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기획연재 | 한국축구, 그 황홀함과 씁쓸함에 관하여·하

축구냐 민주화 운동이냐

암울했던 80년대의 단상

  • 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축구냐 민주화 운동이냐

3/8
당시 대부분의 경기는 시차관계로 다음날 밤에 녹화로 보여주었다. 차마 컬러TV가 있는 안방으로 넘어가지는 못하고 사촌누나가 지내던 건넌방에서 봐야만 했다. 소형 흑백TV였지만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부모님이 주무시기를 기다렸다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고 사촌누나 방에 살금살금 들어갔다. 물론 아이스크림은 사촌누나의 입을 막기 위한 ‘뇌물’이었다.

몰래 본 게임이 더 재미있는 건 당연한 일. 스페인월드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서독과 브라질도 훌륭한 팀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프랑스팀이었다. 힘 안들이고 경기를 술술 풀어나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패스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작은 덩치임에도 다른 나라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서독이 다이내믹함, 잉글랜드가 파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발재간을 상징한다면, 프랑스 축구는 부드러움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중심에 ‘축구 예술가’ 미셸 플라티니가 있었다. 언제나 셔츠를 밖으로 내놓는 이 곱슬머리 선수야말로 82스페인월드컵을 통해 내가 발견한 최고의 기쁨이었다(포항제철 축구팀은 1982년 월드컵을 단체로 관람했다. 이때 21세의 나이로 참관했던 최순호는 플라티니와 프랑스팀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그가 은퇴한 뒤 프랑스로 축구유학을 떠난 건 스페인월드컵의 추억 때문이다).

월드컵 결승전에 오르지 말았어야 했을 세 팀이 있다. 최악의 팀은 역시 1982년 월드컵의 서독팀. 준결승에서 골키퍼 슈마허의 지저분한 반칙으로 승부차기 승리를 낚아챘지만, 실력으로 볼 때 프랑스가 진출해야 마땅했다. 1986년 월드컵의 서독팀도 스타일을 구겼다. 이번에도 준결승에서 프랑스를 꺾었지만 전력상 프랑스가 한 수 위였다. 아마 프랑스가 결승전에 올라갔더라면 아르헨티나의 우승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1990년 월드컵의 아르헨티나. 당시의 구질구질한 승부는 말 안해도 잘 알 것이다.

대입 낙방과 멕시코 신화

나는 82스페인월드컵이 끝난 뒤에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푹푹 찌는 여름방학 때도 학교에 나와 공부했다.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엔 뙤약볕 운동장에서 잠깐 공을 차고 샤워를 하면 머리가 맑아졌다. 드디어 학력고사. 잠도 충분히 자고 컨디션도 좋았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2교시에 급하게 수학문제를 풀다가 그만 한 페이지를 그냥 넘기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 객관식이니 그냥 찍는 수밖에. 나중에 확인해 보니 찍었던 수학문제 10개 중 2개가 맞았다.



나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그날 밤 만취해 난생 처음으로 오바이트를 하고 필름까지 끊어졌다. 다음날 점심 무렵 가까스로 일어났는데, 옆에 어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안아 줘, 엄마!” 어머니의 품에 들어간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음을 추스리고 학원종합반을 다녔다. 1983년 3월2일 토요일. 모든 걸 잊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봄날 오후였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연고전 축구 경기를 하는 게 아닌가. 봄철 전국선수권대회 개막경기였는데 축구협회에서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두 팀을 첫판에 맞붙인 것이다. 그때 고려대에는 신연호 김종부 김판근 등 멕시코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신화의 주역들이 신입생으로 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게임을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축구가 좋다지만 어떻게 시험에 떨어진 대학의 경기를 볼 수가 있는가. 게다가 공교롭게도 나랑 같이 공부하던 녀석들은 모두 연대 아니면 고대에 가고, 나만 떨어졌다. 응원단 속에는 친구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순간 자괴감과 열등감으로 범벅이 된 나는 TV를 꺼버리고 방을 뛰쳐나왔다. 그러자 뒤이은 어머니의 목소리. “내년에 합격하면 된다! 그 좋아하는 축구를 왜 안 보노?”

1983년에도 어김없이 축구가 나를 괴롭혔다. 바로 온 국민을 열광시킨 박종환 축구가 위용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박종환 사단이 처음부터 국민적 관심을 끈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이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 첫 경기인 스코틀랜드전에서 0대2로 졌을 때만 해도 일간신문 스포츠면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실릴 정도였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전반전에 일방적으로 몰렸으나 후반전엔 상대를 완전히 압도했다(94미국월드컵 독일전을 연상하면 된다). 경기가 끝나자 멕시코 관중들이 승리한 스코틀랜드를 외면하고 “꼬레아! 꼬레아!”를 외칠 정도였다.

두번째 경기인 홈팀 멕시코전을 앞두고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은 신연호의 종료 1분전 결승골 덕분에 2대1로 이겼는데, 나는 이 경기가 생중계인 줄 알고 아침부터 난리를 쳤다. 그런데 옆 동네에 살던 사촌누나가 “기룡이 너 참 웃긴다. 두 시간 전에 라디오로 중계한 걸 가지고 왜 그러냐?”고 말해서 허탈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멕시코를 이기고 8강 진출의 가능성이 보이자 매스컴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예선 마지막 경기인 호주전에서 또다시 2대1로 이기자 청소년축구 소식은 9시 뉴스의 톱기사가 돼버렸다. 국제전화로 선수들을 인터뷰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축전이 이어졌다.

우루과이와의 8강전은 일요일 아침에 열려 온 국민이 지켜보았다. 한국은 일찍이 보지 못한 멋진 경기로 우루과이를 2대1로 눌렀다. 한발 빠른 패스를 구사하다가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그야말로 붉은 이리떼처럼 달려들었다. 스피드와 기동력이라는 한국축구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최고의 작품이었다.

브라질과의 준결승전이 열리기 전날 4000만의 관심은 온통 멕시코로 쏠려 있었다. 보름째 단식중인 김영삼씨의 소식은 쏙 들어가 버렸다. 전두환의 우민화정책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던 순간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는 각 반마다 내기가 벌어졌다.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들도 축구 이야기로 한동안 ‘썰’을 풀고 강의를 시작했다. 어느 선생은 칠판에 축구장을 그려놓고 한국선수들을 포지션별로 설명하기도 했다. 수학선생은 자기가 선생님들과의 내기에서 이길 가능성이 몇%인가를 확률 공식으로 따졌다.

준결승전이 벌어진 날, 나는 학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TV를 봤다. 1대2로 아깝게 졌지만 대단한 선전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패하고도 멕시코 관중들에게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관중들이 운동장을 한바퀴 돌라고 함성을 지를 정도였다. 하지만 진 것은 너무나 열받는 일.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공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학원을 땡땡이치고 뒷산에 올라가 혼자 고함을 지르고 시내를 쏘다니며 분을 삭이고 나서, 저녁이 돼서야 집에 들어왔다.(한국은 비록 4강에 그쳤지만 선수들은 대회 내내 반칙을 하지 않고 깨끗한 플레이를 펼쳤다. 이 때문에 주최측에서는 예정에도 없던 페어플레이상을 주기도 했다).

3/8
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목록 닫기

축구냐 민주화 운동이냐

댓글 창 닫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