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숲향기 숲빛깔 숲소리 찾아 떠나는 여행

전영우 교수의 숲 이야기

  • 전영우 < 국민대 교수 . 임학 >

    입력2005-04-04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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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갖 나무가 제각기 다른 색으로 잎눈을 틔우는 봄 숲의 모습은 자연이 그린 한 폭의 파스텔화다. 아까시나무 꽃의 진한 향기로 시작하는 여름 숲을 눈여겨보면 송진 냄새와 송화향기, 그리고 전나무의 건강한 바늘잎에서 뿜어 나오는 톡 쏘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한편 가을 숲에서는 다래와 머루의 상큼한 맛, 도토리와 산밤의 떫은맛, 더덕과 도라지의 쌉싸름한 맛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겨울 숲은 낙엽 밟는 소리, 솔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 서릿발을 밟으면 들을 수 있는 사각거리는 소리, 계곡의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 소리 등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음악을 만든다. 우리 주변에서 이처럼 다양한 표정을 짓는 것은 숲밖에 없다. ‘숲해설가’ 전영우 교수와 함께 숲 소리, 숲 빛깔, 숲 향기를 찾아 숲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하늘이 높고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합니다. 숲 속을 지나는 물빛과 바람결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습기를 털어낸 선들바람이나 쪽빛 하늘을 담은 물빛은 그래서 가을을 알리는 전령입니다. 이때쯤이면 숲의 빛깔도 변합니다. 사실 숲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든 말든 스스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변화하는 숲의 빛깔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이는 많지 않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우리네 삶에서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500만년에 이르는 인간 진화의 역사를 생각하면, 편리하고 안락한 실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혀 지내는 오늘의 일상은 그저 순간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일 뿐입니다. 우리 가슴속에는 자연을 갈구하는 본능이 숨을 죽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을 숲이 만들어내는 형형색색의 빛깔을 활자로 형상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봄이라는 짧은 한 계절에 만들어낸 후, 좀체 변할 것 같지 않던 강건한 ‘녹색세상’을 어느 틈에 변화시키는 계절의 섭리 앞에, 그리고 그 현란한 변신 앞에 오히려 입을 다물고 조용히 음미하는 것이 자연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자연과 유리된 삶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 자체가 행운일지도 모릅니다.

    봄 숲은 우리 주변에서 시작됩니다만 가을 숲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을 숲의 시작을 우리가 느꼈을 때는 이미 한참 진행된 뒤라 정작 가을 숲이 만들어내는 현란한 색채를 가슴속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습니다.

    가을 숲의 변신은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진 높은 산마루에서 시작됩니다. 산마루에서 시작한 변신은 산허리로 내려오고, 마침내 맨 마지막으로 우리 주변으로까지 달려옵니다. 봄 숲의 생명력이 우리 주변에서 시작되어 맨 마지막에 산마루로 달려가는 것과는 정반대지요.



    그래서 여름 내내 녹색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했던 숲이 하루가 다르게 표정을 바꾸는 것을 도회에 사는 우리는 지나치고 맙니다. 그러나 조금만 신경쓰고 주변을 살펴보면 가을 숲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가을 숲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빛깔에 파묻히는 일은 복잡한 절차와 거창한 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가을 숲’이란 세 음절의 단어를 한번 읊조리고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면 됩니다.

    가을 숲의 모습은 단풍나무·신나무·옻나무·붉나무·매자나무·마가목·산벚나무·화살나무 같은 붉은색 단풍을 연출하는 나무들은 물론이고, 사시나무·생강나무·참피나무·쪽동백나무·떡갈나무·층층나무·자작나무들이 연출하는 노란색이나 황갈색 단풍 덕분에 현란합니다. 좀체 변할 것 같지 않던 녹색의 강직함이 어느새 수그러들고 숲은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첫서리가 내리는 높은 산의 가을은 유난히 짧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수십 가지의 넓은잎나무가 다양한 색을 연출해 그 짧은 기간 동안 별천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숲에서는 적막감이나 엄숙함 대신 역동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넓은잎나무’가 만드는 별천지

    단풍은 하늘을 이고 있는 산정에서 불붙기 시작해 어느 틈에 인간세상까지 내려옵니다. ‘넓은잎나무’들이 연출하는 단풍은 주의 깊게 지켜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습니다. 아직 햇볕이 따가운 늦여름부터 변신을 준비하여 금세 옷을 갈아입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단풍나무가 꾸미는 가을 숲의 변신은 빈틈이 없습니다. 가장 늦게까지 녹색을 지킨 엽맥(葉脈)의 몸부림도 잠시, 누르스름한 이파리가 순식간에 노란색으로 바뀌다 마침내 붉은색으로 변합니다. 단풍나무에 속하는 신나무·복자기·당단풍나무·단풍나무는 가을 숲의 여왕이자 진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할 수 없는 법. 어느 틈에 적갈색으로 변한 이파리는 황갈색이 되어 대미를 장식합니다. 그리곤 겨울을 맞기 위해서 마침내 잎을 떨굽니다. 강렬한 생명을 거두고 겨울 채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이처럼 넓은잎나무들만 변신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을 보는 맑은 눈만 있으면 좀체 변할 것 같지 않은 ‘바늘잎나무’들의 변신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대표적인 바늘잎나무인 소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상들은 소나무를 아름다운 덕목인 변치 않는 지조와 굳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조상들은 소나무를 문학과 예술의 다양한 상징적 소재로 애용해 왔습니다. 바로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의 특성을 아끼고 기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나무도 늘 푸르지 않은 때가 있다면 아마 놀라리라 믿습니다.

    천지자연물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늘 푸른 소나무도 마찬가지. 소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린다면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사실입니다. 소나무들은 보통 2년 정도만 잎을 가지에 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을 숲에 익숙한 사람은 솔가리가 될 갈색 솔잎을 달고 있는 초가을의 소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소나무는 우리가 지금까지 본 ‘늘 푸른 소나무’와 분명 다릅니다. 녹색 솔잎 속에 황갈색 솔잎이 만들어내는 부조화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부조화는 아주 짧은 시간에만 나타납니다. 가을이 깊어 가면 언제 그런 부조화가 있었느냐는 듯 묵을 때를 씻어낸 멋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때의 소나무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검푸른 빛이 도는 소나무나 송홧가루를 피워내기 위해서 연녹색 솔잎을 가진 초여름의 소나무와 다릅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껍질의 줄기와 푸르름을 자랑하는 싱싱한 솔잎으로 단장한 이때의 소나무는 정녕 우리가 아끼는 늘 푸른 소나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때의 소나무를 소나무가 가진 가장 멋진 모습이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강렬한 붉음과 푸름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솔숲이 아름답습니다. 코발트빛 하늘색과 진한 녹색의 바다에 떠 있는 소나무 줄기의 붉은 빛깔은 세련된 도심에선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파격입니다. 붉은색과 녹색의 이런 파격을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짓는 데 이용했습니다.

    목조 건물에 쓰이는 단청의 두 가지 바탕색은 석간주(石間)라는 붉은색과 뇌록(磊綠)이라는 청록색입니다. 단청의 석간주와 뇌록은 바로 이 산하를 덮고 있는 소나무를 상징합니다. 건물의 기둥에 칠하는 석간주는 토종 소나무 적송의 붉은 줄기 색과 같고, 건물 지붕틀의 뇌록은 소나무 잎과 같은 청록색입니다. 색채로만 본다면 건물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한 무리의 소나무 숲과 다르지 않습니다. 붉은색 껍질과 초록색 잎이 가진 소나무의 자연적 보색을 나란히 칠하면 서로 다른 색을 자극하여 최고로 선명한 색깔을 유지하는 잔상효과와 동시성의 효과 때문에 붉은 색은 더욱 붉게 보이고 청록색은 더욱 푸르게 보이는 보색대비 효과를 우리 조상들은 솔숲으로부터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붉게 물든 색동 단풍잎으로 치장한 가을 숲을 찾아 나서는 걸음은 꼭 올라야 할 봉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꼭 건너야 할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며, 꼭 지켜야 할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사람의 흔적을 되도록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곳이 숲입니다. 꽉 찬 머리를 적당히 비울 수 있는 정신적 여유와 오관을 활짝 열고 현란한 숲의 빛깔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정신적 여유만 있다면 언제든지 훌쩍 나설 수 있는 길입니다. 가을 숲이 내뿜는 다양한 빛깔의 경이로움에 한번 파묻혀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숲 소리를 듣기에는 겨울이 제격입니다. 겨울 숲의 소리는 흔들리는 꽃잎이 만든 봄 숲의 소리와 습한 비바람이 꾸미는 여름 숲의 소리, 현란한 단풍에 묻힌 가을 숲의 소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봄, 여름, 가을 숲이 만들어낸 화사함, 안락함, 현란함은 없을지라도 겨울 숲의 소리는 또 다른 감흥을 줍니다. 회색빛 겨울 숲이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완급과 고저가 다른 여러 가지 독특한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낙엽 밟는 소리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서릿발을 밟으면서 숲길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기억하십니까. 푸른 창공을 가로지르는 겨울 숲이 만들어낸 그 소리, 대지를 밟는 그 소리, 그리고 개울을 지나는 그 소리들은 자연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임을 한번이라도 느끼기엔 사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철저하게 인공의 소리에 길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숲이 만드는 소리는 그 숲이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능선비탈이나 마루금의 숲을 지나는 바람은 조급합니다. 그래서 가는바람이나 산들바람처럼 여유를 부릴 틈이 없습니다. 쌩, 쏴쏴, 쐐, 씽씽…. 그저 바쁘고 빠른 소리를 만듭니다. 산록이나 계곡을 지나는 바람소리는 마루금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비하면 성미가 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편안한 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우-’ 하고 말입니다.

    숲을 이룬 나무에 따라서 숲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다릅니다.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참나무들은 약한 바람에도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쉽게 바삭거리고 버석댑니다. 그리고 스르륵거리며 서걱대고 소시락댑니다. 이렇게 참나무 숲의 소리는 번잡스럽습니다. 참나무들은 나이가 들면 대부분 잎을 떨구지만 어린 시절엔 겨우내 잎을 가지 끝에 달고 있습니다. 말라버린 참나무 잎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가지에 붙어 있기에 약한 바람에도 사각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작은 바람에도 겨울 참나무 숲에선 사각사각, 서걱서걱거리는 소리를 쉽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마른 참나무 잎은 참나무의 훌륭한 발성기관입니다. 참나무의 마른 잎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처음엔 번잡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느 틈에 그런 번잡스러움은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대신에 ‘서걱’, ‘사각’, ‘스르륵’, ‘소시락’거리는 모든 소리에 질서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이 만들어내는 화음의 아름다움이지요.

    숲이 만드는 소리 중에 솔숲이 만드는 소리는 격이 다릅니다. 사실 소나무 숲은 쉽게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 소나무가 말을 하면 잠든 영혼을 깨우듯 숲 전체가 울리는 웅장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솔숲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내는 ‘쏴아’하는 솔바람소리는 영혼을 흔드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솔잎을 가르는 장엄한 바람소리를 태아에게 들려주면서 시기와 증오, 원한을 가라앉히고자 솔밭에 정좌하여 태교를 실천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심신을 치유하는 자연의 소리

    다른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소나무는 바람이 있어야 제 값이 나타납니다. 한 시인은 “솔바람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라야 별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솔바람소리가 오죽 영묘하면 밤하늘 별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신묘한 귀를 가져야만 들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조상들은 송성(松聲)이나 송운(松韻)이라 하면서 솔바람소리를 특히 아꼈는지도 모릅니다.

    숲이 만드는 소리는 자연의 소리입니다. 자연의 소리는 지친 뇌를 쉬게 해줍니다. 솔바람, 시냇물 흐르는 소리, 새소리처럼 자연의 소리를 접하면 뇌에서 알파파가 나와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하나로 통일시키며, 무상무념의 경지를 갖게 해줍니다. 숲을 찾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쉽게 명상에 빠져들 수 있는 이치도 자연의 소리가 만들어주는 이 알파 뇌파 덕분입니다.

    숲이 만드는 소리는 빠름의 가치체계에 전도된 우리네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처럼 인식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산업문명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하루하루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각박한 세태에 숲을 가르는 바람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쉬 돈이 생길 것 같지 않아도, 아무런 실용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숲이 품고 있는 소리는 속도에 대한 현대문명의 잘못된 믿음을 깨뜨리거나, 소비문화에 전도된 물신주의의 가치관을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그래서 숲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듣고 즐기는 일은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느림’의 가치관

    오늘날 ‘빠름’에 대한 가치관은 맹목적인 선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느림’에 대한 가치관은 부정되거나 애써 무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상생의 원리는 빠른 것이 최선이 아님을 일러줍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훼손, 대량폐기는 모두 빠름에서 유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빠름의 세태를 맹목적으로 쫓아가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덜 쓰고 덜 더럽히고 덜 훼손시키는 것이 내일을 위한 책무임을 인식하고, 느림의 가치관을 우리 사회에 확산시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솔숲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당신은 행복합니다. 마른 가랑잎이 만드는 소리와 솔숲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구별하므로 당신은 더욱 행복해집니다. 아니 무엇보다 압축 고도성장기에 이어 초고속 정보통신의 광풍이 숨막히게 휘몰아치는 이때, 느림의 가치를 대변하는 숲의 소리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기에 당신은 더 더욱 행복합니다. 겨울 숲의 웅장한 소리에 귀기울여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겨우내 한껏 움츠린 숲의 식솔들이 기지개를 폅니다. 풀잎은 풀잎대로 바쁘고, 나뭇잎은 나뭇잎대로 분주한 계절이 다가옵니다. 숲 바닥에서 뿜어 나오는 풀 내음이 싱그럽고 흙내가 구수하기까지 합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대지가 호흡을 시작한 것이지요. 대지에 터잡고 살아가는 숲의 식솔들이 가진 생명력은 놀랍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꽃을 피우고, 잎을 키우고, 향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록을 간지르는 명지바람이 솔밭을 지나갑니다. 보드랍고 화창한 봄바람을 따라 솔밭에서 송홧가루가 구름처럼 피어오릅니다. 청명한 봄 하늘로 피어 오른 송홧가루 구름의 비상도 잠시, 어느 틈에 우리 머리 위로 연두색 안개가 되어 내려앉습니다.

    송홧가루가 내뿜는 기분 좋은 내음이 코끝을 스칩니다. 옅은 송진냄새가 온몸을 휘감습니다. 솔잎에서 나는 냄새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속에 찌든 영혼까지 청신한 기운으로 씻어지는 듯합니다. 송홧가루가 휘날리는 오월 솔밭의 향기는 철따라 다른 숲의 모습을 즐겨 찾는 이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소나무가 송홧가루를 흩날리면서 신비로운 향기를 창공으로 내뿜을 때, 아까시나무는 계절의 여왕다운 진한 향기를 준비합니다.

    봄 숲이 만들어내는 향기는 단숨에 꾸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적인 예가 전나무 숲의 향기입니다. 봄은 이미 우리곁에 왔는데도 높은 산의 전나무 숲에는 잔설이 쌓여 있습니다. 겨우내 눈 속에 파묻힌 전나무 가지가 양지 쪽의 따뜻한 햇살덕분에 원래의 푸른 모습을 살포시 드러냅니다. 눈이 녹은 양지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에서는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색도 형체도 없으면서 코끝을 자극하는 경이로움입니다. 자연이 간직한 신비로움이 전나무 숲 고유의 향기 속에 담겨 있습니다.

    퍼석거리는 잔설 위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싱그러운 향기가 코끝을 간지르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폭설로 꺾인 전나무의 푸른 가지가 겨우내 눈 속에 갇혀 있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비축했던 향기를 뿜어 내는 것입니다. 눈 속에 갇혀 있던 방향성 향기가 잔설이 녹으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 느껴집니다. 전나무의 송홧가루는 솔숲의 송홧가루보다 조금 이른 때에 만들어집니다. 이때의 전나무 숲이 만들어내는 향기도 예사롭지 않습니다만 조금 더 진한 향기는 올 봄에 새로 키운 마디에서 돋아난 연녹색의 바늘잎에서 뿜어 나옵니다. 꺾인 가지와 떨어진 솔방울에서, 흩날리는 송홧가루에서, 그리고 새 잎에서 뿜어 나오는 전나무 숲의 독특한 향기는 테르펜 성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린네 우수는 식물의 계통을 분류하여 식물마다 고유한 이름을 부여한 사람입니다. 그는 식물이 내뿜는 향의 느낌을 유쾌한 순서에 따라 일곱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방향성 냄새, 향기로운 냄새(향수), 머스크향과 같은 사향냄새, 마늘의 짜릿한 냄새, 땀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 그리고 역겨운 냄새로 말입니다.

    흙내음과 고향생각

    소나무 숲과 전나무 숲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는 유쾌한 순서로 따졌을 때 가장 상위에 자리잡고 있는 방향성 냄새입니다. 그리고 아까시나무 꽃이나 수수꽃다리 꽃의 향은 방향성 냄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유쾌함의 정도가 상위권에 속하는 향기로운 냄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산사나무나 밤나무가 꽃을 피울 무렵에는 머스크향과 같은 달콤하면서도 야릇한 냄새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말씀드리기 민망합니다만 산사나무 꽃에서는 여성의 은밀한 부위의 냄새가, 밤나무 꽃에서는 남성의 정자 냄새가 풍기기 때문입니다.

    봄 숲의 생동하는 기운은 흙내로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봄 숲의 냄새를 맡는 즐거움은 숲 바닥에서 시작해도 좋습니다. 숲 바닥의 흙내를 맡기 위해선 우선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과 아직도 이파리 형체가 남은 낙엽부스러기를 걷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 한 움큼의 검은 토양을 집어서 코끝으로 가져가면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 우리를 맞습니다. 구수하다고 할까요, 아니면 풋풋하다고 할까요. 표현하기 힘든 새로운 경이로움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아마도 지금껏 잊고 지내온 고향을 상기시켜줄지도 모릅니다.

    흙내가 고향을 상기시켜 주는 이유는 냄새가 기억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냄새가 기억을 이끌어내는 마법사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 되었습니다. 미국 모넬화학 감각연구센터의 레이츨 하르츠 박사의 냄새 기억에 대한 실험은 흥미롭습니다. 그는 실험대상자들에게 어떤 그림을 향기와 함께 감상하게 한 후, 다시 향기만 맡게 했습니다. 그 결과 향기와 함께 그림을 봤던 사람이 오직 그림만 봤던 사람에 비해 감상 당시의 느낌을 훨씬 잘 기억해내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냄새가 기억을 이끌어내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흙 마당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숲 바닥의 흙내로 옛 고향에 얽힌 여러 가지 추억을 회상하시리라 믿습니다. 아까시나무 꽃향기 속에서 사랑을 고백한 사람은 아까시나무 꽃이 필 때마다 그 사랑을 기억하겠죠. 반면에 아파트가 고향인 어린 세대들은 성년이 되면 햄버거와 피자 냄새로 고향을 회상할지도 모릅니다.

    아까시나무 숲에서 진한 향기가 흩날리기 시작하면 봄 숲이 만들어내던 오묘하고 신비로운 향기의 잔치는 파국에 이릅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람들은 아까시나무 꽃향기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지도 모릅니다. 송홧가루를 털어낸 솔숲이 내뿜는 송진 가득한 냄새는 물론이고, 건강한 바늘잎에서 뿜어 나오는 전나무 숲의 방향성 냄새도 차츰 사라집니다. 그리고 참나무 숲이나 그 밖에 넓은잎나무들이 모여 사는 숲 속을 지나는 바람 속에서 자연의 순한 체취를 느끼는 일도 잠시, 이제는 그저 밋밋한 풋내만 코끝을 스치는 지도 모릅니다.

    자연이 만든 향기를 즐기기 위해서 어디부터 먼저 나서시겠습니까? 전나무 숲입니까 아니면 소나무 숲입니까? 아까시나무가 꽃을 피울 때까지 기다리시겠다고요. 어느 곳을 선택하든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척척 감기는 바짓가랑이가 성가시고 찬 기운이 머리에서 다리로 전달됩니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진흙물은 새롭습니다.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온 빗물이 등줄기를 적십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바짓가랑이 속까지 젖어듭니다. 봄비와 가을비는 더워진 몸을 식히지만 여름비는 체온을 적당하게 유지시켜 주는 자연이 준 선물입니다. 여름장마비 속을 뚫고 젖은 몸으로 숲을 찾는 재미는 그래서 더욱 유별납니다.

    우의, 우산도 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아본 적이 언제입니까? 많지 않겠죠. 아니 평생 한번도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옷이 젖어도 좋다는 각오만 하면 자연을 진득하게 즐길 수 있는 기쁨이 바로 우리 지척에 있습니다.

    언론에서 호들갑을 떠는 산성비의 위험은 잠시 잊고 진창길을 거닐면 발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올라오는 흙의 감촉이 새롭습니다.

    학생들에게 뒷산 숲을 밟고 느낀 점을 써내라는 숙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발바닥에 상처가 나면 어떻게 합니까? 씻을 장소가 마땅찮은데 어떻게 발을 씻습니까? 여전히 볼멘소리가 없잖았지만 반 시간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화강암이 풍화되어 굵은 모래알이 깔린 마사토길도 걸었고, 솔가리가 깔린 솔숲길도 걸었고, 햇볕에 달구어진 바위 길도 걸었습니다. 그리고 낙엽 수북한 숲바닥도 거닐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자주 꾸밉니다. 저와 함께 숲을 찾는 분들께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맨발로 한번 걷게 하니까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맨발로 한번 걸어보셨습니까? 지난 여름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서 걷던 기억이 떠오르신다고요. 혹 산길을, 또는 숲길을 걸어보신 적은 없습니까? 글쎄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요. 맨발로 숲바닥을 걷는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드리겠습니다.

    한여름 폭염이 계속됩니다. 숲길도 적당히 달구어졌습니다. 물론 사람 키 높이 몇 배나 되는 숲속으로 난 오솔길은 한낮의 볕이 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만. 한낮의 볕이 따갑습니다. 온몸에 칙칙 감기는 습한 기운도 제철을 만나 한참입니다. 몸뚱아리에 걸친 날개옷도 버거워집니다. 어디 옷뿐이겠습니까. 신발조차 가벼워지지요.

    발바닥에 전해오는 감촉이 좋습니다. 고무창 안창 깔개창 양말을 거쳐서 겨우 느껴지던 무딘 감촉 대신에 살아서 펄쩍펄쩍 뛰는 생선을 만지는 것처럼 숲바닥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오는 그 전율이 좋습니다. 발꿈치, 발바닥, 발부리, 발샅, 발허리를 어루만지는 감촉은 신발이나 양말을 신고 느꼈던 감촉과는 다릅니다. 무뎌져 있거나 또는 통째로 죽어 있던 발 전체의 감각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숲길의 종류와 상태에 따라 느껴지는 감각의 부위나 강도는 다릅니다. 어떤 길에서는 발바닥의 감촉이 최고이고, 어떤 때는 발샅이나 발부리에 전해지는 은밀한 촉감에 전율합니다.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숲길의 감촉은 그래서 각양각색입니다. 이끼가 많은 계곡길을 맨발로 걷는다면 양탄자를 밟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비오는 날, 맨발로 걷습니다. 옛 추억을 반추하며 몰라보게 자란 나무들을 벗하며 자연과 한몸이 되는 연습을 비오는 숲에서 합니다. 맨발로 언제 한번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아니 언제 한번 온몸으로 비를 흠뻑 맞아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동참소식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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