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중국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60명

  • 이종환 <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 ljhzip@donga.com

    입력2005-03-30 15:4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7월1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건 80주년 기념식에서 향후 중국 공산당의 대변신을 예고하는 중요 담화를 발표했다. 관영 CCTV가 생방송하는 가운데 장주석은 이날 크게 두 가지 내용을 강조했다.

    우선 ‘3개 대표’ 이론에 따라 당의 변신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게 그 하나였다. 3개 대표란 중국 공산당이 ▲중국의 선진적인 사회생산력 발전요구를 적극 대표하며 ▲중국 선진문화의 발전방향을 대표하고 ▲중국의 광범한 인민대중의 근본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이론은 지난해 2월 장주석이 광둥성을 시찰하면서 처음 밝힌 이래 관영언론을 통해 계속 선전되다 이날 장주석의 ‘7·1 강화(講話)’를 계기로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지도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중국 지도부는 그 후 8월 초 보하이(渤海)만의 하계 휴양지에서 열린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에서 이 이론을 당 강령에 명기하는 문제를 집중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이와 함께 3개 대표 이론을 교과서에 게재해 학교에서 가르치게 하는 한편, 당 조직을 동원해 전국적인 학습열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3개 대표 이론은 한마디로 말해 중국 공산당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게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 20여 년간의 개혁·개방 결과 산업구조는 물론 사회시스템도 완전히 바뀌었다. 13억 인구의 3분의 2가 종사하는 농업은 중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 이하로 떨어졌다.

    전공산당원의 경제관료화



    대신 ‘돈벌이의 바다로 나서자’는 샤하이(下海) 붐이 몰아치면서 노동자, 농민에 이어 광범한 민간기업인 및 자영업자군(群)이 중국 사회를 이끄는 새로운 주역의 하나로 떠올랐다. 전통적인 계획경제는 무한경쟁의 시장경제로 탈바꿈했으며, 이에 따라 ‘산티에(三鐵)’로 불린 철밥통, 철의자, 철봉급은 이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공산당 창건 80주년 기념식에서 장주석은 또 하나의 중요한 발언을 했다. “민간기업인도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게 당의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 동안 공산당은 기업인의 입당을 허용하지 않았다. 기업인을 자본가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기업인은 지주와 더불어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인들을 노동자·농민의 당을 자처해온 중국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장주석의 7·1강화 후 불과 한 달 사이에 중국 전역에서 이미 수만명의 기업인들이 당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홍콩 언론들은 전했다.

    중국 공산당이 민간기업인을 당원으로 포용키로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기업인들이 이미 중국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으로 자리잡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사회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이들을 당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당의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최근 베이징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베이징이 광속으로 변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베이징뿐 아니라 중국 전체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중국경제는 지난 20여 년간의 개혁·개방 기간에 실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1979년 선전 등 홍콩과 마카오 대만에 인접한 4개 도시를 경제특구로 지정해 조심스럽게 시장경제를 실험해온 중국은 1990년에는 상하이를 특별개발구로 지정, 새로운 도약의 견인차로 삼았다.

    이어 지난해부터는 이와 같은 시장경제 실험을 통해 먼저 부유해진 동남부 연안지역을 발판으로 낙후한 중서부 지역을 발전시킨다는 이른바 ‘서부 대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 때문에 국민의 관심도 온통 경제에 집중돼 있으며, 돈벌이와 주식투자가 주된 화제다. 상하이와 선전 증권시장의 주가 변동은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반드시 챙기는 주요 뉴스가 됐으며, 과거엔 경멸해 마지않던 ‘라오반(老板·사장)’은 서민들이 선망하는 용어로 바뀌었다.

    중국 공산당이 3개 대표 이론으로 전 당원의 경제관료화를 추진하는 것도, 민간기업인을 당원으로 가입시켜 당의 경제관리 실무능력을 높이려 하는 것도 이처럼 국가경영에서 경제의 비중이 대폭 커졌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미 1990년대 이전부터 경제기술관료들을 대거 정부 요직에 포진시켜 중국경제를 이끌도록 해왔다. 농촌경제 전문가인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가 1989년 톈안문(天安門) 사태로 물러나고 전기 엔지니어 출신의 장쩌민이 총서기로 발탁됐을 때 중국은 이미 경제기술관료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것이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은 당시 상하이 당서기로 있던 장쩌민을 중앙으로 불러들이면서 바로 당 총서기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이어 주룽지(朱鎔基) 총리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이들 두 사람은 ‘상하이방(幇)’으로 불리면서 덩샤오핑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포스트 덩’시대의 정치·경제를 이끄는 후계자로 성장했다.

    상하이幇의 개혁실험

    1926년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에서 출생한 장쩌민 주석은 상하이 교통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정통 엔지니어다. 졸업 후 상하이 비누공장, 창춘 제1자동차 공장 등에 배치돼 현장 실무를 익힌 그는 1982년 전자공업부 부부장으로 발탁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장주석이 엔지니어 외길만 걸었다면 중국 최고 지도자로서의 오늘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장주석은 1980년부터 전자공업부에 입성하기 전까지 2년간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와 외국투자관리위원회 서기를 맡아 무역제도와 해외자본 유치방식 등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쌓는데,이때의 경험이 1985년 상하이 시장으로 발탁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주룽지 총리는 덩샤오핑이 장주석보다 늦게 안 것을 한탄했다고 얘기했을 정도로 ‘작은 거인’ 덩샤오핑의 눈에 쏙 든 인물이다.

    장주석보다 두 살 아래인 주총리는 1928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났다. 1951년 칭화(淸華)대 전기과를 졸업한 주총리는 1957년 국가계획위원회 기계국 종합과 부과장으로 발탁됐다. 이는 공업부문의 기계·전기수요 계획과 중요 프로젝트 심사를 담당하는 요직이었으나, 그는 곧바로 밀어닥친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쓸려 오랜 기간 큰 고난을 겪는다. 지금도 직설적인 언행으로 종종 화제를 일으키는 주총리는 1958년에 거침없이 내뱉은 말들이 문제가 돼 부르주아 우파분자로 낙인찍히는 비운을 겪고 이어 공산당에서도 제명됐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시기가 주총리에겐 오늘날 ‘경제총리’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경제지식 충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기술관료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 마훙(馬洪) 등의 주선으로 국가계획위원회 소속 고참 간부들에게 수학 물리 화학 영어 등을 가르치는 야간 간부교육학교 교원이 된 것이다.

    반우파 투쟁 이후 중국에서는 지식인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낮아졌기 때문에 야간학교 교원이 되는 것도 일종의 벌(罰)이었다. 주총리는 이 시기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데이비드 리카도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등 많은 근대 경제학 원전을 읽었다고 회고했다.

    문화대혁명이 중국대륙을 휩쓸었을 때 후베이(湖北)성 국가계획위원회 소속 57간부학교로 추방돼 돼지를 사육하고 인분을 퍼내는 등 중노동을 했던 주총리는 덩샤오핑의 집권과 더불어 1979년 국가경제위원회 연료동력국 과장으로 복귀했다. 중국경제 최고책임자의 자리를 향한 질주가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1987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상하이 시장이 된 주총리는 상하이를 중국 개혁의 실험대로 삼았다. 광둥성에 뒤처져 침몰해가던 상하이가 중국 발전의 중심지가 된 것은 주총리 시절의 개혁이 그 토대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는 주총리가 담당한다.”

    이는 장주석이 수차례의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주총리가 중국경제를 지휘하는 최고책임자가 되기까지엔 덩샤오핑은 물론 장주석의 절대적인 신임도 큰 역할을 했다.

    1991년 덩샤오핑의 추천으로 부총리에 오른 주총리는 기업간의 연쇄 부실채권을 의미하는 ‘삼각채’ 문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냈으며, 1992년에는 인민은행장을 겸하면서 중국 거시경제를 통괄하는 경제개혁의 기수로 부각됐다.

    1998년 리펑(李鵬)에 이어 국무원 총리가 된 주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5년의 재임기간 중 세 분야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유기업 개혁, 금융 개혁, 정부기구 개혁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주총리는 재정·경제전문가와 기술관료들을 대거 신임 내각에 포진시켜 현대 중국사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압축 개혁’을 시작했다.

    국무원 내에서 주총리의 측근이자 참모로 꼽히는 인물로는 상하이에서 함께 일했던 우방궈(吳邦國) 부총리, 지질구조 분야의 엔지니어로 중앙판공실 주임을 역임한 원자바오(溫家寶·59) 부총리 등이 있다. 원자바오 부총리는 주총리에 이어 후임 총리 물망에 오르는 인물이다.

    주총리의 국무원 내 측근으로는 다이샹룽(戴相龍·57) 인민은행장을 빼놓을 수 없다. 주총리와 다이행장은 마치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다닌다. 장쑤성 출신인 다이행장은 중앙재정금융대학을 졸업한 후 평생을 금융기관에서 일한 재정·경제통. 1995년 주총리에 이어 인민은행 행장에 올랐고, “인민폐 평가절하는 없다”는 주총리의 취임공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심복이자 ‘금융을 통한 거시통제’라는 주총리 경제개혁 이론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다.

    역시 장쑤성 출신인 샹화이청(項懷誠·62) 재정부장은 산둥(山東)대를 졸업한 후 1962년 재정부에 들어와 부장까지 오른 정통 재정부 관료 출신이다. 샹부장과 동갑내기인 대외무역경제합작부 스광성(石廣生·62) 부장은 베이징대외무역대학 졸업 후 대외무역경제합작부에서 평생을 보낸 국제교역문제 베테랑이다. 스부장은 올해 중국의 WTO 가입협상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능력을 인정받는 한편, 한·중 간 마늘분쟁과 중·일 간 농산물분쟁 등에서도 ‘슬기롭게 대응’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도 중국 정보통신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우지촨(吳基傳) 신식산업부장과 올 들어 시작한 제10차 5개년계획을 수립해 추진하는 쩡페이옌(曾培炎) 국가발전계획위원회 주임, 지방할거식 ‘제후경제’ 타파에 총력을 기울이는 리룽룽(李榮融) 국가경제무역위원회 주임도 주총리가 이끄는 경제 실무내각의 야전군 사단장이다.

    주총리는 측근을 두지 않기로 소문나 있다. 이 때문에 국무원 안팎에서 그의 측근으로 불리는 인물은 극소수다. 그중에서도 인민은행 부행장을 역임한 후 현재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주석으로 있는 저우샤오촨(周小川), 국가 원로 야오이린(姚依林)의 사위로 광둥성 부성장을 지낸 후 현재 국무원 경제체제개혁판공실 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왕치산(王岐山), 저명 경제학자 우징롄(吳敬璉)의 애제자로 경제체제개혁판공실 부주임으로 있는 리젠거(李劍閣), 원로 천윈(陳雲)의 아들로 국가개발은행장을 맡고 있는 천위안(陳元) 등이 주총리의 신임을 받는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배후 조종자들

    중국의 경제정책은 경제관료 몇 명의 생각과 주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주총리를 비롯한 내각 각료들이 각종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기까지는 정부 기관들의 스태프 조직으로 있는 국책연구기관들의 광범위한 연구와 조언이 뒷받침된다. 중국 국무원 산하에는 중국사회과학원, 거시경제연구원,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등 다양한 연구기관이 있어 때로는 역할을 분담하고 때로는 서로 경쟁하면서 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중에서도 국무원 국가발전계획위원회 산하기관인 거시경제연구원은 경제정책 실무 분야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연구소로 통한다. 현재 원장은 국가계획위원회 소속으로 오랫동안 경제분석과 예측활동에 종사해온 바이허진(白和金·61).

    거시경제연구원 산하에는 경제연구소, 산업발전연구소, 투자연구소, 시장 및 가격연구소, 종합운수연구소 등 9개 연구소가 있다. 신장(新疆) 타림분지의 천연가스를 가스관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는 서부 대개발의 서기동수(西氣東輸) 프로젝트나 양쯔강의 물을 거대 수로를 통해 화북평원으로 끌어올리는 남수북조(南水北調) 프로젝트 등이 이 연구원의 작품들이다. 무려 1000명이 넘는 연구인력을 확보하고 있는 거시경제연구원에서 농업 전문가인 류푸탄(劉福垣)과 교통운수 전문가인 숭푸잉(宋孚瀛) 등 세 명의 부원장이 바이원장을 돕고 있다.

    사회과학원은 중국 최고 권위의 연구기관이자 최대 연구기관이다. 부총리급인 리티에잉(李鐵映)이 원장을 맡고 있다. 사회과학원은 산하에 경제연구소와 수량경제연구소, 공업경제연구소, 재정무역경제연구소 등 무려 34개 연구소를 갖고 있다. 가령 공업경제연구소는 고급 연구인력 45명을 포함, 연구소 인력이 모두 600명에 이른다. 기업개혁이론으로 유명한 천자구이(陳佳貴) 부원장을 비롯해 금융이론에 강한 왕궈강(王國岡), 리양(李揚) 등이 사회과학원 소속 경제이론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국무원 발전연구중심은 국무원 직속의 별도 연구기관이다. 주임은 베이징대 왕멍구이(王夢奎) 교수. 중국의 대표적 개혁개방 이론가인 쉬에무차오(薛暮橋)와 사회과학원 부원장을 지낸 마훙(馬洪) 교수가 명예주임으로 있다. 산하에는 거시경제연구부 등 6개 연구부가 설치돼 있다.

    1993년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주임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마훙(81) 교수는 주룽지 총리의 오늘을 만드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는 대학을 막 졸업한 젊은 주룽지를 자신이 고위관리로 있던 동북지역으로 데려갔으며, 그 후 국가계획위원회가 설립되자 주총리를 그곳으로 보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칠 때 주총리가 다치지 않도록 음으로 양으로 도운 사람도 그였다. 그래서 주총리는 “마훙은 영원한 나의 선생님”이라며 자주 그를 찾아 문안도 하고, 주요 정책에 대해서 상의하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그 동안 관료만능의 시대였다. 학자나 지식인은 영향력이 극히 제한돼 있었으며, 사회적 지위도 낮았다. 그러나 시장경제시대가 열리면서 상황이 변했다. 학계의 영향력이 빠르게 커지고 있는 것이다.

    힘 얻는 이론가들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정치협상회의(정협)가 개막됐을 때 학계의 몇몇 인물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양회(兩會)’로 불리는 두 회의에 유명 학자 두 명이 대표로 참석했기 때문이다. 칭화대의 우징롄과 베이징대의 리이닝(以寧) 교수였다. 이들이 각기 전인대와 정협 대표로 양회에 참석했을 때 중국 기자들은 “증시 논쟁이 정계로 비화했다”며 이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와 같은 소동의 발단은 올 초 두 사람이 벌인 증시 과열 여부 논쟁이었다. 중국의 한 인터넷신문이 지난해 중국 최고의 경제학자로 뽑은 우교수가 지난 1월 CCTV에 나와 한 말이 논쟁의 발단이었다. 그는 “중국 주식시장은 권력층을 배후에 낀 ‘큰손’과 기관투자가들이 짜고 치는 도박판 같다”고 비난했다. 또 “이들이 자신의 주머니를 부풀리기 위해 가격을 조작하는 바람에 소액 투자자들은 빈털터리가 되기 십상”이라며 “중국의 개혁·개방이 일부 특권층만 배불리는 ‘특권층 자본주의’로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교수의 발언은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증권관리감독위원회는 즉각 문제의 주식거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으며, 이로 인해 주가가 대폭락하는 등 주식 거래가 크게 위축됐다.

    그러자 베이징대의 저명 경제학자 리이닝 교수가 2월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리교수는 샤오줘지(蕭灼基), 퉁푸나이(董輔乃) 등 다른 경제학자들과 함께 TV에 나와 “우교수의 발언은 과대 포장된 것”이라며 “주식시장엔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같은 베이징대의 샤오교수는 “우리(같은 저명 경제학자) 다섯 명이 한자리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발언의 권위를 높였다.

    이 논쟁은 개혁·개방 후 중국 학계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벌인 최초의 대규모 논쟁으로 꼽힌다. 중국 학계는 그 동안 논쟁을 극히 꺼려왔다. ‘구동존이(求同存異)’, 즉 ‘다른 것은 제쳐두고 같은 것을 찾는다’는 중국의 외교정책이 논단에도 적용된 셈이다.

    그러나 논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수파 이론가와 개혁파 이론가 사이의 논쟁은 그 동안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다. 덩샤오핑이 채택한 개혁·개방노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유명한 인물이 지금은 은퇴한 사회과학원의 류궈광(劉國光) 교수다. 이어 1989년 톈안문 사건 이후 개혁이 주춤했을 때 칭화대의 후안강(胡鞍鋼) 교수 등이 나서서 대대적인 개혁을 촉구했다.

    주총리가 취임해 국유기업과 금융개혁을 추진하고 나섰을 때도 학계에서 이론적인 틀을 제공했다. 국민경제연구소 소장인 판강(樊綱), 베이징대의 린이푸(林毅夫) 교수와 하이원(海聞) 교수, 인민대 금융증권연구소장인 우샤오치우(吳曉求), 칭화대의 웨이제(魏傑) 교수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중국 경제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인사들로 알려져 있다.

    홍콩 출신인 량딩방(梁定邦) 교수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학계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홍콩 증권거래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독학해 나중에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하기도 했던 그는 증권거래소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실무와 스스로 개척한 이론을 바탕으로 홍콩 증권감독위원회 주석에까지 올랐던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현재 주총리의 초청으로 본토로 건너와 주총리의 측근 저우샤오촨이 주임으로 있는 증권관리감독위원회의 특별고문직을 맡고 있다.

    지난 7월31일 중국 최대 맥주회사인 칭다오(靑島)맥주집단유한공사 총재 펑줘이(彭作義)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중국 언론은 즉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그 후 상하이와 홍콩 증시의 칭다오맥주집단 주식은 급락을 거듭했다.

    펑줘이는 1996년 총재 취임 이후 공격적인 경영으로 중국 맥주시장의 ‘천하평정’을 이룩한 인물이다. 칭다오맥주는 지난해 베이징의 산환(三環)과 우싱(五星)맥주, 상하이의 칼스버그를 인수합병했고, 올 들어서는 푸젠(福建)성의 디이자(第一家) 맥주회사를 사들이는 등 최근 2년 사이에 38개 중소형 맥주회사를 통합, 연 생산능력 300만t의 매머드 맥주재벌로 변신했다.

    중국에서는 2년 전부터 치열한 맥주전쟁이 벌어졌다. 중국 언론은 이를 ‘맥주 삼국지’라고 부르는데, 현재 산둥(山東)성의 칭다오맥주와 베이징의 옌징(燕京)맥주, 광둥성의 화룬(華潤)맥주가 벌이는 3파전으로 치닫고 있다. 이를 통해 400여 개에 이르는 중국의 맥주회사가 이들 ‘빅3’와 수십 개의 군소 맥주회사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중에서도 칭다오맥주는 사령탑인 펑줘이 총재의 지휘하에 옌징과 화룬맥주가 합쳐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펑줘이가 사망했으니 투자자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만하다.

    펑줘이와 더불어 칭다오에는 중국인이면 다 아는 기업계의 거물 두 명이 더 있다. 가전분야에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우뚝 올라선 하이얼(海爾)집단의 장루이민(張瑞敏) 수석집행관과 하이얼을 바짝 뒤쫓고 있는 하이신(海信)집단의 총수 저우허우젠(周厚健)이다.

    하이얼집단은 10여 년 전만 해도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빚투성이 기업이었으나 장루이민이 총재로 오면서 급성장을 거듭했다. 지난해 하이얼의 매출액은 406억위안. 2억8000만달러어치를 해외에 수출했으며 브랜드 가치만도 330억위안을 호가하는 중국 최일류 기업이다. 하이얼은 이미 해외에 14개 공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해외 영업소가 3만8000개에 이르는 세계 9위의 가전업체로 성장했다.

    칭다오맥주와 하이얼, 하이신 등 칭다오에서 출발한 세 그룹이 세찬 기세로 급성장하면서 ‘칭다오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유명 경영인을 만들어내는 칭다오의 문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시장경제가 본격화하면서 이들 칭다오 3인을 비롯, 중국 곳곳에서 유명 기업인들이 속속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최대의 컴퓨터 제조회사로 성장한 베이징 렌샹(聯想)그룹의 류촨즈(柳傳志) 총재, 중국 최대의 TV 제조기업인 쓰촨(四川)성 창훙(長虹)그룹의 니룬펑(倪潤峰) 총재, 소프트웨어와 컴퓨터 주변기기로 중국을 평정한 팡정(方正)그룹 설립자 왕쉬안(王選), 중국 제1의 벤처기업인으로 불리는 커리화(科利華)그룹의 숭차오디(宋朝弟) 등은 중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 기업인들이다.

    이 밖에도 커룽(科龍)집단의 왕궈단(王國端), 화웨이(華爲)의 런정페이(任正非), 옌징맥주의 리푸청(李福成), 완샹(萬向)그룹의 루관치우(魯冠球), 쥐런(巨人)집단의 스위주(史玉柱) 등도 하루가 멀다 하고 중국 언론에 등장하는 유명 CEO들이다.

    IT업계 귀재들

    최근의 정보기술(IT)산업 발전은 중국에서도 참신한 IT 기업인을 대거 배출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업체인 추보쥔(求伯君)도 그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한자는 영어나 한글처럼 제한된 자모의 표음문자가 아닌 탓에 워드프로세서 개발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추는 1997년 자신의 별장을 판 돈으로 중국어 도스(DOS)용 워드프로세서 ‘WPS 97’을 개발했다.

    이 소프트웨어가 발매되면서 중국인들은 비로소 한자도 컴퓨터로 타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는 단번에 ‘민족영웅’으로 떠올랐고, 그가 양복을 입는지 중산복을 입는지가 관심거리가 될 만큼 유명인이 됐다.

    지난해 그는 새로운 화제를 낳았다. 윈도용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진산(金山) 츠바(詞覇) 2000’과 번역 소프트웨어 ‘진산 콰이이(快譯) 2000’을 불과 28위안씩에 내놨기 때문이다. 중국어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가격은 보통 500∼1000위안. 그러나 이처럼 파격적인 가격에 출시되자 이들 소프트웨어는 시판된 지 두 달 만에 100만 개가 팔리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중국 최대의 인터넷망 신랑(新浪·sina.com)의 설립자 왕즈둥(王志東)도 중국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기업인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IT산업에 불황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올초 자신이 설립한 신랑에서 물러났지만, 이것이 도리어 신랑의 브랜드가치와 그의 몸값을 올리는 계기가 됐다.

    1984년 종합정보기술업체인 쓰퉁(四通)을 설립, 50여 개의 자회사를 가진 대그룹으로 키운 두안융지(段永基)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밖에 중국 3대 인터넷 서비스망의 하나인 왕이(網易)망의 딩레이(丁磊) 총재, 백혈병을 이겨내고 소프트웨어 산업에 뛰어들어 중국 IT산업사의 화려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우스훙(吳士宏·여) TCL 정보산업공사 총재도 화제의 주인공들.

    장쩌민 주석의 아들인 장멘헝(江綿恒) 중국과학원 부원장도 지난해 IT 기업인 대열에 합류했다. 장부원장은 대만 최대 재벌인 포모사그룹 왕융칭(王永慶) 회장의 아들인 왕원양(王文洋) 훙런(宏仁)그룹 총재와 함께 상하이에 자본금 10억달러의 대규모 반도체회사를 공동 설립했다. 장부원장은 1988년 미국에 유학해 고압 초전도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2년 귀국해 중국 3대 통신회사의 하나인 중국인터넷통신유한공사 이사 등으로 활동해온 반도체 통신분야의 전문가다.

    최근에는 경제에 대한 언론의 비중도 커지고 있다. 중국 내 대표적인 경제지로 떠오른 ‘경제일보’의 쉬신화(徐心華) 사장과 ‘경제참고보’의 왕하이정(王海征) 총편집(주필)은 중국경제의 움직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거론된다.

    끝으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베이징무역관과 대한무역협회 베이징지사, 대외경제연구원 베이징사무실 등 베이징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관과 기업으로부터 중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을 추천받았다. 일부는 중복되고, 일부는 정부요인이나 학계 인사에 치우친 느낌도 있으나 나름대로 중국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음에 소개한다.

    < 중국경제를 움직이는 20인 >

    ▲한국무역협회 베이징지사 추천

    장쩌민(국가주석) 주룽지(국무원 총리) 스광성(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 리룽룽(국가경제무역위원회 주임) 샹화이청(재정부장) 다이샹룽(중국인민은행장) 쩡페이옌(국가발전계획위원회 주임) 왕멍구이(국무원 발전연구중심 주임) 저우샤오촨(중국증권감독관리위원회 주석) 우징롄(국무원 발전연구중심 연구원) 후안강(칭화대 교수) 린이푸(베이징대 교수) 진런칭(국가세무총국장) 첸관린(해관총서장) 장자오중(국방대학 교수) 류촨즈(렌샹집단 설립자) 류융하오(쓰촨 시왕집단 이사장) 후수리(재경잡지사 총편집) 장루이민(하이얼집단 총재) 리카싱(홍콩 창콩그룹 이사장)

    ▲LG전자 중국유한공사 추천

    주룽지(국무원 총리) 쩡페이옌(국가발전계획위원회 주임) 샹화이청(재정부장) 스광성(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 리룽룽(국가경제무역위원회 주임) 성화런(전 경제무역위원회 주임) 다이샹룽(인민은행장) 진런칭(국가세무총국장) 스완펑(국가경제무역위원회 부주임) 류밍캉(중국은행장) 징수핑(전국공상연합회 주석) 천진화(중국기업연합회 회장) 장젠칭(공상은행장) 팡청궈(교통은행장) 쉬신화(경제일보 사장) 왕하이정(경제참고보 총편집) 셰치화(바오산 강철 이사장) 니룬펑(창홍집단 총재) 장루이민(하이얼집단 총재) 류촨즈(렌샹집단 설립자)

    ▲대외경제연구원 베이징사무소 추천

    리룽룽(국가경제무역위원회 주임) 샹화이청(재정부장) 우지촨(신식산업부장) 스광성(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 다이샹룽(인민은행장) 왕멍구이(국무원발전연구중심 주임) 저우샤오촨(증권감독관리위원회 주석) 류중리(국무원 경제체제개혁판공실 주임) 류밍캉(중국은행장) 천윈(국가개발은행장) 리이닝(베이징대 광화관리학원 교수) 우징롄(국무원 발전연구중심 고급연구원) 린이푸(베이징대 중국경제연구중심 주임) 후안강(칭화대 교수) 판강(국민경제연구소장) 바이허진(거시경제연구원장) 류궈광(사회과학원 고급연구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베이징무역관 추천

    주룽지(국무원 총리) 원자바오(부총리) 쩡페이옌(국가발전계획위원회 주임) 리룽룽(국가경제무역위원회 주임) 샹화이청(재정부장) 스광성(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 롱융투(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부장) 우지촨(신식산업부장) 다이샹룽(인민은행장) 우징롄(국무원 발전연구중심 고급연구원) 린이푸(베이징대 교수) 리이닝(베이징대 교수) 후안강(칭화대 교수) 판강(국민경제연구소장) 장루이민(하이얼집단 총재) 류촨즈(렌샹집단 설립자) 니룬펑(창훙집단 총재) 런정페이(화웨이집단 총재) 저우허우젠(하이신 총재) 류융하오(시왕집단 총재)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