~2011)을 1세대로 보면 2세대 중국통(中國通).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워싱턴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영삼 정부에서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한중전문가공동연구위원회 한국 측 위원장을 맡았다. 김준엽 전 총장이 이끌던 사회과학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중국통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스승입니다. 후학들이 선생께서 쓴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어떻게 지냅니까.
“아는 게 중국밖에 없으니 중국을 들여다봅니다. 숙명여대 학부에서 강의해요. 고되나 이점이 많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소통하면 나이를 잊어요. 강의하려면 공부해야 하기에 긴장감 갖고 중국을 살핍니다. 또 사회과학원 원장으로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와 ‘김준엽 렉처 시리즈’를 개최합니다.”

김준엽 전 총장과 인연이 각별하죠.
“영향을 미친 정도가 아닙니다. 김준엽 선생 덕에 중국을 공부했어요.”
김 전 총장은 광복군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석을 닦았다. 군부 독재에 항거했으며 양심의 훼절도 없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1985년 권력에 의해 총장직에서 물러날 때 학생들이 총장실로 쫓아가 광복군 노래를 합창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100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3000리 3000만의 우리 동포를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갑세다.”



중국을 공부한 것도, 고려대 교수가 된 데도 김 전 총장이 영향을 미쳤다.

“1969년 시애틀로 떠날 때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에 귀국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습니다. 유학은 허락할 테니 돌아올 생각 말라는 거였죠. 학생운동한 이들을 반(半)추방 비슷하게 내보냈습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은 후 격변기가 도래합니다. 고려대 총장이던 김상협 선생과 김준엽 선생이 귀국을 도와줬습니다. 김준엽 선생이 총장이 된 후 나한테 학생처장을 맡으라더군요. 학생운동하다 반(半)추방당한 놈에게 학생 탄압하는 자리를 맡긴 겁니다. 총학생회 부활이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김영춘(현 해양수산부 장관)이 선봉이었죠. 학도호국단을 수호하고 총학생회 부활을 막으라는 게 정부 주문이었습니다. 길은 두 갈래로 나 있었습니다. 하나는 학생에게 죽는 길, 다른 하나는 정부에 죽는 길. ‘총장 선생은 어떻게 할 겁니까?’ 물었더니 ‘명예롭게 쫓겨나겠다’고 말씀하더군요. 영원히 죽는 길이 아닌 잠시 죽는 길로 나아간 겁니다.”

쑹청유(宋成有) 베이징대 교수가 쓴 ‘중한관계사’에 김 전 총장 활약이 정리돼 있더군요. 그 책을 읽으면서 김 전 총장이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총장에서 쫓겨난 뒤 그 양반이 국내 활동을 못하잖아요. 한국 내 중국학, 중국 내 한국학 부흥에 힘을 쏟기로 결심합니다. 베이징대 한국학연구중심을 비롯해 중국 10여 개 대학 한국학 연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합니다. 지금은 중국이 돈이 많아 한국 지원이 절실하지 않으나 그때는 달랐어요. 지금도 김준엽 선생 이름을 걸고 중국에서 학술회의를 하면 한국학 전문가가 몰려옵니다. 김준엽이란 이름이 달린 행사에 참여하는 걸 영광이라고 여기는 거죠.”  



붉은 旗 나부끼던 美 캠퍼스

그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때는 중국 연구가 척박하던 시절이다. 공산주의 국가를 공부하는 건 금기시됐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문화대혁명(1966 ~1976)이 한창이었습니다. 서구의 좌파 학생들은 마오쩌둥(毛澤東)에 열광했고요. 중국을 연구하기로 한 데는 이념적 관심이 영향을 미쳤습니까.  
“이념적 관심이 없었다고 얘기할 순 없죠. 우리 세대는 지구의 반쪽에서만 살았습니다. 자본주의만 봤지 사회주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몰랐죠. 이데올로기를 떠나 나머지 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어요. 한국에서 중국을 아는 사람이 없다시피 할 때입니다. 중국어 공부할 곳도 없었고요. 한국 역사는 지정학적 위치, 다시 말해 중국과 연관 짓지 않고는 설명을 못합니다. 한국의 운명은 좋든 싫든 중국과 관련이 있어요. 중국을 모르고선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1969년 9월 워싱턴대에 짐을 풀었습니다. 베트남전 반전 데모가 치열했어요. 중국 깃발이 캠퍼스에 나부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적색기가 휘날리는 곳에 서 있는 걸 누가 알면 내 운명은 끝난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미국 신좌파(New Left)는 문화대혁명을 인류의 대실험으로 여겼죠. 정통 학파는 광기(狂氣)라고 봤고요. 세미나실, 학회에서 양쪽이 충돌하는데 어안이 벙벙하더군요. 한국이 아닌 곳은 이렇듯 논쟁을 벌이면서 사는구나 싶었죠. 당시 경험이 학문적,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해줬습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가 토론을 통해 균형 잡는, 동양식 표현의 중용지도(中庸之道)를 깨우친 겁니다.”


“한중 관계, 봄날은 갔다”

한중수교 25주년 기념식이 따로 열릴 만큼 한중 관계가 경색됐습니다. 경제, 사회 영역에서 중국과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에 취해 전략적 인식 격차를 간과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8월 22일 화정평화재단 강연에서 말했듯 앞으로 한중수교사(史)를 서술할 때 사드 이전, 이후로 양분해야 할 겁니다. 사드 배치 문제가 아니라 사드로 상징되는 한중 관계 변화 양상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드 이전의 한중 관계가 폭발적으로 발전한 배경이 뭐였는지부터 살펴봅시다. 1992년 수교의 밑바탕에는 한국·미국·중국이 가진 전략적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그 같은 공감대 속에 한중 관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겁니다. 현재는 그 공감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는 “공감대가 약화한 것은 개혁·개방 성공으로 중국이 강대국이 되면서 미·중 관계가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라면서 “2008년을 경계로 아시아에서 전략 갈등이 노골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2년 한중수교 전후 한국·미국·중국이 공유한 전략은 세계화 흐름을 적극 활용하면 윈-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89~1991년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탈냉전이 일어납니다. 세계화와 탈냉전은 동전의 앞뒤죠. 중국은 이 같은 격동기에 톈안먼 사태(1989년 6월 4일)를 겪습니다. 미국 조야와 학계가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을 언급합니다. 체제 경쟁이 끝났다는 거였죠. 중국이나 북한, 쿠바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경제 제재를 통해 중국을 옥죄면 자본주의가 세계를 완전히 제압한다고 본 겁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 아버지 부시(조지 H W 부시)였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게 부시는 대(對)중국 관계를 확대·발전시키는 게 미국 국익에 맞고 세계 발전에도 기여한다고 봤습니다. 여론, 의회 압력 탓에 베이징을 공격하면서도 비밀리에 특사를 보내 ‘너희들과 잘 지낼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서방세계 앞잡이와 손잡다

한국은 비슷한 시기 북방 정책에 나섭니다.
“한국에서도 논쟁이 벌어집니다. 한중수교 하려면 대만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대만을 어떻게 버리느냐, 중국에 다가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과 ‘중국과 무조건 수교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뉩니다. 나는 중국과 수교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봤고요. 외교부 관리들이 미국과 서방의 대(對)중국 제재가 한창인데 한중수교에 매달리는 것은 우습지 않으냐고 할 때입니다. 외교부 관리들에게 ‘미국에 알아봐라, 오히려 좋아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워싱턴은 이해한다(understanding)는 반응을 보였죠. 노태우 정부는 중국뿐 아니라 돈을 주고서라도 소련과 수교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내립니다. 소련이 붕괴하는 통에 차관으로 제공한 게 나중에 문제가 됐으나 적은 비용으로 잘 처리했다고 봐요. 북방 정책을 전략으로 삼은 것은 노태우 정부의 업적입니다. ‘베이징,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으로’가 북방 정책의 슬로건이었습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와 한국 북방정책, 미국 대중 정책이 맞물려 교집합을 이뤘다는 거군요.
“한중수교가 이뤄진 1992년 덩샤오핑이 걸은 길을 봅시다. 톈안먼 사태 유혈 진압 최고책임자가 덩샤오핑 아닙니까. 자오쯔양(趙紫陽), 후야오방(胡曜邦)이 주도한 개혁의 시대는 끝났으며 중국은 보수 정권 아래에서 체제 옹호로 가리라고 서방이 내다볼 때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나섭니다.”

남순강화는 덩샤오핑이 1992년 1월 18일~2월 22일 우한·선전·광저우·상하이를 돌면서 개혁·개방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을 가리킨다.

“남순강화는 중국이 굴기하는 데 횃불을 밝힌 일대 사건이에요. 덩샤오핑이 남순강화에 나서기 이전까지 베이징은 한국을 ‘서방세계의 앞잡이’로 여겼습니다. 그런 한국과 수교를 통해 중국은 서방에 ‘앞으로 세계와 지속적으로 협력한다. 개혁·개방에 나선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중국이 세계에 편입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죠. 요컨대 1990년대 초반 한국·미국·중국 전략가들 사이에 세계화 시대에는 체제, 이념의 차이를 넘어 협력하면 윈-윈이란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수교 이후 한중 관계가 역사상 유례없이 경이적으로 발전한 까닭도 그래서고요.”


중국의 굴기, 미국의 쇠퇴

현재는 전략적 공감대가 깨진 겁니까.   
“탈냉전, 세계화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중국입니다. 한국도 이득을 봤고요. 상대적으로 수혜가 적었으나 미국도 덕을 봤습니다. 덩샤오핑이 가진 전략이 대단한 게 중국은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습니다. 소련과 구분되는 점이 그것이에요. 베이징은 서구가 만들어낸 시장경제 바깥에 사회주의 질서를 별도로 꾸립니다. 쉽게 설명하면 대형마트 안에 들어간 게 아니라 가게를 따로 차린 후 힘을 키워 굴기한 후 경쟁에 나선 겁니다. 워싱턴은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중국이 들어오면 흐물흐물해져 서구화할 것이라고 내봤으나 베이징은 그들의 방식으로 성공합니다. 워낙 덩치가 큰 놈이 부상하니 미국도 혼란스러울 수밖에요.”

베이징이 동아시아에서 패권 의지를 드러냅니다. 한국에도 힘을 투사하려 하고요.  
“신흥 강대국 출현은 세력 개편을 촉발합니다. 베이징은 최소한 아시아 문제는 미국과 공동으로 처리할 만큼 강국이 됐다고 여깁니다. 세력 전이(Power Shift) 시대에는 도전국과 패권국 간 경쟁이 일어납니다. 전략적 공감대가 무너지는 터라 한중 관계, 미중 관계가 요동칠 수밖에요.”

그는 2008년이 분수령이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2008년을 ‘핀 포인트’해야 합니다. 중국이 올림픽을 치릅니다. 개막식에서 유교 문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중화문명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리죠. 중화제국이 돌아왔다고 시위한 겁니다. 같은 해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합니다. 서구식 경제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요. 미국의 쇠퇴, 중국의 굴기가 엇갈린 해가 2008년이에요. 그때부터 국제 무대에서 중국의 목소리가 거칠어집니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면서 싫은 건 싫다고 말하죠.”

한국과 중국은 경제로 복잡하게 얽혔습니다. 계속 갈등을 빚으면 서로에게 손해죠.
“두 나라는 서로 필요한 게 많아요. 아직도 보완적 관계가 이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과장해 말하면 우리가 발전한 데는 일본 도움이 컸습니다. 경험을 복사해왔으며 자본과 기술을 들여왔죠. 일본을 따라잡으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나 우리가 일본을 극복했다고 얘기할 순 없습니다. 한국과 중국도 비슷해요. 중국이 한국 발전 모델을 참고했습니다. 한국과의 경제협력은 앞으로도 중국에 필요해요. 위안부 문제 등으로 감정은 나쁘나 한국, 일본의 상호 의존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일관계가 갈등 속에서도 그럭저럭 이어지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사드 이후 한중 관계도 한일 관계와 비슷할 것으로 내다봅니다.”  



“봄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

한중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 한국·중국·미국의 공감대에서 비롯했다는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공감대가 사라지거나 약화하는 추세를 바꿀 수 있을까요.
“국제정치 양상은 복잡해요. 이중 구조로 이뤄졌습니다. 세계화가 하나, 권력 전이가 다른 하나예요. 세계화 시대는 윈-윈이 가능합니다. 협력할수록 이득인 거죠. 경제 분야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권력 전이는 제로섬 게임입니다. 윈-윈, 제로섬 두 세계가 복잡하게 얽힌 게 당대예요. 미중 관계를 봅시다. 파워 게임을 할 때는 굉장히 적대적인데, 경제 분야에선 굉장히 얽혀 있습니다. 협력, 갈등, 경쟁, 견제가 뒤섞였어요. 복잡한 관계를 단순하게 봤다간 큰코다칩니다. 트럼프 행보가 위험해 보이는 까닭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해 들여다봐서예요.

한국 외교는 영리해야 합니다. 권력 전이만 들여다보면 중국 편들까, 미국 편들까 고민하게 됩니다. 어느 쪽 편들어도 손실이 납니다. 한국이 양자택일의 순간으로 몰려선 안 돼요. 출병을 거절하면 망하고 요구에 응해 전쟁에 나서도 망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몰리지 않도록 사전에 준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미중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느 쪽을 선택해도 치명적 손실이 발생할 겁니다.”


“복덕방 외교로 美中 다뤄야”

미국, 중국 전략 갈등이 군사 충돌로 비화할 수도 있다고 봅니까.
“일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패권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깁니다만 ‘안 올 것이다, 안 올 수 있다’고 봅니다. 왜 안 오느냐? 핵무기에 의한 공포의 균형 탓에 미국, 중국이 전쟁하면 다 죽습니다. 승자가 없어요. 극단적 상황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이 대목에 한국의 활로가 있습니다. 속된 말로 ‘복덕방 외교’를 해야 합니다. 중개 외교의 슬로건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는’ 겁니다. 복덕방은 사는 사람, 파는 사람이 윈-윈 할 때 잘 돌아가요. 어느 한쪽이 이익 보고, 다른 쪽이 손해 보면 중개 한 번 하고 문 닫아야 합니다.

균형 외교와 중개 외교는 다릅니다. 균형 외교는 19세기 영국처럼 우리가 한쪽 손을 들어주면 승패가 뒤바뀔 때 가능합니다. 한국이 중국을 편들면 베이징이 승리하고, 워싱턴을 편들면 미국이 승리하는 구도에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거예요. ‘까불지 마, 둘 다 가만히 있어’ 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얘기라는 겁니다. 한국은 균형자(balancer) 구실을 할 힘을 갖지 못했어요. 우리는 어느 쪽에 서도 승패와는 무관합니다. 균형 외교는 이론적으로 뭔가 착각한 것입니다.

복덕방 외교는 자본금이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중개 외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용입니다. 신용과 아이디어로 미국과 중국이 윈-윈 게임에 나서도록 하는 게 한국 외교가 지향할 길이에요.”

중국과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1990년대 중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중국이 북한과 특수 관계에 있다는 걸 잘 안다. 한국과 미국도 마찬가지다. 북·중 관계, 한미 관계에 대해선 서로 얘기하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1992년 한중수교 때 구동존이(求同存異·서로 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서로 다른 점은 건드리지 말자는 겁니다. 문제는 서로 다른 점이 뭐냐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한미동맹과 북·중 특수 관계를 왈가왈부하면 판이 깨진다는 상호 이해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같은 상호이해가 사라지는 형국입니다. 그게 큰 문제예요.”



韓은 애인… 北은 조강지처

중국 학자들이 북한을 두고 ‘조강지처(糟糠之妻)’라더군요.   
“천안함 사건 직후 중국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아침에 공항으로 출발하려는데 아내가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아무 말하지 않는 나라가 무슨 친구라고 새벽부터 달려가느냐’고 힐난하더군요. 그 말이 맞아요. 칭하이(靑海) 대지진 조문이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단상에 올라 지진으로 입은 피해에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측에서도 천안함 사건에 유감을 표명하리라고 기대했죠. 그런데 아무 말도 없는 겁니다. 다음 날 중국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오찬이 있었는데 인사말을 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친구라면 벗이 돌에 맞아 피 흘리고 쓰러지면 어디 다친 데 없냐고 묻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 중국 정부만 아무런 코멘트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랬더니 중국 친구들이 난감해하더라고요.

그날 오찬을 함께한 중국 친구와 나중에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때도 조강지처 얘기가 나옵디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한국은 애인이지만 북한은 조강지처다. 조강지처가 악독하고 포악해 이혼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혼이 그렇게 쉽냐. 고민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그런데 너희는 이혼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보고만 이혼하라고 하느냐, 그건 경우에 맞지 않는다.’ 그 얘길 듣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 싶더군요. 우리는 이혼 안 하고 재미만 보면서 상대에게는 이혼을 요구하는 게 상식으로도 맞지 않죠. 중국인이 말하는 조강지처 얘기의 함의가 이렇듯 큽니다.”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상황에서 베이징이 평양과 이혼할까요.
“북한을 어떻게 다룰지 중국이 결정하게 해야 합니다. 이혼하든, 구박하든 제 마누라니 제가 알아서 하게 나둬야 합니다. 제3자가 이혼하라, 마라 하면 엇나갈 수 있습니다. 북한을 두고 중국을 압박해선 안 돼요. 다만 조강지처를 계속 데리고 살면 앞으로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지 알려줘야 합니다.

누구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던데 중국은 1992년 북한을 한 번 버렸습니다. 두 번 못 버리란 법 없어요. 북한과의 관계가 국익을 위협한다면 평양을 포기할 겁니다. 미국이나 한국이 버리란다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국익에 따라 결정하는 겁니다. 

한미동맹도 똑같습니다. 한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점을 중국에 노골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한중 관계는 구동존이로는 안 됩니다. 요즘엔 구동화이(求同化異·차이점을 인정하면서 같은 점을 추구해 나가자)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구동화이가 말이 됩니까. 다른 점이 어떻게 같아져요?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5월 11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구동화이를 강조했다.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더욱 노골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너하고 나는 달라, 이것도 다르고 저것도 달라, 그럼에도 잘 지내자’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서로 조화를 이루나 같아지지는 않음)이라는 말을 씁니다. 사이좋게 지내되 의(義)를 굽혀 좇지는 아니한다가 돼야 해요. 화이부동 원칙으로 한중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절정기의 70%까지 복원할 수 있습니다.”


“사드 배치는 주권적 사안”

중국은 한국을 향해 “초심을 잃지 말자”고 강조합니다.
“나 역시 초심을 강조합니다만 내가 말하는 초심과 중국이 말하는 초심은 다릅니다. 구동존이에 따라 사드는 핵심 이익을 위협하는 문제니 그만두라는 게 중국이 말하는 초심인데, 나는 ‘존이’에 방점을 찍습니다. 사드 배치는 우리의 주권적 사안입니다. 북한이 중국을 어떻게 하든 그것이 중국의 주권적 사안인 것과 똑같습니다. 상대국의 주권적 결정을 존중하는 게 내가 말하는 초심입니다.”

▼평양은 세력 전이 상황을 적극 활용해 핵 개발에 속도를 냈습니다.
“북한의 도발이 강대국 간 갈등을 확대·재생산합니다. 전략적 공감대의 붕괴로 인한 세력 개편 양상이 함축적으로 표출된 게 사드 문제예요. 사드 이전, 이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봄날은 갔다’입니다. 봄날은 다시 오지 않아요. 다만 최절정기의 60~70%까지는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북한 핵을 결국 용인할까요.  
“중국 내부에 고민이 많을 겁니다. 북한이 핵무장을 완성하면 동아시아에 주는 파급이 상당합니다.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날지 지켜봐야겠으나 최대한 버티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수준에서 움직일 겁니다. 북한이 응답하지 않으면 원유 공급 중단까지도 갈 것이라고 봅니다. 제재와 설득에도 북한이 막무가내로 나오면 끝까지 버티다가 북한을 버릴 겁니다. 북한을 포기할 확률이 60%가량 된다고 봐요. 중국 국력이 커졌으나 앞으로 10년은 미국과 협력해야 합니다. 미국과 틀어지면 중국이 입을 상처가 큽니다.”



차이나 3.0 시대의 공산당

베이징이 평양을 포기하게 하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면 전술핵 배치, 더 나아가 핵무장을 하겠다고 베이징에 명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핵무장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핵무장 의지를 밝히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북한을 포기하는 쪽으로 중국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시진핑 체제가 반(反)부패운동을 광범위하면서도 과감하게 진행합니다. 베이징은 청렴정부 건설을 위한 단호한 개혁이라고 말하고 국민 대다수도 환호하고 있지만 최고지도자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됨으로써 정치 발전이 퇴행하거나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습니다. 서구 언론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21세기 중화제국’ 황제 격이 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마저 나옵니다. 현재 시진핑의 통치 방식을 보면 지나치게 정적(政敵)을 많이 만들면서 자기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합니다. 이전까지 중국 정치를 들여다본 틀에서 보면 중국 정치가 불안정해야 정상인데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오쩌둥 시대를 차이나 1.0, 덩샤오핑 시대를 차이나 2.0, 시진핑 시대를 차이나 3.0으로 나눠봅시다. 차이나 2.0을 받쳐준 것은 개혁·개방이었습니다. 개혁·개방을 통해 체제 옹호 세력을 키워냈고, 그것이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차이나 3.0 시대, 베이징은 개혁·개방이 심화·확대·발전한다고 말하지만 진행이 잘 안 됩니다. 차이나 2.0 때까지만 해도 개혁·개방을 주도한 게 공산당이었습니다. 차이나 3.0 시대에 진입한 후 공산당이 기득권 세력이 돼버렸습니다. 말로만 심화·확대·발전이지 공산당이 개혁·개방에 저항하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개혁·개방을 심화·확대·발전시키겠다는 구호가 안 통하죠.

공산당이 기득권 세력이 된 결과가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입니다. 권력 집중을 통해 더 큰 개혁을 하자는 게 중국 논리인데 악순환이 될 수밖에 없어요. 1인에게 힘이 집중되면 권력 자체가 불안정해집니다. 개혁·개방을 심화·확대·발전시키려면 권력 집중이 필요한데, 권력 집중을 하려니 개혁·개방이 안 되는 딜레마에 봉착한 겁니다. 시진핑 1인 체제가 구축되느냐는 지켜볼 일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공산당이 몰락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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