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暗葬으로 대권쟁취한 윤보선 전두환, 移葬으로 출세한 노태우 김대중

  • 김두규·풍수지리학자·우석대교수 / 안영배·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8-11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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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죽었다”며 신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린 철학자 니체는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라는 글에서 그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장소와 풍토, 즉 우리 식으로 말하면 풍수(風水)적 조건을 언급하였다.

    “어느 누구도 아무 곳에서나 살 수는 없다. 자기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큰 과업을 이뤄야 할 사람은 누구나 이 점에 있어 선택이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 풍토가 신진대사에 끼치는 영향, 즉 그 부정적 및 긍정적인 영향은 지대하다. 장소와 풍토 선택에 한번 실수하면 자기가 지향하는 목적을 완수할 수 없으며, 아예 그 기회조차 갖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니체는 좋은 땅에서 나올 인물로,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천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니체는 천재가 나올 수 있는 땅의 조건으로 ‘맑은 공기, 청명한 하늘, 즉 거대하고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을 언급하였다.

    그러니 니체가 말한 천재가 나올 수 있는 지리 조건을 염두에 두고 역대 대통령들의 땅을 보면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이나 권력자들은 니체와 같은 천재 사상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란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한 자들이다. 니체의 논리에 따르자면 그들의 생가 터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땅이어야 할 것이다.



    과연 집터의 기운은 있으며 그것은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인가?

    “무릇 땅에 집을 짓고, 뼈를 묻을 때 받게 되는 것은 그 땅의 기운이다. 땅의 기운에는 좋고 나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즉 땅의 기운을 받아 태어날 때 맑고 탁하고, 현명하고 어리석고, 착하고 악하고, 귀하고 천하고, 부자가 되고 가난하게 되고, 오래 살고 일찍 죽고 등의 차이가 어찌 없겠는가?”

    이는 조선조 지관을 선발하는 데 필수 시험과목이었던 ‘지리신법’의 한 대목이다. 특정한 땅의 기(地氣)가 특정한 인체의 기(人氣)와 만나 상생(相生) 관계를 가질 때 발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인걸지령론(人傑地靈論)이다.

    따라서 특정한 땅의 기를 받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한 명씩 독특한 인물이 나올 수 있다. 반면에 특정 지기(地氣)와 인기(人氣)가 만나 상극 관계를 가질 때 재앙이 일어나기도 한다.

    권력과 궁합이 맞는 땅

    다시 니체에게로 돌아가보자. 그의 말을 따르면 자기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땅을 선택할 때 한 번 실수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재기 불능 상태가 될 수 있으며 반대로 땅의 선정에 성공하면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은 성공한 대통령이다. 김대중은 97년 대통령 선거 전에 오랜 세월 자신의 정치무대였던 동교동에서 일산으로 이사하였다. 동교동 저택에서는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풍수 술사(術士)의 말을 따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이 집을 팔았다. 퇴임 후에는 다시 동교동 옛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이로 보아 김대중의 일산 집은 거주하려는 실질적 목적보다는 풍수 도참설에 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의 이러한 선거전략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1800년 전 중국에서 조조(曹操)가 활용한 수법이었다. 후한이 몰락할 즈음 조조, 유비, 손권, 원소, 제갈공명, 주유 등 쟁쟁한 시대의 영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때 후한의 신하 왕립(王立)은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에게 천문과 오행의 이치로 볼 때 새로운 천자가 나타날 조짐이 있는데, 오행상 ‘흙의 덕(土德)’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흙(土)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천자가 될 것이니 대비하라는 글을 올린다.

    바로 토(土)의 덕성을 갖고 있었던 군벌 가운데 하나가 조조였다. 자기가 풀어놓은 정보원을 통해 그 말을 들은 조조는 왕립을 협박하여 더 이상 그런 말을 떠벌리지 못하게 한다. 동시에 측근과 상의하여 오행상 토(土)의 방위에 해당하는 땅을 찾는데, 그곳이 바로 허창(許昌)이었다. 결국 그는 이곳으로 한나라 도읍지를 옮기게 하고 자신의 세력 기반을 다져 마침내 위왕(魏王)이 되었고 그 아들대에 이르러 천자가 나왔다.

    고려 때 묘청과 신돈의 서경 천도설, 조선 광해군의 교하(파주군 교하면) 천도 계획 역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풍수도참 사상이다.

    김대중이 일산으로 이사하게 된 풍수도참적 근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일산 집터는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읽게 해준다.

    그의 일산 집터는 일산의 유일한 야산인 정발산 기슭에 있다. 정발산은 평지돌출의 야산으로 한강을 만나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춘 곳이다. 갈 곳까지 가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산이자, 드러낼 것을 다 드러낸 산이다. 따라서 절박한 상황이기도 하지만 개방적이기도 하다. 대통령 선거에 몇 번이나 떨어진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일산 집터는 그런 의미에서 성격이 맞아떨어진다.

    사람마다 성격과 그 지향하는 바가 다르듯, 땅도 그 성격이 다르다. 특정한 땅과 특정한 사람이 만나 궁합이 맞으면 성공하지만, 서로 궁합이 맞지 않으면 실패한다.

    역대 대통령 집터의 공통점

    실제 역대 대통령들과 몇몇 대권을 지향하는 정치인들의 생가와 선영 묘소를 살펴보면 독특한 보편성을 보여준다.

    먼저 이들의 집터, 즉 생가에 대해 언급해 보기로 하자. 역대 대통령들의 집터를 따지는 데 우선 언급되어야 할 것은 그 출생 성분에 따라 집터 입지가 두 가지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출생 성분이라 함은 신분이 아니라 태어날 때의 집안의 빈부 정도를 말한다.

    윤보선과 김영삼은 그 윗대 조상부터 인근에서 알아주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집터는 그 동네에서 가장 좋은 터에 자리한다. 윤보선과 김영삼 생가 모두 산 능선이 동네 한가운데로 뻗어내려, 산 능선의 끝집이면서 동네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윤보선 생가 터(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새말)는 풍수 전문가의 안목으로 볼 때 가진 자의 겸손을 적절히 보여주면서도 풍수적 지혜를 활용한 완벽한 예술품이다.

    그에 반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의 경우 살림이 가난해 여유 있게 터잡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이승만의 생가는 북한에 있어 답사가 불가능하므로 제외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대 대통령들의 집터 공통점은 집 바로 뒤로 산 능선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즉 동네를 감싸주는 변두리에 있지만, 산자락의 끝 집이라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역대 대통령의 생가 터를 구분하여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그림 1 참조).

    풍수지리는 산 능선 끝 집을 ‘산이 다하는 곳(山盡處)’, ‘용(龍: 산 능선)이 다하는 곳(龍盡)’이라고 하여 중요시한다. 그것은 전선을 따라 흐르는 전기와 마찬가지로, 산천의 정기는 산 능선, 즉 용의 지표면을 따라 흐른다는 관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집터 풍수의 대표적 고전인 ‘양택십서(陽宅十書)’에서는 “사람이 거처할 집에서는 그 내려오는 산 능선의 기세가 중요하다” 하여 집 뒤로 이어지는 산 능선을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양택십서’의 이론과 역대 대통령 집터 입지가 일치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부터 역대 대통령의 생가를 본격적으로 고찰해보기로 하자.

    박정희 생가, 또 대통령 나올 터

    먼저 박정희의 생가.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1916년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재 구미시 상모동)로 이사를 한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처가인 수원 백씨 묘지기로 주어지는 시제답 8마지기를 경작하기 위해서였다.

    “박성빈은 금오산 효자봉의 산자락이 평지로 변하기 직전 끝머리에 집터를 골랐는데 움푹하게 팬 대지에 동쪽만 제외하고 사방이 대나무와 탱자나무 숲으로 빙 둘러쳐진 곳이어서 담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 고려되었다”고 조갑제는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서술한다.

    즉 선택의 여지 없이 지은 집이었던 것이다. 그 터는 부잣집이 집을 짓고 살 수 없는 작은 터였다.

    이 집터는 상모동 마을을 에워싸는 왼쪽 산 능선, 즉 풍수적 용어로 좌청룡의 끝부분으로 동네 전체로 볼 때 변방에 위치한다. 이곳에 집을 지은 지 일 년 후인 1917년에 태어난 이가 박정희다. 이곳 땅의 기운과 은밀한 감응을 하게 되는 사람은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현재 이곳 생가 관리를 맡고 있는 김재학씨(전 초등학교 교장)는 “박대통령 생가를 찾는 이들은 대개 추모객이지만, 풍수 호사가들도 적지 않아 지금도 적게는 서너 명에서 때로는 버스를 대절하여 수십 명씩 찾아온다”고 말한다. 풍수 호사가들의 말로는 “신혼부부가 와서 자면 대통령이 또 나온다”는 것이다.

    박정희 생가와 비슷한 곳으로 전두환 생가를 꼽을 수 있다. 경남 합천면 율곡면 내천리에 위치한 전두환 생가 역시 동네 왼쪽 산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전두환 생가로 이어지는 능선(현재 밭으로 활용) 맨 뒤 정상이 하나의 주산(主山)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이나, 이 마을의 실질적 주산은 정상에 ‘못재’라는 연못이 있는 산이다. 이 못재가 있는 곳에서 몇 줄기 능선이 뻗어 내려 내천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때 동네의 왼쪽 산줄기, 즉 청룡 끝 줄기에 전두환 생가가 위치한 것은 박정희 생가와 같다.

    전두환 고향 마을을 그곳 사람들은 ‘넓은 모래밭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상’, 즉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의 명당이라고 자랑한다. 마을 앞을 감싸 흐르는 황강 모래밭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상의 산세이며, 그 주둥이 부분이 전두환 생가터다.

    그런데 기러기가 착륙할 때 부드럽게 접지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충돌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땅은 길흉화복에 극단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풍수 속설에 “평사낙안형의 명당이 진짜가 아니면 후손이 끊긴다”는 말이 나온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실제로 전두환이 태어나기 전에 어린 두 형이 떨어져 죽은 것도 그러한 땅의 성격에 적응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전두환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노태우의 생가는 어떠할까. 노태우의 고향은 대구시 동구 신용동 용진 마을로 대구의 명산 팔공산의 한 자락 끝에 자리한다. 노태우의 전기에도 이 일대 지세를 가리켜 ‘한 마리의 큰 용이 도사리고 있는 듯’하며, 마을은 바로 ‘용의 머리’에 위치한다고 적고 있을 만큼 보통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특히 노태우 생가는 용머리의 중심처에 자리한다.

    한편 동네에서 비교적 잘사는 사람들이 이 동네의 우백호 능선 품안에 자리하고 있는 반면, 노태우 생가는 동네 좌청룡 끝집이라는 것도 다른 역대 대통령들의 생가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곳 동네 사람들은 노태우 고향마을을 감싸는 우백호 끝부분을 ‘동산’이라 하여 예부터 금기시해왔다. 노태우 생가에서 보면 그것은 우백호 끝자락이자 여의주에 해당된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노태우도 동산의 나뭇가지 하나에도 손대지 못하게 했다.

    노태우 생가를 들어설 때 눈에 띄는 특징은, 2∼3m 높이의 계단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그 계단들이 자연암반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네 뒷산에서 이어지는 산 능선이 노태우 생가 마당 끝에서 끝이 났다는 증표다.

    마당 입구와 집 뒤에는 자연석 암괴가 박혀 있다. 자연 암반이 집터나 묘지 주변에 있는 것에 대해 이몽일 풍수지리학 박사(경북대)는 터잡을 때 자연석이 나오면 힘이 좋은 곳, 곧 발복이 빠른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자연과학적으로 암반이 땅 속에 박혀 있으면 지반이 안정되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단지 여기에 멈추지 않고 바위가 사람의 심성에 끼치는 영향, 특히 심리학적 영향이 크기 때문에 그와 같은 술수적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까닭에 집터 주변이나 무덤 주변에 바위가 있을 때 좋은 바위이면 권력을, 나쁜 바위이면 재앙을 불러온다는 극단적인 길흉화복 해석을 한다.

    이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조선 중종 때 ‘희릉(禧陵) 사건’이란 게 있었다. 희릉은 중종의 부인 장경왕후 윤씨(1491∼1515)의 무덤이다. 윤씨가 죽자 중종은 정광필을 총호사로 임명하고 풍수학인 조윤·황득정·성담기 등으로 하여금 능 자리를 찾게 하여 현재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부근으로 묘지를 정한다. 그런데 무덤자리를 다섯 자쯤 팠을 때 큰 돌줄이 나와 더 파내려갈 수 없었다. 광중에 돌이 나온다는 것은 풍수에서 극히 꺼리는 일이다. 이에 당시 현장에 있던 우의정 김응기가 도승지 손중돈으로 하여금 중종에게 이 뜻밖의 사건을 보고하게 한다. 이에 중종은 “돌이 있으면 쓸 수 없으니 그 아래가 쓸 만하다면 그 아래로 내려 쓰라”고 하여 돌이 나온 자리에서 약간 아래에 장지를 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중종의 부인이자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는 헌릉 서쪽에 묻혀 희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22년이 흘렀다. 1537년(중종 32년) 정언 이문건이 희릉에 돌이 박혀 있다는 말을 중종에게 아뢴다. 비록 중종 자신도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이러한 말이 나오자 장경왕후에게서 난 세자(훗날 인종)의 안위가 걱정되어 돌이 광중에 있을 경우 어떤 길흉화복이 있는지를 지관들로 하여금 보고하도록 명한다.

    관상감에서 올린 보고서는 험석(險石)이 있을 경우 재앙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에 중종은 그해(1537)에 능을 옮기게 하고 당시 그 일에 관여하였던 대신들과 풍수학인 조윤·성담기·황득정 등에게 책임을 물어 유배를 시키거나 사형에 처했다.

    그런데 중종의 아들 인종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중종의 두려움은 현실이 되고 만 셈이다.

    당시 희릉사건은 정치세력간 알력도 작용했지만, 일차적으로 풍수에서 바위가 보일 경우 길흉화복이 극단적으로 동시에 신속하게 나타난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사건이었다.

    어떻든 노태우 생가의 경우도 집 주변에 보이는 자연 암반이 좋은 돌로 강력한 기운을 소응(昭應)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기가 살기(殺氣)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는 점도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그는 아버지의 교통사고사를 겪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불행을 야기했던 5·18 전후의 노태우 행적도 어느 정도 이 살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해기(海氣)가 넘보는 김대중 생가

    목포에서 두 시간 뱃길 거리에 있는 김대중 생가는 하의도 맨 끝으로 알려져 있다. 하의도 선착장이 있는 웅곡리 면소재지에서 ‘김대중 대통령 생가’ 안내판을 따라가면 후광리가 나온다. 후광 2구와 후광 1구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1km 떨어진 곳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 생가 마을을 바라보면 마치 거북이가 목을 길게 빼고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김대중 생가가 있는 곳은 거북이 머리 부분이다. 금거북이 진흙 밭으로 들어가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이다.

    이곳은 하의도 북동쪽 끝으로 후광마을에서도 끝 집이자 왼쪽 외딴집이다. 이 역시 다른 대통령들의 집터처럼 동네의 좌청룡 끝 지점에 있다.

    집터는 마을 뒷산에서 내려온 산 능선의 끝부분에서 반달 모양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1999년에 복원한 생가는 반달 모양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집 뒤로 이어지는 산 능선은 후덕하여 그곳 특산인 마늘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집 뒤 수백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산(主山)은 높지 않기 때문에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이곳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데, 썰물 때는 섬의 북동쪽에 있는 장병도와 갯벌로 이어진다. 따라서 김대중 생가터는 하의도의 맨 끝집이 아니라 장병도에서 이어지는 지맥의 원줄기이자 맨 처음 갈라져 나온 왼쪽 능선 끝이다. 하의도 전체의 산들은 이곳 김대중 생가 우측 능선에서 이어져 나가는 꼴이다.

    정신질환자가 나올 땅

    동네 주변부에 자리한 역대 대통령 집터가 모두 동네 왼쪽 산 능선 끝머리에 자리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집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은 모두 밭이나 다른 주택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산 능선은 동네 중심부를 감싸는 방어공간이다. 즉 동네 중심부와 바깥세상의 접경지인 것이다.

    산 능선이기 때문에 지기가 흐르는 곳이라고 하지만, 사실 풍수 고전에서는 주변부 산 능선을 그리 좋은 땅으로 여기지 않는다. 주변 여건도 좋지 않을 때 정신질환자가 나오거나 재앙을 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 변방의 집터에서는 정신이상이나 뜻밖의 불행으로 죽은 사람들이 있다.

    박정희의 경우 셋째 형 상희씨가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총살당했고, 넷째 형 한생씨는 정신질환으로 죽었다. 또 큰형인 동희씨는 20년이 넘는 가출 생활을 했다. 집터의 기운이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두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80년대 초반에 모든 관공서뿐만 아니라 군부대에 비치되어 누구나 필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전두환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에는 전두환의 큰형 열환이 7살 때 동네 아이들의 장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적혀 있는데, 그가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음을 암시한다.

    흔히 이러한 주변부 집터에서는 꼭 정신질환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름 모를 병이나 뜻밖의 사고로 죽는다고도 풍수에서는 말한다. 실제 역대 대통령들의 가족을 보면 교통사고로 죽거나(노태우 아버지), 떨어져 죽거나(전두환 둘째 형 규곤), 병들어 죽은(김대중 누이동생) 가족이 있었다. 대개 이런 집터는 폐가가 되거나 그곳에 오래 살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그 터의 기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윤보선이나 김영삼의 경우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들의 집터는 마을에서 가장 좋은 터인 동시에 마을의 중심부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윤보선과 김영삼 생가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반면,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대중 생가에는 관리인 이외 실제 생활을 하지 않고 있음도 하나의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입지 조건의 집터이기에 권력자를 낳았으면서 동시에 불행한 삶을 살게 하는 자를 나오게 하는 것일까? 마치 땅이 니체를 천재로 만들었으면서 동시에 그로 하여금 미쳐 죽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산 능선이 평지와 만나는 부분은 기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기 때문에 강력한 기운이 응결된 곳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역대 대통령의 생가에서 보이는 공통점이다.

    그런데 태어날 때 그리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대중의 집터는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지 않고 변방에 위치한다. 마을 전체에서 볼 때 마을을 감싸주는 테두리, 즉 청룡이나 백호 부분에 해당되는 갓집이다. 이러한 울타리 지점에서는 심리적으로 울타리 구실을 하는 곳으로 동네 중심부와 외부세계의 경계에 서 있다. 한편으로는 동네 중심부를 부러워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세계와의 접경지에서 불안스러운 눈으로 바깥세상을 넘보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김대중의 생가는 그 특징을 잘 드러낸다. 김대중 생가는 산으로 둘러쳐져 있어 바다가 보이지 않으나 언뜻언뜻 바다 기운이 비친다. 바다가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육지와 바다의 접경지이기 때문이다. 파란만장한 정치인의 흔적을 엿보는 듯하다. 김대중 가족이 일찍이 목포로 떠난 이후 그 집터가 밭으로 변해버린 것도 이 땅의 성격 때문이다.

    전두환 가족이 비록 일제라는 시대적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가족이 만주로 떠나 해방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대구에 정착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박정희와 노태우의 생가는 산 능선의 끝에 위치하면서도 동시에 동네 맨 끝집이다. 산과 마을의 접경지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노태우 가족의 경우 비록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당시 흔하지 않던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사망하는 희생을 치렀다. 박정희 가족은 박정희의 여러 형제가 사고와 고난을 겪었음은 앞에서 기술한 대로다.

    생가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산 모양

    역대 대통령 생가 주변 산들이 원형(圓形)이나 방형(方形)이 많다는 점도 하나의 공통점이다. 윤보선·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생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집 주변에 노적봉과 기와 지붕 모양의 산이 보인다는 점이다.

    풍수지리의 고전 ‘양택십서’에 “집 문 앞에 산 모양이 평탄하거나 원형인 산일 때 길하다”는 문장과 부합한다. 방형(方形), 즉 평탄한 산은 마치 대궐과 같이 중후하면서도 반듯한 모양의 산이기 때문에 아마도 임금이나 제왕의 기운이 있다고 유추 해석했을 것이다. 또 원형의 산은 가마솥을 엎어놓거나 노적봉과 같은 모습인데, 가마솥과 노적봉 모두 큰 부잣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귀의 기가 있다고 해석한다.

    이는 일종의 환경지각적 이미지를 사람의 길흉화복에 결부시켜 해석하는 방법인데, 그 역사는 아주 길며 논의 또한 다양하다.

    이를테면 산 모양에 따라 방형(方形)의 산은 부자가 많이 나온다고 하기도 하고, 왕후가 나오는 형태의 산이라는 둥 술사들 사이에서 통일된 견해는 없다. ‘설천기(泄天機)’를 저술한 중국의 풍수학인 요금정은 방형을 재성(財星)으로 보았으나, 당나라의 양균송(楊筠松)은 존성(尊星)으로 보았다. 방형의 산을 재성으로 보느냐, 존성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길흉화복 해석이 달라진다. 재성일 경우 큰 부자가 나온다고 하며, 존성일 경우에는 임금이 나온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 둘보다 후세대의 풍수학자인 명나라 서선계, 서선술 형제는 방형의 산 가운데 깨끗한 느낌을 주는 산은 왕이 나올 자리이며, 흐린 느낌을 주는 산은 부자가 되게끔 영향을 준다고 하여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주장을 통일시킨다.

    그런데 한국의 다른 역대 대통령의 생가나 선영에 방형의 산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토형(土型, 방형)의 산을 권력자 배출과 연결시킨 옛사람들의 풍수적 관념이 억지 말은 아닌 듯하다.

    한편으로 역대 대통령 생가에 공통적인 특징이 드러나지만, 이것이 풍수지리 고전 이론과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패철(나침반) 사용법이 그렇다. 지관뿐만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이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패철인데, 터 잡기뿐만 아니라 공간 배치구조를 정할 때도 사용하는 도구다. 역대 대통령의 생가를 조사하면서 패철을 사용한 흔적을 살펴보았다. 지관들이 대단히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 생가에서는 패철에 의한 방위론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권력지향적인 땅과 사람들

    역대 대통령들의 생가를 살펴볼 때 단지 땅만이 그렇게 권력 지향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살았던 사람들 역시 권력 지향적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권력 지향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방법은 다양한데, 그들 집안의 묘지를 살피는 것이 그들의 권력관을 엿볼 수 있는 유력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1846년 훗날 고종의 아버지로서 흥선대원군으로 불린 이하응은 지관(地官) 정만인(鄭萬仁)의 도움을 얻어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묘를 이장한다. ‘천자가 나올 자리’를 택해서 이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853년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태어나고, 명복은 나이 12살 되던 해인 1863년에 고종 임금이 된다. 그 후 그는 임금에서 황제로 즉위한다. 결국 고종 황제와 그 아들이 뒤를 이어 순종 황제가 되었으니 예언된 풍수설이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그로부터 150년 후인 1995년에도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에 ‘남북통일을 주도할 지도자가 나올 자리’에다가 아버지와 어머니 묘를 이장했다. 2년 후인 1997년 김대중 총재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는 최근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을 갖는 등 남북통일에 기여할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김대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부모의 산소 아래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즉 신후지지(身後之地)까지 마련해 놓고 있다.

    1846년과 1995년 사이 150년 세월에 왕조가 바뀌고, 사회경제체제가 바뀌었지만 풍수지리에 관한 것은 바뀐 것이 없었다.

    흥선군도 아버지 묘를 ‘천자가 나올 자리’에 이장해서 아들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였고, 김대중도 아버지 묘를 ‘대통령이 될 자리’에 이장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뿐만 아니라 이전 역대 대통령들의 풍수관련 사안들을 챙겨보면 모두 풍수지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대개 권력을 장악하는 이들은 풍수를 활용하여 권력장악의 필연성을 정당화시켜 나간다. 대개 ‘천명이 바뀌었다!’느니, ‘구국을 위한 역사적 결단!’이니 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동시에 ‘용비어천가’를 창작하는데, 이때 풍수지리가 요긴하게 활용된다. 그 조상의 무덤 혹은 생가가 ‘제왕이 나올 땅’이었다고 이야기하면 일단 그 조작된 ‘왕권신수설’은 백성과 국민에게 먹혀 들어간다.

    이것은 단지 권력을 획득한 이들에게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부정과 불의로 엄청난 부를 획득한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석숭과 같은 거부가 나올 자리에 그 조상의 무덤이 있거나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정당성 여부를 떠나 심리적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점만으로 권력과 풍수의 오랜 야합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풍수지리가 갖는 또 다른 내적 이유가 있다. 풍수지리의 핵심이론인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이 갖는 선동성과 신비성 및 혁명성이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인간과 자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아우르는 천지간에는 일정한 기가 충만하다. 그 기를 매개로 하여 인간과 자연이 감응하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감응한다는 것이 동기감응론이다. 이때 발생하는 감응은 서로 유사성이 강할 때, 즉 동기에 가까울수록 더욱 쉽게 또는 빨리 발생한다.

    이러한 풍수지리의 동기감응론은 ‘신이 하는 일을 빼앗을 수 있으며, 하늘이 부여한 운명을 고칠 수 있다’는 소위 ‘신공가탈 천명가개(神工可奪 天命可改)’적 사고를 동아시아 민족의 집단무의식 속에 심어놓았다. 즉 스스로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집단의 운명을 고칠 수 있다는 ‘탈신공개천명(奪神工改天命)’ 사상을 풍수지리가 대변해온 것이다.

    풍수지리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한 가문을 흥하게 할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한 나라를 빼앗을 수 있다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기 때문에 대중성, 전통성 그리고 신비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운명을 거부하는 적극적 사고 방식은 다른 한편으로 동아시아 고유의 사고 관념으로 이야기되는 ‘하늘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이라는 운명론이 줄 수 있는 절망감에 한 줄기 희망이 된다.

    그러한 이유로 순천(順天) 사상과 역천(逆天) 사상은 지금까지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공존을 하고 있다.

    암장으로 권력을 잡은 대통령들

    실제로 탈신공개천명의 논리로 정권에 도착한 역대 권력자가 엄연히 존재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고향은 북한에 있기 때문에 답사가 불가능하지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승만의 아버지가 그 부모, 즉 이승만의 조부모 묘를 제왕이 날 자리에 암장(暗葬)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그 묘가 실전되었다고 한다.

    2대 대통령인 윤보선의 경우도 그러하다. 윤보선의 조상은 고향과 서울에 교회를 세웠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풍수지리의 은총’을 가득 받은 집안이다.

    윤보선 대통령 조상 묘가 명당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다음은 윤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의 자서전 내용이다.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 이야기다. 하루는 5대조 할아버지가 굶주림에 쓰러진 스님 한 분을 구해주었다. 생명의 은인인 윤대통령 5대조 할아버지에게 스님은 보은으로 산소 자리를 하나 물색해 주었다. 현재 윤대통령 선영이자, 윤대통령 무덤이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

    그러나 그 땅은 원래 사패지지(賜牌之地)로 나라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하사한 곳이었다. 이순신 장군 가문의 땅이었다. 그리하여 윤보선 4대조는 그 아버지, 즉 윤보선 5대조 할아버지가 죽자 이순신 장군의 땅에 암장하였다.”

    역시 기독교도이며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공덕귀 여사조차 그 땅이 좋아 보인다고 칭찬하는 자리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윤보선은 풍수설을 맹신하였다. 윤보선이 1990년 서거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즉 신후지지(身後之地)를 만들어놓고 즐겨 찾았다. 공덕귀 여사는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해위(윤보선 대통령 호)를 모신 곳은 생전의 해위가 5대조 할아버지 산소에서 별로 높지 않은 뒷산을 사서 그곳에 별장을 조성해 놓은 곳이다. 해위는 한식과 추석 외에도 이곳에 일하러 오면 자신의 신위지까지 올라 그곳의 풀도 뽑고 멀리 서해바다 쪽을 바라보며 그림같이 아니 병풍같이 둘러 있는 산들을 바라보고 ‘아, 우리 별장 참 좋다!’며 좋아라 했다.”

    윤보선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선영으로 간 까닭을 시인 김소월의 노래처럼 “조상님 뼈 가서 묻힌 곳”이기 때문이라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보건대 그것보다는 명당에 묻히고 싶은 소망에서였다. 윤보선은 자신이 명당에 묻힌 이후 윤씨 가문에서 “다시는 그 누구든지 (선영에) 묘를 쓰지 못한다”라고 유서에 못박아 놓을 정도였다. 이유는 선영의 아름다움이 손상될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현재 윤보선 대통령 산소와 그 아래 5대조 윤득실의 무덤 사이에 아늑한 자리가 빈 공간으로 남아 있고 그곳에는 조경수가 십자가 형태로 심어져 있다. 누구든지 묻히고자 탐낼 자리인데, 일부러 나무를 심어 아무도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선영의 아름다움이 망가지는 것을 꺼려서일까?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관점에서 보면 지기(地氣)의 손실을 막자는 의도다.

    암장을 하여 후손이 대통령이 된 것은 윤보선 집안만이 아니다. 전두환 조상도 마찬가지다.

    전두환 생가가 있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마을 뒷산 정상에는 희귀한 연못이 하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연못을 ‘못재’라고 부르는데 백두산 천지의 축소판 같아서 매우 신성시해 왔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이곳은 물이 마르지 않는다. 2000년 4월 중순 전국적으로 심한 가뭄이 들어 산불이 매일 뉴스가 되다시피한 때 이곳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때도 이곳 산꼭대기에 있는 못재만은 물이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신비로움에 넋을 놓았다.

    전두환의 윗대 조상으로 기사관(記事官) 벼슬을 지낸 전치원(全致遠)은 이 연못의 신비함을 보고 내천으로 터를 옮겼다. 따라서 전씨 문중뿐만 아니라 인근 사람들에게 못재는 일종의 성역과 같은 곳이다.

    현재 못재 바로 위에는 전인(全絪, 1504년 출생으로 종사랑 벼슬을 지냄)의 묘소가 있는데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전인의 후손 전영희씨(합천군 쌍책면 거주)는 바로 그 명당의 발음으로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현재 약 1500여 호가 합천 일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전인의 묘는 무덤 주변이 자연석으로 둘러쳐져 ‘게의 눈처럼 생겼다’ 해서 해목혈(蟹目穴)로 분류하는 괴혈(怪穴)이다. 따라서 완산 전씨, 특히 전인의 후손에게 이곳은 명당 성역이다.

    여기에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다. 전두환은 완산 전씨이긴 하지만 전인의 후손이 아니다. 전인의 형님 후손이다. 400여 년 전에 이미 파가 갈린 셈이다.

    그런데 전인의 무덤에서 불과 몇십m 안 되는 곳에 전두환의 할아버지 전영수(全永洙)의 무덤이 있다. 본디 재산이 없는 데다가 6남1녀의 자녀를 둔 전영수(1867∼1936)가 자기와 파가 다른 문중의 성역에 안장된 것이 이상하다.

    비록 풍수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노력이 있었다 할지라도 남의 시조격이 되는 무덤 근처에 다시 무덤을 쓰기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니 전인의 후손들이 전두환에 대해서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다. 대통령 자리를 빼앗아 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전상석(全相錫)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전두환의 막내삼촌인 전상희(全相希)가 이서(異書)와 풍수에 능해 그곳에 썼다. 해방 후의 일이다. 처음에 밀장(密葬)을 하였다가 이장하였다.”

    전두환 조부의 사망연대가 1936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사망 10여 년 후에 현재의 못재 부근으로 암장한 것이다. 처음에는 암장하였다가 나중에 전두환이 군인으로 출세하면서 봉분도 제대로 조성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번듯하게 할아버지 묘를 조성했다고 한다. 암장의 합법화인 셈이다.

    전영수의 무덤 형세에 대해 비문은 “뭇 산들이 두 손을 맞잡고 절을 하며, 여덟 개의 시내가 굽이돌아 율곡의 명당을 형성한 곳”이라고 적고 있을 정도로 좋은 자리다. 특히 무덤 1∼2m 뒤에는 바위가 박혀 있는데, 이것은 술사들이 흔히 말하는 ‘입수(入首) 바위’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후손이 나온다 하여 귀하게 여긴다. 민간에서는 복을 가져다 준다 하여 ‘복바우’라고도 한다.

    ‘이 무덤을 잘 써서 전두환이 장군도 되고 대통령이 되었을까?’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여기서의 주제는 남의 문중에서 성역시하는 곳에다가 왜 목숨을 걸고 암장을 하느냐다. 암장의 원인에 대한 국문학자 신월균 박사(인하대)의 분석은 탁월하다.

    “자식대(代), 혹은 확인할 수도 없는 먼 후대의 신분 상승을 위해서 당대의 희생은 기꺼이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며 그러한 명당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조상의 번영은 후손의 번영으로 지속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며, 천민 조상의 고생과 절망은 후손의 신분 상승으로 인해 완전히 만회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좋은 자리에 할아버지 묘를 암장하고 나서 그 손자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당연히 풍수의 명당 발복을 민중들이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두환 고향 마을의 전상석 노인의 다음과 같은 말은 풍수에 대한 기층 정서의 단적인 표현이다.

    “흙무더기 하나만 잘해놓으면 먹고 산다. 요즈음 아새끼들은 납골당에 넣어놓고 성묘도 안 하는데 양반은 산비탈에 기어 가서라도 벌초를 한데이!”

    전두환가의 풍수를 논할 때 그것이 전두환 부모대에서 한 일이라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두환의 부모 묘와 전두환이 죽어 묻힐 자리(신후지지)를 살펴보면 전두환 역시 얼마나 풍수에 집착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전두환 부모 묘와 자신의 신후지지는 고향 마을에서 멀지 않은 율곡면 기리 정골에 자리하고 있다. 전두환이 권력이 막강할 때 그곳에 헬리콥터장과 접견실까지 만들었다 하여 말이 많았던 곳이다. 전문 풍수 술사가 잡은 자리임이 완연하다. 그가 결코 풍수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권력과 풍수의 야합

    암장이 불법이라면 합법적인 방법은 땅을 정식으로 구해 이장(移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장도 역시 그 지향하는 목적은 같다. 흥선대원군과 김대중이 이장을 통해 대권을 잡은 것이 그것이다.

    천하의 명당을 통해 권력으로 접근하려는 욕심은 고금을 통해 일반적인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인 서기 600년 전후의 일이다.

    수나라 때 소길(蕭吉)이란 학자가 있었다. 박학다식하여 음양과 풍수지리에도 능했다. 성품이 고고하여 당시 조정 대신들과 어울리지 못하였지만 수 문제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수 문제의 부인 헌황후(獻皇后)가 죽자 황제는 소길로 하여금 장지를 잡게 하였다. 소길은 무산(筮山)의 한 곳을 선택하면서 황제에게 말했다.

    “이 자리는 2000년 지지에 자자손손 200세 후손까지 보존해줄 자리입니다.”

    이에 황제는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길흉화복이란 인간에게 있지 땅의 좋고 나쁨에 있지 않다. 이전 왕조들은 어찌 명당을 고르지 않았겠느냐? 그럼에도 나라들이 망하지 않았느냐? 만약 우리 조상 무덤 자리가 나빴다면 나는 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좋았다면, 왜 내 동생이 전쟁에서 죽었겠는가?”

    수 문제는 묘지와 인간의 길흉화복이 서로 관계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수 문제의 그 다음 태도가 재미있다. 수 문제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끝내는 소길의 말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소길에게 큰 상을 내렸다. 역대 권력가들의 풍수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의 한 단면이다.

    수 문제보다 좀더 솔직한 사람은 그 둘째 아들이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장지 선정에 소길이 관여함을 알고 그에 접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천자가 될 수 있는 자리를 잡아주시오. 내가 천자가 되면 마땅히 그대를 부귀로 보답하겠소.”

    둘째 왕자의 은밀한 부탁을 받은 소길은 그가 황제에 오를 수 있는 무덤 자리를 잡아주며, 4년 후에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4년 후인 서기 604년 수 문제가 죽자 과연 둘째 왕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수 양제(煬帝)다. 양제는 소길의 공을 높이 인정하여 태부소경의 벼슬을 주었다. 권력과 풍수가 야합한 좋은 보기다.

    이렇게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간 소길이 언젠가 양소(楊素)의 무덤을 본 적이 있었다. 양소는 수 양제가 황제로 등극하는 데 기여한 일등 공신이어서 양소의 집안에 대해 수 양제는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양소의 무덤을 본 소길은 황제에게 은밀히 “무덤이 흉해서 조만간 전란으로 집안이 몰락할 것 같으니 빨리 이장을 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는 양소의 아들이자 예부상서 벼슬을 하고 있던 양현감(楊玄感)을 불러 이장을 권했다. 그러나 양현감은 “고구려 땅을 아직 평정하지 못했는데 어찌 사사로운 일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하고 이장을 하지 않았다. 실은 아버지 무덤을 명당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후인 서기 613년, 수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러 간 사이에 양현감은 10만 대군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소식을 접한 수 양제가 전쟁을 중단하고 급히 회군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양현감과 그 일족은 소길의 예언대로 모두 죽임을 당했다. 소길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서기 600년 전후 수나라 황실에서나, 1840년 조선 왕실에서나, 그리고 우리 시대 대통령 가문에서나, 풍수에 관해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부친 묘를 이장하고 나니 잘 풀렸어”

    특히 명당을 찾아서 이장한 후 그 효험을 피부로 느낀 경우도 있다. 노태우가 그 좋은 예다.

    “(노태우) 부친을 불당골에 모셨는데 군대에서 일이 제대로 안 풀렸어. 풍수에게 물어보니 물이 찼다 하기에 송정동에 산을 구한 뒤 뫼를 파보니 실제로 물이 차 있었어. 내가 보았어. 이장 후 진급 등 일이 잘 풀렸어! 산만등(산등성)에 뫼를 써도 물이 차더라니까. 풍수가 정말 있긴 있어!”

    노태우 대통령의 생가 마을에서 만난 구고봉 씨의 증언이다. 그 동네 다른 사람의 증언도 비슷하다.

    “노태우 대통령 아버지는 인물도 훤하고 체격도 좋았다. 이것저것 아는 것도 많았다. 또 풍수에도 관심이 많았다. 노태우 대통령 아버지 묘는 처음에 생가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40년 전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다. 그 후부터 노태우는 진급도 하고, 무슨 일이든지 승승장구하였다. 운이 많이 따랐다.”

    동네 사람들의 증언으로 보아 노태우 대통령이 아버지 묘를 이장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노태우에게 군대에서 일이 안 풀린 때가 언제일까?

    ‘노태우 대통령전’을 보면 그는 1962년에 소령에 진급하였고 1968년에 중령으로 진급한다. 노태우 자신도 “중령 진급 후 월남전에 참가하여 많은 무공을 세운 뒤 진급이 순조로웠다”고 말한다. 1971년에 연대장, 1974년에 대망의 장군이 되었다는 대목을 보면, 역으로 그가 1962년에서 1968년 사이 6년간 소령으로 머물렀던 때가 일이 잘 안 풀린 때인 듯하다. 다음은 이장한 노태우 아버지 묘에 대한 필자의 현장 답사 메모 일부다.

    ‘노태우 아버지 노병수(盧秉壽),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묘. 건좌손향(乾坐巽向) 임자내룡(壬子來龍)에 정파(丁破)로 수법이론을 따진 것 같지는 않다. 자리를 소점(所點)해 준 지관의 풍수 실력은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음.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상주의 복이다…. 무덤 뒤 바위들로 내맥을 형성, 무덤 뒤로 수많은 고분(古墓)이 있음. 우측에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이 있다. 무덤 가운데 맨 끝에 위치. 제자리 차지하고 있음…. 함께 어울려 사는 원만한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좌향도 제대로 맥을 따라 썼고, 좌청룡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다. 수구(水口)에는 독봉(獨峰)이 우뚝 막아주어 돈도 있겠다…. 주변 산들이 토성(土星)과 금성(金星). 이장 후 상주에게 힘이 되었겠다.’

    이장 덕분으로 일이 잘 풀렸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일이 안 풀리자 절박한 심정으로 이장을 하였고, 이장 후에 일이 잘 풀렸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대통령과 김영삼의 집터에 대한 이야기는 많으나 묘지 풍수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묘지 풍수를 신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을 조용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할머니 묘는 전국의 풍수들이 한결같이 제왕지지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풍수학자 박시익 박사는 “이 자리가 하극상이 성공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자리”라고 말한다. 무덤 뒤로 이어지는 산 능선 힘이 막강할 뿐 아니라 무덤 앞에 2m 높이로 세워진 바위는 기의 흐름을 거스르는 역룡(逆龍)으로 하극상이 성공하면 대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생가보존회 김재학 회장은 “이 땅을 당시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숙부들(박용빈, 박일빈)과 공동명의로 구입하였다”고 증언한다. 1946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좌익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던 박상희(김종필 전 총리의 장인)의 풍수적 혹은 권력에 대한 야망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땅은 박상희의 권력에의 의지를 실현시켜 주지 않고, 그 동생인 박정희를 통해 땅의 야망을 실현시킨 것이다.

    다음은 김영삼 집안의 음택 풍수관을 보자. 역대 대통령 가운데 김영삼만이 풍수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들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나 대권을 꿈꾸는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조상의 무덤을 옮기거나 풍수지리에 관심을 보인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정치 인생에서는 풍수지리를 따라 이장을 하거나 이사를 한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가 집사요, 아버지와 자신이 장로일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가문의 영향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풍수지리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의 집터가 동네 중심부에 자리한 것은 원래 부자였기 때문에 풍수지리와 관계없이 최적의 입지를 선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조부모 및 어머니 묘를 답사하면 풍수지리의 냄새가 물씬 풍김을 쉽게 알 수 있다.

    전통적 장례 관행에 의한 터 잡기에서 재력 있는 집안이니만큼 땅의 선택범위가 넓어 좋은 자리를 차지했을 것임은 당연하다. 김영삼의 조부모 무덤과 어머니 무덤을 조금이나마 풍수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 보게 된다면 그 무덤들에서 야심을 읽을 수 있다.

    1954년 김영삼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할아버지(1954), 할머니(1959), 어머니(1960) 등이 죽었을 때 외아들이자 국회의원의 신분인 김영삼은 집안 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김영삼 조부모와 어머니 묘가 풍수적 야심을 보여주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장지 선정에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지관들이 관여한 듯하다. 조부모 묘는 흔히 시골 지관들이 선호하는 사(砂: 청룡 백호)를 중시하여 잡혔다면, 어머니 묘는 전문 지관에 의해 소점(所點)된 것으로 보인다.

    조부모 묘의 특징을 한마디로 하면 장군이 칼을 차고 있는 형국, 즉 장군패검형(將軍佩劍形)의 명당이다. 동네 사람들이 ‘봉바우’로 부르는 무덤 뒤의 높은 산은 투구 모양이다. 무덤을 감싸는 우측 능선은 칼과 같고 좌전방(左前方)에 말안장과 같은 산의 모습은 천마(天馬)와 같다. 전반적으로 기운이 왕성하여 아랫사람을 많이 거느리는 형상이다.

    대권주자들의 생가터는?

    정치적으로 김영삼에게 불리한 일이 있거나 그가 무엇인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달려가는 그의 어머니 무덤 역시 고향 마을 앞산에 있다. 제왕지지로 손색이 없다. 역시 다른 역대 대통령의 선영과 생가에서 볼 수 있는 산의 형세다. 주산에서 무덤이 있는 혈장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은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힘이 있다. 용인에 있는 김대중 선영 뒤에 있는 산 능선 못지않다. 이곳 주민들도 이 자리가 좋은 자리라고 말한다.

    옆마을 소계마을에 사는 김권오 씨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아마도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 와전된 듯하다. 닭은 새벽과 새로운 세상을 알리며, 신라 김알지 신화에서처럼 닭은 나라를 통치할 인물의 탄생을 예언한다. 만약 금계포란형이라는 말을 지어냈다면 그 의도는 뻔하다.

    무덤 바로 앞은 가파르게 푸르고 맑은 남해 바다 속으로 이어진다. 달리 보면 신령스러운 거북이 바다로 들어가는 영구입해형(靈龜入海形)의 자리다. 거북은 하늘의 뜻을 점치는 신령스러운 짐승으로 알려졌거니와, 가야의 구지가(龜旨歌)처럼 새로운 임금의 출연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 장로, 집사 집안으로 겉으로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속으로는 철저하게 풍수설에 따라서 무덤을 잡았다는 증거다.

    결론적으로 역대 대통령들 혹은 그 조상이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고 좋은 자리를 찾아 무덤을 쓰거나 옮긴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의 생가가 일정한 공통점을 보여주되, 풍수지리 술서에서 말하는 좋은 터의 입지 조건과 부분적으로 부합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 역대 대통령뿐만 아니라 현재 대권을 꿈꾸는 일부 정치인의 생가에서도 산 능선의 끝집에 해당하거나, 그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가족 중에 누군가가 사고를 당하거나, 생가에서 떨어져 사는 등의 이력을 보여주는 것을 답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무덤에서도 역시 풍수지리를 따르고 있다는 흔적도 보였다.

    여기서는 풍수의 논리가 현재의 차기대권 게임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해당 정치인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기로 하겠다.

    풍수지리의 윤리

    문제는 땅이 인간의 윤리를 무시하고 자체의 논리를 가져 악한 사람에게도 부귀를 주는가 하는 문제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는 국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야망과 부귀를 탐해 정권을 찬탈하고, 인권을 유린하였고, 국정을 파탄시켜 수많은 국민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만약 풍수지리가 이러한 불의한 자와 무능한 자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준다면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풍수지리의 윤리 역시 인간의 윤리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과 풍수지리가 서로 상정하는 시간 개념이 틀릴 뿐이다.

    역대 정치인들에게 좋은 땅이 주어진 것은 하나의 기회 부여이며 시작일 뿐이다. 그들이 대통령이 되었다가 물러난 후 그들의 잘잘못에 대해 사법적 심판이 있었고, 더러는 역사적 심판으로 미뤄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수적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심판은 인간의 심판과 다르다. 더욱더 잔인하다.

    당나라 때 복응천(卜應天)이 지은 ‘설심부(雪心賦)’에는 “나쁜 짓을 하면 좋은 땅도 도리어 재앙을 부른다”고 하였는데, 원나라 때의 학자 조방은 ‘장서문대(葬書問對)’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무릇 집안이 장차 흥성하려면 반드시 그 조상이 음덕과 선행을 두텁게 베풀되 그 보답을 당대에서 누리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비록 땅을 골라 일부러 장사지내지 않더라도 명당을 차지하며 그 자손이 번창하는 것은 확실하다. 하늘의 묵계, 이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다. 후손들이 그 조상의 번창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모르고, 이에 묘하게 탐하고 교묘하게 취하고 농락하고 비정한 짓을 하는 것이 누구의 계략인지 모르고(즉 돈을 탐하는 지관들의 행위인지 모르고) 땅을 고르는 데 급급한 것은 역시 사사로움을 심고 이익을 엿보는 일단일 뿐이다. 마음을 이와 같이 쓰면 하늘에 죄를 얻어 스스로 그 운명을 재촉함이 허다하다.”

    대통령을 지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비록 그가 조상의 음덕과 하늘의 묵계로 대통령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혹은 대통령 신분으로 행한 악행이 있다면 그 후손이 재앙을 당하는 것 또한 필연이다.

    이것은 역대 대통령의 후손들에서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하늘의 묵계는 완성이 아니고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나친 악행에 대해서는 그 후손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하늘은 자신의 일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풍수지리의 논리다.

    송나라 유학자 채원정(蔡元定)은 주자(朱子)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주자에게 풍수지리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의 ‘발미론(發微論)’은 풍수의 윤리를 정의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나쁜 업보가 가득하면 하늘은 반드시 나쁜 땅으로 대응하는데, 그 자손이 화를 입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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