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호

추미애의 법질서 교란, 우병우와 비교도 안 돼

[신평의 풀피리⑱] 조국, 추미애는 사법개혁 전열 흩트린 역사의 죄인

  • 신평 변호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lawshin@naver.com

    입력2020-12-02 10: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조국‧추미애가 유린하는 헌정질서

    • 정치적 중립성 보장한 검찰청법 짓밟아

    • “못 먹어도 고!” 외치듯 달려들어 尹 압박

    • 秋, 진보 장기집권 사명의식 갖는 듯

    • 검찰·법원·경찰 아우르는 사법개혁 해야!

    *19대 대선 당시 신평 변호사(64·사법연수원 13기)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앙선대위에서 ‘공익제보 지원위원회’ 위원장과 ‘민주통합포럼’ 상임위원을 지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여권을 향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지식인의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경북 경주에서 농사를 짓고 시를 쓰며 산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12월 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12월 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나이가 이렇게 들고 보니 종종 쓸쓸함을 느낀다. 훌쩍 늙어버렸는데, 흘러간 세월이 잡히지 않고 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다. 좋은 점도 있다. 젊음의 가늠할 수 없는 정열은 더 이상 나를 쥐고 흔들지 못한다. 나는 이미 현실의 이해관계를 거의 떠나버렸다. 나를 치사하게 얽어매는 것은 없다. 차분하게 대지에 발을 딛고 여유롭게 이리저리 살핀다. 할 말도 거침없이 할 수 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데 만족하며 사는 처지에 누구에겐들 눈치 볼 일 없다. 

    돌이켜보면 아득하나, 그 길에 박힌 추억의 편린(片鱗)을 소환해본다. 잘된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잘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런 것들이 내 인생길의 방향을 그때마다 결정해온 것이 아찔하기만 하다.


    그때 3000만 원을 받았더라면

    판사로 근무하던 30대 중반의 일이다. 옆집 사람이 돈을 가득 싼 보따리를 들고 왔다. 같은 법원에 근무하는 판사에게 사건에 관해 한 마디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3000만원이라고 했다. 받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른 판사에게 “사건 잘 검토해 봐주세요”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이고, 그때만 해도 이런 정도는 법관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용납됐다. 욕심도 났다. 나도 명색만 판사였지 내면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나 거절했다. 거절하면서도 많이 아쉬웠다. 많은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탁월한 선택을 했다. 그 돈을 받았다면 어찌 내가 지금까지 그나마 약간의 사회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 것인가! 그 돈을 받았다면 나는 내 영혼을 팔아버린 셈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보통의 가정을 꾸려갈 수 없다는 상황에 처해 절망감을 느꼈다. 차차 우울증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것이 우울증인 줄도 미처 모른 채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코올에 의존했다. 물론 효과는 없는 채 수렁은 점점 더 내 몸을 끌어내렸다. 법조인은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직업이다. 얼마나 내 주량이 세었던지, 법조계 전체를 통틀어 1등 아니면 2등 아니겠느냐는 말이 오갔다. 두주불사(斗酒不辭)에 새벽 네 시, 다섯 시까지 음주도 예사였다. 

    술 앞에는 장사가 없다. 주취가 야기하는 판단력의 상실은 치명적일 수 있다. 아찔한 순간이 더러 생겼다. 그때 단 하나의 경우에라도 제대로 걸렸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씩 닥쳤던 위기들이 별일 없이 지나간 건 운이 좋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삶의 폭파 뇌관을 잘 피할 수 있던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잘 나서 혹은 내가 잘 선택해서 피한 게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 보따리도 어쩌다 그날 덜컥 받았을 수도 있다.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하는 마음 한 번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내 삶의 방향을 좌우한 여러 구체적 사건들이 연이어 머리에 떠오른다.


    이회창과의 인연

    대학을 다니면서 고시공부를 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어린 마음에 법이나 법학이란 것은 사회의 ‘가진 자’, ‘강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법학을 지극히 혐오했다. 막걸리나 마시고 정신이 어찔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법서를 읽을 수 없는 비참한 몰골로 지냈다. 

    1980년 1월의 일이다. 친형제처럼 지내던 이석현(前 국회부의장) 형이 다니던 현대건설을 그만두고 동교동계(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신그룹)의 비서로 들어갈 생각을 했다. 나와 함께 한 사흘간 집을 나와 낮에는 점집에 가서 점을 보고, 밤에는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곳에 가니 동교동계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점괘를 말해줬다. 

    상반되는 두 점괘가 모두 맞았다고 본다. 석현 형은 멀쩡한 직장을 집어치우고 동교동계에 들어가면서 1980년 ‘서울의 봄’을 거쳐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바로 연행됐다. 동빙고동에 가서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린 채 매를 맞았으니 무척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일이 바탕이 돼 5선 국회의원을 하며 국정운영에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터다. 

    그때 석현 형은 나보고도 동교동계에 같이 가자고 했다. 고시를 준비하는 낭인으로서 고향에 계신 늙은 부모님의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 없는 처지였다. 석현 형은 김대중 선생이 당시 나만한 나이의 영남출신 청년으로 영어, 일어 회화가 가능한 사람을 골라 자신의 후계자감을 키우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거기에 응모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때 내가 석현 형의 제의를 받아들였더라면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음에 틀림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말이다. 

    일본 유학 후 1993년에 법관 사회의 정풍을 주장한 일로 현행 헌법 시행 후 처음으로 법관재임명에서 탈락했다. 그 전에 법관사회와 나 사이의 알력은 어느 정도 소문이 나있었다. 내가 쓴 ‘일본 땅 일본 바람’은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책에서 한국 법관사회에 가한 신랄한 비판이 사법부 상층부를 격분시켰던 것이다. 

    이회창 당시 감사원 원장이 나를 딱하게 여겨 감사위원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법관재임명탈락 소식이 전해져 무산됐다. 30대의 나이로 출세(?)할 뻔 했다. 그러자 그 분은 나를 창설 초기의 헌법재판소 사무처장(당시는 차관급으로 처장직을 두었음)으로 조규광 당시 헌법재판소 소장에게 천거했다. 조 소장은 변호사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뽑고 싶다고 완곡히 거절했다. 

    그 후 1997년. 변호사로 일하던 나에게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총재의 복심인 어느 의원이 일본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일본어를 잘 하고 일본에 상당한 인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이 총재에게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할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대선 전략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몇 번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나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왜 그렇게 거듭 거절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이유가 분명치 않다. 이때 거절하지 않았다면 내 운명의 방향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다. 그 후 이 총재가 겪게 된 불운에 대해 그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한 내 배은망덕함이 무거운 짐이 돼 아직까지 가슴을 누르고 있다.


    공직에 대한 포기와 노년의 자유

    2013년 8월에 친구 목영준(前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헌법재판관 후임으로 나를 천거했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여야합의 몫이었다. 그 무렵 나는 일본 학자들과 공동으로 책을 출판하기 위해 한국 헌법학 교수들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이목희 당시 민주당 의원에게서 전화가 와서 “민주당에서는 신 교수를 새로운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추천하기로 했어요”하고 말했다. 같이 있던 한국 교수들이 “와!”하고 소리를 질렀다. 당시 여당(새누리당) 쪽에서도 별 무리 없이 나를 선택했는지, 나에 대한 최종 인사검증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일본 장기출장에 이어 또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 헌법포럼’에 참석해야만 했다. 내가 이 대회의 창설자여서 여러 준비를 위해 장기출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중국에서 전해 들으니, 상황이 차츰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결국 내가 아닌 강일원 씨가 후임 재판관이 됐다. 후에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주심을 맡게 된다. 

    만약 내가 일본과 중국에 장기출장을 가지 않고 국내에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예정대로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국회에서 선출됐다면 하고 상상해보기도 하나 부질없는 짓이다. 그리고 여러 차례 대법관에 천거되던 중 2018년에 확실한 힘을 받으며 후보로 추천받았으나, 뜻하지 않은 상황이 조성돼 또 좌초한다. 

    만약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랬으면 조 변호사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공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으리라는 공상(空想)을 더러 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사유가 겹쳐 내가 공직을 맡아 뜻을 펼칠 기회를 막아버렸다. 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도 이것이 좀 서운했다. 이젠 나이가 공직을 맡을 한계 시점을 지나버렸다. 그리고 지적 능력의 쇠퇴를 여실히 느낀다. 이제는 나설 때가 아님을 잘 알게 됐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그 운명은 내게 공직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런 역할, 봉사를 하지 않은 것에 내 책임은 없다. 이젠 그런 꿈 자체를 완전히 포기했다. 포기는 나에게 훨씬 큰 자유를 줬다. 노년의 자유로움에 푹 젖었다. 자유로움이 주어진 데 지극히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 

    그래도 발을 헛디디는 큰 사고를 당하지 않고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고맙고 기적처럼 여겨진다.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그 많았던 험한 구덩이들에 깊이 빠진 일이 없이 이 나이까지 살아온 게 어찌 기적이 아니랴! 엄청난 허물과 약점을 가진 인간이면서도 그나마 크게 악하고 삿되지 않은 마음가짐을 가진 덕에 나에게 주어진 복이 아니랴 하고 자위한다.


    우병우가 한 일을 추미애와 비교하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측 이옥형 변호사(왼쪽)와 윤석열 검찰총장 측 이완규 변호사가 11월 30일 서울행정법원에서 열린 윤 총장의 직무배제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사건 비공개 심문을 마친 뒤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영대,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추미애 법무부 장관 측 이옥형 변호사(왼쪽)와 윤석열 검찰총장 측 이완규 변호사가 11월 30일 서울행정법원에서 열린 윤 총장의 직무배제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사건 비공개 심문을 마친 뒤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영대,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운이나 운명에 관해 생각하다보면, 박근혜 정부에서 민정수석을 하다가 그 후 엄청난 시련을 겪은 우병우 씨를 떠올린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병우 씨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 나는 언론에서 그의 얼굴을 얼핏 대할 때마다 깊은 우수와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을 본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가진다. 만약 그가 소년등과를 하지 않았다면, 혹은 박근혜 정부에서 벼락출세를 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얼마나 좋았을까. 그가 지금 재판을 받았거나 또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서 기소된 범죄행위란 것들은 청와대에서 과거부터 별달리 잘못이라는 의식도 없이 관행적으로 해오던 일이다. 그것들은 지금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나 그와 한 팀을 이룬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심재철 법무부 검찰국장 등이 벌이는 일과 비교하면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 씨는 결코 그렇게 노골적으로, 또 권력을 이용한 야비한 수법으로 국가의 법질서를 어지럽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추미애 장관팀’은 헌법상 법치주의나 적법절차의 원리와 같은 원칙들을 여지없이 무시하거나 혹은 이를 교묘히 비켜나며 권력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 결과, 검찰권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검찰청법 등 법률을 짓밟으며, 중립적 관료제로 대표되는 국가의 기강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 현란한 작난(作亂)에 눈이 어지럽다. 

    아, 어찌하여 우리가 이 지경까지 와버렸는가! 그 팀은 고스톱 판에서 “못 먹어도 고!”라고 외치듯이 계속 달려들어 윤석열 검찰총장의 골수를 후벼 파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가 ‘인격적 사망’에 이를 때까지 이 난장판은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에 대한 부정적 기류가 지금 급격히 형성돼 정권의 힘을 빼고 있다. 

    법무부 감찰위원회는 12월 1일 임시회의를 열고 “추 장관의 윤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청구, 직무배제, 수사의뢰는 모두 부적절하다”고 만장일치로 결론 내렸다. 감찰위 권고가 나온 직후에도 추 장관은 “여러 차례 소명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감찰이 진행됐고, 그 결과 징계 혐의가 인정돼 총장에 대한 징계 청구를 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같은 날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조미연 부장판사)는 윤 총장이 추 장관의 직무 배제 명령에 반발해 제기한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했다. 감찰위와 법원이 연이어 윤 총장 측 손을 들어준 셈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검찰을 부당하게 옹호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검찰에 맞서 싸워왔는지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일필단기로 달려 나가 민주화운동 인사, 노동운동가를 방면해 구해냈다.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그것이 한 판사에게 안기는 엄청난 중압감이나 또 그로 인해 내가 받았던 심대한 불이익을 헤아려 달라고 요청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요청을 한 일이 없다. 다만 그런 과거를 가진 사람이 왜 조국 교수나 추미애 장관을 비판하는지 그 연유가 있을지 모른다는 정도의 인식은 해주었으면 한다. 

    내가 반정부·반체제 인사들을 석방해 담당 검사들은 고과(考課)평가에서 손해를 입었으니 내게 원망의 마음을 품었을 터이다. 검사 중에도 기분은 나쁘지만 판사가 법에 따라 하는 일이니 감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 대한 온갖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를 거꾸러뜨리는 것이 자신의 인생목표인 양 설쳐대며 내가 판사직을 떠난 뒤에도 긴 시간 내 뒤를 따라오며 해코지를 한 이도 있었다. 

    수십 년 간에 걸쳐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갖는 사법 권력과 불화했다. 이는 한 개인에게 파멸적(devastating)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나는 이것이 나에게 가해진 천형(天刑)이라 생각하고 꿋꿋이 견뎠다. 모질고도 야속한 격절(隔絶)의 긴 세월이었다. 언젠가는, 아마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내가 남긴 저술이나 자료를 읽으며 후세에서 나에 대해 작은 명예회복은 해주리라는 희미한 희망의 불씨를 안고 살아왔다. 뜻하지 않게 불우한 처지의 나를 이해하며 도움을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은 적잖은 사람들에게도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살아왔다.


    조국, 추미애 머릿속 ‘진정한 사법개혁’ 없어

    나는 검찰의 어두운 면을 누구 못지않게 잘 꿰뚫고 있다. 행동으로 저항했다. 평생을 통해 검찰, 법원, 경찰을 모두 아우르는 사법개혁을 연구하고 주장했다. 많은 법조인들이 이에 참을 수 없는 반감을 품었다. 노골적으로 내 면전에서 심하게 모욕을 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의 대부분은 소위 ‘개천에서 난 용’으로 자신이 법조인이 된 것을 일생의 영예로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법조계를 대폭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하니 심한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사법개혁을 필생의 과제로 생각하고 행동을 해온 내가 어찌 검찰을 옹호하기 위해 추미애 팀을 비판하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아는 한, 조국 교수나 추미애 장관의 머릿속에는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사법개혁’은 들어있지 않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조 교수나 추 장관은 사법개혁의 전열을 흩트린 역사의 죄인들이다.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사법신뢰도 꼴찌인 나라다. 사법개혁이 그토록 절실히 필요한데 그들 때문에 천금 같은 귀중한 시간이 허비됐다. 

    추 장관이 지금 벌이고 있는 ‘활극’은 사법개혁과는 무관한 일이다. 왜 내가 이런 말을 단정적으로 하는지 궁금하다면 내가 그간 사법개혁에 대해 써놓은 글을 한 번 읽어봐 줬으면 한다. 그리고 추 장관이나 조 교수가 무엇 때문에 검찰개혁의 회오리를 일으켜 왔는지 그 연유를 한 번 돌아봐 주기를 바란다. 오직 나는 한 명의 민주시민으로서 그리고 헌법학자로서 그들이 무참하게 유린한 헌정질서, 국법질서를 지키는데 작게라도 쓰임새 있는 사람이 되고자 그들의 지나친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다. 

    윤석열 총장이 그들의 의도대로 일찌감치 눈치를 채고 사직했더라면, 그래서 정권의 심장을 겨눈 수사들이 유야무야로 끝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더 이상의 무리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영화롭게 권력을 즐기며 나른한 몸으로 봄 낮잠을 자듯 한 세상 잘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윤 총장이 버티자 자꾸 더 강도가 심한 수를 두고 있다. 비열함과 교활함이 정도를 점점 더해가고 있다. 그런 행동들은 윤 총장이나 한동훈 검사장 같은 몇 몇 개인에게만 불법, 부당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국가 전체에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고 있다. 과거에 우병우 씨가 한 행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원의 행위다. 

    그들이 이 모든 일에 얽혀 들어간 것이 순전히 그들의 주체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추 장관은 원래 대권을 염두에 두고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이니 순순히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생에서 어떤 때는 마치 홀린 듯이 악수(惡手)를 두는 때가 빈번하게 있지 않은가. ‘추미애 팀’의 팀원들은 나중에 가서는 어쩌다보니 불운한 일에 휘말려 들었다고 길게 탄식하지 않을까 한다. 모진 사람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 식으로 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추 장관! 온유함과 평온함 찾으시오

    추 장관은 지금 자신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진보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탄탄대로를 만든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불멸하는 한국의 ‘잔 다르크’가 된다는 심정일 터다. 저 썩어빠진 보수 집단이 윤석열을 매개로 다시 살아나는 참혹한 사태를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치겠다는 결연함일 것이다. 

    그러나 추 장관!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고 위대한 존재가 아니오. 불멸은 우리 인간에게 원래 없는 것이오. 당신 역시 다른 어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불운을 보며 눈물 흘리는 한낱 평범한 지어미에 불과한 것이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대부분의 일들은 우리의 의지나 선택과는 별 상관없이 운이나 혹은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제멋대로 결정해버리는 것이오. 우리는 그에 의해 수시로 번롱당하는 희미하게 깜빡이는 존재일 뿐이오. 바람 앞에 하염없이 흔들리는 촛불 같은 것이오. 당신이 나라 전체의 명운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지극히 교만한 짓이오. 세상은 한 번씩 그런 자들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는 것이오. 그 벌은 인간의 벌이 아니라도 다른 차원의 것도 있는 법이오. 

    그리고 진보의 쪽에도 썩은 무리가 있고, 보수의 쪽에도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애써 무시하지 마시오. 정권의 장래는 국민들에게 맡기고, 이제 온유함과 평온함을 찾으시오. 내가 고향 선배로서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몇 마디 어리석은 말이오.


    ■ 당신 곁에서

    너희들 내 곁을 떠나지 마라는 말씀
    뼛속에 차인 한기 으스스 튀어나와
    눈물을 글썽거리며 황망함을 참습니다

    저 해가 기울어 한밤이 되어도
    찬 공기 덮쳐서 온 풀잎이 시들어도
    당신은 곁에 서시어 품 안에 거두십니다

    가없는 길 걸으며 오로지 바라기는
    기쁘고 서러움이 일어서고 스러져도
    무심히 당신 곁에서 한 생을 보내렵니다

    집을 지을 때 먼 곳에서 오죽 뿌리를 도끼로 캐와 심었다. 다 잘 자랐다. 세 군데 무성한 대나무밭을 이루었다. 농가에서 대나무는 자재로 귀하게 쓰인다. 용도가 무척 다양하고, 손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른 대나무나 비바람으로 굽어버린 대나무를 솎아내는 것만 해도 양이 상당하다. 이웃집에서도 자주 얻어간다. [신평 제공]

    집을 지을 때 먼 곳에서 오죽 뿌리를 도끼로 캐와 심었다. 다 잘 자랐다. 세 군데 무성한 대나무밭을 이루었다. 농가에서 대나무는 자재로 귀하게 쓰인다. 용도가 무척 다양하고, 손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른 대나무나 비바람으로 굽어버린 대나무를 솎아내는 것만 해도 양이 상당하다. 이웃집에서도 자주 얻어간다. [신평 제공]


    ● 1956년 출생
    ● 서울대 법학과 졸업
    ● 제23회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제13기
    ● 인천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 대구지방법원 판사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헌법학회 회장 역임
    ● 저서: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들판에 누워’(시집) 등.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