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호

윤평중 시론

문재인식 反민주·反공화 ‘진리정치’

‘운동권적 선악이분법’, 민중의 삶과 나라 흔든다

  •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pjyoon@hs.ac.kr

    입력2019-04-2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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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은 갔다

    • 일자리 참사, 양극화 확대, 인사 실패, 저자세 대북 유화책…

    • 문 대통령 ‘나만 진리고 선’에 함몰

    • 실정(失政)은 남의 탓이자 과거 탓

    • 정책이 재앙이 돼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기자단]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기자단]

    문재인 정부가 출범 3년차를 맞는다. 국민적 환호와 함께 호기롭게 시작한 2년 전의 봄날은 갔다. 우리 사회엔 긍정과 통합보다는 부정과 적대의 기운이 가득하다. 경제엔 먹구름이 끼었다.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북핵 위기 해결은커녕 남북관계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정권 차원의 역사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온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 문재인 정부가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을 독식하고 사법부와 언론을 재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20년 집권의 호언장담이 무색할 만큼 민심은 차갑다. 흔들리는 민심의 일단을 4·3 보궐선거 결과가 섬광처럼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부의 위기는 대부분 자초한 것이다. 압도적인 촛불 민심으로 타오른 거대한 정치동력을 2년도 안 돼 소진한 것은 정권 자체의 무능과 무정견 외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일찍이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도살장에 비유한 바 있다. 한국 현대정치사야말로 집권 세력의 도살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 정권에 대한 대중의 과잉기대와 과대환멸의 악순환은 갈수록 빨라지는 추세다. 집권자의 생명주기도 그만큼 짧다. 촛불의 도정(道程)에서 정치적으로 ‘도살된’ 이명박·박근혜 정권조차 한때는 보수의 장기 집권을 꿈꿨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사의 기시감을 곱씹게 된다.

    정부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많은 증거

    문재인 정부의 개혁 조치들은 지지부진하다. 문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여러 경험적 증거가 쌓이고 있다. 민생고가 극심하고 외교안보는 흔들린다. 소득주도성장의 부작용과 일자리 참사, 양극화 확대, 거듭된 인사 실패, 저자세 일변도의 대북 유화정책, 외교안보 균열 등이 생생한 사례들일 것이다.
     
    구체적인 정책 실패도 심각하지만 정책 실패를 낳은 근원적 이념을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복되는 정책 실패와 인사 참사를 보면서도 문재인 정부가 당당한 것은 ‘내로남불’의 두꺼운 얼굴 덕분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민심 이반의 기미를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특유의 정치철학인 ‘진리정치’ 때문이다. 결국 문 정부의 진리정치야말로 출범 2년 만에 국가의 위기를 부른 사상적 근원이다.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신한다. 자신들이 촛불혁명의 대의를 구현한다고 믿는다.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소명을 거듭 강조한다. 친일적폐 청산의 기치를 내걸고 민족정기를 되살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문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가 촉발한 역사전쟁에서 보듯 문 정부는 국정 정상화에 필요한 적폐청산의 적정선을 넘어선 지 오래다. 국정 전체가 ‘진리정치의 선악 이분법’에 함몰되면서 국가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선악 논리로 현실정치를 가를 때 발화(發話) 주체인 정권이 진리와 정의의 대변자가 된다. 이는 정확히 문재인 정부가 밟아온 길이다. 진리정치는 정치영역에 강력한 진리 주장을 투사하면서 정치적 실천의 진리가 객관적으로 확정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 결과 정치적 진리의 담지자와 허위에 매몰된 반동세력이 칼같이 나뉜다. ‘두 국민 전략’을 채택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 방향과, 도덕적 우월감과 정의감으로 가득한 대통령과 정권 핵심 인사들의 언행이 진리정치를 웅변한다. 



    서울대에 8년간 유학했고 평생 한국을 연구한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는 한국을 ‘도덕 지향성 국가’로 정의한다. 이는 한국인이 도덕적으로 살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국인이 도덕 지향적”이라는 말은 모든 걸 도덕으로 환원하는 도덕 근본주의를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관행을 가리킨다. 겉으로 나타난 도덕적 우위를 권력 쟁탈의 도구로 사용하는 한국적 관습을 짚은 것이다. 문 정부는 선과 정의의 구현자임을 자처하면서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국민을 이단시한다. 친일적폐 공세가 증명하듯 보수를 악과 불의의 세력으로 낙인찍는다.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쟁탈전을 벌이는 거대한 극장인 한국 사회’의 승자로서 문재인 정부가 질주해온 게 지난 2년의 족적이었다.

    ‘도덕쟁탈전 극장’ 한국 사회의 승자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진리정치는 심각한 후과(後果)를 초래하고 있다. 약자를 위한다는 소득주도성장을 진리로 여기는 문재인 정부는 민중의 비명소리에도 정책 전환을 거부한다. 정의롭고 참된 경제정책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연보호라는 진리의 이름으로 탈원전을 정당화하고 4대강 보를 해체하려 한다. 문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이 북한 핵 보유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안보위기를 부른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평화를 파괴하고 전쟁을 부추기는 수구세력의 책동이라며 맞받아친다. 감정적 반일 정책이 국익을 해친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민족정기가 먼저라고 반박한다. 정책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을 때 문 정부는 정책 결함을 성찰하기보다 전임(前任) 보수정부를 탓하고 수구집단의 저항을 비난한다. 이처럼 진리정치의 폐해가 총체적 국가 위기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현실정치는 공동체의 번영과 민생의 성과로 판정된다. 우연과 불확실성의 공간인 정치에 절대적 진리가 존재할 리 없다. 욕망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삶의 현장에서 보편적 정의를 독점한 진리정치는 갈등과 적대를 부추겨 타협과 공존을 어렵게 한다. 진리정치가 현실의 문제를 풀기는커녕 나라를 뒤흔드는 이유다. 진리정치의 해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구조와 동력을 해부해야 한다. 진리정치야말로 사상적으로 ‘족보가 있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진리정치는 민주공화정의 위기를 부른다. 진리를 독점한 진리정치는 민주주의의 본질인 비판을 적대시하고, 공화국의 핵심인 법치주의와 사회 통합을 무시한다. 서양에서 진리정치는 플라톤에서 시작해 마르크스주의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성리학이 진리정치의 모델이었다. 국가철학으로서 플라톤주의·마르크스주의·성리학은 모두 비판과 다원주의에 적대적이었다. 진리정치를 거역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거나 민중의 적(敵)으로 정죄되었다. 한국 사회를 과거사의 블랙홀에 밀어 넣은 문재인 정부의 역사전쟁은 진리정치의 폐해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진리정치는 정치적 실천의 진리가 객관적으로 확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의 진리성이 확보되면 진리정치와 거짓정치 사이에 깊은 심연이 생긴다. 진리정치는 진리를 알고 실행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범주적 구별을 낳는다.

    문 정부의 망탈리테(집합적 무의식)

    진리정치의 정치사상사적 모델은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마르크스주의이며, 조선왕조에서는 성리학이다. 문재인 정부의 진리정치는 플라톤적 색깔의 마르크스주의 정치관과, 성리학적 정치관에 심정적으로 빚지고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마르크스주의나 성리학을 정권이념으로 삼는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 그건 불가능하다. 다만 문재인 정부의 망탈리테(집단적 사고 및 집합적 무의식)가 마르크스주의와 성리학적 진리정치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플라톤은 정치적 혼란상태(anarchos)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서 이상국가의 지도자인 ‘철인 통치자’ 육성책을 ‘국가’에서 상세히 논한다. 그런 논술의 결론은 동일한 사람(들)이 진리와 통치 권력을 통합할 때 좋은 나라가 만들어진다는 주장이다. 플라톤적 진리정치에서 진리 이해와 정치적 실천은 불가분리적이다. ‘동굴의 비유’가 진리정치의 행로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최선의 훈련을 거쳐 최고의 좋음을 보게 된, 즉 쇠사슬을 끊고 동굴의 오르막을 거슬러 올라가 실제 세계의 태양을 보게 된 사람(들)은 다시 동굴에 들어가 암흑 속에 갇혀 있는 동료 죄수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정치를 믿는 문 정부 인사들이 ‘열등한 국민’을 항상 ‘가르치려’ 드는 건 이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플라톤의 국가철학보다 훨씬 강력한 현대적 진리정치의 모델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의 진리를 해명한 학문 탐구와 민중 해방을 위한 정치적 실천이 같다고 선언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은 곧 진리정치의 이념과 실천을 가리킨다. 현실사회주의의 중앙통제경제는 진리정치에 상응하는 ‘진리경제’이다. “민주주의만이 특수자와 보편자의 진정한 통일이며, 이 민주주의에서 형식적 원리와 실질적 원리가 일치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진리정치 패러다임의 전형이다. 마르크스적 민주주의야말로 진리정치 그 자체다.

    지배자의 적은 인민의 적

    대화를 나누는 청와대 관료들. 왼쪽부터 노영민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청와대기자단]

    대화를 나누는 청와대 관료들. 왼쪽부터 노영민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청와대기자단]

    하지만 마르크스가 꿈꾼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에 의한 민주주의’는 공산당 독재로 타락했다. 공산당과 서기장의 통치는 인민을 위한다는 진리정치 이념으로 분식되었다. 현실사회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이상이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왜곡됐다는 변론은 피상적이다. 마르크스적 진리정치 자체가 자기파멸의 씨앗을 내장하고 있었다. 진리를 빙자한 통치가 무서운 것은 절대적 진리가 비(非)진리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며 통치자가 진리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진리정치에서 지배자의 적은 인민의 적과 동일시된다. 좌파 독재가 우파 독재보다 훨씬 지독했던 사상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적 진리정치의 신봉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옳다는 확신과 도덕적 우월감으로 가득하다. 진리정치에서 나오는 정책이 현실에서 실패하면 이들은 정책보다는 현실 탓을 하면서 반동적 현실을 만든 자들의 책임을 따진다. 설령 좌파적 진리정치가 현실투쟁에서 패배해도 이들은 역사투쟁을 기약한다. 현실에서 패배한 좌파 양심수들이 종교적 순교자 비슷하게 처절한 정치적 양심의 수호자로 남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조선왕조에서도 진리정치가 지배적 흐름이었다. 천명과 천리(天理)를 찾는 성리학에서는 단일한 통일적 세계질서가 상정되며 그 질서는 자연과 역사에 두루 적용된다. 모든 존재가 세계이성을 분유(分有)해 본성을 이루며 그 질료를 받아 개별자의 모습을 형성한다는 주장이다. 성즉리(性卽理)의 원리는 이를 가리킨다. 존재논리와 도덕논리가 호환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정치는 ‘하늘의 이치’의 실현이라는 맥락에서 정당화된다. 

    성리학적 진리정치에서 하늘의 질서는 정명론(正名論)으로 표출되며 “정치는 바로잡는 것”(政者正也)이다. 세계 이성은 바름의 원천이요, 정치는 그 실현이라는 것이다. 조선조 성리학은 이를 극단화한 진리정치로 도식화했다. 이처럼 정치가 영원한 진리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때 정치적 갈등과 이견은 진리에 대한 모독이나 천명에 대한 훼손이 된다. 권력투쟁이 곧 진리투쟁 기능을 한다. 조선조에서 권력투쟁이 생명을 건 명분론적 예송(禮訟)과 필사의 당파 싸움으로 점철된 까닭이다. 

    하지만 진리정치는 이론적·실천적으로도 두루 해롭다. 진리정치가 인간 지식의 잠정적 성격을 간과함으로써 당위론에서 나온 정책이 재앙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치는 지배·피지배관계를 포함하며 모든 정체(政體)는 지배관계의 정당화를 위해 진력한다. 인류의 역사는 진리정치가 지배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기능을 맡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주정의 경우에조차 실질적 지배자는 항상 소수에 머무른다. 진리정치는 이 지점에서 역사에 치명적 해악을 끼치게 된다.

    비판하면 기득권세력으로 몰아

    내(우리)가 진리의 편일 때 나(우리)에 대한 반대자들은 필연적으로 허위의 편이다. 통치자가 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렵게 된다. 통치행위가 정의의 실현이 되면 건전한 비판조차 악랄한 음해로 여겨진다. 자신들의 실정(失政)은 모두 남의 탓이자 과거 탓이다. 한국적 운동권 정치의 정치적 상상력과 감수성은 진리정치에 크게 의존한다. 현대 한국 정치에서 타협이 죄악시되고 구체적 현실에 입각한 변화가 변절로 매도되기 일쑤인 건 이 때문이다. 진리정치는 현실감각과 차이의 감수성을 저해한다. 진리정치의 최대 문제점은 보통사람들의 삶을 정치적 진리의 이름으로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의 진리정치가 민중의 삶을 어렵게 하고 나라를 흔드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진리정치는 이상국가론과 동행하는 경우가 많다. 진리정치는 비루한 현실을 혁파해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인 것은 진리정치가 강제와 억압 없는 철인통치의 이상 국가를 꿈꾸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고상한 꿈이 전체주의나 독재로 타락한 이유는 역사의 낙후성이나 궁정정치에만 있지 않다. 진리정치의 사상적 속성 자체가 열린 사회와 적대하고 나라와 민생에 해롭다. 

    진리정치는 공화정과 충돌한다. 공화정에서는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본질적 차이가 인정되지 않는다. 진리정치의 엘리트주의적 기본 전제가 부인된다. 나아가 공화정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경쟁하는 세력들의 건전한 이견과 갈등을 먹고 자라는 정체(政體)이다. 진정한 공화정에서는 누구도 정치적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진리정치는 공화정의 법치주의와 애국심을 독단적 진리 아래 종속시켜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 

    진리정치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자유토론과 상호비판이 민주주의의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론에서 대북정책에 이르기까지 입장이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반대 논변을 거칠게 힐난한다. 문재인표 경제정책을 비판하면 분배정의를 반대하는 기득권세력이라고 몰아붙인다. 문 정부 대북 유화정책의 일면성을 지적하면 전쟁을 부추기는 논리라고 공격한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에 대해서조차 적폐세력에 부역하는 기회주의라고 매도한다. 협치와 통합의 정치가 들어설 자리를 문재인식 진리정치가 원천 봉쇄한다. 


    절대적 진리 따위는 없다

    ‘정치의 목표가 진리 구현에 있다’고 믿는 마르크스주의적이고 성리학적인 진리정치의 망탈리테를 현대사에서 내면화한 대표 주자가 한국적인 운동권 정치다. 운동권 정치는 민주화를 앞당기는 혁혁한 공을 세움과 동시에 진리정치의 독소를 퍼뜨렸다.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운동권 정치의 관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악의 세력’인 수구반동집단을 ‘분쇄’하는 것을 정권의 소명으로 여기는 게 단적인 증거다. 

    하지만 성리학과 마르크스주의적 상상력을 뒤섞은 운동권의 진리정치 이념은 반(反)민주적이고 반(反)공화적이다. 정치적 경쟁자를 악으로 매도하는 진리정치는 민주공화국의 현대 정치와 동행할 수 없다. 진리를 전유(專有)한 통치자가 이상향을 향해 진군할 때 국가는 위기에 빠지고 민중의 고통은 증폭된다. 문 정부가 민족주의를 진리로 격상하면서 남북 국가이성의 대립적 본질을 무시할 때 한반도 평화의 길은 더 멀어진다. 진보·보수의 협치 없이 남북의 평화 공존은 불가능하다. 문재인 정부의 진리정치는 내치(內治)를 해치고 한반도 평화를 저해한다. 

    진리정치는 민주공화정의 적(敵)이다. 문재인 정부가 진리정치의 미망(迷妄)을 깨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 현실정치에 절대적 진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의견(doxa)의 지평’이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에서는 그 누구도 원천적 정당성을 자임할 수 없다. 정치의 근본은 자유시민의 성숙하고 풍요로운 삶이라는 성과를 내놓는 데 있다. 현실정치는 오직 구체적 결과로써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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