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마스터플랜 걷어치우고 로드맵 펼쳐라

  • 권삼윤 tumida@hanmail.net

    입력2005-05-13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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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기 연속 순 이익을 기록중인 일본 세콤그룹에는 예산제도도, 경영계획도, 사업목표도 없다. 휴렛팩커드 경영진은 책상에서 보고서를 기다리지 않고 현장을 뛰어다니며 경영을 챙긴다.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기업, 소비개체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다이어트 열기가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다. 여성들이 주로 시청하는 아침시간대 TV 프로그램이나 여성지는 다투듯 다이어트를 소재로 다루며, 특히 여성지는 광고지면의 상당부분이 다이어트 관련 제품들로 채워진다.

    다이어트에 좋다고 하면 값이 얼마든 불티나게 팔린다. 만인에게 관심의 표적으로 떠오른 다이어트는 이제 이 시대의 대표적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됐다.

    반론도 만만찮다. 속을 다듬기보다는 외형적인 멋만 내려고 한다든지, 운동이나 섭생을 통한 단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아니라 별스런 식품이나 약품을 이용해 단기간에 효과를 보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이어트가 추구하는 것이 몸매의 슬림(slim)화라고 한다면 그 방법이나 태도가 갖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슬림화’는 몸의 유연성을 높여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생활방식에까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운동을 위해 승용차 대신 지하철이나 버스, 자전거를 이용하고 기름진 음식보다는 자연식을 찾는 등 소박한 삶의 방식을 택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는 생활비를 줄이는 경제적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다이어트의 시대



    다이어트를 개인의 차원을 넘어 조직이나 사회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우리에게는 덩치만 크면 살아남을 수 있고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이른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앙 같은 것이 있었다. 기업은 외형만 키우면 은행에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기에 모두 그 길로 나섰고, 그렇게 해서 빌린 돈은 연구개발이나 인재를 키우는 데 쓰기보다는 또다시 외형 부풀리기와 덩치 키우기에 쏟아부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비대할 대로 비대해졌다.

    그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규모의 경제’니 ‘파이낸셜 레버리지 이펙트(financial leverage effect·차입금을 지렛대로 한 경영효과)’ 같은 경제·회계이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큰 것이 좋다”며 할 짓 못할 짓 다해본 그들이 저지른 실책을, 이제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무고한 사람들이 부담해야 할 상황을 맞았다. 한해 국가예산과 맞먹는 규모의 거금을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쏟아부을 판이다. 우리는 개인과 조직, 사회가 한꺼번에 다이어트에 들어가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마주해 있다.

    지금 우리가 민간기업 공기업 금융권 노사관계 등 각 분야에서 추진하는 구조조정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이것은 명칭만 달랐지, 새로이 들어선 정권의 초기나 혁명 직후엔 반드시 등장했던 단골 메뉴다. 번잡스러운 제도와 형식을 타파하고, 그와 동시에 기득권 집단이 지닌 부의 일부를 생산계층으로 돌려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엔 실질적인 것을 중시했을 뿐, 형식이나 장식은 극도로 배제했다. 개혁은 늘 그렇게 슬림화를 지향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의 현실은 새삼 스스로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초심(初心)의 자세’라든가 그저 군살이나 좀 빼는 식의 미미한 조직 슬림화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모든 부문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러는 파괴의 길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던 재벌이 몰락하는 것쯤은 예사로운 일이 됐고, 관료집단과 공기업은 무능과 도덕적 해이로 마치 무너지기만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과 계층, 지역은 타협의 길을 찾기보다는 누구 목소리가 더 큰가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정과 학교도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분노한 ‘개체’들

    이런 현상은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세계국가는 없다. 그들도 혼자 살기에 바쁘다. 제국(帝國)체제는 붕괴됐고, 보편성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이제는 모델로 삼을 대상마저 사라졌다. 바야흐로 다문화, 다문명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아니 나 자신이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기존 제도와 가치, 틀은 이미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와선 그것들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한다. 낡은 파이프를 갈지 않고 방치하면 아파트 전체를 못 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기존 제도와 틀은 국가주의, 산업사회, 조직중심, 실적주의, 남성우위, 수직적 위계 체계의 원리에 입각했다. 그래서 대중은 소수의 권력자와 가진 자들을 위해서, 개인은 집단을 위해서, 하부계층은 상부계층을 위해서 희생해야 했다. 그런데 여태껏 잘 참아오던 그들이 이제는 소수와 조직, 집단, 상부계층의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조직은 구성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와 개체의 손을 맞잡고 파트너가 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런 상황을 이미 ‘대붕괴(Great Collapse)’란 말로 설명했고,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 따라 산업사회의 수많은 조직은 마지막 숨을 내쉬는 공룡처럼 죽어가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렇듯 기존 조직과 제도가 파편화돼버린 상황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사회의 기본단위인 개체뿐이다. 무너져가는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도 그들이다. 존 스타인벡은 1930년대 고통스런 대공황시대를 살아간 미국 소시민의 삶을 그린 ‘분노의 포도’를 통해 튼실한 포도 알갱이들이 뭉쳐서 좋은 포도송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일깨우지 않았던가. 개체는 사회의 원자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소우주다. 누구에게 종속된 것도 아니고, 무엇의 부속품도 아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삶의 주인이다. 지금 그들이 분노하며 일어선 것이다.

    인류 역사는 다소 기복이 있긴 했지만 이런 개체들에게 자유와 자아실현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을 쌓아올린 절대군주, 소수 권력자의 시대도 있었지만, 결국 역사는 인터넷이 국경을 무너뜨리고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성별 나이 학력 직위의 차이를 넘어 개인과 개인을 이어주면서 그들을 가치 창조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는 이전에는 누려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자 도전이다. 이제 개체가, 힘없는 다수가 진정한 의미의 다수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따라서 이를 촉발한 디지털문명과 인터넷의 출현은 단순한 기술발명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개체의 시대, 다수의 시대, 참다운 대중민주주의를 실현해야겠다는 대중의 결집된 열망이 사회적 동인이 되어 일어난 기술사적·문명사적 조응인 것이다.

    필자는 이를 ‘개체의 시대(The Age of Individuals)’라 부르고자 한다. 바닷가 모래알만큼이나 미세한 다수의 존재가 모여 만들어내는 시장이, 또 네티즌들이 기존 정치와 경제·사회·문화의 틀을 바꾸고 있지 않은가. 개체는 이제 자본과 조직을 갖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 디지털과 인터넷이 주도한 정보통신혁명은 개체들에게도 ‘자기조직화(self networking)’의 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일군 빌 게이츠가 바로 그런 인물 아닌가.

    개체주의를 극도의 개인주의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나 아니면 안 된다’ ‘내 이익과 무관하면 나는 모른다’는 뜻이라면, 개체주의는 자신의 내실화와 충실화를 도모하되, 사회의 기본구성단위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으므로 모든 일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자세로 임한다는 특색이 있다. 개인주의와는 출발부터가 다르므로 결과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개체의 시대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다. 하나하나의 개체가 독립된 주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20∼30년 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열 명 가운데 여덟 명은 ‘통일’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수며 야구선수, 벤처기업가가 되고 싶다는 등 실로 다양한 답이 나온다.

    그들은 더 이상 국가적인 것, 민족적인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의 중심이 자기자신이다. 물론 과거 아이들도 국가와 민족을 의식해서 통일이라고 답했다고는 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또 설령 그런 게 있었다 해도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스스로 생각할 줄도 알고 표현할 줄도 안다. 이른바 개체성을 확보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누가 강요한다고 이것을 저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을 말할 뿐이다.

    집단과 조직이 붕괴되면서 공통의 인식, 공통의 이익이 사라진 대신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다양한 이해구조와 시각이 생겨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점치기가 아주 어려워졌다. 모든 개체가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표출하고, 또 개인과 기업, 조직이 그걸 수용하려고 그들에게 가세함으로써 변화는 동시다발적으로, 또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면 변화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리더십의 성격도 그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는 정보의 원천이 일정했기에 소수가 그것을 독점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개체 스스로 정보를 마음껏 발신하고 수신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정보의 독점체제가 붕괴, 소수에 의한 조직의 지배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됐다. 리더는 정보 독점을 통한 지배와 군림의 자세에서 벗어나 정보의 공유화시대가 도래했음을 깨닫고 권한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았다. 따라서 이 시대의 리더십이 가야 할 방향은 설득과 협력이다. 정보화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코스트 프리 사회가 온다

    정보화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했던 국경과 민족 같은 거름장치가 허물어짐으로써 자칫 전세계의 미국화를 불러 일으키리라는 우려도 있다. 그렇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이제까지 존재했던 물적·문화적 장벽이 모두 허물어졌다면 위기라고 겁낼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로이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만큼 오히려 기회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렇게 국경, 민족이라는 벽이 헐리면서 이뤄진 정보공유화는 이해(利害)관계에 매달리는 사회가 아니라 이해(理解)에 기반을 둔 세계다. 이는 개체의 시대가 이뤄낼 원가절감효과에 따라 실현될 수 있다. 개체의 시대는 ‘코스트 프리 사회(cost-free society)’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모든 개체가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집중 투자함으로써 질 좋고 값싸고 개성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의력이 충만한 이들 마니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 원가개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이에 따라 코스트다운(원가절감)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업이나 산업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고 국가체제와 권력구조, 관료조직, 교육제도, 문화 등 모든 영역을 변혁시켜 갈 것이다.

    다른 하나는 1 대1 맞춤상품과 서비스의 확산이다. 요즘 보험 예금 등의 재테크나 아파트 건설분야 등에서 부분적으로 시행되는 맞춤상품, 맞춤서비스는 곧 자동차 안경 화장품 식품 서적 TV프로그램 영화 의료 등 거의 모든 품목에 걸쳐 나타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업은 수십만, 수백만 고객을 상대하면서도 불과 몇 가지의 변형제품을 제공하는 데 그쳤다. 현실 여건상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을 다 살려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를 짜낸 결과가 서로 다른 욕구를 가진 수많은 고객을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시키는 소위 ‘절충식 마케팅’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은 이런 문제점을 일시에 해소하면서 ‘개인화 마케팅’을 촉발했다. 소비자 개인의 취향과 기호를 인터넷을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신속하게 파악하여 소비자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특별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소비자에게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만족감을 주므로 비용 대비 효과가 엄청나며, 이것은 다시 자원의 절약을 가져온다. 주문생산이므로 폐기 처분할 것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전자상거래 방식은 거래비용을 줄이는 것은 물론, 불특정 고객을 위해 상품을 진열장과 창고에 기한없이 쌓아놓는 바람에 발생하는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까지 가져온다.

    맞춤서비스는 대(對)고객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조직 내 인사에서도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맞춤형 인사’가 등장하고 있으며, 노사관계 역시 종래의 집단적 노사관계가 개별적 노사관계로 급격히 이행되고 있다. 집단의 자리에 개체가 들어서는 것이다.

    맞춤시대의 출현은 정보의 내용과 질을 변화시켰다. 이제 정보는 산업·금융·조세정책 등을 다루는 관료의 손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또한 그것은 그다지 유용하지도 않다. 요즘 신문 지면을 보더라도 부처 출입기자가 쓰는 기사보다는 독자적으로 취재한 기사가 늘고 있으며, 독자들도 그런 기사에 더 주목한다. 그들은 관청에서 흘러나오는 그렇고 그런 기사보다 시중에 나도는 이야기, 시장의 주역으로 떠오른 개체들의 트렌디 같은 일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정보들을 더 중요시한다. 이런 것들이 사업 아이디어를 촉발할 뿐 아니라 마케팅의 대상이자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일시적인 구조조정기를 거치면 기업인이 관료를 찾아가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대신 그들은 시장으로, 현장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창의력이 움트는 곳

    이제 기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인 개체,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장과 한몸이 되지 않으면 도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외형보다는 내실을 따져야 하고,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

    또한 기업은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바위처럼 자리만 지켜서는 안 된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주위 환경을 자신에게 맞춰가면서 능동적으로 살아야 한다. 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이 점에 관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성의 기능’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동물들의 사소한 행동조차 잘 살펴보면 그것은 그들의 환경을 개조하는 행위임을 알게 된다. 가장 단순한 생명체도 그들의 먹이가 자연스레 자신들에게 헤엄쳐 오게 만든다. 고등한 동물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먹이를 추적하고, 포획하고, 저작(咀嚼)한다. 그리하여 환경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변형시킨다. 어떤 동물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땅을 파며, 어떤 놈들은 포획할 대상을 추적한다.

    이러한 모든 생존작전을 ‘환경적응’이라는 흔한 용어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하면 정말로 중요한 사실들이 다 빠져나가버린다. 고등한 형태의 생물은 그들의 환경을 개변하는 데 능동적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같은 글에서 인간에겐 세 가지 충동이 있다고 했다. ‘산다(to live·생존의 수준)’ ‘잘 산다(to live well·만족스러운 생활)’ ‘더 잘 산다(to live better·매우 만족스러운 생활)’가 그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만족도가 낮은 수준의 삶을 한 차원 더 높은 삶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을 이성의 기능이라고 했다. 앞서 말한 환경개조 능력이나 이성의 기능이란,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화두처럼 되어버린 ‘지식(knowledge)’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이란 환경을 능동적으로 개변하고 삶의 만족도를 향상시키려는 것이며, 거기에 소용되는 것이 지식이고 이성이라면 반드시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할 필요가 없다. 박사학위를 얻을 이유는 더욱 없다. 고도의 학문적 연마가 필요한 분야나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나 동·식물의 생장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걸 관찰하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때 가서 관련 서적이나 자료를 찾아보면 된다.

    우리는 에고(ego)가 창의성을 개발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것은 일면만 본 것일 뿐, 전체를 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그래서 환경을 개조해 나가려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창의성이 움트는 게 아니던가. 에고는 이렇듯 창의성의 원천인 것이다.

    문제는 소수와 조직을 위한 수직적인 틀을 어떻게 수많은 개체를 위한 수평적인 틀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이해집단간에 충돌도 일어날 것이다. 특히 기득권층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밖에 살 길이 없으니 우리는 개체의 시대를 사는 법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먼저 조직과 개체의 관계를 살펴보자. 새로운 시각으로 조직을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기존 조직이 해체의 길을 걷는 지금 가장 긴절한 문제다. 그중에서도 삶의 바탕이라 할 경제를 직접 담당하는 기업조직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제 개체는 자영업자가 될 수도 있고 프리랜서로 일할 수도 있기 때문에 취업은 필수코스가 아니다. 구조조정으로 대량 실업사태가 일어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 대세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도 억대 연봉을 내걸고 인재를 구하려는 헤드헌터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회사는 사람으로 구성된 조직이다. 지금까지는 자본이 중요한 요소였을지 모르나 이제는 사람이 그 중심요소다. 원래부터 회사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회사를 뜻하는 ‘company’란 말이 ‘빵을 함께 먹는 사람들’이란 뜻을 가진 ‘companion (com+pan+ion)’에서 나온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회사라는 조직을 만드는 걸까.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지배받기 위해서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정도(正道)는 아니었으리라. 혼자보다는 여럿이 모여 일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조직은 불행하게도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피라미드 구조였다. 주주-사장·이사-상급관리자-중급관리자-사원 등으로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철저한 피라미드 구조의 조직에선 하부의 정보가 최상부로 전달되기 어렵고, 그 반대 방향의 정보전달도 쉽지 않다. 그것이 가능한 경우라 해도 정확성과 신속성이 반감된다.

    이래서는 시장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고, 의사결정이 소수인 상부에 집중돼 독단으로 흐를 가능성도 높다. 지도부의 생각과 다른 의견은 무시되기 십상이다. 회사는 직원들을 조직의 정서와 문화에 동화, 적응시키기 위해 수련대회 같은 것도 실시한다. 전문지식보다는 애사심과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리하여 ‘회사인간’이 양산됐다.

    그러는 사이에 중간관리자는 최고 결재권자의 결재를 얻기 위해 몇날 며칠을 비서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최고 결재권자는 결재를 기다리는 직원 수가 얼마나 되는지로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으려 했다. 그러고도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기적이다.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가 낳은 획일적인 문화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회사인간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멸사봉공형’ 인간이 결코 회사를 살리는 이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회사를 살리는 자는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이다. 자신이 허약한데 어찌 조직을 살릴 수 있겠는가. 틀에 빠지면 인간은 틀을 위해 움직인다. 틀은 단지 하나의 수단일 뿐인데, 마치 그게 목적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렇게 조직에 의존적이라면 자신도, 조직도 살릴 수 없다.

    피라미드 조직의 미덕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으로 소위 ‘관리론적 조직론’이라는 게 있다. 7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의 허버트 사이먼이 대표적 주창자인데 골자는 이렇다. “종업원은 정보처리 시스템 속에서 기능하는 존재로서 그의 정보처리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계층조직과 분업체제가 도입돼야 하고 전문화도 필요하다.”

    人和가 밥 먹여주나

    그러나 이런 체제하에서는 조직 구성원들이 창의성과 혁신적인 자세를 보여주기 어렵다. 독창성과 혁신적 자세는 그 성질상 의견을 이견으로 받아들이고, 명령과 통제를 일삼는 ‘관리’방식으로는 결코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21세기형 원형구조’다. 여기에선 관리자층이 얇다. 실질적인 위계질서도 없다. 구성원 모두가 전문가로 대접받는다. 개체가 서로 파트너 자격으로 모여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조직이다. 주종·상하 관계가 아니라 합리적인 거래 관계,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인터넷 정보환경이 만든 결과로서 이론적으로는 ‘생성론적 조직론’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 주창자 중의 한 사람인 일본 지식과학계의 대가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朗)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커지고 싶어하고 위대해지고 싶어하기 때문에 회사를 조직하고 회사에 참여한다”면서 “조직은 개체의 ‘자기초월 프로세스(self-transcending process)’가 일어나는 장(場)”이라고 했다.

    21세기형 원형구조는 조직 구성원들로 하여금 조직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하게 만든다는 강점이 있다.

    물론 이런 조직에도 관리직은 있지만 그들은 피라미드 조직에서처럼 군림하거나 간섭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 역시 그 분야의 전문가들로서 업무 부서를 효율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한다. 원형구조 조직은 피라미드 형태와는 달리 통합이 아니라 분산을, 수직적 통제가 아니라 수평적 협력을, 한 가지 색깔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 내기를 지향한다.

    이들의 중심 테마는 회사(조직)가 아니라 일이다. 그러므로 인화(人和)를 목표로 내세우지 않는다. 인화는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그게 목표가 되면 사람들은 움츠러들게 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인화를 맨앞에 내세우는 기업이 있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라는 말도 한다. 서로 아낀다는 뜻에서 하는 말인 줄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런 말은 본말을 흐리게 만들 우려가 있다.

    회사는 가족공동체가 아니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가족끼리는 이익을 내세우면 안 되지만 회사는 그게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익을 위해 머리를 맞댈 때는 맞대고, 할 말이 있을 때는 해야 한다. 그것을 회피하려 든다면 이익이 보장될 수 없다. 이익이 없다면 화(和)가 넘치는 조직이라도 문을 닫아야 한다. 지금 구조조정을 당하는 기업이, 그 종업원들이 애사심이 없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애사심과 조직의 인화는 회사가 잘 돌아가면 자연스레 생겨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조직의 중심 테마는 일이어야 하고, 모든 문제는 일을 위한 연장선상에서 해결 방도를 찾아야 한다. 셈을 흐리게 하는 어떤 논의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인화를 내세워야 한다면 그 조직에는 ‘하는 일에 비해 사람이 많다’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오다 노부나가의 허허실실 조직

    개체의 시대에 어울리는 최고·최선의 조직은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무정형’이나 ‘허허실실’ 조직이다. 이는 고용의 유동화, 기업간 전략적 제휴, 아웃소싱, 팀제 운영 등이 가능해짐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졌는데, 역사적으로 본다면 16세기 혼란스럽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가 바로 그런 조직을 거느렸고 그에 어울리는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오랫동안 장기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는 일본 기업가들도 에도 막부를 열고 한동안 번영을 구가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를 모델로 삼았으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자 성실과 충성, 끈기를 중시했던 도쿠가와보다는 난세의 리더 오다를 찾았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직다운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적절한 형태의 것을 만들었다가 필요성이 사라지는 순간 재빨리 없애버렸다. 마치 요즘 미국의 야후가 신제품 개발을 위해 팀을 편성했다가 개발이 끝나면 다음 신제품을 위해 헤쳐 모이게 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그런 오다가 인사관리에서 역점을 둔 것은 능력, 구체적으로는 ‘지적 생산성’이었다. 그는 400여 년 전에 이미 21세기형 지식경영을 실험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한 지적 생산성이란 전장에서 베어온 적병의 머릿수가 아니었다.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지을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갖춘 고도의 지적 능력을 뜻했다. 그랬기에 그의 부하들은 화공(火攻)은 물론, 수공(水攻)과 양공(糧攻·적군의 식량공급루트 차단)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오다는 충성심이나 노력, 근성 같은 것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은 대신 적은 비용으로 짧은 시간에 최대 전과를 올리는 인재를 높이 샀다. 그에게는 이처럼 남다른 상인기질이 있었다. 또한 그는 본영(本營)을 여러 번 옮겼다. 그때마다 가족들을 이끌고. 이것 역시 변화가 극심한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는 때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부하들을 도구로 삼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사실 그 시대 인물 중에 이런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한 지금과 같은 시대에 그의 조직론과 리더십은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조직은 고정불변한 것이어선 안 되고, 최고경영자는 관리자형보다는 전략가형이어야 할 것 같다. 중간관리층은 얇으면 얇을수록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최고경영자는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미시적으로 파고드는 직원들과는 정반대로 망원경 같은 눈으로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이 시대 경영의 요체는 ‘관리(management)’가 아니라 ‘배려(care)’이므로.

    무릇 조직에는 완성된 형태가 없다. 끊임없이 자신을 변혁시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직은 ‘organization’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자 능동형인 ‘organizing unit’이어야 한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이성의 기능’에서 지적한 ‘능동적인 자세’와도 어울린다.

    제너럴모터스(GM)의 새턴 부문은 모든 직원이 정보관리 시스템을 활용해 공정을 파악하고 이상이 생기면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것이야말로 능동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능동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유연성’이다. 고정된 것, 경직된 것에서 탈피하기 위해 이미 많은 기업은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에 의한 급여·승진시스템을 버렸다. 직급과 직책도 파괴하고 팀제를 도입했다. 임금제도도 연봉제와 성과급제로 바꿨다. 이렇게 모든 것을 유연화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말처럼 그리 유연하지가 않다. ‘부’가 ‘팀’으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고정된 상설조직이고, 팀장은 과거의 부서장처럼 결재서류를 들고 이리저리 쫓아다닌다. 말로는 전자결재체계를 갖췄다면서 아직도 서류에는 담당-과장-팀장-이사-사장-회장으로 이어지는 층층시하의 직인란이 버젓이 살아 있다.

    나중에 책임소재를 밝히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면 몰라도 단순한 의사결정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서류결재건 사이버 결재건 어떤 형태와 절차를 갖춰야 할지 원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회의석상에서, 혹은 개인적인 미팅에서 의견조율을 끝낼 수도 있다. 적어도 ‘매니징(managing)’ 조직이 아니라 ‘크리에이티브(creative)’ 조직을 만들려고 한다면 말이다. 일본 소프트방크의 손정의 사장은 형식이 내용을 앞지르는 관료주의를 ‘대기업병 징후’라고 일컬으며 그런 회사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연공서열제가 붕괴되면서 새로이 등장한 ‘목표에 의한 관리(MBO·Manage-ment By Objectives)’ 방식도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문제가 있다. 담당자의 의견을 수렴한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최고경영자의 생각이 지배한다는 점에서 우선 그러하다.

    다음 문제점은 MBO에서 말하는 ‘목표’에 있다. 목표란 것이 개인별 성과를 측정해서 합리적인 보상을 해주기 위한 것이고 회사의 경영방침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한번 정해지면 고정될 수밖에 없는데다 그것을 위해 배정된 예산을 다른 사업으로 전용하기도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목표가 수치로 표현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현 경제기획청 장관)가 93년에 펴낸 ‘조직의 성쇠’에서 ‘3비(比)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일본이 행복했던 전후시대가 끝났다고 전제하고 조직이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제시하면서 그 대안의 하나로 ‘3비(전년比·타사比·예산比)’로부터 탈피할 것을 주장했다. 일본 기업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3비주의식 실적 타령은 ‘확대는 곧 이익’이라는 발상에서 나왔다는 것. 그는 수량지향적인 확대주의는 지양돼야 한다면서 ‘코스트+적정이윤=적정가격’이란 개념은 ‘가격-이익=코스트’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시대는 양이 아니라 질을 추구한다.

    목표에 구속되지 말아야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일본 세콤그룹의 창업자인 이다 마코토(飯田亮) 최고고문은 “계획과 목표는 필요없다”며, “세콤에는 예산제도도, 중기·장기 경영계획도, 수치로 표시된 목표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세콤은 36기 연속 순이익을 기록했다.

    그는 “연초에 투자예산을 책정해 놓으면 거기에 구속되므로 나중에 예상치 못한 좋은 사업 아이템이 나타나도 거들떠보지 않게 되고, 또 이를 고려한다 해도 그것을 위해 원래 계획을 변경하려면 무척 애를 먹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년 사업계획을 세워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앞으로 1년 동안 벌어질 여건변화까지 예상해 거기에 맞는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항목별로 소요예산과 수익을 뽑고, 또한 그렇게 단숨에 세워놓은 계획에 1년을 묶어놓는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앞날을 웬만큼 예측할 수 있던 시절이라면 몰라도 지금처럼 전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연도별 사업계획은 빨리 버리면 버릴수록 좋을 것이다. 지금은 ‘마스터플랜’이 아니라 ‘로드맵’이 필요한 시대다.

    이다 고문은 연간 계획을 세울 시간에 구체적인 사업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서 결심을 하면 신속하게 실천에 옮긴다는 것. 수치로 된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은 “숫자는 결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보다는 혁신과 투명성(clean), 스피드 같은 ‘보이지 않는 목표’가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개체의 시대 경제가 갖는 또 하나의 특성은 ‘플로(flow)’ 중심이라는 것. ‘스톡(stock)’은 과거의 유물이다. 우리 금융기관들이 부동산 같은 스톡의 보유 여부를 기업 대출심사 기준으로 삼고 있을 때 미국계 은행에선 철저히 현금의 흐름(cash flow)에 주목했다. 아무리 기초가 튼튼해도 돌아오는 어음이나 만기가 도래한 대출금을 상환할 유동성이 부족하다면 기업은 쓰러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흐름이 중요하다고 해서 현금을 보유하는 데만 주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과로 얻는 것이어야 한다.

    그보다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읽고 현장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의사가 청진기를, 그것도 안 되면 초음파 검사나 단층촬영을 통해서라도 환자의 몸 상태를 살피듯 경영자는 장세를 읽고 시장의 맥박을 짚어내야 한다. ‘변화의 시대에는 거리로 나가라’는 것이다. 현장은 늘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미래를 대비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체제, 맞춤경제의 시대란 바로 그런 것이다. 개성과 차이, 그리고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소비 개체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친다면 경영이 이뤄질 수 없다.

    스톡 중심에서 플로 중심으로

    미국 컴퓨터산업의 맹주 휴렛팩커드(HP)의 경영진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현장을 찾는다. 그들은 MBO를 대신해 MBWA(Management By Wandering Around·현장순회경영)라고 부르는 새로운 경영방식을 통해 현장의 미세한 변화까지 읽어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며 조직원 및 고객과 일체감을 공유하려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현장’에는 일이 행해지는 사무실 연구소 공장 창고 점포뿐 아니라 거리 학교 등 관련있는 곳 모두가 포함된다. 그들은 그렇게 접촉과 교류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무실에 칸막이를 세우지 않고 문도 달지 않는다. 최고경영자의 방도 마찬가지다. ‘오픈 도어(open door)’, 모든 것이 열려 있고 그래서 투명하다.

    휴렛팩커드의 경영진은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나선다는 점에서,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읽는 게 아니라 현장에 바로 뛰어들어 몸으로 느껴보겠다는 용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개체를 신뢰하고 존중할 줄 안다는 점에서, 유연성과 혁신의 자세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21세기 조직의 이상적인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개체가 모든 것을 조직에 맞춰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조직도 필요하다면 개체의 요구에 맞춰야 한다. 지금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원형구조로의 변신 움직임이나 지식경영(IT)체제 구축, 인재파견 등 고용형태의 유연화, 아웃소싱·인 소싱 등의 인력동원 구조, 팀제 운영과 분사화(分社化), 핵심인력 육성 프로그램(succession planning) 운영, 커리어 카운슬링, 복지제도의 확충, 전자학습(e-learning) 등의 새로운 방식은 다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다.

    그렇다고 조직 차원에서만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체도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다. 감독과 간섭이 없어도 자율적으로, 창의적으로, 능동적으로 일하는 자세를 배워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야말로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교육방식이자 문화적 가치인 수신, 중용, 절제와 같은 덕목이 요구된다. 개체의 시대란 자기 수련이 곧 지식이 되고 경쟁력이 되는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화와 정보화는 절대로 두려워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에겐 그런 잠재력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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