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비정한 세상살이에 고개숙인 국민영웅들

벤처사업 실패한 김재엽, 시간강사 전병관, 보증섰다 2억날린 김원기

  • 이영미·스포츠라이터

    입력2006-08-11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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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국민적 성원을 한몸에 받던 스포츠계의 영웅들. 그들 가운데 ‘제2의 인생’을 성공시킨 선수는 의외로 드물다. ‘국민영웅’의 대다수는 비정한 세상살이 앞에서 쓴맛을 봐야 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금메달을 딴 마라톤의 손기정. 시상대 위에서 월계관을 쓰고 승리의 감격을 맛보았던 그의 가슴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선명했다. 민족은 있어도 국가가 없는 설움 속에서 그의 금메달은 슬픈 기억으로 남게 된다.

    그로부터 40년. 레슬링의 양정모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건국 이래 첫 금메달을 따내자 감격과 흥분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녀 출전한 이래 느껴오던 금메달에 대한 갈증이 40년 만에 풀린 것. 이후 1984년 LA올림픽에선 무려 6개의 금을 캐냈고 동서냉전을 극복한 88서울올림픽에선 금메달 12개를 획득한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은 한국을 위한 잔치였다. 여자 공기소총에서 여갑순이 첫 총성을 울리더니 마지막날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가 감격적인 금메달을 따냈다. 금 12개로 종합 7위. 한국은 4년 뒤 애틀랜타에선 금 7개로 세계 10위에 오르며 스포츠 강국의 위용을 과시했다.

    그동안 한국이 따낸 올림픽 금메달만 모두 47개(동계올림픽 금메달 9개 포함). 올림픽 무대를 통해 국민을 감동시켰던 금메달리스트들. 지금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국민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한국의 양정모 선수가 마침내 금메달을 땄습니다.”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흘러나온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국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TV와 라디오 앞으로 몰려들었고 반복해서 들리는 아나운서의 멘트에 전국이 들썩거렸다.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몬트리올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정모(47). 23세의 청년에서 어느덧 불혹의 중년이 된 그는 선수와 지도자로 25년간 몸담았던 조폐공사 레슬링팀이 98년 해체되면서 레슬링계를 떠났다.



    양정모와 김재엽의 외로운 싸움

    그런 그가 한때 투사로 돌변한 적이 있다. 일명 대진표 조작 사건에 대한 정부의 올바른 조사를 촉구하며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 97년 전국학생레슬링선수권대회 당시 부산협회 부회장의 아들을 4강에 진출시키기 위해 대진표를 조작,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레슬링 관계자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시위를 벌이는 현장에 양정모가 나타난 것이다.

    양정모는 당시 상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 “만신창이가 된 레슬링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며 핏대를 올리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묵묵부답. 다만 “한평생 레슬링만 해온 사람이 레슬링을 떠나 살 수 있겠냐”는 여운만 남겼다. 한때 한국 레슬링의 병폐를 고쳐보겠다고 투지를 불사르던 열정은 세월과 함께 가슴 한켠에 묻어둔 모양이다.

    88서울올림픽 유도 60kg급 금메달리스트 김재엽(36)은 은퇴 후 쌍용양회와 마사회에서 코치로 생활하다 현재는 벤처사업가라는 거창한 명함을 새로 달았다. 김재엽이 평생 업으로 삼았던 유도를 버리고 뜬금없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김재엽은 국내 유도계의 대표적인 ‘야당’으로 불려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해대는 직언 때문에 유도협회 관계자들과 항상 불편한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유도계는 용인대 총장인 김정행씨가 유도협회 회장을 겸직하면서부터 용인대 출신과 비용인대 출신의 판정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비용인대 출신인 김재엽은 시합 때마다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에 강하게 어필해왔고 96애틀랜타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선 심판판정에 항의하다 일시적으로 연금 지불을 정지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98년 8월이었다. 마사회가 김재엽에게 전기영, 윤동식이 96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것을 문제삼아 사표를 종용하자 김재엽은 눈물을 머금고 짐을 꾸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서울올림픽이 낳은 금메달 커플로 동성동본의 어려움 속에서 힘겹게 결혼, 화제를 뿌렸던 아내 김경순(핸드볼)과 합의 이혼하는 불행까지 맛보았다.

    그후 김재엽이 부딪힌 세상살이는 끔찍할 정도로 냉정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도통 손에 잡히는 아이템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처한 처지가 한심하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꼬리표가 원망스러웠다. 방황의 나날을 보내다 시작한 사업이 이동전화용 무선 데이터 컨텐츠를 제공하는 정보 통신업. 서울 코엑스(한국종합전시장)에 사무실을 내고 (주)TNS란 벤처기업을 설립했는데 얼마 못 가 문을 닫고 말았다. 정확한 자료와 준비 없이 주변 사람들의 말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실패의 쓴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최근 매형의 주선으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아스팔트나 대형 간판 등에 첨가되는 필름을 미국에서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이다. 가족끼리 믿고 하는 일이라 사기 당할 염려는 없지만 무역 지식이 없고 영어실력도 부족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이 사업을 한다니 쉽지 않은 게 당연하지요. 컴퓨터도 켤 줄 몰랐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전 성공할 겁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다시 유도계로 돌아갈 거예요. 바위에 계란 던지기라도 계속 할 생각입니다.”

    체육교사로 변신한 박시헌

    88올림픽 복싱 라이트미들급 챔피언 박시헌(35)은 현재 진해남중학교에서 체육교사와 복싱부 코치를 겸하고 있다. 경남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덕분에 교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던 그는 은퇴 후 곧바로 교단에 섰다. 89년 진해종고에서 교편을 잡은 뒤 복싱팀을 신설,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5개를 따내는 강팀으로 키웠다. 96년 7월엔 진해남중으로 옮겨 복싱팀을 창단, 제자 키우는데 열정을 쏟고 있다.

    박시헌은 88올림픽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금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 속에 영광의 기쁨보다는 뼈아픈 상처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당시 박시헌은 결승에서 미국의 로이 존스와 맞붙었다. 당시 박시헌은 경기내용으로는 뒤지고서도 3-2 판정승을 거두었다. 경기 후 미국측에서 심판 매수설을 주장하며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정식으로 제소함으로써 논란이 확대됐다.

    편파판정 시비는 10년이나 계속됐다. 97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로이 존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함으로써 박시헌은 오랫동안 가슴을 짓눌러왔던 무거운 굴레를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박시헌은 그 날 경기는 자신이 진 경기라고 솔직히 고백한다.

    “차라리 은메달을 땄다면 더 떳떳했을 거예요. 금메달 따고 바보가 된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요즘도 학생들이 그 때 일을 물어봐요. 솔직히 얘기하죠. 진 게임인데 심판이 내 손을 들어줬다고.”

    들어메치기의 1인자로 유도를 인기 종목으로 올려놓았던 84년 LA올림픽 하프헤비급 금메달리스트 하형주(40)는 현재 동아대 스포츠심리학 교수다. 역대 금메달리스트중 교수가 된 사람은 하형주가 유일한 케이스. 88년 서울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한 뒤 비교적 성공가도를 달려온 하형주는 교수 외에도 부산시의회 의원과 대한유도협회 이사를 맡는 등 대외적인 활동도 꾸준히 펼쳤다.

    그러나 그의 생활 뒷면에는 내색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동아대에 엄연히 유도부가 있는데도 지도자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김재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계획대로였다면 동아대 유도부를 맡아 제자들을 키우고 있겠지만 선수 시절부터 잦은 충돌을 빚었던 사람들이 하형주한테 지도자 자리를 맡길 수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어쩔 수 없이 매트가 아닌 강단에서 교양체육을 맡게 된 하형주는 1학기에 13시간이나 되는 수업시간을 채우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배운 게 유도밖에 없는 사람이 교양 체육을 맡았으니 가르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용을 써도 6시간밖에 채울 수 없었습니다. 수업시간을 채우지 못한 데 대한 경위서를 쓰는 일이 제일 바빴죠. 제 연구실에 책상과 컴퓨터, 팩스가 그럴 듯하게 놓여 있는데도 사용할 수가 없었어요. 밥값을 제대로 못한데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죠.”

    도피하다시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년간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 후 서울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응시했다가 두 번이나 고배를 마신 다음 성균관대에서 어렵게 박사 과정을 마쳤다. 하형주는 동아대에서 스포츠심리학을 맡게 된 것도 실력 반, 투쟁 반이라고 설명한다.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우여곡절 끝에 연구실을 확보한 하형주는 요즘 다른 교수들처럼 외국에 교환교수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자리를 비운 동안 누군가의 ‘장난’으로 연구실을 빼앗길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선수 시절부터 대학 교수가 꿈이라고 주문처럼 말하던 전병관(31)은 평택 경문대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후 교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그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 역도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목에 건 후 전성기를 보내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실격패하고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동안 운동을 쉬다가 다시 바벨을 잡았지만 결국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난해 7월 쓸쓸히 은퇴했다.

    “금메달은 빛좋은 개살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에는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이 드물다. 오랜 선수생활로 인해 사회 물정에 어둡고 남을 쉽게 믿는 순진함이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88서울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인 김광선(38)은 현재 체육관을 운영중이다. 처음 체육관을 개관할 때만 해도 침체된 한국 복싱의 부흥을 위해 직접 후배 양성에 나서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난에 부딪히자 복싱 에어로빅을 개발, 복싱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91년 세계타이틀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 94년 은퇴하자마자 시작한 일이 즉석 탕수육체인점. 유명한 복싱 선수라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사각의 링처럼 진실만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탕수육 체인점을 처분하고 할 일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솔잎은 송충이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체육관을 내게 된 것이다.

    88년 서울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82kg급의 한명우(44)는 불교미술 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사찰 개보수 작업 때 단청을 그려주는 대행사를 운영중인데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사찰이 대부분이라 사무실을 운영하기도 벅찰 정도다. 한명우는 선수 시절보다 은퇴 후의 생활이 파란만장했다. 은퇴 후 대표팀 코치로 2년간 활동하다 일본으로 건너갔고 다시 말레이시아 대표팀 감독으로 초청돼 말레이시아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도착해보니 레슬링팀이 없었다. 말레이시아 국왕의 양아들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말레이시아 레슬링을 부흥시켜달라고 간청했지만 생활비조차 제대로 못받는 실정이었다.

    결국 레슬링을 포기하고 국왕의 배려로 250만달러를 융자받아 한국을 주공급처로 삼은 숯불 공장을 차렸다가 IMF가 터지는 바람에 빚만 떠안게 됐다. 5년 동안 말레이시아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가며 고생했지만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귀국한 한명우는 1년 전부터 그림 그리는 후배들과 인연을 맺고 불교미술 사업에 손을 댔다. 지금 한명우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레슬링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금메달리스트는 빚 좋은 개살구나 마찬가집니다. 메달리스트라고 사회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거나 명예를 얻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젊은 청춘을 온통 운동에만 바쳤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증섰다가 2억 날린 김원기

    “영업소장은 종합 예술인입니다. 전문 지식과 행동으로 고객과 직원을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이 바닥에서 성공하기 힘듭니다.”

    삼성생명 광명지점 교육 차장으로 일하는, 84년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39). 그는 89년 보험회사 직원으로 새출발한 뒤 전국 각지의 영업소장을 거쳐 올해부터는 교육 관리자로 나섰다. 금메달로 받은 상금을 형제들 집 장만하는데 고스란히 쏟아부은 후 빈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다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2억원이란 엄청난 액수의 빚을 떠맡게 됐다. 써보지도 못한 남의 빚을 갚는 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4년 동안 눈물겨운 노력 끝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절치부심, 사회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더욱 더 보험 일에 매달리게 됐다는 김원기. 금메달리스트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사업을 시작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다양한 사회현상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과감히 직장 생활을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험 영업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전문 지식과 어려운 용어들을 알기 쉽고 간략하게 설명해내는 입심이 부족해 초반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운동을 통해 얻었던 명예는 이미 과거일 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고 사회에서 더 대우받는 게 아니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금메달을 버리고 나왔다는 김원기는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공부했고 말솜씨를 늘리기 위해 사람 만나는 일도 꾸준히 했다. 김원기의 꿈은 소박하지만 거창하다. 삼성생명 이사까지 오른 후 양로원을 차려 오갈 데 없는 노인들에게 편한 쉼터를 제공하는 것이다.

    88서울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74kg급의 김영남(41)은 현재 카자흐스탄에서 살고 있다. 그가 이역만리 카자흐스탄까지 건너가게 된 것은 서울올림픽 당시 결승전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카자흐스탄의 다울렛 때문. 올림픽 출전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다울렛은 김영남에게 사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김영남은 2년 전 서울에 (주)코앤카란 무역회사를 차려 창업 1년 만에 카자흐스탄에 국산 자동차와 의약품을 수출, 400만 달러(약 5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금은 가족 모두가 카자흐스탄으로 이민, 한국 식당을 경영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18살의 나이에 84년 LA올림픽에서 금과녁을 명중시켰던 서향순(34)은 1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패스트푸드점 사장으로 변신했다. 94년 시댁이 있는 충북 충주시에 ‘롯데리아’를 차렸으나 시골 사람들의 입맛에 서양 햄버거가 먹혀들지 않아 자본금을 다 날리고 가게마저 넘어갈 위기를 겪었다. 다행히 2년이 지나면서부터 패스트푸드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청소년들의 입맛과 맞아떨어지면서 98년엔 2호점을 열 정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유도 국가대표 출신 박경호씨(37)와 90년 결혼, 두 아이의 엄마인 서향순은 선수 시절의 근성과 오기만 있다면 사회 생활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운동 선수 출신도 사회에서 힘든 과정을 극복하고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빙상 스타’ 김기훈(33)은 97년 얼음판을 떠난 뒤 조흥은행에서 근무하다 1년 뒤 사직서를 내고 아버지 김무정씨와 함께 ‘김기훈 스포츠’라는 점포를 열었다. 값싸고 질 좋은 국산 스케이트화를 개발한 덕분에 장사가 비교적 잘되는 편이라고. 현재 ‘기훈 스케이트화’ 6종을 내놓고 빙상 선수들을 상대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라면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역 생활을 접을 것 같지만, 미련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은퇴 후 다시 선수 생활을 시작하는 금메달리스트 중에 이번 시드니올림픽에 도전하는 ‘아줌마’ 선수들이 눈길을 끈다.

    대표적인 선수가 양궁의 김수녕(30)이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단체전과 개인전을 휩쓸며 ‘신궁’의 반열에 오른데 이어 92년 바르셀로나올리픽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추가, 모두 3관왕을 차지한 그가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고 은퇴한 지 6년 여 만에 현역으로 복귀한 것.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김경욱이 개인전과 단체전 2관왕에 오르는 것을 보고 김수녕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보다 한 살 위인 김경욱이 결혼도 미루고 선수 생활을 계속해 올림픽 금메달까지 따낸 것이 김수녕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로부터 3년 뒤 한국 양궁의 침체를 염려한 양궁협회 정몽구 회장이 김수녕의 복귀를 강력히 권유하였고 협회로부터 장비 일체를 지원받으면서 김수녕은 새로운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걱정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활을 놓고는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데다 두 아이를 낳고 나서 변해버린 체형 때문에도 자신이 없었던 것. 그러나 남편과 시부모가 흔쾌히 허락했고 두 아이를 청주에 계신 부모님께 맡기면서 가정주부라는 굴레를 벗고 본격적으로 연습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다행히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림픽 출전 티켓을 거머쥐었지만 김수녕의 등장으로 은퇴하게 된 몇몇 선수들의 질투 어린 시선들로 한동안 마음 고생도 컸다고.

    김수녕과 함께 시드니에서 ‘아줌마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벼르고 있는 조민선(28·두산)도 96애틀랜타올림픽 여자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후 결혼하면서 은퇴했다가 지난해 말 2년 여 만에 매트에 복귀했다. 그 과정에 결혼과 이혼이라는 충격적인 인생사가 오갔다. 조민선이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도복을 다시 챙겨입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도 이혼의 상처 때문. 이혼 후 온갖 후유증과 잡념을 떨쳐버릴 수 있는 ‘마지막 비상구’가 바로 운동이었던 것이다.

    운동을 하지 않는 동안 늘어난 체중과 굳어버린 근육 등으로 복귀에 성공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올림픽의 결과에 상관없이 체력이 허락하는 한 매트를 떠나지 않겠다는 조민선은 외국 진출도 계획중이다.

    골프로 전업한 빙상스타 전이경

    동계올림픽 4관왕에 빛나는 한국스포츠의 간판 스타 전이경(24)은 골프 선수로 완전 전업했다. 98년 나가노 올림픽을 끝으로 빙판을 떠난 전이경은 국내 스포츠계 최초로 연금 3억원 시대를 연 주인공. 그런 그가 스케이트와는 무관한 골프채를 들고 프로 골퍼에 도전하는 이유는 대학 교수가 되겠다는 ‘초심’ 때문이다. 비인기 종목인 쇼트트랙만으로는 교수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에 서둘러 전업을 준비, 프로 골퍼가 되기 위해 하루 8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해내고 있다.

    지난 7월 임진한 프로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기초부터 배우고 있는 전이경은 날마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실전 라운드를 반복하며 혹독한 과정을 밟고 있다. 하지만 골프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만끽하고 있다며 즐거워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에는 방송 해설가로 입문했거나 이번 시드니올림픽을 계기로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도 있다. 먼저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30)는 KBS 해설위원으로 일찌감치 방송계에 데뷔한 케이스. 황영조는 방송뿐만 아니라 은퇴 후 육상계 밖에서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카레이서, 드라마 출연, 스킨스쿠버와 열기구 도전, 해외 산악 등정 계획에다 얼마전엔 신당 창당 발기인으로 변신했고 최근엔 LG홈쇼핑과 스포츠 운동기구 코너의 호스트를 맡는 조건으로 연봉 1억원에 계약을 체결, 관심을 모았다. 이미 고려대 대학원 체육학과 석사 학위를 마친 그는 올해 말 박사과정을 밟을 예정.

    양궁 대표선발전에서 아깝게 탈락, 눈물을 쏟았던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의 이은경(28·한국토지공사)도 KBS를 통해 해설가로 변신했다. 이은경이 활이 아닌 마이크를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 딱딱한 이론 위주의 해설보다는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들의 심리 상태와 게임 운영 방법 등을 상세히 풀어나가는 해설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현재 한국토지공사 플레잉코치로 활동하고 있지만 선수 생활은 이미 접은 상태. 오는 10월 전국체전에서 소속팀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한 다음 국내 대회에는 출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내년엔 유럽 투어를 시작으로 국제 대회에 출전하며 후배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겠다”고 밝힌 이은경은 “누구처럼 올림픽 3관왕까지 차지한 후 다시 현역에 복귀, 후배들과 경쟁을 벌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 메달리스트 커플인 유도의 김미정(금메달·29)과 김병주(동메달·32)는 각각 MBC와 KBS에 나란히 해설가로 등장,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병주는 이미 96애틀랜타올림픽 때부터 방송 해설가로 활약했지만 김미정은 이번 시드니올림픽이 해설가로선 데뷔전이다. 그동안 용인대 전임강사와 여자코치, 국제심판으로 맹활약을 펼친 김미정은 해설가로서 합격 판정을 받으면 방송 쪽에도 진출할 생각이다.

    엄마가 된 여갑순과 방수현

    92바르셀로나올림픽 개막 첫 총성을 울려 여자 사격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선사한 여갑순(27)은 어느새 100일 된 아들의 엄마가 됐다. 원래 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할 예정이었으나 임신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그는 계속되는 팀 해체로 방황하다 현재 전남 일반 소속으로 활동중이다. 여갑순은 임신 5개월까지 총을 쐈다고 한다.

    태교가 걱정되긴 했지만 오랫동안 총을 쏘지 않으면 감각을 잃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총을 놓지 못했던 것. 그래서인지 태어난 아기가 총소리에 전혀 놀라지 않는다. 연습이 있는 날엔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사격장까지 데리고 가는데 여갑순이 훈련하는 동안엔 절대로 울거나 칭얼대지 않는다고. 불가리아의 레체바가 30대 중반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듯이 여갑순도 40~50살까지 총을 쏠 예정이다. 지금은 2004년 올림픽 출전이 가장 큰 목표다.

    96애틀랜타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방수현은 지난해 6월 재미동포인 뒷바라지를 위해 국내 무대에서 완전 은퇴한 뒤 현재 뉴욕 맨해튼에서 생활하고 있다. 얼마전 남편 신헌균씨(31)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아들 하랑(미국명 폴)을 낳은 그는 요즘 모유를 먹이느라 잠이 부족하다고 하소연. 임신 초기까지 뉴욕 시내의 초등학교와 스포츠 클럽에서 강사로 활동했지만, 현역 시절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수다스런 아줌마의 여유로움만이 전해질 뿐이다. 열심히 사는 게 최선의 삶이라고 강조하는 방수현한테 이렇게 물었다.

    “혹시 현역으로 복귀하실 생각없으세요?”

    “전혀요. 선수 생활은 할 만큼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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