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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 상주처로 변신한 신라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관음보살 상주처로 변신한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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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의 조상 내용을 살펴보면 명문에서 밝힌 대로 전면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사방에 2중의 테를 둘러 네모난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한 구도인데, 권속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협시하여 서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는 4인의 불제자들이 승려 모습으로 시립하고 있어 7존불 양식을 보여준다. 그 양쪽 끝으로는 범왕과 제석으로 보아야 하는 호위 신장이 위세를 과시하며 옹위하고 있다.

아미타좌상은 통견(通肩) 형식으로 불의(佛衣)를 입고 네모난 수미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가사 자락이 대좌를 3중으로 덮어 내리는 포수좌(袍垂座, 裳懸座) 형식을 보여준다. 수인(手印, 손짓)은 설법인(說法印; 설법할 때 짓는 손짓)을 지어 가슴 앞에서 오른손 가운데 세 손가락을 꼬부려 보이고 왼손으로 하여금 명치 근처에서 무엇을 받쳐든 듯한 손짓을 하게 하였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데 어깨가 넓고 커서 당당한 체구를 자랑한다. 이렇게 어깨가 넓고 큰 것은 초당시대 당나라 불상 양식의 특징이니, 660년대에 당에서 만들어진 (도판 2)의 주불에서도 그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다.

좌우에 시립한 관세음보살 입상과 대세지보살 입상은 경주 (제13회 도판 1)의 오른쪽 보살 입상과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긴 구슬걸이를 어깨에서 무릎 아래까지 걸어내리고 천의를 비슷한 길이로 늘어뜨려 서로 교차시키는 몸치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각기 바깥쪽 손을 늘어뜨려 정병(淨甁)을 잡고 안쪽 손은 가슴으로 들어 올려 구슬 모양의 지물을 받쳐들고 있는 것은 의 왼쪽 보살 자세 그대로다.

두 보살상 역시 얼굴이 뭉개져서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데, 두원광은 그 안에 든 연꽃잎 표현이 국화꽃처럼 꽃잎 수가 많고 끝이 뾰족하다. 둥글고 꽃잎 수가 적은 불상의 두원광 형식과는 대조적인 표현이다. 두원광 뒤로는 보통 주형(舟形) 광배라고 부르는 촛불꽃 모양의 거신광(擧身光; 온몸에서 나오는 빛)이 2중으로 표현되고 있다. 안쪽 거신광은 5구의 화불 좌상이 연화좌 위에 합장하고 앉은 모습으로 높게 돋을새김 되어 있고, 그 아래로는 파서 새긴 불꽃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두 가닥 둥근 띠 사이로 구슬 띠를 둘러 안쪽 거신광을 구별짓고 나면 그와 같은 모양의 바깥 거신광이 펼쳐지는데, 무엇인가를 가지고 천의 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는 모습의 천인이 좌우에 각 4구씩 새겨져서 공간을 가득 메워 놓는다. 양쪽 공간이 만나는 정상에는 가부좌를 틀고 연화좌 위에 앉은 인물이 전각을 두 손으로 머리 위에 받쳐든 형상으로 새겨져 있다.

전각 안으로부터 2좌의 불상이 기둥 사이로 보이니 아마 이 인물은 제석천일 듯하다. 불꽃 형태의 거신광 상부와 불비상의 위쪽 네모틀 사이에 생겨난 양 모퉁이 삼각형 공간은 인동(忍冬) 무늬로 불꽃 주변을 장식한 다음 불상을 모신 전각 한 채씩을 한 손으로 떠받들고 각각 비천을 1구씩 새겨서 장식해 놓았다.

3층의 옷주름이 덮어내린 네모진 수미좌대 아래로는 엎어진 연꽃잎이 표현되고, 그 좌우로는 사자가 1마리씩 엎드려 있어서 연화좌와 사자좌를 모두 상징하고 있다. 불타의 좌대를 수미좌라고도 하고 연화좌라고도 하며 사자좌라고도 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 표현해 놓은 것이다. 놀랄 만한 종합의 장이다.

협시보살상을 비롯한 모든 협시 권속들은 각각 연꽃 줄기로 연결된 둥근 연화좌를 딛고 서 있는데, 이런 모든 좌대를 큰 연꽃 잎으로 이루어진 우람한 연화좌대가 받치고 있다. 정녕 화면을 빈틈 없이 채운 화면충전법(畵面充塡法; 화면을 가득 채우는 기법)의 인도적 전통을 충실하게 지켜낸 보기 드문 불비상 조각이라 할 만하다.

양쪽 측면(도판 3)은 각기 한면에 4구씩의 주악천(奏樂天;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을 돋을새김해서 전면의 아미타삼존상을 찬탄하게 하고 있다. 연꽃 줄기가 뻗어가면서 4송이의 연꽃들을 각각 피워내고 그 위에 각종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주악천을 1구씩 표현해 놓은 것이다. 악기는 요고(腰鼓), 금(琴), 젓대(笛), 소(簫), 생(笙), 비파(琵琶) 등이다. 그리고 명문은 이 주악천들 사이의 공간에 새겨 넣고 있다.

뒷면 역시 긴 네모꼴 평면인데 4단으로 나누어 각 단에 5구씩 화불 좌상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모두 연화좌 위에 앉아 팔짱낀 모습이니 북위시대 이래로 천불을 표현하던 방식이다. 20불 모두 가슴에 만(卍)자가 새겨져 있으니 앞면 아미타불상과 동일한 불격(佛格)임을 나타낸 것이다. 명문은 각단 화불 좌상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다.

본래 이 불비상은 지붕과 받침이 딴 돌로 만들어져서 끼워 맞추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반신라적 의중 담긴 비암사 미륵보살사유반가비상

비암사에서 발견된 3개의 불비상 중에는 (도판 4)도 있다. 과 (보물 367호)이 모두 아미타불상이라는 명호와 조성 연대 및 조성자를 밝힌 명문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 (보물 368호)은 어떤 명문도 새겨져 있지 않고 그 규모도 가장 작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당시 신앙 형태를 짐작케 해주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니, 백제 유민들은 아직까지도 무왕(武王, 580년 경∼641년)과 같은 미륵보살이 백제 땅에 다시 내려와 신라와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고 미륵 불국토를 재건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신라적인 의중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규모도 작게 하고 명문도 새기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만드는 정성만은 가장 절실하고 간절했을 듯하다.

그래서 비첨(碑; 비석의 처마, 즉 비석 덮개)과 비좌(碑座; 비석의 좌대)를 한 돌에 새기는 완벽성을 과시하면서, 비신(碑身; 비석의 몸돌) 정면에 미륵보살사유반가상 1구를 단독으로 돋을새김해 놓는 과감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미륵반가상 양식은 (제 9회 도판 4-1)에서 (도판 5)으로 이어지는 양식 기법을 보이고 있다.

극도로 추상화된 가냘픈 몸매에 길고 무거운 구슬 꿰미 장식을 목과 전신에 걸어 내리고 보관의 띠도 이마에서 어깨까지 늘어뜨린 모습이다. 팔뚝도 가늘고 무릎과 어깨도 빈약한데 반해 얼굴은 자못 크나 마멸되어 그 상호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일반 사유반가상과 크게 다른 점은 바닥을 짚은 왼발이 반가한 오른쪽 무릎 밑에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체 구조상 이런 자세는 나올 수 없는데, 이렇게 무리한 표현을 한 것은 아무래도 기획 단계에서 오른쪽에 연화발 받침을 먼저 조성해 놓는 실수로 말미암아 비롯된 파행이 아니었던가 한다. 더구나 무릎 이상의 상체가 정면을 하고 있어 오른쪽 연화발 받침 쪽으로 틀어 댄 왼발의 방향과는 도저히 연결될 수 없음에야!

이런 실수를 감추기 위해 천의 자락을 왼쪽 무릎 아래로 지나치게 모아 떨어뜨려서 무게를 너무 실어 놓았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적당주의가 빚어 놓은 신비한 초논리적 표현 기법이라 하겠다.

전체 구도를 살펴보면 용화수 나무 가지가 뒤엉킨 모양으로 표현된 나무 그늘 형태의 비첨석을 두 개의 둥근 기둥으로 받쳐서 신묘한 실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꽉 차도록 미륵반가상 1구를 안치해 놓은 구도다. 용화수 아래에 하생한 미륵보살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다.

그 분위기를 장엄하게 하기 위해 머리 위 나무 그늘 아래로 꽃 덮개를 띄우고 양쪽으로 구슬 띠를 늘여 각기 기둥 머리에 고정시킨 다음 그 늘어진 구슬 띠로부터 세가닥 2중 구슬 띠를 반가사유상의 네모난 대좌 위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그렇게 되니 둥근 기둥과 비석 덮개, 비석 받침이 만들어 놓은 비신 정면의 방형 공간은 꽉 차게 되었다.

이 미륵보살의 권위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양쪽 측면에는 연꽃 위에 올라서서 꽃을 받쳐들고 각각 미륵반가상을 향해 공양을 드리는 1구씩의 보살 입상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대좌 부분에는 큼직한 향로에 향을 사르며 차를 달여 공양하는 모습의 승려와 속인을 1명씩 정면에 표현하였다. 양쪽 측면에도 반가상을 향해 합장하고 꿇어앉은 인물을 1명씩 추가해 새겨 놓아 비신 측면과 마찬가지로 양쪽 측면이 정면과 연결된 한 화면임을 암시하였다.

신라는 관음보살 상주처

이렇게 미륵 하생신앙이 백제 옛 지역에서 사그라들지 않자 신라 조정에서는 신라가 이미 미륵보살과 미륵불이 하생한 미륵 불국토일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물고 있는 관음 성지라는 사실을 유포하여 민심을 다잡으려 한다.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적임자는 당시 40∼50대의 장년기에 접어들어 신라 불교계를 이끌던 원효(元曉, 617∼686년)와 의상(義湘, 625∼702년)뿐이었다.

그러나 원효는 이미 태종 무열왕(654∼660년) 재위 기간에 과부가 된 그의 둘째 딸 요석(瑤石) 공주에게 장가들어 파계하였으므로 표면에 나설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의상대사가 앞장서게 되는 듯하니, ‘삼국유사’ 권3 낙산의 두 큰 성인 관음과 정취(洛山二大聖觀音正趣)조에 의하면 의상이 동해변에서 관세음보살의 참모습(眞身)을 직접 뵙고 그곳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락가산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막 당나라로부터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 관세음보살의 진짜 몸)이 이 해변 굴속에 머물러 산다는 말을 들은 까닭에 그로 인연해서 낙산(洛山)이라 이름지었다. 대개 서역의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은 여기서 이르기를 소백화(小白華)라 하는데 곧 백의대사(白衣大士; 관세음보살)가 머물러 사는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를 빌려 그렇게 이름지었다. 7일을 재계(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 함)하고 방석을 던져 물 위에 뛰어드니 천룡팔부(天龍八部; 불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장, 천·용·야차·아수라·가루라·건달바·긴나라·마후라가, 이상은 사천왕의 권속임)가 모시고 굴속으로 이끌어 들인다.

공중에 대고 절을 올리니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꿰미를 준다. 의상이 받아가지고 물러나자 동해용왕이 또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준다. 대사가 받들고 나와 다시 7일을 재계하고 들어가니 이에 참모습(眞身)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앉았던 자리 위 산꼭대기에 쌍대나무가 솟아날 터인데 마땅히 그 땅에 전각을 지으면 좋으리라.’

대사가 이를 듣고 굴속에서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땅으로부터 솟아나온다. 이에 금당을 짓고 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봉안해 놓으니 원만한 용모와 아름다운 자태가 꼭 하늘에서 나온 듯하였다. 이후에 그 대나무가 도로 사라졌으므로 이곳이 바로 진신이 머무르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그 절 이름을 낙산이라 하였다. 의상대사는 받아온 두 종류의 구슬(염주와 여의보주)을 성전(聖殿)에 모셔두고 떠났다.

후에 원효법사가 뒤따라 와서 뵙고 예배를 드리려고 맨처음 남쪽 들판에 이르니 무논에서 한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다. 법사가 장난으로 그 벼를 좀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 흉년이 들었다고 장난으로 대답한다. 또 한참 가서 다리 아래에 이르니 한 여자가 월수백(月水帛; 여자의 월경대)을 빨고 있다.

법사가 물을 청하자 여자가 그 더러운 빨래물을 떠서 준다. 법사가 엎어버리고 다시 맑은 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 소나무 위에서 한 마리 푸른 새가 ‘아이구 이 젓먹이 화상아’라고 울더니 홀연히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데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다.

법사가 절에 도착해보니 관세음보살 좌대 아래에 또 전에 보았던 신발 한 짝이 놓여 있다. 이제야 겨우 전에 만났던 성녀(聖女)가 곧 진신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일컬었다. 원효법사가 성굴(聖窟)에 들어가 다시 참모습을 보려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갔다.”

의상대사는 원효보다 8세나 어렸으나 진골 귀족 출신으로 1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한 이래 원효와 뜻이 맞아 늘 함께 수련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진덕여왕 4년(650)에는 34세의 원효와 26세의 의상이 같이 당나라로 가려다가 고구려군에게 잡혀 간첩으로 오인돼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도중에 해골에 고인 물을 달게 마시고 대오각성하여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게 되고, 의상은 37세 때인 문무왕 원년(661)에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그래서 장안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러 화엄종 제2조사(사실상 화엄종의 창시자)인 지엄(智儼, 600∼668년)화상을 만나 그 의발을 전수받는다.

의상이 지엄을 찾아가기 전날 밤 지엄이 꿈을 꾸니 나무 한 그루가 바다 동쪽에서 자라나 점점 커지더니 그 가지와 잎이 온 중국을 다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봉황이 둥지를 틀어서 올라가 보았더니 한 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있어 광명을 멀리 비추고 있다. 놀라 꿈에서 깬 지엄은 의상이 올 줄 알고 집안을 청소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보고 크게 만족하여 입실(入室; 제자로 들어감)을 허락하였다 한다. 이에 의상은 지엄이 돌아가기까지 8년 동안 지엄의 문하에 있으면서 화엄종지를 철저히 전수받으니 사실상 의상은 지엄의 상수제자였다.

그러나 문무왕 11년(671) 당 고종이 설인귀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정벌하게 하자 이 소식을 탐지한 숙위왕자 김인문이 신라에 이 정보를 알려 대비케 하기 위해 의상을 조기 귀국시키니, 의상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화엄종주의 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급히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문무왕의 조리 정연한 답서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의상의 공이 태반이라 하겠다.

다행히 의상에 의한 사전 정보 유출이 효과를 발하여 설인귀 대군이 전단을 열지 않고 회군하자, 문무왕은 한편으로 백제 유민을 회유하고 한편으로 고구려 부흥군을 부추기며 민심을 합일시켜 삼국 통일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움직임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그래서 신라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불국토임을 내외에 표방하기 위해 의상으로 하여금 동해변 양양 땅에서 보타락가산을 찾아내게 하고 원효로 하여금 다시 이를 증명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낙산사의 주전각은 원통보전(圓通寶殿)이고 그곳에 봉안된 주존은 (도판 6)이다.

당나라 점령군과의 싸움

문무왕 13년(673) 7월1일에 삼국통일의 원훈(元勳)인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이 79세의 천수를 누리고 돌아간다. 사적으로는 문무왕의 외숙부이자 매제인 지친이며 조정에서는 군부의 구심점이었던 그가 돌아간 것은 문무왕에게 여간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해 윤5월에도 당의 이근행이 임진강까지 쳐내려오는 등 당의 괴롭힘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 대당 항쟁이라는 큰 과업이 남아 있는 데다, 그동안 삼국통일 과정에 공을 세운 무장들의 발호가 만만치 않은 마당에 이들을 제압할 군부의 중심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무왕은 김유신의 장자 삼광(三光) 이찬으로 하여금 김유신을 이어 집정(執政)을 담당하게 하였지만 이전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장 이 달에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군에 빌붙으려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처자가 천민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문무왕은 당군의 침략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해의 제해권 확보가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대아찬 철천(徹川) 등으로 하여금 병선(兵船)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에 진치게 하여 당군의 해상 침략에 대비한다.

당나라도 때를 놓치지 않고 이 달에 말갈과 글안병을 이끌고 신라 북변을 전면 공격해 들어온다. 이에 신라는 9회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여 2000여명을 참수했다 하는데, 임진강변의 호로하(瓠蘆河, 장단, 고량포) 전투와 한강변의 왕봉하(王蓬河,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익사한 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격노한 당 고종은 문무왕 14년(674) 2월2일에 문무왕을 폐하고 당나라에 있는 그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시키는데,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으로 하고 이필(李弼)과 이근행을 부장으로 삼아 대군을 거느리고 동행하게 한다. 그러나 문무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점령지를 5경 9주로 나누고 그곳에 진골들을 보내 직접 통치하게 하는 여유를 보이며 9월에는 고구려왕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책봉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자장율사의 생질이자 명랑법사의 둘째 형인 의안(義安)법사를 정관대서성(政官大書省)으로 삼아 불교계를 총괄하도록 한다.

드디어 문무왕 16년(675) 2월에 유인궤는 임진강을 건너서 칠중성(七重城, 현재 경기도 積城)을 깨뜨리고 이근행은 말갈병을 거느리고 바다로부터 쳐들어와 매초성(買肖城, 인천)에 진을 치자, 문무왕은 사죄사를 보내 사과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달랜다. 당 고종도 한반도를 침략하는 것은 수렁에 빠지는 일과 같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하여 못이기는 척하고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김인문을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고쳐 봉하여 중도에서 당나라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러나 당 고종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해 문무왕 15년(675) 9월에 숙위학생 김풍훈(金風訓)의 아비 대장군 김진주(金眞珠)가 모반하려다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설인귀로 하여금 김풍훈을 향도로 삼아 신라를 다시 침공해 들어가게 한다.

천정성(泉井城, 경기도 교하)으로 쳐들어온 대군을 신라 장군 문훈(文訓) 등이 크게 격파하여 1400여명을 참수하고 병선 40척을 빼앗으니 설인귀는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전마 1000필도 노획하였다. 내친 김에 신라군은 9월29일 매초성에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주둔해 있는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 이근행의 본영을 들이쳐서 전마 3만3080필과 그만한 숫자의 병장기를 빼앗으니 이근행은 주둔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이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싸움 18회를 벌여 모두 이기고 6000여명을 참수하며 전마 200여필을 빼앗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자, 당군은 더 이상 한반도 내에서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드디어 문무왕 16년(676) 2월6일에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으로부터 요동성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공주에 있던 웅진도독부도 요하 하구 발해만의 영구 부근에 있던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겨서 당나라에 있는 백제 백성들을 잠시 이곳으로 옮겨 놓는다. 사실 요하 하구 일대는 원래 백제의 식민지가 있던 곳이었다.

이로써 한반도 안에 있던 당나라 주둔군 사령부는 일단 모두 압록강 밖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문무왕은 이달부터 의상대사로 하여금 태백산 기슭에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浮石寺)를 짓게 한다.

그러나 당이 신라 침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1월에 설인귀는 다신 수군을 이끌고 와서 웅진도독부를 되찾기 위해 금강을 거슬러 오르려 한다. 이에 사찬 시득(施得)은 병선을 이끌고 기벌포에서 맞아 싸우는데 이 싸움에서는 패하였으나 이후 22회나 계속되는 크고 작은 싸움에서 번번이 이겨 4000여명을 참수하게 되니 설인귀는 다시 소득없이 물러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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