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포철 뛰어들고 LG 물러간다”

청와대 直報 비밀 문건을 통해 본 통신산업 구조조정 시나리오

  • 이나리 byeme@donga.com

    입력2005-04-29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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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로통신 사장의 청와대 보고서, 어떤 내용 담고 있나
    • “한국 통신산업, 건설·금융 전철을 밟고 있다”
    • ‘포철 동기식 사업 주도→LG텔레콤·하나로 인수’ 시나리오
    • LG 구본무 회장 “통신 ‘통’자도 듣기 싫다”
    • 한국통신-SK 2강 구도냐, 한통-SK-포철 3강 구도냐
    • 통신 구조조정에 정치 논리 개입해 있나
    • “판 커지면 부실 규모도 커진다”
    지난 1월 초, 청와대에 ‘통신사업 구조조정정책 건의서’라는 제목의 대외비 문건이 제출됐다. 작성자는 하나로통신 신윤식 사장(64). 하나로통신은 시내전화 및 초고속망 사업을 하는 중견 통신업체다. ‘나는 ADSL’이 대표 브랜드. 전남 고흥 출신인 신사장은 체신부 차관, 데이콤 사장을 거친 통신전문가다. 여권 핵심부와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동아’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보고서 원문을 단독 입수했다. 건의서에는 통신업계에 팽배한 위기감과 ‘살 길을 열어 달라’는 간절함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요지는 ‘정부가 나서 포항제철의 동기식 IMT2000 컨소시엄 주도→LG텔레콤·하나로통신 인수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 신사장은 같은 보고서를 들고 이한동 총리와도 독대(獨對)해 장시간 브리핑을 했다. 통신업계 구조조정의 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건설·금융 전철 밟고 있다”

    SK, LG, 포철, 한국통신, 삼성. 한국 경제의 핵심을 쥐고 있는 대그룹들과 하나로통신, 데이콤, 두루넷, 파워콤, 드림라인 등 IT업계 핵심업체들의 사활이 걸린 한판 승부. 그 중심에 동기식 IMT2000 사업자 선정이라는 핫 이슈가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요즘 통신업계는 겉으로 보기에 ‘개점휴업’ 상태에 가깝다. 정통부는 물론 업계 핵심인사들까지 극도로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동기식 IMT2000컨소시엄의 ‘간사’ 역을 자임한 하나로통신만 바쁘게 움직이는 모양새. 동기식 사업계획서 제출일(2월 26~28일)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어떤 업체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참여할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회사 및 업계의 미래와 관련해 자신 있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거의 없다.

    사내 분위기도 뒤숭숭하긴 마찬가지. LG텔레콤 이모 과장은 “요즘 같아선 정말 일할 맛이 안 난다. 직원들끼리도 만나기만 하면 회사 운명과 관련해 이런저런 정보나 의견을 교환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말한다. 두루넷, 데이콤 등 중견 업체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본의 아니게 통신업계 구조조정의 핵으로 떠오른 포철의 한 임원도 “철(鐵)만 상대하며 우직하게 살아온 우리가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몰렸는지…”하며 근심 아닌 근심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는 폭풍전야의 고요에 불과하다. 성층권에선 이미 격렬한 핵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최고경영진 간의 거듭되는 비밀 회동, 치열한 정보전(情報戰), 사내·외로 수많은 문건이 날아다니고, 경쟁사 사장의 말 한마디에 핵심인력들은 밤샘작업으로 내몰리기 일쑤다.

    혼란의 결과는 우선 동기식 컨소시엄의 형태로 구체화될 것이다. 이어질 업계와 시장의 대대적 재편(再編). 어떤 곳은 문 닫고, 어떤 회사는 팔려가며, 두세 업체는 막대한 자금과 조직을 바탕으로 시장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이는 크게 보아 국가신인도에까지 영향을 끼칠 중대 사안이다. 현재 우리나라 통신산업이 총체적 위기에 몰렸다는 것은 정부나 업계 모두 인정하는 사실. 신윤식 사장의 청와대 건의서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현실인식이다.

    ‘국내 정보통신사업은 한국통신과 SK텔레콤을 제외한 대부분 통신사업자들의 중복과잉투자, 지속적인 적자, 자금난 등으로 2001년 상반기를 넘기기 어려운 危機 狀態에 직면.

    LG텔레콤, 하나로통신, 온세통신, 데이콤, 두루넷, 드림라인 등 통신업계도 建設·金融의 前轍을 밟고 있음.’

    일각에서 “구조조정을 적시에, 효율적으로 달성하지 못할 경우 올 하반기쯤에는 공적자금 투입 문제가 전면 대두될 수도 있다”는 진단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업계 구조조정과 관련해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대략 5가지다.

    ▲동기식 IMT2000 사업권은 어디로 갈까 ▲포철은 무선통신사업에 뛰어들 것인가 ▲LG그룹은 통신사업을 계속할까 ▲LG텔레콤, 파워콤, 하나로통신 등은 새 주인을 만나 기사회생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통신 민영화는 가능한가.

    현재로선 어느 것 하나도 쉽사리 결론을 말할 수 없다. 또 각 사안은 업체 간 지분구조, 역학관계, 모(母)그룹의 상황, 소비자 편익, 장비업체 문제 등이 얽히고 설켜 독립적인 논의가 거의 불가능하다. 통신산업의 특성상 시장논리로만 접근할 수도 없는 일. 결국엔 정통부의 ‘계획’과 중재, 정책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권의 입김도 거세, 이 문제가 이미 정치적 사안으로 비화된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동기식 IMT2000 사업권은 어디로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기 전 현재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지난해 12월 15일, 정통부는 IMT2000, 즉 차세대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 발표했다. 결과는 한국통신-IMT와 SK-IMT의 승리. 정통부의 ‘1동2비(동기식 1사, 비동기식 2사) 방침에 따라, 역시 비동기식 사업신청서를 냈던 LG글로콤은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1동’을 겨냥해 기습적으로 동기식 신청서를 냈던 하나로통신의 ‘한국IMT2000’도 과락 점수를 받아 탈락했다. 주인을 찾지 못한 동기 티켓은 차후 재신청을 받아 처리하기로 결정됐다.

    무선통신사업자에게 IMT2000 사업 탈락은 단지 큰 돈 벌 기회가 사라졌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지금의 2세대, 2.5세대 통신 서비스 이후 도래할 3세대 시장 참여를 원천 봉쇄 당한다는 것, 즉 통신사업 자체를 포기해야 할 위기에 처했음을 뜻한다.

    IMT2000 탈락으로 인해 LG는 통신 중심 그룹으로 거듭난다는 비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이로 인해 ‘LG가 통신 사업에서 철수한다더라, LG텔레콤을 한국통신에 매각한다더라’는 등 각종 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LG는 1월 초 IMT2000 사업 추진단을 80명에서 20명으로 대폭 축소하는 등 ‘동면’에 들어갔다. 같은 달 16일에는 LG텔레콤의 대주주인 LG전자가 ‘텔레콤 매각 검토’를 공시, 통신서비스 사업을 포기할 가능성이 가시화됐다.

    ‘LG가 비동기식을 포기하고 동기식 사업권에 재도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정통부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각도로 동기식 참여를 권유했으나 LG 측은 “동기식 사업권을 딴다 해도 꼴찌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거듭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일각에선 LG의 이런 행보를 두고 “마지막 남은 티켓마저 비동기식으로 바꾸기 위해 배수진을 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동기식 사업권자의 윤곽이 불투명해지자 정통부는 시간 벌기에 나섰다. ‘동기식 재도전’ 의사를 밝힌 하나로통신 측의 반발을 묵살하고, 애초 2월 말로 잡혀 있던 동기식 사업자 선정을 3월 중순으로 연기했다. 이 와중에 하나로통신 신사장과 이한동 총리의 독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신사장이 정통부를 거치지 않고 청와대에 직접 보고서를 올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2월8일 경에도 통신업계 구조조정과 관련된 견해를 피력한 문건을 제출한 바 있다. 당시는 아직 IMT2000 사업자 선정 전이라 1월 건의서와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핵심은 같아 ‘포철의 IMT2000 사업 참여를 유도해 한국통신-SK로 양분된 통신업계를 3자 구도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지난해 10월부터 정통부에 같은 내용의 건의를 수차례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권 핵심인 청와대에 직접 보고서를 제출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했던 건 그간 포철이 통신사업 진출에 강한 의지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철강산업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으니 풍부한 자금을 활용, 미래형 산업인 정보통신, 에너지 등의 분야에 진출하겠다는 것이 포철의 장기 계획. 그래서 벌인 일이 신세계통신에 대주주로 참여했다 지분 전체를 SK텔레콤에 매각한 것, SK-IMT에 지분 15%를 가진 2대 주주로 참여한 것, 한전 자회사인 파워콤 지분 5%를 인수한 것 등이다. 파워콤은 한국통신망에 대적할 만한 전국적 규모의 통신선로를 가진 국내 유일의 회사다.

    그러나 파워콤의 새 주인이 되려던 포철의 계획은 SK와 LG의 견제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SK, LG 모두 파워콤 인수를 통해 IMT2000 사업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나아가서는 한국통신에 대적할 유무선통합 통신업체로 발돋움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부부처간 갈등도 한 몫을 했다. 파워콤의 실제 주인 격인 산업자원부와 공기업민영화 주무부처인 기획예산처는 포철을 지지한 반면, 통신사업자 허가권을 쥐고 있는 정통부는 국내외 기간통신사업자 또는 컨소시엄으로 자격 제한 규정을 둬야 한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양 세력의 의견충돌로 매각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포철뿐 아니라 자금 사정이 악화된 LG, SK도 인수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파워콤은 아직도 민영화되지 못한 채 ‘주인 없는 회사’로 남아 있다.

    이렇듯 포철을 ‘딴 식구’ 취급해온 정통부의 태도는 1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인 구애’ 쪽으로 180도 선회했다. 동기식 사업자 선정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구조조정에 대한 업계 안팎의 요구가 거세진 까닭이다.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지만 ‘그럴 시기는 이미 놓쳤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 당장 IMT2000 사업에 참여하는 데만도 1조원 가량이 든다. 국내에서 이만한 현금을 동원할 수 있는 회사는 포철과 롯데, 삼성전자 정도다. 이 중 롯데와 삼성전자는 오래 전부터 통신서비스업에 진출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남은 카드는 포철 한 곳. 업계의 분석에 따르면 포철은 단기간 최대 16조원의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요즘 정통부의 행보는 “하나로통신과 밀월관계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사장이 제안한 구도에 근접해 있다.

    “포철 기침에 업계 감기 걸릴 판”

    여기서 다시 신사장의 청와대 보고 문건으로 돌아가보자. 건의서의 주내용은 ‘포철의 정보통신사업 참여를 유도해 업계를 ▲한국통신그룹 ▲SK통신그룹 ▲LG텔레콤·하나로통신 등 기존통신사업자 및 포철 중심의 신규 통신그룹 등 3대 종합통신그룹체제로 재편해달라’는 것이다.

    문건은 포철의 통신사업 진출 방안까지 적시하고 있다. ‘1단계-그랜드 컨소시엄 구성을 통한 동기식 사업권 획득, 2단계-포철의 LG텔레콤·하나로 통신 경영권 확보 및 군소통신기업 흡수 통합’의 순서이다. 예상 소요액은 1조5000억 원. IMT2000 지분 20% 확보, 하나로통신 및 LG텔레콤 지분 30% 인수를 기준으로 추정한 액수다. LG텔레콤과 관련해서는 비동기 사업권 획득 실패와 자금난 등으로 통신사업에서 퇴출이 예상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따로 만들어진 요약문에는 ‘문제점 - 포철 회장은 통신사업 참여에 대한 포철 실무진의 긍정적 검토결과와 산자부 장관, 정통부 장관의 통신사업 참여 권고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결정을 유보함으로써 기회를 놓치고 있음’이라는 구절이 덧붙어 있어 궁금증을 더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건의서 제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포철의 동기식 IMT-2000 컨소시엄 참여설이 모락모락 피어나왔다. 포철 유상부 회장과 신사장이 만났다, 청와대·정통부·산자부에서 유회장에게 동기식 참여 압력을 넣고 있다, LG텔레콤이 포철에 매입 의사를 타진했다는 등의 각종 설이 증권가를 중심으로 파다하게 퍼졌다.

    급기야 지난 1월 중순, 안병엽 정통부 장관은 “동기식 그랜드컨소시엄 구성을 위해 중복참여 금지조항을 완화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는 SK-IMT에 2대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포철에 동기식 컨소시엄 참여 길을 열어 주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포철은 사업성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포철의 한 고위인사는 “이곳 저곳에서 들어오는 압력 때문에 곤혹스럽다”며 “하나로통신 신사장과 유상부 회장이 만난 거나, 정통부·산자부는 물론 정권 핵심부로부터도 동기식 참여를 종용받고 있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즈음 업계에는 “포철이 기침만 해도 업계 전체가 감기에 걸릴 판”이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신사장의 의도대로 포철이 통신산업 구조조정에 핵으로 떠오른 것이다.

    논란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 유상부 회장은 지난 2월8일 기자회견을 갖고 “동기식 컨소시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보통신, 에너지, 바이오, 환경 등 미래 성장산업을 집중 육성키로 했다”는 계획을 밝혀 ‘통신산업 진출’이라는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이와 관련, 포철의 한 임원은 “솔직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포철은 분명 통신산업에 진출할 뜻이 있다. 문제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뛰어드는가다. 포철 정도 되는 회사가 남의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다. 통신산업이라는 대양에 배를 띄웠으면 항공모함 정도는 끌고 가야지 거룻배로 잔물결이나 타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여기에 포철의 고민이 있다.”

    ‘항공모함’이란 쉽게 말해 유무선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대통신그룹을 뜻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선통신, 즉 IMT2000 사업자로 나서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동기식은 수익성이나 장래성 면에서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전체 주식의 51% 이상을 보유한 외국인 주주들의 반대도 우려된다. 산업정책적 측면보다는 수익률을 중시하는 그들이 포철의 동기식 컨소시엄 참여를 달가워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항공모함’이 되는 길이 하나 더 있기는 하다. 한국통신 민영화에 참여해 최대 주주 혹은 주요 주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기업이 공기업을 인수했다’는 비난을 듣기 알맞은 구조다. 포철이 완전 민영화했다고는 하나 아직은 공기업적 성격이 강하다. 더 큰 문제는 ‘공기업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아는 포철이 보기에 한국통신은 그리 매력적인 매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포철의 한 고위인사는 “노조 문제 해결 등 사전정지작업이 완결되고, 30% 이상의 지분을 가져와 명실상부한 지배주주가 될 수 있게 해준다면 모를까…” 하고 말끝을 흐렸다.

    배포를 확 줄여 파워콤, 하나로통신 인수로 만족하자니 이 또한 여의치 않다. 파워콤은 기간통신망을 보유하고 있고 하나로통신은 시내전화 사업권을 갖고 있으니만큼 두 업체의 최대주주가 되는 것도 나쁜 포석은 아니다. 실상 지난해 9, 10월 포철은 파워콤과 하나로통신 인수를 적극 검토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격이 지나치게 높은 데다 그 수준에서 인수할 경우 주주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돼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 하나로통신은 지분 30%를 넘기는 대가로 1조원을 요구했다. 요즘은 이 ‘가격’이 20% 인수시 5000억 원으로 뚝 떨어졌다. 포철로서는 단가가 더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이 순리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정통부의 견제도 큰 몫을 했다. 하물며 포철이 끝까지 동기식 참여를 거부할 경우 정부가 파워콤 인수를 지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쩌면 포철의 행보를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유상부 회장을 비롯, 포철에 대한 정권 핵심부의 전방위 압박인지도 모른다.

    유회장이 동기식 컨소시엄 및 한국통신 입찰 불참을 밝힌 2월8일 저녁, 업계 정보통들 사이에는 “유회장의 처사에 대해 정부 여당의 비난이 거세다”는 설이 돌았다. 심지어는 ‘유회장이 창(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쪽 사람이 된 것 아니냐’ ‘누구 덕분에 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데…’ 하는 이야기까지 오갔다는 소문이었다. 낭설일 가능성이 훨씬 크지만 유회장과 정부 여당의 관계, 아울러 포철의 행보에 대한 업계 안팎의 시각이 어느 지점에 못박혀 있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일각에선 유회장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결국 포철은 동기식 IMT2000 사업에 뛰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점차 세를 얻고 있다.

    2월14일, 모 통신업체의 정보 담당 임원은 포철 핵심부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라며 “포철이 동기식 컨소시엄에 참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구체적 방안까지 논의중이라는 것. 가장 큰 난관은 3월16일로 예정된 주주총회다. 주주들의 반발을 피하려면 주총이 끝난 다음 컨소시엄 참여를 공식화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일정이 여의치 않다.

    동기식 사업자 신청 기간은 2월26~28일이다. 주총을 피하려면 사업서 제출이 끝난 다음에나 컨소시엄 참여를 발표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동기식 사업자가 선정된 후 참여할 길을 찾는다. 둘째는 ‘대리인’ 노릇을 할 회사를 찾아 지분을 할당받은 뒤, 사업자 결정 후 다시 넘겨받는 수순이다. 둘 다 무리가 따르는 방식이라 실제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그야말로 ‘뚜껑을 열어봐야’ 알 일이다.

    그렇더라도 정통부 주무부서는 물론 업계에서도, 시기가 문제일 뿐 포철의 동기식 참여를 ‘피할 수 없는 일’로 보고 있다. 하나로통신 신윤식 사장도 “금년 상반기에는 업계 진출이 가시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포철 실무진은 “동기식 참여와 관련한 어떠한 지시도 받은 바 없다”며 사업 참여설을 부인했다.

    LG는 어디로 가는가

    포철이 동기식 컨소시엄, 나아가 통신 산업에 ‘정식 데뷔’하는 것은 현재의 업계 구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력을 지닌다. LG텔레콤, 하나로통신, 파워콤 등 포철의 행보에 따라 이름이 오르내리는 기업은 물론이요, 지난해부터 공공연히 ‘새 주인’을 찾고 있는 두루넷 드림라인 온세통신 등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한국통신과 SK에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을 의미한다. 포철이 전면에 나설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 업계 지도는 어떻게 변할까.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LG그룹의 방향 설정이다. 비동기식 사업자 선정 탈락 후 LG그룹은 통신사업 포기와 고수를 놓고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그러나 구본무 회장의 ‘의중’은 이미 통신 부문 철수 쪽으로 굳어진 듯하다는 것이 측근의 전언이다.

    그룹 관련 사장단의 신년하례 자리에서 한 CEO가 “통신 사업은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묻자 “통신의 ‘통’자도 꺼내지 말라”며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구본무 회장이 농장에 칩거중인 구자경 전 회장에게 문안차 들렀다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는 류의 입바른 소문도 심심치 않게 돌고 있다. 그만큼 구회장과 LG의 상처가 크고 깊다는 의미일 것이다.

    LG에는 통신사업관련 경영진 회의가 상시 운영된다. 변규칠 LG텔레콤 회장과 남용 사장, 박운서 LG글로콤 부회장, 강유식 구조조정본부 사장 등이 주 멤버다. 이들은 요즘 LG텔레콤의 미래를 두고 격론을 벌이고 있다. 구조본부가 통신사업을 접자는 쪽이라면, LG텔레콤은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접자’는 쪽의 논리는 “서비스는 포기하되 LG전자를 통해 비동기식 장비 시장을 선점하자”는 것이다. 반면 ‘계속 가자’는 쪽은 “아직 살길은 있다. 어떻게든 정통부가 쥐고 있는 동기식 카드를 비동기로 바꿔 그룹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결정난듯 하다. 그룹의 한 고위간부는 “정리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동기식 사업권을 딸 확률보다 장비 시장을 노리는 편이 훨씬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동기식 컨소시엄 참여와 관련해서도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본적으로 이번 사업자 선정은 LG텔레콤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컨소시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LG텔레콤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참여하겠다. 예를 들면 현물 출자, 정확히 말해 LG텔레콤 주식을 일부 넘기는 형태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당 가치를 현재 주가 수준으로 산정한다면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증시 가격이 기업 가치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통신사업 철수를 말하면서 동기식 컨소시엄 참여 가능성은 여전히 열어 두고 있는 속내는 무엇일까. LG텔레콤을 ‘문 닫게’ 할 작정이 아닌 이상 적당한 매수자를 찾는 것이야말로 시급한 일. 이때 좋은 값을 받기 위해서는 길을 잘 골라 기업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발을 디뎌야 한다. 다시 말해 LG는 기업가치를 높이는 형태의 IMT2000사업 참여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LG가 이처럼 상대적으로 느긋하고 유보적일 수 있는 것은, 동기식 IMT2000사업 추진을 위해서는 LG텔레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존 LG텔레콤망을 활용해야만 초기 투자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고 한국통신, SK와의 가격 및 고객 유치 경쟁에 뛰어들 만한 ‘기본 체격’을 갖출 수 있다.

    또 LG텔레콤의 참여 없이 사업을 시작할 경우 사실상 4강(한국통신·SK·LG·동기식 컨소시엄) 구도가 형성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하나로통신이 LG그룹을 향해 줄기차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애초 하나로통신은 동기식 IMT2000 컨소시엄의 구도로 포철 등 대기업 지분 10%+α, 정보통신중소기업협회(PICCA) 10%+α, 하나로통신 10%, 일반 중견기업 10%, 소액 주주 20%, 외자 40%의 조합를 상정했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국내 단말기 업체인 삼성전자, 현대전자, LG전자는 물론 해외이동통신업체인 미국 버라이존, 스프린트PCS, 일본 KDDI, 중국 차이나텔레콤, 동기식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퀄컴 등과 다각도의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버라이존 등 해외 업체들은 “경쟁력이 낮은 만큼 1조1500억 원으로 돼 있는 출연금을 정부가 2200억 원으로 수준으로 낮춰줘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경쟁력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 가장 큰 이유는, 한국통신과 SK가 IMT2000 사업 상용화 시기를 애초 약속한 2002년 5월이 아닌 그 이후로 연기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통신시장은 사실상 2.5세대 동기(기존 2세대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형태) 대(對) 3세대 동기의 대결구도가 된다.

    통신전문가들에 따르면 2.5세대와 3세대 사이에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이렇게 되면 동기식 IMT2000컨소시엄은 막대한 투자비를 쏟아 붓고도 동기-비동기 사업을 병행하는 한국통신, SK에 밀려 설 자리를 잃게 될 수 있다.

    파워콤 “꽃단장하고 기다리겠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2월14일, 동기식 컨소시엄 참여 예정업체 대표들로 구성된 ‘CDMA(동기식)2000그랜드컨소시엄 추진위원회’는 1차 회의를 열고 컨소시엄 구성업체들에 참여 지분을 배정했다. 하나로통신이 애초 구상했던 모양새와는 여러 모로 차이가 컸다. 무엇보다 포철, 버라이존, LG텔레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1차로 결정된 사항은 하나로통신 10%, 삼성(1% 미만) 등 대기업과 중견기업 20%, PICCA 등 중소벤처기업 30%, 국민주 10%, 퀄컴(10%미만) 등 해외투자자 30% 등이다. 비록 상징적인 수준이지만 삼성전자의 컨소시엄 참여가 결정됐으니만큼 LG전자도 비슷한 수준에서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이 업계의 전망이다.

    한편 추진위는 같은 달 15일, 정통부에 출연금을 2200억 원으로 감면해주고 LG텔레콤 통신망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내용의 건의문을 제출했다.

    정통부로서는, 동기식 사업자 선정을 위해선 출연금 삭감 또는 분할상환 요구를 수용해야 할 상황이나 그랬다간 특혜 시비가 일 것이 뻔해 속앓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동기식 컨소니엄측의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업계의 관측이다.

    민영화 시한에 쫓기고 있는 파워콤도 내심 포철의 통신업계 진출을 고대하는 분위기다. SK가 무선통신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한데다, LG 쪽으로도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믿을 만한 매수 예상 세력은 포철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한 임원은 지금 파워콤의 상태를 ‘신랑에게 사랑 받기를 고대하며 꽃단장하고 앉은 신부’에 비유했다. “이런 난세에는 이름을 높이려 나댈 것이 아니라 내실을 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두루넷은 어떨까. 한때 나스닥에서 84달러를 호가하던 주가는 3~5달러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 90%가 넘는 대폭락이다. 최근 대주주가 삼보컴퓨터에서 일본의 소프트방크로 바뀌고 korea.com의 분사를 결정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사정은 쉽게 나아지지 않을 전망이다.

    업계의 한 인사는 “지난해 두루넷 측에서 매수 의사를 타진해왔다. 다른 몇 개 업체에도 같은 제안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루넷 측에서는 이를 전면 부인했다.

    새 주인을 찾고 있는 것은 두루넷만이 아니다. 초고속통신망 서비스회사인 드림라인, 시외·국제전화와 초고속망사업을 병행하는 온세통신도 국내외 여러 업체를 상대로 자금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만큼 적자폭이 큰 데다, ‘큰 집’으로 통합되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는 절박한 현실인식 때문이다.

    이제 큰 그림을 그려보자. 포철이 통신시장에 뛰어들 경우와 그러지 않을 경우, 한국 통신업계 구조는 어떻게 재편될까.

    포철이 뒤늦게나마 동기식 컨소시엄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사업자 선정 후 하나로통신 외국자본 LG텔레콤 등의 지분을 인수해 사실상 동기식 컨소시엄의 주도세력으로 떠오를 경우, 통신업계는 신윤식 사장의 제안대로 3대 종합통신그룹체제로 가게 된다.

    한국통신그룹에는 지금처럼 한국통신-IMT, 한통프리텔, 한솔엠닷컴 등이 속해, 3세대 이동통신과 시내·시외·국제전화, 초고속망 사업 등을 펼치게 될 것이다.

    SK통신그룹 역시 SK-IMT, SK텔레콤, 신세기통신이라는 현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최근 출범한 SK웨이콤이 초고속망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지만 자체 망이 아닌 파워콤망을 빌려 쓸 계획이어서 구색맞추기에 그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새로 탄생할 포철 중심 그룹은 어떤 모양새일까. 하나로통신, LG텔레콤, 파워콤을 인수하고 점진적으로는 두루넷, 드림라인, 온세통신, 데이콤까지 아우르는 거대 업체가 될 공산이 크다.

    포철이 참여하지 않을 경우 업계 구도는 한국통신과 SK가 시장을 양분하는 형태로 고착될 것이다. 이때도 포철이 민영화된 한국통신의 최대주주로 참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LG텔레콤은 한국통신에 흡수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 파워콤은 SK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일부에선 LG가 한국통신의 새 주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2대 구도로 간다면 하나로통신, 데이콤, 온세통신, 드림라인, 두루넷 등 각 사업부문에서 한국통신과 경쟁 관계에 있던 업체들의 입지가 대단히 좁아지리라는 것이 업계의 진단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도가 나거나 파산 절차를 밟는 기업도 생길 것이다.

    2강이냐 3강이냐. 시나리오에 대한 업계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시장의 선택’에 따라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 한다는 2강 지지론과, 통신산업의 균형 발전과 업계 생존을 위해서는 3강 구도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은 포철의 ‘통신공룡화’에 가장 큰 위기감을 느낄 법한 SK가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 SK 관계자는 “포철의 자금력을 고려할 때 장기적으로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특히 무선통신과 파워콤을 함께 가져갈 경우 파급력은 몇 배가 된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으리란 것이 우리의 판단”이라고 밝혔다. 더 중요한 것은 포철이 진입함으로써 시장의 불확실성이 줄어든다는 것. 2강 체제는 지나치게 예민한 구도라 거대 외국통신사가 진입을 시도하거나 재벌그룹에서 관심을 가질 경우 예상 밖의 타격을 입을 수 있다.

    SK로서는 포철이 파워콤의 지배주주가 되는 것은 우려할 일. 그러나 전국망 사업자가 한국통신-포철로 2원화하면, SK는 오히려 양사간 가격 경쟁으로 혜택을 볼 수 있으리라는 점도 고려됐다.

    소비자의 선택 폭도 넓어진다. 2강 구도로 굳어질 경우 국민은 시내·시외·국제전화는 물론 초고속망까지도,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될 한국통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무선전화 선택 폭도 두 회사 중 하나로 좁혀진다. 애써 구축한 업계 경쟁체제도 무너져버릴 것이다.

    “통신 구조조정에 정치 논리 개입”

    3강 체제 반대론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인위적 구조조정이 도리어 업계를 병들게 하고 부실 규모를 키우는 데 일조하리라는 점이다.

    두루넷의 모 인사는 “정통부는 지금 최악의 수를 두고 있다”고 거세게 비난했다.

    “하나로통신이 지금처럼 ‘퇴출’ 위기에 몰린 건 그만큼 경영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시장 규모는 고려하지 않고 우선 투자부터 하고 보는 식의 주먹구구식 경영이 화를 불렀다. 그런데 그런 회사를 살리려고 정부 부처가 무리수를 두다니 너무 한 것 아닌가.”

    파워콤이나 포철에서도 비슷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로통신이 문 닫으면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으니까 정부가 나서서 망할 회사를 망하지 않게 억지로 밀어붙이는 꼴”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의 뒤에는 PCS 사업자 선정 후 정통부의 행태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업계와 학계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국내 경쟁 유도도 국제 경쟁력을 높인다는 미명하에 사업권을 남발, 업계의 총체적 부실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정부가 출연금을 받는 기간통신사업자만도 37개사에 이른다. 그중 극소수 업체를 제외한 대다수 통신기업이 이미 부도가 났거나 도산 위기에 몰려 있다.

    장비업체나 설비업체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 넓어진 시장만 보고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과당경쟁에 치여 문을 닫은 경우도 적지 않다. 두루넷, 드림라인, 지앤지네트워크 등 제법 이름 있는 업체들조차 대금 납입을 제때 하지 못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공사 후 3개월이 지나서야 6개월 내지 10개월짜리 어음을 발급하는 지경이니 군소 설비업체들로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을 법도 하다.

    SK 관계자는 “경쟁의 열매가 소비자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SK텔레콤의 경우 타사에 비해 이윤 폭이 커 통신요금을 낮추고 싶어도 ‘공정경쟁’을 해야 한다는 정통부의 논리에 밀려 번번이 뜻을 접어야 했다”는 것.

    “IMT2000 사업만 해도 ‘1동2비’니 하는 식의 표준 규제 규정을 두지만 않았던들 업계 전체가 지금처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외국계 A증권사 통신전문 임원은 “지금 정통부가 추진중인 인위적 구조조정에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는 듯해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보통신 진흥을 정권의 대표적 경제 치적으로 곧추세우려는 의도 때문에, 시장의 요구는 무시한 채 무조건 겉모양을 유지하는 쪽으로 정책을 몰아가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대표적 우량 기업인 포철마저 부실의 멍에를 쓰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외국인 투자전문가들도 “왜 한국의 우량기업이나 그룹들은 주력 업종을 놔두고 통신사업에 뛰어들지 못해 안달이냐”는 의문을 종종 제기한다고 한다.

    “부실 업종에 새로 뛰어드는 업체가 많아지고 그로 인해 ‘판돈’이 커지면 부실 규모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부실을 감추기 위해 시너지 효과 없는 타 업종 대기업을 끌어들이는 것은 난센스다. 그러다 정말 손도 못 대는 상황까지 가면 그게 바로 금융, 건설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고 무엇이냐. 시장의 논리에 따라 퇴출될 것은 퇴출되고 커질 기업은 커지는 것이 순리이고 정도다.”

    포철의 통신산업 진출을 달가워하지 않는 세력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먼저 시장을 봐야

    정통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업계에서는 정통부의 위상과 역할이 재고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타 부처와의 업무 중복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당면 과제. 자칫 ‘행정력 낭비’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지난해 초에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통부 ‘힘’의 원천 중 하나인 통신사업자 약관 심사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맡겠다고 나선 것(통신업체 약관은 마케팅과 직결돼 있어 약관이 통과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영업에 큰 영향을 받는다). 실제로 각종 약관 심사는 공정위 몫이다. 공정위가 각 무선통신업체에 자료 제출을 요구하자 정통부는 “절대 제출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모 업체 부장은 “사실 업체들은 약관 심사 업무가 공정위로 넘어가길 바랐다. 심사가 까다롭긴 하지만 정통부처럼 ‘얕은 수’를 부리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정통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수많은 입장과 주장, 문제가 얽히고 설켜 있음에도 통신업계 구조조정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직원이고 주주인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피해와 최대한의 혜택을 줄 수 있는 쪽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지금이야말로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는 우리 통신업계에 엄정하고도 냉정한 칼날을 들이댈 때다. 그러나 그 칼자루를 정부 손에 쥐어 주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와 이견이 적지 않다.

    한누리투자증권 조사자문역 전준현 박사는 “해외 유명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 통신업계의 모양새는 경쟁 논리가 생존 논리를 억누르는 꼴이다.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통신 민영화부터 구조 개편까지 산적한 문제에 대한 논리적 해답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 결론을 토대로 다양한 형태의 기업인수합병이 가능할 것이다. 통신 분야 M&A는 세계 보편적인 추세인만큼 꺼릴 이유가 조금도 없다. 개인적으로 정통부는 기업간 인수합병의 다리를 놓아주고 우리 경제 규모에 맞는 투자가 이뤄지도록 유도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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