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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8|전남 진도 양천 허씨 운림산방

5대째 화가 배출한 한국최고의 예맥(藝脈)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5대째 화가 배출한 한국최고의 예맥(藝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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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보니 진도 남자들은 대체로 노래나 그림을 잘 그리는 한량이 많고, 여자들은 한량 대신에 생계를 책임지느라 생활력이 특히 강하다는 정평이 있다. 진도 여자 치고 외지에 나가서 못 사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허씨 집안이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1대 화가인 소치의 특출한 능력과 명성 때문이다. 소치의 일생을 간단히 살펴보자.

소치 허련은 순조 8년(1808) 진도 향반(鄕班)이던 허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향반이니만큼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서화에 취미가 있어서 틈이 나는 대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어느 집에 좋은 화첩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서 베껴 그리기도 하였다. 어느 날 해남 연동의 녹우당(綠雨堂)에 고화가 많이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소치는 급류가 휘돌아치는 울돌목을 건너 녹우당을 찾아갔다.

녹우당은 어떤 곳인가? ‘어부사시사’를 쓴 고산 윤선도의 집이자, ‘자화상’을 남긴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1668∼1715)의 장원이고,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젖줄이면서 실제 외가이고, ‘동국진체’라는 필법을 창시한 옥동 이서(玉洞 李:1662∼1723)를 비롯하여 수많은 학자와 시인 묵객이 찾아와 놀던 곳 아니던가.



그런가 하면 수천 권의 진귀한 장서와 함께 화첩을 소장한 호남의 고급 살롱이자 사신사(四神砂)가 완비된 대장원 아니던가. 이 집의 사랑채에 걸려 있는 ‘예업(藝業)’이라는 두 글자의 편액이 말해주듯이 녹우당은 호남 남인의 학문과 예술을 낳은 요람이자 동시에 집산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치는 연동 윤진사댁(녹우당)에 출입하면서 공재 윤두서, 그리고 공재의 아들인 연옹 윤덕희(蓮翁 尹德熙:1685∼1766), 손자인 청고 윤용(靑皐 尹溶:1708∼1740)으로 이어지는 윤씨 집안 3대 화가의 필적과 그림들을 눈으로 접할 수 있었다. 녹우당에 가전(家傳)되는 화풍을 직접 감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소치는 이 집에 있던 중국의 유명한 화보집인 ‘고씨화보’를 보고 크게 감흥을 받아 이를 연마하기도 하였다. 이 화보는 명나라 신종(神宗)대에 활약한 화가 고병(顧炳)이 제작한 것으로 남종화 화보집이다. 그 서문을 유명한 중국의 문인 주지번(朱之蕃)이 썼는데, 주지번이 1606년에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간 적이 있으므로 대략 그 무렵에 이 화보집이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이 시기는 중국의 남종화라는 화풍이 조선에 처음 소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소치는 공재 이후로 녹우당에 가전되는 윤씨들의 화풍과 ‘고씨화보’의 남종화풍을 접하면서 그림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이때 소치의 나이가 대략 20대 중반이었다. 그러니까 소치 그림의 연원은 녹우당에서 비롯된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의선사와 추사를 스승으로

소치는 녹우당을 출입하면서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에 대한 소문을 접한다. 초의선사가 주석하던 대둔사(大屯寺)는 녹우당에서 걸어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사향의 향기는 가만히 있어도 10리를 간다고 하듯이, 향기나는 사람끼리는 때가 되면 만날 수밖에 없는 법. 마침내 소치의 나이 27세에 이르러 초의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초의선사는 승려였으나 그 학식과 인품으로 인해 사대부들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일찍이 정다산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고,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위당 신관호 등 당대의 거물들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릴 만큼 차에도 조예가 깊어서 ‘다삼매(茶三昧)’의 경지에 든 인물로 전해진다.

인연은 인연을 낳는 법. 초의를 통해서 소치는 추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번은 초의선사가 추사를 만나러 서울에 갔을 때 소치가 모사한 윤공재 화첩과 시구를 보여주었더니 추사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얼마 후 초의선사가 해남에 돌아올 때 추사의 답신을 가지고 왔다. 소치더러 서울로 올라오라는 전갈이었다. 이 전갈을 받고 소치가 추사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간 때 소치의 나이 32세였다.

추사는 소치가 그린 윤공재의 화첩을 처음 보고 소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옛 그림을 배운 것은 과연 윤공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신운(神韻)의 경지에 이르는 것에는 좀 모자랐다. 정겸재, 심현재는 모두 이름을 널리 날려서 권첩이 전해지고 있으나 한갓 안목을 어지럽혀서 일체 보아서는 안 될 것이고, 그대(소치)가 화가 삼매의 경지에 들어서기 위해서 만일 천리의 여행을 한다면 비로소 발전이 있을 것이다.”

이 말에서 추사는 소치가 공재, 겸재, 현재에 버금가는 재질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 후기의 이들 삼재(三齋)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여행을 많이 하라고 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소치에게 화가삼매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천리가 넘는 여행을 하여야 한다고 충고한 것이다.

추사가 말한 화가삼매라는 표현에서 다분히 불가적인 뉘앙스가 전달된다. 한국 불가에서는 수행의 단계로, 처음에 독서(경전공부) 10년, 그것이 끝나면 참선 10년, 그 다음에는 여행 10년이라는 과정을 설정하고 있다.

불가에서는 여행을 가리켜 ‘만행(萬行)’이라고 부르는데, 불가수행에서 만행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여행하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가지가지의 인간 삶과 명산대천이 지닌 아름다운 풍광을 접하면서 인간은 완숙의 경지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이 충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후로 소치는 많은 여행을 하게 된다.

소치는 서울 추사 집에서 머물면서 지도를 받는다. 추사의 둘째 형인 김명희, 막내인 김상희를 비롯하여 추사와 안면이 있는 당시의 명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했음은 물론이다.

소치(小痴)라는 호는 이 시기에 추사에게 받은 호다. 원말 4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황공망(黃公望:1269∼1358)이라는 화가가 있는데 그의 호가 대치(大痴)였다. 추사는 평소에 대치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대치에 비할 만한 인물이 되라는 의미에서 소치라는 호를 주었던 것이다.

소치 역시 원말 4대가 중의 한 사람인 운림 예찬(雲林 倪瓚:1301∼1374)을 좋아하여 예찬의 호인 ‘운림’을 따다가 후일 자신의 거처인 ‘운림산방’을 지을 때 그 당호로 사용하였다. 추사는 후일 제자인 소치를 평가하면서 ‘압록강 이동(以東)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찬사한 바 있다.

임금이 후원자가 되다

소치는 서울 추사 집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 더 머무를 수 없었던 이유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소치는 유배중인 스승을 찾아 뵙기 위하여 당시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바닷길인 제주도에 세 번이나 다녀오기도 하였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치의 일생을 보면 그는 참으로 인연복(因緣福)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복 중에 가장 좋은 복이 인연복이라고 하는데, 소치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인연을 만나는 운이 있었다. 호남의 대장원인 녹우당에서 서화와 인연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당대의 명선(名禪) 초의선사와 만남, 추사와 맺은 사제 인연이 그렇다.

즉 당대의 최고수들을 스승으로 만나는 인연복이 있었기 때문에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치의 인연복은 스승 잘 만나는 인연에서 끝나지 않고 좋은 패트런(patron; 후원자)을 만나는 데까지 이어진다. 아무리 실력 있는 예술가라도 좋은 패트런을 만나지 못하면 고생만 하다 가는 것이 인생살이 아닌가. 소치의 패트런 중 하나가 당시 임금이던 헌종(憲宗)이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벼슬하지 않는 서민은 임금이 있는 왕궁에 출입할 수 없었다. 소치는 헌종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고 왕궁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소치는 42세에 헌종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 헌종이 친히 그림책을 소치에게 보여주면서 그림에 대해 묻기도 하고, 소치가 그림 그릴 때 직접 화폭을 잡아주는가 하면, 제주도에 추사를 만나러 세 번 갔다올 때 파도가 어떠했느냐, 초의는 어떤 인물이냐 등등의 문답이 있었다. 어떤 때는 왕으로부터 과객비로 300금을 하사받기도 하였으며, 어느 날 입궁했을 때는 ‘필홍(筆紅)’ ‘어장(御章)’ ‘시법입문(詩法入門)’과 같은 서적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오동나무 상자에 헌종이 직접 시법입문이라는 글씨를 쓰고, 그 상자 안에 전체 4권이 담긴 ‘시법입문’은 현재 허씨문중에서 가보로 전해지고 있다.

헌종 이외에도 소치의 패트런은 많았다. 당대의 고관, 명사가 대부분이었음은 물론이다.

소치는 전남 해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길, 그러니까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서울 일대를 비롯한 호남대로를 통하여 많은 여행을 하였다. 이 길을 따라 여행하며 패트런들을 만나서 대접을 받고, 시를 주고받고,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옛날에 황대치가 있었다면 지금은 허소치가 있다(古有大痴 今有小痴)’는 찬사를 받으면서 말이다.

보통 사람은 여행하기도 어렵고, 여행을 하더라도 고생을 감수해야 했던 조선시대에 이처럼 환대를 받으며 화려하게 여행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한 환대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예술가로서 소치의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고, 역으로 이러한 지방 명사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소치의 작품이 널리 유통되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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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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