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호

명사에세이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방법

  • 이태환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

    입력2019-06-12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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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를 제압하는 동시에 상생하는 최고의 전략은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손자병법은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은 최선 중의 최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 중에서 최선(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고 강조한다. 싸워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고 상대가 계산해보고 따라오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이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기보다는 상대의 체면을 살려가며 따라올 수 있도록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손자병법을 거론한 것은 내가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계기와 연관이 있어서다. 한중수교 2년 전인 1990년 미국에 체류하던 필자는 중국의 손자병법연구회와 국제전략기금회가 공동으로 주관한 ‘제2차 손자병법 국제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당시는 톈안먼(天安門) 사태 1년 후인 터라 중국의 국제교류가 활발하지 않을 때였다. 손자병법 심포지엄에서는 아직 수교 전인 한국을 포함해 미국 일본 인도 유럽 등 10여 개 국가에서 50여 명의 학자가 참석해 중국 학자 100여 명들과 토론했다. 

    이 학술대회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토론 주제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는 것이었다. 심포지엄을 마치고 베이징대에 방문학자로 한 달간 체류할 기회가 주어져 비공식이기는 하지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베이징대 방문학자가 되는 행운도 누렸기에 손자병법의 그 대목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었다. 

    첫 번째 중국 방문 이래 나 스스로에게 지속해서 되묻는 질문은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이고, 우리는 중국에 무엇인지’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한중 양국 사정에 대한 이해는 필수고, 더 나아가 두 나라 사람들의 상호 인식이 어떠한지 이해해야 한다. 중국을 제대로 알려면 중국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우리를 바라보는 중국의 인식을 동시에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사드 사태와 중국의 경제 보복을 거치면서 다시 한번 그 질문을 생각해보게 된다.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중국에 무엇인가.

    ‘열하일기’의 균형감 있는 시각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에 젖어 있던 조선인의 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청에 대해 잘 모르면서 오랑캐로만 치부하고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조선 내에서 팽배했는데, 연암이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이 몰랐던 청의 발전상과 실상을 소개함으로써 조선의 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연암은 청 황제가 동남지방을 순행한 것과 강희제 때부터 북방 열하(熱河)에 행궁을 짓고 몽골의 강력한 군대를 견제한 것에 주목했다. 열하는 현재 중국 허베이(河北)성 북부에 있는 칭더(承德)라는 곳이다. 베이징에서 250㎞ 거리에 있는 황제의 피서 별장지였다. 연암은 열하 별장 건설이 청의 통치술, 국제 전략과 관련된 것이라고 봤다. 

    “중국 동남지방 사람들은 반골 기질이 강하다. 청 황제들은 이들의 기질을 억누르고자 이 지역을 자주 순방하고, 북쪽 오랑캐들을 견제하기 위해 열하에 궁궐을 짓고 황제가 변방을 지킨다.” 

    연암은 덧붙인다. 

    “서번(西藩·티베트족)은 강하고 사나우나 황교(黃敎·라마교 일파)를 매우 경외하니, 황제가 그 풍속을 따라 황교를 떠받들고 그 법사를 맞이해 왕의 이름을 주어 세력을 분할했다. 이것이 청나라 사람이 사방을 통제하는 전략이다.” 

    연암은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선비였다. 청을 좋게 인식하기는 어려웠을 텐데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 있게 들여다보려 노력했다. 

    1990년 베이징대 방문학자로 체류할 때 체험기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게 아쉽다. 그때 내가 본 중국은 지금의 중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낙후돼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인이 한국을 보는 인식이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른 것을 그때 알았다. 

    당시 중국 주류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경제 발전에 대한 선망 의식도 있었으나 한국을 중국의 한 부류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한국을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나 분리된 한 부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한국은 중국을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경제적으로 낙후했으며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공산주의 국가 정도로 인식했다.

    ‘겸손하던’ 중국인들

    1900년대 베이징 공사관지역 [위키피디아]

    1900년대 베이징 공사관지역 [위키피디아]

    1990년 당시 중국 사정은 전반적으로 열악했으나 베이징으로 좁혀 보면 한국에 비해 15년가량 뒤처진 것으로 보였다. 베이징 거리에는 차량이 별로 없었다. 지식인들도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시절이다. 칭화대, 베이징대, 런민대 부근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며 불야성을 이루는 중관춘(中關村) 일대도 해가 지면 적막감만 흐르던 시절이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매우 겸손한 태도로 외국인들을 대했다. 속으로는 문화적 중심이라는 생각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반면 한국인들은 중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 격차가 있었던 수교 이후 10년간은 대체로 이런 상호 인식하에서 한중 교류가 확대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상호 교류와 접촉은 괄목할 만큼 증가했지만 인식의 차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중국인 학자들의 생활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집은 물론이고 보유한 차량도 한국의 교수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 만큼 생활이 윤택해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 대학과 연구소에서 러브 콜을 받는 처지가 되자 한국 학자들을 주요국이 아닌 주변국 학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중국의 무역대상국 중 한국이 세 번째인데도 불구하고 인식상으로 한국은 수많은 주변국 중 하나가 돼버렸다.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은 잘 모른다. 

    한국에 중국은 없어서는 안 될 무역대상국 1위 국가면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다. 중국의 관점에서도 한국이 전략적 협력 동반자이기는 하지만 세계 제2위 규모의 경제대국이 된 마당에 한국은 선망의 대상이 더는 아닐뿐더러 자신들과 한 부류도 아니며 하나의 주변국일 뿐이다. 

    한국 처지에서는 무역대상국 1위인 중국과 거리를 두기도 어렵고,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으며, 그렇다고 중국의 눈치만 보며 살 수도 없다. 중국과 함께 상생하려면 중국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국에 우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대립각을 세우기도 어렵고 눈치만 보며 살 수도 없다

    어쩌면 그동안 중국의 대(對)한국 인식에 근본적 변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국이 한국과 한국인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전략적으로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을 우리가 제멋대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실제로 덩샤오핑(鄧小平) 이래 시진핑(習近平) 이전까지 중국의 대(大)전략 기조는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실력을 기르면서 겉으로 이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시진핑 집권 이후 이 기조는 분발유위(奮發有爲·떨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하겠다)로 변화했다. 

    중국의 대전략이 변화하는 와중에도 한국에 대한 인식에서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이러한 중국의 대(對)한국 인식은 경제적 격차가 크던 1990년 당시에도 있었다. 다만 우리가 중국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는 손자병법을 떠올리면서 중국인들의 인식과 전략을 제대로 이해한 후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고 전략을 마련할 때다.


    이태환
    ● 195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터프츠대 석사(국제법·외교학)
    ● 서던캘리포니아대 박사(정치학)
    ●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 현대중국학회 초대 회장
    ● 現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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