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호기심 먹고 사는 ‘자유로운 독수리’

여행가 한비야

  •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입력2004-09-16 1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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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 위의 인생, 길 위에서 세운 뜻. 타고난 역마살도 없다는데 어느새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돌고도 다시 그만큼의 길을 꿈꾸고 있다는 여행가 한비야씨. 여행을 하다보니 사람을 만나게 됐고 그러다보니 그들을 사랑하게 됐다는 그는, 난민을 위한 구호사업에 헌신하는 와중에도 요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또 다른 계획에 마음이 달뜨고 있다.
    지금은 더없이 우스운 일이 돼버렸지만 예전에는 왼손으로 글을 쓰는 게 흉이었다. 왼손잡이인 필자의 여동생은 왼손으로 글씨를 쓰다가도 남이 보면 얼른 오른손으로 옮겨 쓰는 ‘위장술’을 보여주곤 했다.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나쁜 습관’이라는 인식 탓이었으리라.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당당함


    1958년생이니까 한비야(韓飛野)씨도 연령으로만 따지면 그 세대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 보건 말건 당당하게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 세계를 누비는 이 당찬 여성은 작은 것 하나도 달랐다. 우리 나이로 45세, 늘어지는 나이일 법한 데도 공처럼 통통 튄다. 쫓기는 듯 빠른 말씨, 민첩한 행동 하나하나가 다부지고 탄력이 있다. ‘관록 있는 노처녀’지만 결혼 못해 안달하는 수준은 오래 전에 통과한 듯하다.

    전세계 65개국의 오지를 찾아다닌 담력,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전 수전 공중전 시가전’까지 모두 겪으며 세계여행을 척척 해낸 그의 모험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의문을 풀어보겠다고 그가 일하고 있는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앞의 월드비전빌딩 10층 사무실을 찾아가는 길에 필자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여자가 겁도 없이 홀로 세계를 누비면 무섭지 않습니까?”

    여성에게 ‘여자가 감히’라는 투의 말을 하는 것이 반(反)페미니즘적 태도인 것은 분명하다. 이 말 속에는 여성비하나 성차별의 뜻이 암묵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터뷰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여성을 노리는 범죄가 갈수록 극악해지고, 백주 대낮에 부녀자를 납치해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지 않는가. 이쯤 되면 세계를 사방팔방 누비는 한비야씨라도 긴장감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잘못 짚었다. 그는 간단명료하게 이북식으로 대답했다.

    “일없습니다.”

    일없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남자들이 겁탈하고 강도짓을 하겠다고 덤벼든다 해도, 내 태도가 분명하면 99.9%는 예방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라고 해도 임하는 자세가 또렷하면 극복할 수 있어요. 사고는 어정쩡하게 대처하거나 미온적으로 나갈 때 당하는 거죠.”

    그러면서 한씨는 멕시코를 여행할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현지의 한 미남청년이 호의를 베풀며 다가오더란다. 고적지, 시장통, 번화가 등을 안내해주는 그에게 자연스레 고마움을 느꼈다.

    “그랬더니 다음날부터 저를 어떻게 해보려고 수작을 벌이는 거예요. 애인 역할을 하려는 거죠. 번화가를 걷는데도 저를 껴안으려고 해요. 그래서 냅다 뺨을 한 대 갈겨주었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더니 청년이 떨어지더라는 것. 겁 먹고 질질 끌려다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당하는 수가 있지만 자기 태도가 단호하면 위험을 얼마든지 돌파해나갈 수 있다는 게 한씨의 지적이다. 그는 해외여행을 할 때는 늘 가스총을 휴대하고 다닌다. 여차하면 발사해버릴 태세를 풀지 않는다. 한번도 써먹은 적은 없지만 대처능력을 완벽하게 갖추었기 때문에 범죄지역을 여행해도 자신만만하다.

    “그렇다고 제가 마냥 무서운 여자는 아니에요. 알고보면 한없이 부드러운 여자죠.”

    한비야씨와의 인터뷰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만큼 그의 하루 일상이 빡빡하다. 평균 5시간 정도 걸리는 인터뷰를 단번에 처리하지 못하고 ‘다음에 계속’을 거듭한 것은 ‘할 일은 많고 세상은 넓기 때문’이다. ‘노처녀가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을까’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처녀지만 엄연히 두 딸을 둔 어머니고, 세계의 난민구호를 위해 바쁜 활동가다. 에티오피아와 방글라데시에 한 명씩 흩어져 있는 입양한 두 딸을 보살피는 일이나, 국제 NGO인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 역할이 한가함과는 거리가 먼 자리인 것이다. 게다가 책 집필에 각종 강의까지 쌓여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지난 7년 동안 세계의 오지를 두루 누벼온 그는 최근 아프간 난민구호 활동을 벌이고 돌아온 데 이어 곧바로 다시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동안 어디어디에 다녀오셨지요.

    “맨 처음 해외여행을 떠난 것은 1987년 9월부터 약 3개월간이었어요. 미국 유타대학 언론대학원에서 국제홍보학을 전공하고 있을 무렵인데, 이탈리아 초교파 종교회의에 참가하면서 유럽을 돌아보고 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권인 동유럽 여행이 여의치 못해서 그 쪽은 돌아보지 못했고, 특별히 준비하고 떠난 여행도 아니었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선 것은 1993년 3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다녀온 두번째 여행부터였어요. 여행이라기보다 세계의 오지에 직접 들어가 살다온 겁니다. 한 대륙에서 1년6개월씩 살다왔으니까요. 그래서 오세아니아를 빼고 전 대륙을 여행했습니다.

    세번째는 중국 여행입니다. 2000년 3월15일부터 2001년 3월14일까지 중국에 머물렀어요. 일단 중국어를 배우자고 마음먹고 간 길이었지만 중국을 제대로 알자는 뜻에서 1년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 2개월 반 동안 남한을 종단한 것도 빠뜨리면 안되겠네요. 중국으로 떠나기 전이었죠. ‘외국으로만 돌아다니는 게 올바른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전남 해남의 땅끝에서 휴전선 바로 밑인 통일전망대까지 도보로 종단했습니다.”

    -여행 경비는 집에서 지원해 주었습니까.

    “아니요, 저는 그렇게 호사스런 사람이 아니에요. 두번째 여행부터 직접 경비를 조달한 셈인데, 그동안 회사에서 받은 월급을 탈탈 털어 떠났죠. 유타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제홍보회사인 버슨 마스텔라 한국지사에서 근무했거든요. 한 3년 모으니 2500만원 정도 되더군요. 다른 여자들이 혼수 밑천을 준비하기 위해 저축하는 동안 저는 해외여행을 떠나기 위해 돈을 모은 셈이죠.”

    남들의 눈에는 무모한 짓이었겠지만 본인에게는 철저히 ‘준비된 행동’이었다. 괜찮은 직장을 버리고 훌쩍 세계여행을 떠난 것은 어렸을 때부터 다져온 단순하고도 소박한 꿈을 달성해보자는 소망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공부방 벽에는 세계지도가 걸려있었고, 머리맡에는 지구의가 놓여 있었다. 그때부터 미지의 세계에 대해 무한한 동경의 날개를 펴곤 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여행을 꿈꾸게 된 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가장 큰 영향은 아무래도 부모님 때문이겠죠.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제가 하는 일에 관해선 거의 간섭을 안 하셨어요.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하지 말라는 제지를 받아본 기억이 없거든요. 언니들은 규범이나 예의 같은 기존 틀 속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저는 호기심이 많았어요. 언론인(조선일보)이셨던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인 1972년에 돌아가셨는데, 가끔씩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숭의여고)를 마친 그는 ‘대학에 갈 필요가 뭐가 있나’라는 고집으로 바로 출판사에 취직한다. 번역 일을 하며 6년을 보냈지만 능력과 상관 없이 대졸자와 엄청난 차이를 두는 월급에 화가 나 대학진학을 결심했다. 1년간 학원을 다닌 끝에 홍익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시험 성적이 뛰어나 서울대도 갈 수 있었지만 4년간 장학금을 줄 수 있는 학교를 찾다보니 홍익대를 택하게 됐다는 것이 본인의 후일담이다.

    한비야라는 이름 석자도 독특하다. 날비(飛)에 들야(野). 들판을 날아다니는 잠자리처럼 살라는 뜻이었을까.

    “천주교 세례명이자 제 본명입니다. 우연이지만 ‘비야’라는 세례명의 어원에는 ‘새’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고 하더군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제 팔자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긴 있나 봐요. 새와 같은 호기심이 숨어있다고 할까요. 한번 고집을 피우면 어느 누구도 꺾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 비해 부모님은 저에게 관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언젠가 저 아이는 무엇인가 일을 저지를 것이다’라는 식으로요. 지금도 제 가슴속에는 ‘호기심’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어요. 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않으면 저는 순간순간 질식할 것 같아요.”

    여행을 시작하면서 그녀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육로만을 이용한다는 것. 비행기는 그의 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반도에 살면서 원통하게 생각한 것이 해외로 나가려면 반드시 바다를 건너야 하고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북쪽이 막혀 있으니 육로 여행은 불가능하잖아요. 그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반발이랄까. 그래서 여행지에 도착하면 항상 육로로만 여행했죠.



    위기일발의 순간들


    육로여행을 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면 그야말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일 뿐입니다. 지구는 직접 맨땅에 헤딩하면서 봐야 제 맛이죠. 제가 하느님도 아니고, 천상에서 내려다보며 여행한다는 건 건방진 태도라는 생각도 들고요. 게다가 육로여행은 경비가 쌉니다. 비싼 돈 주고 지구의 뚜껑만 본다는 것은 지구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둘째 원칙은 현지인과 똑같이 먹고 잔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나라 사람들 고유의 냄새를 더 밀접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 그 민족의 풍속, 고유의 전통, 먹고 사는 방식을 접할 수 있어야 진짜 여행이라는 의미다. 이는 ‘가급적 사람을 많이 만난다’는 셋째 원칙과도 맥이 닿아 있다. 지금껏 이런 방식을 고수해온 것이 여행을 더욱 풍요롭고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쓸데없는 노파심일까. 여자 혼자서 낯선 곳으로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다시 걱정이 앞선다.

    -여자 홀몸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곤란하거나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무엇보다 낯선 곳을 다니려면 두렵고 무서울 텐데요.

    “저는 오히려 가장 이상적인 여행방식은 ‘여자 혼자서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둘 이상 단체로 다니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거든요. 홀로 여행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누구나 경계심을 갖지 않죠. 그래서 현지의 가족생활을 저항 없이 들여다볼 수 있어요.

    서너 명이 단체로 움직이면 거부감이 생기겠지만 여자 혼자라면 현지인들이 먼저 호감과 호기심을 가져요. 남의 집 부엌에서 주부와 얼마든지 대화도 나눌 수 있고,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습니다. 혼자니까 가정집에서도 쉽게 잠을 재워주지요. 얼마나 좋은 조건입니까. 경비절약 차원에서도 그렇죠.

    잠을 잔 집에 돈을 주려 해도 대개는 받지 않아요. 대신 방법을 연구했죠. 안주인이 갖고 있는 물건을 팔라고 우겨서, 그 물건값이라는 핑계로 돈을 주는 겁니다.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이런 따뜻한 인정도 여자 홀몸으로 다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여행을 다니면서 사기를 당하거나 돈을 털린 적은 없었을까. 먼 땅 오지에서 낯선 남자에게 이런저런 수모를 겪지는 않았을까. ‘자꾸 겁탈당할 위험이 없었는지 캐물어 인터뷰를 흥미 위주로 끌고 나가려 한다’고 불평하면서도, 한씨는 여행지에서 겪은 수많은 ‘사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위기에 처한 적도, 유혹을 받은 적도 있고, 또 제가 먼저 남자에게 빠져든 적도 있죠. 인도 여행 때의 일입니다. 릭샤(인력거)를 타고 이동하는데 릭샤꾼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거예요. 어느 골목을 지나 주위를 돌아보니 이상한 동네예요. ‘나를 사창가에 팔아 넘길 생각인가’ 싶어 얼른 릭샤에서 뛰어내렸어요. 사창가에 갇히는 것보다는 다리가 부러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거죠.”

    여행지에서도 가급적 중요한 물건은 직접 휴대한다. 경험상 그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카메라나 달러 등은 전대에 담아 차고 다닌다. 물론 그 정도면 현지인들에게는 몇 달을 먹고 살 수 있는 큰 재산. 강도가 행인이 오가는 거리에서도 버젓이 ‘한탕’을 노리는 경우도 있다.

    “탄자니아에서의 일이에요. 거리를 구경하려고 여관을 나섰죠. ‘중요한 물건은 집에 두고 나가라’는 여관 주인의 말을 무시하고 평소처럼 전대에 넣어 메고 나섰죠. 시장 골목을 지나가는데 한 녀석이 팔로 제 목을 껴안아 조르는 거예요. 행인들은 멀거니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고요. 제가 누구예요? 유관순 언니의 후배답게 용감하게 뿌리쳤죠. 우스운 것은 두렵다는 공포보다 그 청년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냄새에 대한 역겨움이 더 컸다는 거예요. 스컹크 냄새보다 더 지독해 질식할 뻔했으니까요. 이후로도 여행하면서 한번도 돈을 털린 적이 없어요.”

    터키의 한 여관에서 겪은 일도 잊지 못할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루지아에서 터키로 밤늦게 넘어왔어요. 여관 주인이 침대를 두 개 쓰겠냐, 하나 쓰겠냐고 물어요. 당연히 하나만 쓰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문을 잠그지 말고 자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받으려나보다 하고 문을 잠그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곤히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제 몸을 더듬는 거예요.

    눈을 비비고 살펴보니 남자가 곁에 있는 거예요. 남자는 ‘나타샤, 나타샤’와 ‘쟁기, 쟁기’를 연발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 동네는 창녀촌이고, ‘나타샤’는 몸을 파는 러시아 여성을 상징적으로 부르는 용어더군요. ‘쟁기’는 러시아어로 돈이라는 뜻이고요. 말하자면 몸 파는 러시아 여성을 찾아 들어와, ‘돈 줄게, 돈 줄게’ 한 셈인데, 오히려 제가 큰 소리로 호통을 치자 자기가 더 화들짝 놀라 도망을 가더군요.”

    자신이 쓴 여행기에도 없는 무용담을 뒤로하고 이야기는 그가 ‘내 여행의 목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으로 천천히 옮겨가기 시작했다. 드넓은 대륙, 다양한 나라에서 만난 다양한 인종,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오지를 다니다보면 영어로 말하는 사람만 보아도 반갑다고 한다. 말이 통한다는 사실만으로 바로 공감대가 형성돼 ‘동포애’를 느낄 정도라는 것. 그렇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또 그 나름의 삶을 배울 수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잊을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터키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남자를 만났어요. 이란 망명자였는데 호메이니 시절 반정부 지도자로 활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조종사로 활약했고, 친서방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죠. 처음 저를 필리핀 여자로 알더군요. 미국 노래 ‘The end of the world’를 좋아하는 것도 같아 금방 가까워졌어요. 비밀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친구를 통해 제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도록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두바이에서 반정부 조직 자금책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볼리비아에서 만난 할머니는 또 다른 의미에서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라파즈라는 도시는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도시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면 꾸준히 내려가야 돼요. 산 밑까지 꼬박 4박5일이 걸리죠. 네덜란드 여자 2명과 일행이 되어 함께 내려가는데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산골짜기를 가게 됐죠. 그런데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그 산골에 할머니 한 분이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더라고요.”

    할머니는 그들 일행을 보자 저승에 갔다온 자식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1년에 한번 사람을 만날까 말까 하는 정도니 반가워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 그 지방 사투리로 연신 신발과 양말을 벗어달라는 할머니에게 한 켤레 줄 요량으로 등산화를 벗어주었다. 신발에 욕심을 내는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신발을 꼬챙이에 꿰어 불에 잘 말리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산길을 내려오느라 젖은 신발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 집에서 묵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안이 정말 돼지우리 같은 거예요. 할머니 혼자 살림을 감당해갈 수 없으니 그렇게 됐겠죠. 그래서 집안 청소며 해진 옷을 기워드렸어요. 눈이 안 보이니 바느질은 아예 할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에요. 왜 혼자 이 깊은 산중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10년 전에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린다고 하시더군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아들이 자신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이 올 때까지 이곳을 지키겠다는 거죠.

    헤어질 때 돈을 좀 드렸더니 영 받지 않으세요. 필요없다는 거죠. 그래서 설탕, 치약, 비누 같은 물건을 드렸더니 고구마 비슷한 그 고장 특산물을 주는 거예요. 할머니가 하도 원해서 예정에도 없이 며칠을 보냈는데, 헤어질 때는 얼마나 섭섭해 하며 우시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요.”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보다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얘기가 가슴에 오래 남는 것일까. 볼리비아의 할머니 못지않게 베트남의 한 여관에서 만난 화교 소녀를 떠올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호치민시의 조그만 여관에 투숙했죠. 화교 소녀가 심부름을 하고 있는데 주인이 어찌나 가혹하게 부려먹는지 애가 픽픽 쓰러지는 거예요. 노예나 다름이 없더라고요. 월남전 이전에 미군 통역을 했던 아버지는 공산당이 집권하자 폐인이 돼버렸다더군요. ‘반동분자’였던 거죠. 아이는 결국 멀리 호치민시까지 흘러들어와 여관에서 일하고 있었고요. 반동의 자식이니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가축처럼 부리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어요.

    아이에게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물으니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1년 학비가 100달러라고 하길래 제가 100달러를 주기로 하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주었죠.”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요즘에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당시만 해도 베트남은 통제가 심한 나라였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가면 보안경찰에게 적발된다. 사진을 찍느라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더니 곧바로 마을 치안책임자에게 발각돼 경찰이 들이닥쳤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숨느라 혼났죠. 그 아이는 지금도 가끔 저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데 이젠 훌륭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돼 있어요. 낯선 길을 가는 여행자에게 100달러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지만, 한 소녀의 인생을 바꾸어주었다는 점에서는 100달러 이상의 값어치를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사는 방식은 달라도 사람은 모두 똑같다’는 걸 느껴요. 염색체 구조상 인간과 초파리는 같은 부분이 60%나 된다고 하더군요. 침팬지와는 98.8%가 같고요. 그러니 사람끼리는 거의 100% 완벽하게 같은 거겠죠. 그런데도 다른 것인 양 신기해 하고, 조금만 말이 달라도 별종인 양 자기 식대로 재단하고 단절하고 싸우고 으르렁거리지요. 돌이켜보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걸 모르고 말이죠.”

    ‘전지구적 인류애’에 대한 사명감에 넘치는 한비야씨는 기회만 있으면 진지한 주제로 말길을 돌리려 애썼다. 덕분에 기사가 재미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진지함도 좋지만 그 때문에 독자들이 지루해 한다면 그 또한 난감한 일. 필자는 급히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여행을 하다보면 미남이 많은 곳, 미녀가 많은 곳도 알 수 있을 터다. 호사가들을 위해 안내해달라고 제의했다. ‘미남이 많은 곳은 아껴두었다가 혼자만 가려고 한다’던 한비야씨가 결국 선심 쓰듯 몇몇 곳을 추천해 주었다.

    “어차피 전부 차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몇 군데 알려드릴게요. 우선 터키 남자들이 잘생겼죠. 로마 남자들도 괜찮고요. 그중 터키 남자들은 석고상하고 비교도 안될 만큼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요.

    미녀는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여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피부가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새까만 것이 아니고 갈색 윤기가 나는 검은 피부죠. 이곳 여성들은 내가 봐도 흠뻑 빠질 만큼 매혹적이에요. 에티오피아 남부는 아프리카 계통이지만 북부는 오래 전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역이고, 서양문물에 익숙한 곳입니다. 사람들도 혼혈이 많아요.

    생각해보면 매혹적인 여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매혹적인 남자가 있어요. 미녀가 있는 곳에는 미남이 있는 법이더라고요.”

    -경치가 아름다운 곳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산을 좋아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파키스탄의 북부 산악지대를 꼽고 싶어요. 히말라야, 힌두쿠시, 파미르 고원의 삼각지대로 볼 수 있는 지역인데, 해발 6000m 정도의 산은 너무 흔해 이름도 없고, 7000m 쯤은 돼야 족보를 내놓을 수 있는 산악지대죠. 그 아름다움이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어요. 장엄하고, 아름답고, 기후도 좋죠.

    물론 티베트나 네팔 쪽도 좋지만 파키스탄 북부의 산들은 신이 만들어놓은 예술품처럼 느껴지거든요. 킬리만자로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등산하기 쉬운 산일 뿐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몽골의 산악지대가 훨씬 아름답습니다. 몽골을 흔히 사막지대라고 하지만 사막은 3%밖에 안된다고 해요. 대부분 산악지대죠. 산이 깊으니 계곡의 물도 좋고, 호수가 많아 참 아름답습니다. 알래스카의 산과 숲도 좋고요.”

    -여행에는 음식 얘기가 빠질 수 없죠. 어느 나라 음식이 가장 맛있던가요.

    “베트남 음식이 맛있습니다. 음식은 중국과 프랑스 음식이 좋다고 하지만 보편화해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이 없어요. 또 고급 음식점의 메뉴는 맛으로 평가할 수가 없다고 봐요. 비싼 값을 해야 하니까 맛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렇지만 베트남 국수나 빵은 구수한 맛에서나 쫀득쫀득한 맛에서나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다고 봅니다.

    특히 베트남 쌀국수는 최고로 치고 싶어요. 야채에 소의 눈살코기가 한 점씩 들어가는 쌀국수, 여기에 콩나물 비슷한 것이 들어가는데 이 나물을 씹는 맛이 사각사각 경쾌하고 싱그럽죠. 다음으로 과테말라의 옥수수빵 토르티아가 맛있어요. 프리홀렛을 으깨서 빵에 바르고, 매운 고추를 넣어서 먹는 맛이 최고예요. 터키 음식도 맛있죠. 동서양이 교차한 곳이기 때문에 음식도 다양하게 발달했어요. 매콤달콤한 맛이 좋지요. 중동 음식들도 괜찮고요.”

    -나라마다 민족성도 각기 다를 텐데 실제로 접해본 나라의 민족성은 어떻던가요. 흔히들 게르만민족 하면 이지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하고, 프랑스는 예술적 취향, 스페인은 낙천적이고, 놀이문화에 익숙하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건 과연 타당한 평가인가요 아니면 그냥 상투적인 평가기준일 뿐일까요.

    “제가 문화인류학자도 아니고, 그 방면에 딱히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떻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네요. 다만 어떤 선입견을 갖고 그 나라 사람들에게 접근한다면 자칫 왜곡되거나 일면의 진실에만 빠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태평양 바닷물 중 물 한 컵 정도의 분량인데 어떻더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요.

    그래서 다른 분들에게도 개인적 잣대를 갖지 말라고 주문하고 싶어요. 그게 여행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일 거라고 믿거든요. 다만 우리 민족의 강인함은 외국에서 발견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회사가 건축공사를 하는 곳에서는 그곳 사람들이 모두 탄복을 해요. 코리아 넘버 원이라는 거죠.”

    -우리 내부에서는 국민기질이나 성향이 엉터리라고 하는데도요.

    “하지만 외국에서 우리를 보는 눈은 심상치 않아요. 방글라데시엔 동서를 가르는 큰 강이 있어요. 나룻배로 이 강을 건너다 급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고, 교통이 불편해 발전이 안된다는 곳이었죠. 강 하류는 강 셋이 합류한 지점이어서 강이라기보다 바다라고 해야 옳을 정도고요. 이곳에 스웨덴 등 여러 나라에서 다리를 놓으려고 시도하다 실패하고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건설이 끄떡없이 다리를 놓았어요. 그 뒤 그곳 사람들은 한국사람만 보면 ‘메이드 인 코리아’가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워줍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레이스키(구 소련지역의 한인동포)들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 민족의 강인함은 더 실감나요.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1937년 연해주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중앙아시아의 늪이나 사막지대에 강제이주를 당했는데, 이들은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땅을 개척해 수박을 심고 감자를 키워서 최고의 수확을 올렸어요. 이주 4년 만에는 쌀농사를 짓기도 했고요. 우리 동포가 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불모지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거지요. 실제로 우리 동포가 손대지 않은 다른 지역은 여전히 사막이나 늪으로 남아있기도 하고요.”

    해외여행을 많이 하다보면 누구나 민족주의자 또는 국수수의자 성향이 강해지는 걸까. 그의 저서 ‘중국견문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행중에는 늘 작은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며 설명과 자랑을 한다. 아프리카와 중동여행이 끝난 다음부터는 대형국기도 한 장 넣어 다녔다. 갖가지 위험한 일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서 였다. ‘만에 하나 내가 객지에서 불귀의 객이 되면 태극기로 나를 덮어야 한다.’ 자칭타칭 코스모폴리탄이라는 사람이 웬 감상적 민족주의냐고? 나도 예전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 한비야라는 개인만으로도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섞여보니 대부분 그들에게 나를 확인시키는 첫번째 창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 직접 쓰신 국토종단기를 읽었는데, 국토를 종단하면서 에피소드가 많았더군요.

    “저는 늘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을 골라 숙식을 했어요. 하루는 전라북도 순창의 한 할머니 댁에서 묵는데, 저녁에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먹었죠. 그런데 배달하는 음식점 주인 아들이 경찰에 신고를 해버렸어요. 생전 자장면 한 그릇 사먹을 리 없는 집인데, 갑자기 탕수육까지 시키니 이상하다는 거죠. 그래서 계속 방안을 기웃거리다가는 ‘낯선 사람이 돈을 펑펑 쓴다’고 경찰에 신고해 버렸어요. 탕수육 하나가 큰돈으로 비쳐지는 농촌의 경제규모가 우습기도 했지만, 아직 신고정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더라고요.”

    -특별히 할머니가 사는 집을 골라 숙소로 정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선 편하잖아요. 할머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설책 한 권만큼의 사연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 실타래가 풀리면 밤새 듣는 재미도 있고요. 우리나라 농촌 현실이 그렇듯 농가에는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요. 눈 어두운 노인분들을 위해 며칠씩 묵으며 재봉틀 일도 해주고 옷도 기워주면 더없이 좋아하시죠.”

    마을에 잠잘 곳이 없으면 시골 교회당을 찾는다. 성당을 찾아 성상 밑에서도 자기도 한다. 경찰관이 근무를 서고 있는 방범초소에서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 가급적 여관에는 가지 않는다.

    “여관의 이불이 청결한 편은 아니죠. 밤새 어떤 남녀가 뒹굴던 이부자리가 아닌가 하는 불쾌감도 들고요. 그래서 여관에 들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제 침낭을 사용해요. 할머니 방을 찾으면 퀴퀴한 냄새가 나긴 해도 한 이불 속에서 자죠. 친해지면 쭈그러진 할머니 젖을 만지면서 자기도 하고요.”

    여행을 다니며 한비야씨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이들은 세계 도처의 난민들이다. 그가 세계 여행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로 꼽는 것도 난민촌의 아이들이 굶주려 죽거나 콜레라 등 전염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경우다.

    “제 몸이 괴로울 때는 차라리 괜찮아요. 아프리카 오지의 주민들은 동물 축사 같은 곳에서 동물과 함께 먹고 잡니다. 그러면 택(진드기의 일종)이라는 벌레가 온통 다리나 목 등 노출 부위에 엉겨붙어서 피를 빨아먹어요. 사람들은 만성이 된 데다 지친 나머지 그대로 빨리고 자고 일어나지요. 방에는 빈대, 벼룩, 쥐 같은 온갖 해충 때문에 피부가 성한 곳이 없어요.

    특히 어제까지 나하고 즐겁게 놀던 아이가 아침에 쓰러져 죽어갈 때 이를 지켜보는 마음은 견딜 수 없이 아파요. 그게 알고보면 단순한 탈수증 때문이에요. 단 700원짜리 링거 주사 한 방이면 시퍼렇게 살아날 증상이라는 말이죠. 700원과 목숨이 교환되는 현실을 보면서 무력감이랄까, 절망감에 빠집니다. 그럴 때가 가장 괴롭습니다.”

    한씨가 이들을 돕는 국제단체 ‘월드 비전’에서 긴급구호팀장으로 일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박애정신이나 헌신, 배려 같은 거창한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소박한 애정을 바탕으로 시작한 작은 실천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하는 수준’의 월급을 받고 있지만 그마저도 다시 구호사업에 쓸 정도로 열성을 갖고 임하고 있다.

    “월드비전은 1950년 한국전쟁중에 미국인 피어스 목사와 작고한 한경직 목사가 설립한 단체입니다. 지금은 전세계 100여 개국에서 긴급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죠. 우리는 지난 40년간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아 일어섰지만, 1990년부터는 우리가 직접 외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전쟁을 치른 80만 아프간 난민을 돕는 일을 하고 있고, 장차 북한방문도 계획하고 있어요.”

    그는 이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식수 식량 의약품 천막과 물자를 수송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해외여행을 시작했지만 이젠 인류애적인 사명감으로 목적이 바뀐 셈이다.

    “긴급구호팀장도 열정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철저한 훈련을 받죠. 지진은 순식간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전쟁도 그렇고요. 긴박한 상황에서 고아들과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구호활동을 벌이고 보호할 것인가에 대해 세계적 기준에 맞춘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하는 거죠.”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지요.

    “기부나 모금으로 확보하죠. 그런데 우리는 부자가 더 인색한 것 같아요. 돈 있다고 돕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날 성당에 설명회를 하러 갔더니 가난한 성당인데도 그 자리에서 수백만원이 모아져요. 그들 대부분이 가난한 샐러리맨들입니다. 우리는 회원 7만명을 두고 있는데 대부분이 월급 130만원 이하의 직장인들이에요.”

    당분간은 구호사업에 힘을 쏟을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 동안 육로로 세계를 누볐으니 앞으로는 요트를 타고 해로로 지구를 돌 계획이라고. 지금까지 여행한 지구 세 바퀴 반을 바닷길을 통해 다시 한번 시도한다는 구상이다. 대양을 횡단하는 거대한 계획보다는 항구에서 항구로 연안을 따라가는 요트 여행이 요즘 그를 설레게 하는 꿈이다.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하는 수준의 월급으로 어느 세월에 요트를 사시려고요.

    “이래봬도 저는 베스트셀러 작가예요. ‘중국견문록’만 해도 30만부가 나갔는데요.”

    그가 집필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라는 4권짜리 책, 국토종단 기행문집인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와 지난해 가을 출판한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은 모두 스테디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중국견문록’만 해도 30만부가 넘게 팔렸다. 책을 쓰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1996년 아프리카를 여행할 때의 일입니다. 말라리아 약을 과다복용한 후유증으로 머리털이 뭉텅뭉텅 빠지는 거예요. 자고 나면 머리맡에 수북이 쌓이더라고요. 삼단 같던 머리털이 순식간에 줄어드니 겁이 덜컥 났어요. 눈이 시리고, 건강 상태도 몹시 악화됐어요. 부랴부랴 귀국해서 간 검사를 받았죠. 예상했던 대로 아주 안 좋았어요.

    그래서 치료를 받는 동안 글이나 쓰자는 생각으로 입원을 했지요. 4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쓴 책이 또 돈벌이가 돼요. 그게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었어요.”

    책이 잘 팔린 덕분에 더 호사스럽게 여행을 할 수 있는 밑천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믿거라 하는 구석이 있으니 미래에 대한 계획도 자유롭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를 제 자신에게 질문하며 보냈어요. 현재로서는 긴급구호 활동이 1순위이고, 다음이 요트 여행이죠. 그 다음에는 세계의 재래시장과 부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언젠가는 한국식 전통 유스호스텔도 운영하고 싶어요. 그렇게 얼추 계산해보니 110세까지 살아야 할 일을 할 것 같더라고요.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수명이 79.2세라니 아쉬울 뿐이죠.”

    -해야 할 일 목록 중에 결혼은 없습니까.

    “당연히 있죠. 그동안 사랑한 사람도 있었지만 떠나보냈어요”

    -왜 헤어졌죠. 헤어질 때는 괴롭거나 슬프지 않습니까.

    “저는 유목생활을 좋아하는데 상대방은 정착생활을 원하죠. 그러면 별 수 없죠, 결별해야지. 헤어질 때는 꼭 합의 해서 합니다.”

    -이상적인 결혼 상대자를 꼽는다면.

    “같은 길을 갈 사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귀고 싶어요. 정서가 통하고, 마음을 맞춰 이야기할 수 있는 품위 있는 남자. 그런 결혼생활이라면 아름다울 것 같아요. 그런데 일로서, 동료로서 멋진 남자를 많이 만났지만 결혼은 쉽게 안되더라고요.”

    -동료로서 만난 멋진 남성을 소개할 수 있습니까.

    “케냐에서 근무하고 있는 40대 독신 안과의사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7년 가뭄이 계속되니 사람들이 손을 씻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눈병이 많고, 심할 경우 장님이 됩니다. 이 때문에 시각 장애인들이 유난히 많아요. 또 시신경이 뇌를 자극해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수도 있고요. 그래서 거리마다 이상하게 웃거나 고함 지르며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죠.

    나이로비로 나가면 큰돈을 벌 수 있는데도, 이 의사는 소말리아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깊숙이 들어가는 원주민 촌에서 무료 인술을 베풀고 있어요. 비싼 돈 들여서 배운 것을 돈 버는 데만 사용하기에는 인생이 아깝지 않냐고 말하더군요. 동료로서 사랑스럽고 눈물이 날 정도로 멋진 분이었죠.”

    그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 입양한 두 딸은 각각 에티오피아와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다. 직접 데리고 사는 것은 아니고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맡은 것. ‘아이들에게서 온 서툴게 쓴 편지를 받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혼자 살게 된 것은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다. 식사준비를 해주곤 하던 어머니가 더 이상 안 계시니 이젠 그조차도 일거리가 됐다. 밥을 지어먹고 다닐 틈이 없는 동생을 위해 지금은 가까이 사는 언니가 반찬을 챙겨놓고 돌아가곤 한다.

    -외롭지 않으세요.

    “글쎄요. 외로움을 타고난 운명이 아닐까 해요. 운세를 보는 방법도 여러가지잖아요. 그중에 손금-관상-골상의 순으로 정확도가 높다는데, 가장 확실한 것이 심상이라고 하더군요. 어떤 도사 한 분이 제 심상에는 ‘마음의 새’가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새 중에서도 맹금류라는 거죠.

    맹금류는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법이 별로 없죠. 독수리는 혼자 살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물론 혼자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지만, 나뭇가지에 앉아 쉬는 독수리는 매력이 없잖아요. 자유로운 날갯짓을 계속해야 아름답죠. 중간에 포기한다든지 실패할 수도 있지만 단 1%의 가능성만 있으면 끝까지 가보는 것, 아마 남은 인생도 그런 신조로 살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먼 하늘, 석양을 배경으로 바람을 따라 큰 날개를 펼치고 천천히 활공하는 한 마리 독수리. 세상의 눈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한없이 젊기만한 이 여성을 만나고 난 필자의 머릿속에는 그런 이미지가 남았다. 그의 두 눈이 앞으로 어느 곳을 향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해서 살아 움직이고 있으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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