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모래땅에 국회가 섰으니 국운이 모일까”

  • 입력2006-11-30 12: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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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 2002년 2월 10일
    • 곳: 신동아 회의실
    • 대담자: 최창조(풍수학자·전 서울대 교수) 김두규(풍수학자·우석대 교수)
    • 사회: 이성희(시인·고교 교사)
    • 진행: 안영배기자
    이성희 :제가 오늘 이 좌담을 위해서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졸다가 깼다가 하면서 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깨어 있는 시간이나 조는 시간이나 그 단절을 꿰뚫고 산이 끝없이 기차와 함께 달려왔다는 느낌을 받고서는 새삼스럽게 감동했습니다.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산의 기운 속에 사는 우리가 산에 대한 심오한 사유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산 중 상당 부분이 잘려져 나가고 파헤쳐진 현장도 기차 창밖으로 목격했습니다. 오늘날은 모든 땅과 산이 교환가치로 취급되는 시대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본래 산이나 땅은 교환가치만으로 따질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잡아온 게 사실입니다.

    워싱턴의 대추장(미국 대통령)이 땅을 팔라고 전갈을 보낸 것에 대해 시애틀의 인디언 추장이 언급한 말이 있습니다. 제가 읽은 글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글이기 때문에 잠깐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선한 것들이다.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紅人)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21세기를 맞아 새삼스럽게 시애틀 추장의 연설을 되새겨보면서 과연 우리의 땅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명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짚어볼 시점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풍수 좌담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두 분 선생님이 모두 풍수의 대가이신데, 먼저 최선생님이 풍수란 무엇인가에 대해 짚어주시지요.



    풍수는 땅의 질서와 사람의 논리

    최창조: 풍수의 대가란 말씀은 듣기 거북하고 김두규교수님이나 저는 풍수를 상당 기간 공부해오고 있지만, 풍수에 대한 정의 자체가 확립돼 있다고 하기에는 아직도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교과서적으로 말씀드리면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나온 말로,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지요. 이건 결국 기(氣)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기가 바람을 타면 흩어져버리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하지요. 결국 기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갈무리하는 터를 잡는 방법이 풍수의 교과서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나 저는 풍수를 더욱 간단하게 생각해서 풍(風)이란 결국 풍토(風土) 즉 기후조건과 유사한 것이고, 수(水)는 말 그대로 물로 해석합니다. 기후조건과 물은 농업사회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지요. 따라서 풍수란 결국 삶의 조건을 규정짓는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보고 그것이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따져보는 조상들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중국 풍수가 아닌 우리 고유의 자생(自生) 풍수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 요체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논리가 있듯이 땅은 땅대로 어떤 질서가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양자는 상생의 관계, 보완의 관계, 공생의 관계가 돼야 하는데 이성희 선생이 서두에 말씀하셨듯이 파괴, 이용, 소유, 투쟁 쪽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럴 경우 땅의 질서와 인간의 논리를 결합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 전통의 지리 지혜가 필요한데, 바로 이것이 풍수라는 거지요.

    김두규: 최선생님이 말씀하신 자생풍수는 역사적으로 고려 때의 비보(裨補)풍수와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역시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것입니다. 땅마다 사람이 살 곳, 절이나 사원이 들어설 곳, 농경지로 적합한 곳 등 그 기운과 용도가 다른데, 피치 못해 사람이 살 곳이 아닌데도 사람이 살아야 하는 경우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상징적 표시를 함으로써 땅을 고쳐 쓰는 것이 바로 비보풍수입니다. 즉 전 국토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으로 만들어보자는 ‘국토의 극락화’ 개념이지요.

    이성희: 땅의 질서와 사람의 논리에서 부딪히는 상극(相剋) 문제를 상생으로 해결하는 것이 우리 풍수, 즉 우리 지리학이라면 서구 지리학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최창조: 서구 지리학은 지표 현상, 예를 들어 인구 촌락 산업 특산물 산천 지세 등 눈에 보이는 것만을 다루지만 우리 지리학은 눈에 보이는 것(地理)에 더해 눈에 보이지 않는 땅 속 기운, 즉 지기(地氣)까지 감안합니다. 그래서 ‘지리’ 앞에 ‘풍수’를 덧붙여 풍수지리라고 하지요.

    이 지기가 도대체 무언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숙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지기가 있다는 전제 하에 그것이 사람 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생애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던 거지요.

    서구지리학 식으로 눈에 보이는 지리만 다룰 경우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땅을 생명이 아닌 물질로 파악하기 때문에 당연히 소유와 이용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날 땅과 인간의 부조화 문제는 바로 이런 실증주의적 지리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또 서구지리학은, 물론 실증주의 지리학을 전제로 말씀드립니다만, 약간 비꼬자면 ‘천상의 지리학’이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지리학이라는 거죠. 항공사진이나 위성사진으로 찍은 땅 모습을 보면 대세 판단을 하기 쉽고 그럴 듯하게 여겨집니다만, 생생한 현장은 철저히 무시돼 버리고 맙니다. 아주 구체적인 예로 우리나라 지리 계획가들 중 상당수가 자기가 계획을 짜고 있는 땅을 가보지도 않고 책상에서 그려버립니다. 우리 전통의 지리학이 현장에 들어가서 땅을 디뎌 그 기운을 느끼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실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이성희: 서구 지리학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서 땅을 추상화시키고 죽어 있는 껍데기로 보는 반면 우리 풍수지리는 지표 현상 외에 땅 속에도 끝없이 인간과 교류할 수 있는 생명적인 기운이 있다고 보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겠군요.

    최고 지도층이 명당 발복론 부추겨

    그런데 땅속 기운 하면 역시 묘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일반 사람들은 풍수 하면 묘를 통한 발복(發福)의 개념에서 접근하기 쉽습니다. 이 묘지 풍수에 대해서 김두규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김두규: 얼마전 모 언론사에서 주최한 6박7일의 풍수학교에 교사, 대학생, 문화운동 평론가 등 다양한 계층의 수강생들이 모여들었는데, 강의를 하면서 풍수는 묏자리 잡기라는 일방적인 편견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묘지 풍수 또한 풍수지리에 들어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풍수란 사람이 사는 터를 정하는 것인데, 동양에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다 사람 문제에 포함시키거든요. 그래서 산 사람에게는 양택(陽宅)이 주어지고, 죽은 사람에게는 음택(陰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조 성종 이전까지는 사실 묘지 풍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돼요. 성종 때 최호원이라는 유학자 출신의 풍수학인이 있었는데, 황해도에서 일종의 풍토병이 발생하자 풍수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땅을 치료하는 비보풍수를 주창했어요. 그러나 이 주장은 유학 대신들에 의해 견제를 받고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고려조 이래 내려온 비보풍수는 거의 사라졌다고 봅니다.

    대신에 조선에서는 묘지풍수가 대세를 이루게 됩니다. 이는 조선 유림이 숭앙한 주자나 정자와 같은 성리학 대가들이 풍수지리를 개인적으로도 신봉했던 데다가, 유교의 효 개념을 죽은 자에까지 확대시킨 결과입니다. 즉 돌아가신 부모를 좋은 땅에 모시는 것도 효라는 거지요.

    더욱이 조선조 왕가에서는 왕릉을 쓰기 위해 명당 발복을 받았다는 사대부의 능을 뺏기도 했어요. 이것은 사대부가 명당 발복을 받아 세력화하는 것을 막는다는 정권수호적 차원도 있었어요. 이런 행위는 옛 무덤에 묘를 다시 쓰지 않는다는 풍수지리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지만 조선 왕가에서는 감행했던 겁니다. 왕가가 그러니 그것을 지켜보는 사대부들도 덩달아 묘지 풍수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지요. 즉 묘지 풍수는 조선의 왕가가 부추긴 겁니다.

    이런 왕릉 풍수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직 대통령을 포함해 전직 대통령들이 명당을 써서 발복했다는 얘기가 계속 나오잖아요? 대통령이 그러니 그 밑의 정·관계 고위층도 재벌도 다 명당 발복을 추구하는 거구요.”

    명당 쓰면 자손 잘된다는 동기감응론

    이성희: 명당 발복은 그 근저에 동기감응(同氣感應), 즉 같은 핏줄인 조상과 자손 사이에는 기 감응을 일으킨다는 풍수 논리가 개입돼 있는 것 아닌가요? 동기감응에 대해서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창조: 풍수를 논하면서 가장 부딪치는 문제가 역시 기인데, 동기감응도 바로 기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 메카니즘은 어떤 것인지 하는 면과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대담이 기 자체를 논하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풍수적 입장에서만 설명해보기로 하지요.

    동기감응은 ‘친자(親子)감응’이라고도 합니다. 친은 부모를 가리키고 자는 자식을 가리키는데, 이 양자 사이에 기의 교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풍수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똑 떨어지게 설명하지 못하고, 두가지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먼저 같은 나무에서 떨어진 밤을 하나는 이쪽 창고에 넣어두고 하나는 저 너머 다른 창고에 넣어둬도 싹은 같이 튼다, 한 나무에서 난 나무들은 동기(同氣)니까 이렇게 서로 감응한다는 겁니다. 이 비유는 그러나 시원치 않은 설명인 것 같고, 가장 많이 쓰이는 비유는 당 현종의 구리종 얘기입니다.

    당나라 현종이 지나가다 보니까 바람도 불지 않는데 구리종이 울었어요. 무슨 일인가 싶어 옆에 있던 동방삭에게 물었더니 “구리를 캐는 광산에 지진이 일어났을 겁니다” 하는 거예요. 현종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여겼는데 며칠 후 그 지방에서 진짜로 지진이 났다는 보고가 올라왔어요. 현종이 놀라 동방삭에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동방삭은 “쇠붙이까지도 같은 기를 가지면 감응함이 이와 같습니다. 하물며 사람과 귀신은 어떻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동기감응론에 대해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격렬하게 비난합니다. 만약에 죽은 부모와 산 자식 사이에 기의 주고받음이 있다면 살아 있는 부모 자식 사이에도 있어야 될 것 아니냐, 그런데 부모가 옥에 잡혀가서 온갖 악형을 다 당하고 있어도 옥 밖에 있는 자식한테 종기 하나 나는 꼴을 못 봤는데 이건 어떻게 된 거냐 하고 따지는 거죠. 사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비유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긴 합니다.

    저는 동기감응론에 상당 정도 의지하면서 풍수를 시작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여하튼 과연 땅에 있는 기가 부모 유골에 영향을 주는가, 또 부모 유골이 땅의 기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기가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점은 동기감응의 핵심적인 문제일 겁니다. 이는 기를 연구하는 쪽이나 사람 인체를 연구하는 한의학 쪽에서의 학문적 연구 성과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인 것 같습니다.

    김두규: 동기감응론을 친자감응 논리로 풀 때 경계할 부분이 있습니다. 소위 명당에 모시면 무차별적으로 후손들이 잘 된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빠질 수 있어요. 실제로 조선조에서는 묘를 쓰면서 남의 산소 빼앗기, 남의 땅에 몰래 쓰기, 묘 바꿔치기 등 무조건 명당을 쓰고 보자는 식의 폐단이 극심했습니다. 나라 전체의 소송중 70∼80%가 산송(山訟)이었다고 할 정도였죠. 문제는 그런 식으로 명당을 썼다고 해서 동기감응이 가능하겠느냐는 거죠. 풍수서적들을 보면 그런 기계론적 세계관을 상당히 부정하고 경계합니다.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볼까 합니다. 얼마 전 구정을 맞아 차례를 지냈는데, 후손들은 조상 신위 앞에 향을 사르고 청주를 올려 혼백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젯상에 밥을 차려놓고 조상들이 와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조상의 혼백이 와 밥을 먹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후손들은 그럴 것이라고 믿으면서 같은 생각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를 명당론으로 환원시켜보면 객관적으로 좋은 땅이 있다는 개념보다는 내(후손)가 보기에 편안한 땅, 이 정도면 조상도 편안하게 안식할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땅이면 그것이 바로 명당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싸움질하고 도둑질해서 얻은 땅에 과연 조상들이 묻힌다고 해서 편안해할 것인지, 즉 명당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동기감응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흐름도 있습니다.

    이성희: 두 선생님의 동기감응론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요즘 심층 생태학이나 근본주의 생태학에서 말하는 ‘영성(靈性)’이 풍수의 기와 연결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심층 생태학에서의 영성은 우주 전체와 나라는 개체가 서로 얽혀 있다는 느낌의 의식입니다. 기라는 것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어떤 복을 준다기보다는 우주 전체의 장엄함 속에서 서로 얽혀 있어서 상호 신비적 느낌을 교류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 풍수지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본격적으로 우리 삶의 풍속에서 풍수 문제를 얘기해 보기로 하지요. 풍수와 관련해 곧잘 거론되는 것이 매장문화인데 이에 대한 의견은 어떤지요?

    김두규: 묘지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풍수 답사를 하다 보면 가장 볼썽사나운 것이 묘지를 새로 단장하고 사초하고 비석 세우고 요란하게 치장하는 호화분묘입니다. 또 해마다 많은 산들이 깎여져 여의도 1.2배 크기의 면적이 묘지로 장식된다고 하고, 앞으로 50년 후면 묘지가 포화 상태에 이른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과연 전부 풍수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거 풍수에서는 묘지를 쓸 때 땅을 깎는 것을 두려워하고, 돌을 올리는 것은 지기를 누른다 해서 매우 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무덤들은 자연스럽게 없어져서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서 문제가 되는 묘지들은 조선조의 일부 사대부들, 권세를 누린 사람들의 것입니다. 이런 무덤들이 현재까지 나쁜 선례를 미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로 보면 과연 묘지 문제가 풍수 탓이냐, 묘지문제를 화장 말고 달리 해결할 방법은 없을 것인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창조: 매장문화가 토지 문제를 일으켰고, 그 원인 제공자로 풍수가 찍혔죠. 언론이 전부 그런 식으로 다루고, 풍수를 잘 아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의견에 동조를 하다 보니, 일반인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현상에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국토개발연구원에서 매장문화에 대해 종교별 세대별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매장을 가장 선호하는 사람들은 가장 풍수를 안 믿는다고 얘기하는 개신교 신자들입니다. 풍수를 어느 정도 믿는다고 응답한 사람들은 불교하고 가톨릭 쪽인데, 화장해도 괜찮겠다고 응답한 비율도 높게 나왔어요.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매장문제 자체를 놓고 보자면 풍수쪽보다는 오히려 개신교쪽의 영향이 더 크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묘지 개선운동과 화장 장려운동을 여러 단체에서 하는데, 교회 쪽에 어려움이 많다고 해요.

    풍수 이론으로 보아도 화장이 안된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화장하지 말라, 화장은 금기다 하는 말은 나와 있지 않아요. 현대 사람들이 쓴 책 중에는 화장을 언급하고 있는데, 화장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들여다보면 풍수 이론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효의 관념을 끌고 들어와요. 아무리 돌아가셨다지만 부모를 불구덕에 집어넣을 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나는 그런 사람들한테 “당신들이 이장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일이 있는가?”하고 묻고 싶습니다. 땅구덕에서 벌레가 들끓고 부분적으로 부식이 돼버린 시신을 한번이라도 본 일이 있으면 그런 말 못할 겁니다. 매장을 하면 부모님이 편안하고 화장을 하면 불효라는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풍수 왕조’ 고려 왕가도 화장했다

    제가 북한에 가서 고려 왕릉을 보고 온 적이 있어요. 고려왕조는 지배 이념이 선종과 풍수 아닙니까. 요즘 식의 풍수에서 보면 왕과 왕비는 당연히 매장을 했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화장한 산소들이 상당히 많아요. 고려 태조인 왕건릉이 그렇고, 그 옆에 초기 왕들의 릉으로 추정되는 7개의 무덤은 발굴 결과 매장이 아니라 석실에다가 유골함을 보관하는 형태였어요. 명백히 화장의 현장이죠. 이렇게 국가 지배이념으로 풍수를 신봉하던 왕조조차도 화장을 했는데, 풍수가 화장을 금한다는 얘기는 역사적으로도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풍수 이론으로 보나, 역사적 사실로 보나, 가장 중요한 산 사람의 현실적인 토지 문제로 보나 별 수 없이 화장문화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장을 한다고 해서 산이나 강에 유골을 뿌리는 개념이 아니라 봉분을 조성해 유골을 모시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묘지가 가지고 있는 사회 교육적 측면이 대단히 중요하거든요. 명절날 기를 쓰고 산으로 올라가 얼굴도 잘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 묘에 가서 절을 시키며 조상이라고 가르치는 예절 교육은 가족의 일체감과 유대감, 효도심을 갖게 하는데 아주 좋습니다. 더불어 요즘 많이 거론되고 있는 시한부 매장제도 현실적으로 고려해볼만한 대안이 아닐까 생각하고요.”

    이성희: 최선생님께서 화장을 금하는 종교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화장을 금지하는데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떻든 선생님이 제시하신 대로 하면 화장을 하면서도 유교적인 효의 개념을 살리고 국토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두규: 저는 대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풍수지리 강의를 하면서 ‘동기감응과 화장과의 관계를 쓰시오’하는 시험문제를 출제합니다. 즉 좋은 땅에 모시면 잘되고 나쁜 땅에 모시면 안좋다는 풍수 논리를 전제한 뒤 화장과의 관계를 논해보라는 것이지요. 아까 최선생님도 말씀하셨다시피 무덤을 파보지 않고도 육안으로 보아 물이 찼다는 걸 알 수 있는 묘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묘지중 상당수는 유골 상태가 끔직한 상태에 있을 겁니다. 그걸 후손들이 직접 봤을 때 명당이라는 생각이 안들 겁니다. 그렇게 나쁜 땅이 많은데 차라리 그럴 바에는 화장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게 오히려 풍수논리입니다

    동기감응에 대한 기계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유골이 없어지면 동기감응이고 뭐고 없지 않느냐 생각된다면, 시신을 화장해서 납골로 모시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매장문화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홍보 내지는 설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청와대 터는 신들이 노는 장소

    이성희: 음택풍수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는 산 사람들의 거주지인 양택에 대해 논의해보기로 하지요. 이와 관련해 최창조선생님은 얼마전에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 터가 산 사람들이 살 만한 터가 아니라고 지적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최창조: 역사적으로 청와대는 매우 불순한 동기에 의해 지어진 것입니다. 북악산에서 경복궁을 거쳐 광화문에 이르는 과정은 풍수로 보면 백두산 정기를 서울에 불어넣는 용의 목과 머리에 해당합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총독 집무처(옛 국립박물관)를 지어 입을 틀어막고 총독관저(현 청와대)를 지어 목줄을 눌러 놓았습니다. 특히 청와대 터는 기를 모아 명당에 공급하는 수문 구실을 하는 곳인데, 그곳에 대형 건물을 세우는 것은 서울의 목을 조르는 행위에 해당하지요.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현재 경복궁 북쪽 문인 신무문과 청와대 정문 사이에 난 도로를 경계로 하여 그 아래는 사람들의 거주처가 되고 그 위쪽은 신령(神靈)의 강림지가 됩니다. 다른 말로 아래는 사람의 공간이고 위는 죽음의 공간인 셈입니다. 그러니 신령의 강림지인 청와대에 사는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풍수적 소응은 신적 권위의 부여입니다. 사람이 신의 권위를 부여받았으니 나쁠 것도 없지 않느냐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풍수의 논리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풍수에서는 결코 인사가 천도를 넘보는 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청와대의 터잡기는 애초부터 나쁜 의도로 시행된 것이고 풍수 논리로도 잘못된 것이 분명하니까 장래에 대통령 관저를 옮길 것을 제안했던 것이지요.

    이성희: 김두규 선생님도 지난해에 ‘신동아’에 청와대 터가 좋지 않다는 취지로 글을 발표하시기도 했지요?

    김두규: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청와대에 살던 사람들은 불우한 말년을 맞았습니다. 총독부 관저(청와대)를 지은 후 처음 입주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라는 자는 일본에 돌아간 뒤 피살됐고, 제4대 총독 야마나시 한조는 독직사건으로 총독자리에서 물러나는 등 역대 총독들의 말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광복 이후 청와대 주인들의 말로 역시 잘 아시다시피 불행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물러나 객사했고, 박정희대통령은 총으로 쓰러졌고,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퇴임 후 옥살이를 했고, 김영삼 대통령 역시 모양새를 완전히 구겼습니다.

    이성희: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회가 하루도 조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박정희정권 시절 여의도에 국회가 들어선 이후 그랬던 것같습니다만, 여의도 국회도 풍수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최창조: 국회 터를 말하기 이전에 여의도란 곳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조에 지은 ‘대동지지’나 ‘동국여지비고’ 등에서 여의도는 일반적인 섬이 아니라 일종의 사주(沙洲)라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나 풍수적으로 여의도가 중시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의도(汝矣島)란 말이 홍수만 지면 가라앉는 쓸모없는 땅이기 때문에 ‘너나 가져라’는 뜻으로 불리게 됐다고도 하지요. 여의도는 67년 여의도개발사업 이후 새로 85만평의 대지가 조성돼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여하간 여의도 자체가 모래땅인 사토(沙土)이자 강 가운데 흙을 퍼다 메운 사토(死土)의 지역입니다. 저는 여의도를 처음부터 그 원형을 살려 강변 저습지로 보전함으로써 그나마 서울의 운치를 살릴 수 있는 땅으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성희: 여의도가 모래땅이라면 얼핏 생각하기에 그 위에 세워진 집은 사상누각이어서 별로 좋은 느낌은 들지 않는데요. (일동 웃음)

    김두규: 수맥 풍수를 하시는 임응성신부가 여의도 국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국회의원들의 부정 부패와 무기력한 행태를 보고 그 터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직업 풍수들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 안에서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질 리가 있겠느냐고 말들 하지요.

    최창조: 여의도엔 금융기관과 방송국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의도가 가지고 있는 땅의 성격과 맞아요. 모래 땅이라는 자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바깥으로 분산되고 떨쳐버리는 성격이 있는데, 방송은 전파를 따라 외부로 발산하는 기운이고 금융 역시 돈의 성격상 돌고 도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분야는 여의도의 지기(地氣)하고 맞아떨어지겠지요.

    이성희: 여의도는 모래 땅이니까 분열되고 발산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방송이나 금융업은 잘 맞다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국회 의사당하고는 안 맞는 것 아닙니까? 의사당은 여러 가지 의견을 모아 국론을 결집시키는 곳인데….

    최창조: 그렇지요. 돈 기운이 맞는 땅에 정치가 맞다고 얘기하기는 어렵죠. 현실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지만, 돈 있는데 정치가 따라 다니는 건 좋지 않은것 같습니다.

    김두규: 풍수상 여의도는 수구지점 가까운 지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강의 물길이 흘러 기를 흐트러뜨리는 곳, 곧 장풍이 되지 않는 곳이라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온전한 심성을 가지고 국사를 제대로 하겠느냐고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충분히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같은 영남, 프랑스같은 호남

    이성희: 정치 얘기가 나왔으니 내친 김에 우리 사회의 최대 고민거리인 지역 갈등 문제를 풍수적 입장에서 한번 얘기해보지요. 광복 이후 이승만 박사를 제외하면 모두 영남에서 대통령이 배출됐습니다. 풍수를 하시는 분들 중에는 대통령도 일종의 군주 개념으로 보는데, 유독 영남에서 군주가 많이 나온 것은 영남의 강한 산 기운 때문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에 호남 사람들은 매우 섭섭해 했었고요. 또 지금은 호남 출신의 대통령이 나온 상황에서 반대로 영남 사람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최창조: 영남에서 다수의 대통령이 배출된 것을 풍토론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어요. 아무래도 호남에 비해서 영남이 척박합니다. 실제로 가서 보면 음식 맛이 떨어지고 들판도 좁고 하니까 자연히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경상도에서는 열심히 하지 않거나 투쟁적으로 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지요. 반대로 호남 지방에는 먹을 것은 있으니까 풍류라는 것도 나올 수 있는 거고, 사람들이 권력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면도 있지요.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모두 섬 출신인 것도 풍토론 쪽에서 말할 수 있겠지요. 생활 여건이 열악한 섬이라는 자연 조건은 사람들에게 투쟁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드니까요. 그런 점에서 섬 출신이 권력의 최고자리까지 올라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풍수와는 관계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역갈등 문제를 말할 때 늘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지역에 대해 못살게 군 쪽에서 ‘갈등’이라는 표현을 쓰는 법입니다. 풍수에서 등장하는 ‘호남 역세론(逆勢論)’이니 ‘호남 배역론’(背逆論)의 경우 호남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런 식으로 음해하는 표현을 구사했겠습니까. 호남은 역사적으로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호남 대통령까지 나온 상황에서 강한 위치에 있는 호남사람들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먼저 화해하고 용서를 하라고 저는 말합니다.

    김두규: 풍수적으로 말하는 호남 역세론은 조작된 정치 이데올로기입니다. 왕건의 훈요십조에 등장하는 차령 이남 공주강 외의 강, 즉 섬진강 영산강 등은 반궁수(反弓水)라고 해서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향해 활의 시위를 당겨 겨누는 형상이라 합니다. 즉 배신의 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배류수(背流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고려조의 입장에서 보면 낙동강 역시 개성을 향해서 화살을 쏘고 있는 대표적인 배류수인데, 조선영조때 충신배출의 물길로 승화돼 나타납니다. 이런 것들이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조작된 풍수논리입니다.

    최창조: 저도 덧붙여 보지요. 성호 이익이 호남의 강들을 산발사하(散髮四下), 즉 물길이 동쪽으로 북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흩어져 따로 논다, 그렇기 때문에 항심(恒心)이 없고 인심이 사납고 교활하다 했습니다. 호남의 물길이 산발사하라는 것은 실제로 잘 본 겁니다. 섬진강, 탐진강, 만경강, 금강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리고 영남의 경우는 정 반대입니다. 동향 쪽으로 흐르는 조그마한 하천도 어디서 시작이 되든 모두 다대포로 빠져 버립니다.

    문제는 산발사하는 항심이 없고, 낙동강 물길은 모두 하나로 가기 때문에 항심이 있다는 쪽으로 선악을 가해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영남과 호남의 강을 보고 말할 때 프랑스같은 호남, 독일같은 영남이라고 다소 과장되게 표현합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중앙 대지에서 방사상으로 물이 흘러 내려가고, 독일의 경우는 북해로 흘러들어가는 몇 개 하천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라인강 한곳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우리가 그걸 보고 프랑스가 나쁘다 독일이 나쁘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독일은 단결이 잘 되고 깃발만 들면 와 몰려듭니다. 그래서 자꾸 전쟁을 많이 일으켰는지도 모르지만요. 반대로 프랑스는 다른 문화를 잘 받아들이고 포용성이 있고 사람들이 온화하고 예술이 발달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땅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땅 자체가 옳다 틀려 먹었다는 건 처음부터 말이 안됩니다. 김선생님이 강조하시다시피 누군가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끌어들인, 어떻게 보면 풍수라기보다는 도참이죠.

    아파트 명당론

    이성희: 일반인들이 살고 있는 주거환경 등 실생활 주제로 접근해보기로 하지요. 오늘날 우리 주거 환경이 아파트라는 형태를 떠나서는 생각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아파트 단지는 일정한 자연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그 터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상당수가 자그만 산 하나 정도는 없애면서 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과연 여기에 풍수 개념이 성립될 수 있는지요? 만약 아파트에도 풍수가 관여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최창조: 고전적인 풍수 이론대로 한다면 자생 나무의 높이를 넘어가 버리는 층은 지기(地氣)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땅이 돼버리죠.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뜻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아파트 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현대인들이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풍수적 지혜를 알려줘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말씀드리자면 사실은 아파트나 산소 다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좋은 땅, 나쁜 땅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자생풍수에서 이걸 굉장히 강조하는데, 어디에 가서 마음 편하게 느끼고 여기가 참 좋다는 느낌이 들면 그 사람한테는 그곳이 바로 명당인 겁니다. 그런데 똑같은 장소를 다른 사람이 가면 오히려 기분이 이상하다, 느낌이 안 좋다 이렇게도 반응이 나옵니다. 이 사람에게는 그곳이 명당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살 아파트든 부모님을 모셔야 할 산소 자리이든 1시간 정도 그 자리에 앉아 있어 보면 자신에게 맞는지 안맞는지 그 느낌을 알 수 있어요. 이건 제가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이성희: 김선생님은 ‘한국풍수의 허와 실’이라는 저서에서 아파트 문제를 다룬 걸로 알고 있는데요.

    김두규: 우리 나라는 아파트의 형태나 입지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울의 경우 어디든지 터만 있으면 아파트를 20~30층까지 닭장 비슷하게 지어올리는데, 요즘엔 사람들이 여유가 생기니까 이런 주거환경이 불편하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을 보면 우리 같은 형태의 아파트는 굉장히 드뭅니다. 저는 이제 우리 아파트 형태나 입지도 바꿔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대기업 건설업체에서 동양적 사고를 가지고 아파트를 짓겠노라고 했는데, 2000년대 아파트의 주거 형태는 풍수적 지혜가 참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 이번에 남원 풍수학교에 참석한 수강생들을 보니까 조경학과 학생들은 물론 교수님들도 참석하셨어요. 조경학 자체는 서구적 개념인데, 한국의 조경학자 내지는 학생들이 이제는 서구적 조경학만으로는 우리 땅 우리 풍토에 맞는 조경을 하기에 불안하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경학자들이 우리 전통풍수에서 기본틀을 제공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성희: 그런 점에서 최근에는 풍수라는 학문이 단순히 풍수지리학이 아닌, 인문학과 자연학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미 홍콩이나 일본에서는 풍수와 조경이 만나서 방의 위치를 따지기도 하던데요.

    최창조: 그런 분야도 풍수에서 연구해야 할 거예요. 그런 걸 풍수라고 얘기하면 다른 학자들이 펄펄 뛰는데, ‘산림경제’ 같은 책에는 수종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뜰에는 높이 자라는 과일 나무는 심지 말라고 합니다. 앞뜰에다 심어 놓으면 해를 잘 받으니까 나무가 높이 자랍니다. 거기에 아이들이 올라갔다 떨어지면 곱사가 될 수 있고, 하여튼 곰곰 따져보면 일리가 있어요. 또 안방 뒤에는 대나무를 심지 말라 하는데, 대나무 소리가 공부할 때는 청량감을 주지만 잘 때는 기분이 안 좋거든요. 이렇게 하나 하나 따져가지고 조경에 응용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이성희: 이제 마무리를 지을 때가 됐군요.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끊임없는 게 수입국이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떠든 말들을 시차를 두고 들여와서 여기서 장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입 담론이 아닌 자생 담론이면서 21세기 모든 담론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담론이 풍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풍수는 21세기 우리가 직면하게 될 최고의 골칫거리인 환경 문제에 분명히 큰 지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 풍수학자께서는 생태학적인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연계를 해 우리의 자생풍수가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이 되도록 역할을 해주시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입니다. 장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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