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르네상스 발흥의 열쇠 동과 서의 징검다리

  • 정수일 박사

    입력2005-05-25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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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손에는 꾸란, 다른 손에는 검’으로 상징되는 이슬람 세계는 우리와 그리 멀지 않다. 고대사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원유 등 경제부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미 우리나라에 이슬람 국가의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아직 얕다. 본지는 이번호부터 ‘이슬람’문명에 대해 흥미있는 탐험을 시작한다. <편집자주>
    이슬람, 아직도 우리에게는 알듯말듯하고 혼동스러운 상대다. ‘한 손에는 꾸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것이 마치 징표인 양 회자인구(膾炙人口)하고 전쟁과 테러의 대명사로 지목되지만 성직자 없이도 사원이 제 구실을 다하고 오늘날은 타의 추월을 불허하는 교세의 부흥을 맞고 있는 이슬람. 불상을 파괴하는 탈레반 정권의 반달리즘(Vandalism, 문화예술 파괴행위) 같은 끔찍한 일이 가끔 일어나며 여성에게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줘야 하는지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지만 이자 없이도 은행이 제대로 굴러가고 마천루(摩天樓) 같은 아스라한 건물이 곳곳에 숲을 이루는 이슬람세계. 그토록 뜯기고 빼앗기고 곡해되었지만 140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꿋꿋이 명맥을 이어왔을 뿐만 아니라 이 시점에서 남들로 하여금 커져가는 위세에 기우(杞憂)마저 느끼게 하는 이슬람문명. 그야말로 이슬람, 이슬람세계, 이슬람문명은 헛갈리는 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표상의 주역들을 제대로 알고 그들과 잘 사귀어야 하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역사의 이어짐이고 시대의 요청이며 우리의 실리인 것이다.

    아랍 속담에 ‘서로 알아야 친해진다’는 말이 있다. 서로 알아서 친해지는 것은 인간의 상정(常情)에 앞서 본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차피 서로 알아야 가까이 사귈 수 있고, 또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인간에게 삶을 궁극적 목적이라고 하면 사귐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고, 서로에 대한 앎은 그러한 수단을 가능케 하는 전제다.

    따라서 선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앎이다. 이러한 도리는 비단 인간사(人間事)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이 주도하는 사회사(社會事)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상호성은 없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자연을 잘 알아야만 자연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류의 역사는 서로 다른 문명집단(문명권)이 공생공영(共生共榮)해온 역사다. 그런데 이러한 공생공영은 서로에 대한 앎과 사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이슬람은 종교로서의 이슬람교보다는 이슬람교에 바탕을 둔 이슬람문명과 그 권역(圈域)인 이슬람문명권, 즉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이다.



    원래 이슬람이란 말은 이슬람교에 대한 전칭(專稱)이었으나 이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의 문화복합체인 이슬람문명과 그 권역인 이슬람문명권(이슬람세계)이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이 여타 보편종교와 다른 점이다. 불교나 기독교는 나름의 복합문화체로 발전하기는 했으나 범지역적이고 독자적인 문명권을 이루지는 못했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교리나 지역을 달리하여 여러 개의 문명권으로 분립되어 왔다. 따라서 이슬람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슬람교와 그에 바탕을 둔 이슬람문명 내지 이슬람세계를 두루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슬림은 복종자란 뜻

    ‘이슬람’이란 아랍어는 원래 ‘순종’과 ‘평화’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승화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유일신인 ‘알라’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 몸과 마음의 진정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이슬람의 종교적 신조로 굳어졌다.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은 알라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복종자, 즉 ‘무슬림’이라고 한다.

    이슬람교와 같은 보편종교는 대체로 종교의 창시자(불교와 기독교)나 종교의 소속 지명이나 인종명(유대교와 힌두교)을 따서 이름을 짓는다. 그러나 이슬람은 이러한 관례를 벗어나 종교의 고유이념인 순종과 평화의 뜻을 그대로 담은 ‘이슬람’으로 명명한다고 경전 ‘꾸란’은 규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흔히 서양에서 부르는 ‘마호메트(무함마드)교’니 동양에서 쓰는 ‘회교(回敎)’니 하는 이름은 적절치 않으므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문명이 번갈아 출몰했다. 슈펭글러나 토인비 같은 문명론자는 한 문명의 가장 이상적인 존속기간을 1000년으로 잡으면서 이슬람문명을 가장 역동적인 문명으로 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슬람문명은 이미 1400여 년이나 존속되어 나름의 값어치를 과시해 왔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대안문명’으로도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일부 미래론자들은 이슬람문명을 21세기에 있으리라고 보는 이른바 ‘문명충돌’의 주범으로 지레 짐작하고 크게 경계하고 있다.

    이슬람문명은 이슬람을 바탕으로 한 범세계적인 성장문명(成長文明)이다. 이슬람교의 출현과 더불어 형성되기 시작한 이슬람문명은 이슬람교가 범세계적 종교로 확산됨에 따라 세계의 광활한 지역을 망라한 하나의 문명권, 즉 이슬람문명권을 이루어 인류문명의 발전에 괄목할 만한 기여를 했다. 이슬람문명은 여러 민족과 나라들의 다양한 고유문화가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용광로에 녹아 만들어진 다원적인 문명으로서 그 구성요소가 복잡다기하다. 게다가 이 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이슬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와 왜곡이 겹치다 보니 그 실상을 올바르게 알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슬람문명의 권역인 이슬람문명권(이슬람세계)이란 이슬람문명을 공동으로 창조하고 향유하는 범지역적 문명공동체로서 주민의 과반수가 무슬림(이슬람 신봉자)인 나라와 지역이 이에 속한다. 이슬람문명권은 대체로 이슬람의 발상지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원심(圓心)으로 하여 동서로 활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권내 성원들은 지정학적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다. 이슬람문명권은 이슬람이란 특정 종교를 공통분모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슬람 고유의 종교적·정치적·사회적 및 문화적 양상을 짙게 가지고 있으며 그 구성원들이 지리적으로 서로 밀접히 연결됨으로써 집중성을 나타내는 것이 여타 문명권과 다른 특징이다.

    이슬람문명은 7세기 초반 이슬람교의 출현과 함께 형성되었다. 교조 무함마드(570?~632)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성천(聖遷, 622)한 후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이슬람공동체(움마)가 건설되고, 그의 사후 정통 칼리파시대(632~661)에 전개된 대정복으로 인해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그 주변국들이 점차 이슬람화 함으로써 이슬람문명권의 기반을 구축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피정복지에 대한 아랍-무슬림들의 지배권이 확립된 아랍제국시대(우마위야조, 661~750)를 거쳐 아랍인과 비아랍인이 이슬람교와 이슬람문명이라는 공통된 이념에 기초하여 하나의 통일된 이슬람제국(압바스조, 750~1258)을 건설한 시기는 범지역적인 문명공동체로서 이슬람문명권이 형성된 시기다.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략을 받아 압바스조가 붕괴된 후 중앙집권적인 통일 이슬람제국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슬람교의 부단한 전파와 더불어 도처에 이슬람국가들이 자립함으로써 이슬람문명권은 그만큼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슬람문명권은 명실상부한 범세계적인 문명권의 위상을 줄곧 유지하고 있다.

    흔히 이슬람 하면 아랍이나 중동을 연상하는데, 기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이슬람문명권 내에 속한 무슬림의 수는 세계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2억으로, 세계 5대주 6대양 140여 개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중 주민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나라만도 50여 개국(약 8억명)인데, 이 나라들이 바로 이슬람문명권(이슬람세계)을 이루고 있다.

    무슬림 수를 지역별로 보면 서남아시아(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구소련에서 이탈한 중앙아시아 6개국과 중국, 북아프리카(이집트, 수단,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모리타니), 서아시아의 비아랍국(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서아시아의 아랍국(사우디아라비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쿠웨이트,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오만, 카타르, 예멘) 순이다.

    국가별로 보면 1위와 2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각각 이슬람교가 국교가 아닌 인도네시아와 인도이며 그 다음으로 방글라데시와 나이지리아 순이다. 민족별로 보면 인도족, 말레이족, 터키족, 아랍족, 니그로, 한족, 이란족 순이다. 이러한 분포상황에서 보다시피 무슬림의 80%가 아시아에 편재해 있고, 게다가 이슬람의 발원지가 서아시아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슬람의 주역은 분명히 아시아 무슬림들이며 이슬람교는 다름아닌 아시아 종교인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윤리 등 사회생활의 전반, 즉 문명의 제 영역을 총망라한 인간의 생존양식이며 종교와 세속 쌍방을 모두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이다.

    종교라고 하면 대저 세속의 삶보다 내세를 더 강조하고 인간생활의 육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고 있는 데 반해, 이슬람은 내세와 똑같이, 아니, 어떻게 보면 현세의 삶을 더 중시하면서 사회생활의 여러 분야에 대한 고유 이념과 원리, 제도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여타 종교나 종교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슬람만의 독특한 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러한 특징을 지닌 이슬람에, 그것도 흡사 몇 고개 너머의 마을처럼 서먹서먹한 이슬람세계에 파고들어 겉핥기가 아닌 그 참 속내를 알아내야 하는가? 그 필요성은 우선, 문명사에서 이슬람이 점하고 있는 무게와 영향력에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2대 고대문명을 요람으로 하여 태어난 이슬람문명은 아랍의 전통문명과 고대 오리엔트문명, 그리스-로마문명, 페르시아문명 등 여러 외래문명이 융화되어 창출된 새로운 문명으로서 다방면의 문명 영역을 갈무리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여러 문명을 단순하게 계승하고 융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시대적 요청에 맞게 가일층 발전시켜 특유의 중세문화를 꽃피움으로써 고대문명과 근대문명을 순리적으로 이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문명의 가장 큰 세계사적 공헌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공헌 때문에 우리는 이슬람문명을 통해 사라진 고대문명을 추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문명을 비롯해 생존하는 근·현대문명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문명을 잉태하고 출산해 키워낸 요람은 이른바 고대 4대 문명 중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두 문명, 즉 오리엔트문명이다. 그리하여 이슬람문명에는 이 두 문명이 남겨놓은 흔적이 역력하며, 그러한 흔적을 추적함으로써 인류문명의 여명을 밝힌 오리엔트문명의 실체를 알아낼 수 있다.

    예컨대 이슬람교의 근본교리인 유일신관(唯一神觀)은 그 모태인 유대교에서 이어받은 것이나, 유대교의 유일신관은 고대 오리엔트종교관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일찍이 중왕국시대(기원전 2060~1780)부터 제국의 수호신인 아멘(Amen) 같은 유일신이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왕(파라오)은 신의 화신으로 추앙되었다. 기원전 1300년경 이집트에서 생존하다가 탈출한 모세는 이러한 유일신교의 영향을 받아 ‘10계명’을 핵심으로 하는 율법(律法)에 기초하여 신(야훼, 즉 여호와)과의 계약종교인 유대교를 창시했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족과 바빌로니아왕국의 설화인 ‘길가메쉬(Gilgamesh)’의 서사시를 유대인들이 번안(飜案)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고대 오리엔트문명의 자양분을 받아 나타난 유대교의 제반 종교적 요소가 이슬람교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사실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5경,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다윗과 솔로몬, 소돔의 멸망 등이 그대로 나온다. 물론 예수와 성모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 등 ‘신약성서’에 있는 내용도 옮겨놓았다.

    요컨대 후출한 이슬람교와 선행한 유대교 및 기독교 사이에는 상당한 근친성(近親性)이 있으며, 그 궁극적 원류는 고대 오리엔트문명으로 소급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 종교는 모두 같은 종족인 셈족이 만들었으며, 같은 문명의 배경에서 훈육(薰育)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학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장자로, 이슬람교를 그 차자(次子)로 비유한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상은 오리엔트문명과 그 품에서 태어나 자란 유대교나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서 이슬람교가 차지하는 비중의 일단을 말해준다.

    문명사에서 이슬람의 기능과 영향력은 유럽문명의 사활이 걸린 일련의 문제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원래 선사시대의 몽매에 허덕이던 지중해 중심의 유럽은 고대 오리엔트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문명시대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른바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문명이 싹텄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고대 오리엔트문명을 그들의 문명사 첫머리에 억지로 앉혀놓는 것이다.

    한편 이슬람은 출현과 더불어 그리스-로마문명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의 문명으로 융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럽의 말살로부터 보존하고 발전시켜 중세에 이르러서는 유럽에 재수출함으로써 자칫 영영 멸적될 뻔한 유럽의 고전문명을 다행히도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 부흥)시켰던 것이다.

    유럽에서 중세암흑기가 엄습하여 일세를 풍미하던 그리스-로마문명이 한창 내동댕이쳐지던 7~8세기부터 무슬림들은 그리스-로마 문명으로부터 철학, 학문, 기술을 닥치는 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서, 스트라본의 지리서 등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은 빠짐없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외래 문명을 받아들여 자신을 살찌운 이슬람 선진문명은 13세기를 전후하여 빈혈에 허덕이던 유럽에 수혈되기 시작했다. 아랍어 서적들이 라틴어로 역출되고 이슬람 지리학이나 천문학, 의학이나 수학이 유럽 대학에서 교재로 읽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유럽은 바야흐로 잃었던 문명의 전통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그를 발판으로 하여 르네상스의 전기를 맞았다. 급기야는 근세의 선기(先機)를 잡는 데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유럽사의 서술체계에서 이율배반(二律背反)으로 이슬람사회가 이른바 유럽 중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둔갑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중세 유럽문명에 대한 이슬람의 기여와 영향을 방증해주며, 이슬람문명을 떠나서 유럽의 중세 문명, 특히 그 부흥을 말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설파한다.

    이슬람은 동서문명의 교류에도 특출한 기여를 했다. 지정학적으로 이슬람세계의 심장부는 동서양의 중간지대, 완충지대에 자리하고 있어서 동서문명 교류의 가교 구실뿐만 아니라, 문명의 산파역(産婆役)까지 맡았다. 일찍이 이슬람문명의 요람인 서아시아 일원은 페르시아문명을 비롯한 오리엔트문명과 그리스-로마문명이 접합(接合)하는 곳이어서 여기에서 사상 처음으로 동서문명을 한 그릇에 담아낸 헬레니즘문화가 꽃피었다.

    기원전 4세기에 단행된 마케도니아왕 알렉산더의 동정(東征, 기원전 334~323) 결과로 출현한 알렉산더제국은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대륙을 아우른 미증유의 대제국으로서 그 판도 내에는 그리스문명과 고대 오리엔트문명, 페르시아문명, 인도문명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다양한 문명이 망라되었다. 종전에는 여러 왕조간의 격폐로 인해 이러한 문명들의 상호 교류가 차단되어 왔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동정과 더불어 대제국이 출현함으로써 이러한 차단 요인이 일시에 제거되었으며 제국의 광활한 판도 내에서 초유의 동서문명 교류가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동서문명 교류의 첫 모형(模型)이자 융합체(融合體)인 헬레니즘(Hell- enism)이 출현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러한 동서문명의 융합체인 헬레니즘을 순수한 유럽문명으로 착각한 나머지 기독교의 헤브라이즘(Hebraism)과 더불어 정통 유럽문명의 2대 근간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동양문명의 2대 근간인 유교와 불교에 대응시키는데, 이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중세에 와서 이슬람제국은 동방의 중화제국과 함께 세계사의 쌍벽을 이루어 동서문명 교류의 주역을 담당했다. 이슬람제국은 중국을 비롯한 동방의 문물을 적극 수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후진 유럽에 그대로 전파하기도 했다. 인도가 발견한 영(零, zero) 개념을 받아들여서 수학의 ‘혁명’을 일으킨 무슬림들은 영을 포함한 숫자(소위 아라비아숫자)를 유럽인들에게 가르쳐주었으며 중국의 4대 발명품을 비롯한 동방 특산물 대부분이 아랍-무슬림들의 손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다.

    8세기 말경에 중국의 채후지(蔡侯紙)를 받아들인 아랍인들은 ‘바그다드지’니 ‘다마스커스지’니 하는 따위의 질 좋은 종이를 만들어 유럽에 수출함으로써 유럽인들은 12세기 중반부터 문명 발달의 척도라고 하는 종이를 알게 되었다. 중국의 목판인쇄술은 13~14세기 몽골제국 치하의 이슬람 일칸국(현 이란)을 통해 유럽에 알려졌으며, 중국의 화약과 화기(火器) 제조법은 13세기 중엽 몽골군의 서정(西征)을 계기로 아랍세계에 유입되어 ‘마드파아’ 같은 아랍식 화포(火砲)가 제작되었다.

    한편 유럽인들은 13세기 말엽부터 아랍인들로부터 화약과 화기제조법을 전수 받았다. 중국 북송 때에 만들어진 항해용 나침반도 13세기 말경 아랍에 전해진 후 곧바로 유럽에 알려져서 14세기 초에 이탈리아는 중국 나침반을 개량한 한침반(旱鍼盤)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이 중세 아랍-무슬림들은 동방문명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들의 문명을 가일층 풍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럽에 전달하는 문명중개자 노릇도 수행했다.

    근·현대에 와서 이슬람세계의 중심부인 중동은 시종 서구 열강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그것은 ‘중동을 다스리면 세계를 다스린다’라는 역사적 경험이 그들에게는 한낱 불변의 명증(明證)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970년대 오일쇼크가 발생한 후 한때 세간에는 ‘중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이 번지기도 했다. 새 세기를 맞은 오늘 이슬람의 새로운 부흥이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슬람은 인류 보편사의 전개에서 시종일관 중요한 일익을 담당해 왔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는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을 알아야 할 보편타당한 필요성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슬람을 알아야 할 필요성은 민족사의 전개에 꼭 필요하다는 데 있다. 한 민족의 완벽한 역사는 내치(內治)와 외치(外治)의 복합역사다. 내치의 역사란 민족 내부나 민족국가 영내에서 전개된 대내역사를, 외치의 역사란 다른 민족이나 민족국가와의 대외관계 역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외치는 내치의 순응적(順應的) 연장이지만, 한 민족의 국제적 위상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며 내치와 상보상조적 관계이다. 그리하여 외치를 제대로 밝히는 것은 민족사의 전개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속에 있는 이슬람

    흔히 근세 이전의 한국 외치역사를 말할 때면 고작 인접한 중국이나 일본, 기껏해야 몽골과의 관계사 정도나 언급할 뿐, 더 이상 멀리 취급하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서양인에게 한국은 ‘은자(隱者)의 나라’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자신도 타의반 자의반 그러한 ‘운명’을 응분인 양 감내해 왔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사실(史實)은 그렇지 않다. 그 역사적 증좌(證左)가 바로 일찍부터 있어 왔던 이슬람세계와의 접촉이다. 1200여 년간 한반도와 이슬람세계의 끊임없는 교류관계는 민족사의 전개에서 뜻깊은 외치의 역사로서 ‘세계 속의 한국’이 결코 오늘의 캐치프레이즈만이 아니라 어제의 엄연한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러한 역사는 서로의 관계를 기록한 중세의 이슬람문헌과 한반도에 남아 있는 이슬람유물 및 한국문헌 등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외치의 역사로서 이러한 교류과정은 오로지 이슬람문명의 실체나 전파상을 구명할 때만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 지나간 우리 민족사를 빠짐없이 복원하기 위해서는 이슬람문명과의 관계를 포함해 이슬람문명 전반을 알아야 할 소이연(所以然)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슬람을 알아야 할 필요성은 과거사를 복원하는 데서도 제기되지만, 더 긴절(緊切)한 것은 민족사의 당면과제를 푸는 데 있다. 이제 한국은 당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민족 중흥의 일대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인으로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나누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인 동시에 실리(實利)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의 소명에 부응하려면 외치를 강화하여 이슬람을 포함한 세계와의 만남과 교류를 촉진해야 한다. 작금의 실태가 보여주다시피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는 이러한 만남과 교류가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은 우리에게 그저 이질적이고 멀리 있는 소원한 ‘객체’가 아니라,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우리 속에, 우리와 함께 있는 실체로 자리하고 있다. 국내에는 이슬람에 귀의한 4만여 명의 무슬림을 핵심으로 한 종교유대체와 더불어 한국이슬람학회를 비롯한 문명유대체를 아우른 이슬람공동체가 형성되어 한국과 이슬람세계의 만남이나 교류를 추진하는 견인차 구실을 하며 이슬람을 알리는 전도사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공동체는 다원화한 한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잡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세계 50여 개 이슬람나라들과 국교를 맺고 활발한 현지 외교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이러한 나라에는 예외없이 한국 교민들이 현지 무슬림과 이웃하여 살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외국 무슬림이 한국을 찾아와 함께 어울리고 있다. 문자 그대로 공생(共生)이다.

    이와 같이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서는 전대미문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두 문명 사이에는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방면에 걸쳐 오늘의 문명사에 걸맞은 만남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니, 문명사의 오늘을 훨씬 뛰어넘는 기적도 일어나고 있다. 한국인의 힘과 지혜로 저 멀리 리비아 대사막에 생명수가 콸콸 흘러 넘치게 하는 그러한 기적이 말이다.

    세계의 ‘제8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이 대수로공사야말로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서 세워진 불후의 이정표이며 한국의 세계사적 공헌이다. 일찍이 리비아 지도자 카타피는 이러한 기적이 창조된 것은 한국인들이 리비아가 지향하는 ‘녹색혁명’을 충분히 이해하고 협조해준 결과라는 찬사를 보낸 바가 있다. 사실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았던들 이러한 기적은 성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한국이 사활을 걸고 이슬람세계와 만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중동석유의 수입이다. ‘지구는 석유를 축으로 자전한다’고까지 비유되는 석유는 현대사회의 혈액이고 동력이다. ‘사막의 흑진주’라고 일컫는 이 석유는 비록 골고루는 아니지만 알라가 무슬림에게 하사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원유(유정에서 나온 상태의 석유)를 가장 많이 부존(賦存)하는 곳이 바로 이슬람세계의 심장부인 중동인 바, 그 매장량은 세계 총 매장량의 3분의 2나 된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나라가 중동으로부터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그중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한국은 원유 수입량의 76%(1998년)를 중동에 의존하는데, 비중으로 보아 세계 10대 원유 수입국 중 단연 수위다. 이를테면 한국은 중동 석유 수입의 첫째가는 단골손님인 셈이다. 우리에게 중동 하면 석유를 연상하고, 석유는 곧 중동이라는 등식개념이 생겨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동 석유가 한번 재채기만 해도 큰 쇼크가 돌발해 우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세계경제가 온통 몸살을 앓는 작금에 중동 석유는 우리에게 절체절명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중동석유가 고갈되는 날(중동산유국의 평균 가채연수는 93년)까지 이러한 운명적인 의존관계는 지속될 것이다. 그 밖에 이슬람세계와의 여러 가지 실리적인 교역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경험이 말해주다시피 특유의 이슬람상법을 숙지하기만 하면 무슬림과의 장사에는 묘수가 생긴다.

    이상의 모든 사실은 서로에 대한 앎이야말로 사귐이나 거래의 선결조건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오늘과 내일에도 계속 있게 될 이슬람과의 성공적인 만남을 위해서는 이슬람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이슬람을 알아야 하는 필요성은 이슬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고 변화하는 이슬람사회에 대한 정견(正見)을 세우기 위해서 더 절실하게 제기된다. 주지하다시피 이슬람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오해와 왜곡, 심지어 능멸을 당하는 종교다. 그렇다 보니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문명 전반에 대한 사견(邪見)도 적지 않다.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무어라고 한마디로 답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외연적(外緣的)인 것이다. 물론 이슬람에도 보수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극복해야 할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유별나게 남들로부터 오해나 능멸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 주된 원인은 피해의식에서 오는 배타성이나 시기 같은 외부로부터의 비이성주의적 발상과 행태에 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발상과 행태의 진원지는 대저 유럽과 유럽인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동양과 동양인 속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백안시(白眼視)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의도적인 외연과 더불어 ‘선의’의 무지(無知)도 한 요인이 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악의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이슬람에 대한 정확한 앎의 필요성을 새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오해는 불신을 낳고, 불신은 갈등을 낳는 법이다.

    이슬람에 대한 낭설 중에 대표적인 일례가 ‘한 손에는 꾸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말이 마치 이슬람교의 징표인 양 오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이슬람교는 ‘폭력의 종교’로 비치고 있으며, 급기야는 이러한 ‘폭력성’이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분쟁의 화근이 된다는 식의 연역논리로 이어진다. 우리의 권위 있는 한 서양사 저서에는 ‘마호메트의 종교(이슬람교의 오칭)전쟁이 성공적으로 수행’된 첫째 이유를 ‘선교사업을 무력으로 강행한 전투적 종교의 성격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역사책에는 ‘한 손에는 꾸란을,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말이 경전 ‘꾸란’ 속의 한 구절처럼 기술되어 있다. 오해도 이만저만한 오해가 아니다.

    ‘폭력의 종교’는 오해

    선의건 악의건 이러한 오해는 이슬람을 제대로 알지 않고는 결코 풀 수가 없다. ‘한 손에 꾸란, 다른 손에 검’이란 말 아닌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대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스콜라철학의 대부격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로 알려지고 있다. 이슬람 본연의 평화주의 이념과 전파사가 제대로 밝혀질 때 이러한 말의 허구는 쉬이 갈파될 것이다.

    원래 이슬람은 그 어의가 말해주듯, 또 경전에 누누이 강조되듯,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로서 애당초 신앙을 ‘검’으로 강요하지 않으며 관용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왔다. 원론적으로 볼 때 종교란 일종의 잠재적 의식형태로서 결단코 강요에 의해 성취될 수 없다. 설혹 일시적 강요에 굴복한다 손치더라도 그것은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요컨대 ‘꾸란’과 검, 종교와 폭력은 본질적으로 불가상용적(不可相容的)으로써 병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흔히 같은 맥락에서 전후 여섯 차례나 전쟁이 발발한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로, ‘전쟁다발지대’로 간주하면서 그 근원을 종교 갈등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한낱 허사에 불과하다. 본래 중동지역도 다른 지역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역사의 순리를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전쟁도 있었지만 평화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던 곳이 갑자기 ‘화약고’로 변모한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냉전기류가 이곳을 강타하면서부터다. 느닷없는 냉전기류는 그나마 평온하던 중동에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간의 대립, 그리고 석유자원의 국제화와 민족화 간의 갈등이라는 수화상극(水火相剋)의 난세(亂世)를 몰고 와 불화와 반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그간 있었던 중동분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주범은 정치이지 결코 종교가 아님을 간파할 수 있다. 8년간의 이란-이라크전쟁을 놓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이 전쟁이 일어난 원인의 하나가 이슬람교 내의 종파적 분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 종교적으로 이란은 이슬람교 2대 종파의 하나인 시아파에 속하기는 하나, 이라크도 인구의 과반수(참전 이라크군의 반수)가 이 교파의 신봉자들이며 그곳에는 시아파의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이슬람나라 사이에는 맞불질할 정도의 종파적 갈등은 있을 수 없다. 기실은 영토분쟁과 지역 패권다툼이란 정치적 요인이 전쟁 발발의 주 원인이었다. 그 밖에도 이슬람원리주의 같은 사회운동으로부터 세세한 일상사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에 대한 오해는 실로 다종다양하다.

    오늘 이슬람사회도 여타의 전통사회와 마찬가지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이질적인 서구식 현대문화가 밀려들어 이슬람사회의 전통과 뒤섞이는 바람에 때로는 혼탁과 충돌이 일어나 이슬람사회 곳곳에서 일종의 아노미(anomie, 사회도덕적 무질서)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뜩이나 오해를 받는 이슬람에 더 많은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 전통과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이중적인 이해가 요망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올바른 관점과 견해를 견지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의 합일된 생활양식이고, ‘인간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조화스러운 전체’이며 종교와 세속 쌍방을 모두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기독교사회와는 달리 이슬람사회는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성법(聖法, 샤리아)이 통치하는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사회다. 그리하여 이슬람에는 사회의 제반 영역에 대한 고유의 사상과 이념, 제도가 있다. 따라서 이슬람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러한 모든 측면을 상호 관련시켜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총체론적(總體論的) 관점이 우선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을 취하지 않고 개별적인 측면만을 고립적으로 해석하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편향에 빠져 결국은 이슬람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총체론적 관점과 함께 지녀야 할 것은 문화상대론적 관점이다. 어떤 특정한 사회의 제도나 관습 및 문화(문명)를 그 사회의 특수한 환경과 상황, 그리고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평가하는 관점을 문화상대론 또는 문화상대주의라고 한다. 이질적인 이슬람문명은 이슬람사회가 처한 특수한 환경과 역사적 배경 속에서만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슬람문명은 이슬람사회가 처해 있는 특수한 환경에 실용적으로 적응한 역사적 과정에서 제반 문명요소들이 축적된 결과물로서 그 나름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숱한 오해와 능멸을 당해 온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 견지하는 문화상대론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문화만 우수한 것으로 믿고 자기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관점에서 타문화를 부정하거나 비하하는 이른바 문화국수주의(文化國粹主義), 또는 자문화중심주의(自文化中心主義)를 철저히 지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의 서구문화중심주의가 이슬람에 대한 해악의 오해와 왜곡을 불러왔다는 역사의 경험을 감안할 때, 문화상대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이슬람을 한층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과 더불어 비교론적 연구방법을 도입해야 한다. 이슬람문명을 포함해 모든 문명에는 서로의 공분모(公分母)인 보편성과 서로의 상이성(相異性)을 확인하는 특수성이 있다. 그런데 왕왕 이슬람에 대해서는 공유(共有)의 보편성보다 이질(異質)의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슬람이 무모한 배타(排他)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엄정한 시각에서 타문명, 특히 친연관계에 있는 유대교나 기독교문명과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나간다면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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