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에라스무스, 평화를 사랑한 최초의 세계시민

  • 박홍규 < 영남대 법대 교수 > sky3203@donga.com

    입력2004-09-01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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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선 ‘경제는 일류, 정치는 삼류’라는 말이 유행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정치가 삼류’라는 말은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할 듯한데, 그렇다면 경제는 일본처럼 일류일까? 경제인들은 그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한편 문화는 어떨까?

    독일의 경우 역사적으로 ‘문화는 위대하나 정치는 후진’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경제는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영국병’이니 ‘프랑스병’이니 하는 말은 있지만 ‘독일병’이라는 말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독일에는 문화와 정치에 관한 ‘독일병’이 있다.

    우리에게 독일은 문화의 나라로 보인다. 그중 대표 격은 역시 음악이다. 음악은 질서인 동시에 혼돈을 내포하는 비이성적, 신비적인 것이다. 현대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만은 1945년에 쓴 ‘독일과 독일인’이라는 글에서 독일인이 자랑하는 내면성이란 곧 음악성이라고 했다.

    정신적 귀족, 정치적 노예

    그 글에 따르면 내면성의 존중이란, 인간의 힘을 정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으로 나누고 그중 전자를 우위에 두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담한 사상서나 아름다운 시는 쓸 줄 알지만 정치적으로는 미성년처럼 조잡스러운 상태,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는 노예이면서 정신적으로는 귀족인 상황이 펼쳐진다. 토마스 만은 이러한 반정치성이야말로 음악성과 내면성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화를 낼지 모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얘기가 아니라 토마스 만의 주장이다.



    그런데 만은 ‘정치성의 우위에 있는 내면성’의 대표자로 음악가가 아닌 루터(1483~1546)를 꼽는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신과 인간 간의 직접적 관계를 설정하고 스콜라철학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연구 및 비판의 자유를 부흥시킨 반면, 종교의 자유 이외의 정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후 터져나온 농민반란이 성공했다면 독일도 정치적 자유를 확보했을 텐데, 루터가 이를 ‘정신적 해방사업의 모독’이라 매도하고 반동 제후에 굴복하는 바람에, 독일인들 사이에 권력에 복종하는 태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만의 분석이다.

    즉 문화를 사랑하나 아무런 정치적 권리가 없는 독일 시민은 야만적이고 국수적인 권력에 복종하였으며, 문화인들도 비문명적이고 낭만적인 고도에서 현실과는 무관한 세상에 빠져 사는 상황이 전개됐다는 진단이다.

    또한 만은 세계주의를 지향한 괴테가 나폴레옹 타도를 외친 독일 민족주의에 냉담했던 것은 그것이 야만적이고 국수적이었기 때문인데, 불행히도 괴테의 사상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오해되는 바람에 정신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구분하는 루터의 이원론이 더욱 굳어졌다고 본다. 즉 독일인은 외국이나 국수적 이기주의를 제한하려는 경향에 늘 반항하며 이를 자유니 해방이니 하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 극단이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이는 자유를 향유해보지 못한 독일인이 세계를 정복하려 한 끝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만은 개탄한다.

    독일의 ‘이데올로기 병’

    만과 같은 시대를 산 막스 베버는 독일인의 반정치성을 이데올로기에 대한 병적 집착과 동일시한다.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병’이야말로 ‘독일병’이라 부를 만하다. 베버는, 독일인은 정치를 현실로 보지 못하고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에 집어넣는다고 했다. 이를 긍정할 경우에는 무조건 미화하고, 부정할 경우에는 무조건 혐오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독일인은 냉소적인 권력 만능주의와 현실성을 결여한 추상적 이념 사이를 극단적으로 왔다갔다하느라 안정성을 상실하고 만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베버는 마키아벨리적 정치관을 기본으로 하되 현실 정치와 윤리적 이데올로기의 균형적 관계를 수립할 수 있도록, 구체적 상황에 대한 주체적 겹눈의 사고를 배양할 것을 제안한다. 즉, 정치권력의 성격이나 현실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차 세계대전 이전의 광신적 국수주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평화주의를 옹호하고, 전쟁 말기의 평화주의 무드에 대해서는 민족주의를 강조한다. 이데올로기를 선험적인 것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구체적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화·상대화하는 유연한 사고방식과 주체적이고 강인한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변절 혹은 기회주의적 태도라고 욕하는 지조 높은 선비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절대주의자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자신을 인정하는 권력이면 복종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는 우리 선비의 전형적 태도에는 의문이 간다. 어떤 권력이나 대세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며 인간의 자유·평등·복지라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지식인은, 그것이 가능하도록 현실을 언제나 상대적·실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현실을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무조건 긍정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실용적 필요에 따라 대처하는 유연한 사고와 행동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미덕이 아닐까?

    주체적 정신이란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에 골수까지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그를 자유롭게, 그리고 유용하게 현실 개혁에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버에게 극좌와 극우는 언제나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면성에 뿌리 박은 반정치성이자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병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관점이기는 하나, 일찍이 신채호는 유교도, 불교도 한반도에서는 적절하게 변용되지 못한 채 ‘중국의 유교’ 혹은 ‘인도의 불교’ 모습 그대로 고착된다고 한 적이 있다. 더욱 정확하게는 중국의 수많은 유교 학파 중 주자학만이, 불교의 수많은 교파 중 대승 선불교만이 배타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근대 이후의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주자학이나 대승 불교가 유교나 불교 중 가장 ‘교조적’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기독교 주류나 마르크스주의 주류가 ‘교조적’인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교조성’은 정치권력과 결부되었을 때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그러한 ‘교조성’이 깊이 뿌리내린 배경에는 독일에서와 같은 정신성의 강조라는 측면 외에 어떤 ‘체질’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체질의 기저에는 불교가 ‘호국불교’로 권력화되었다는 좀더 근원적인 요소와 함께, 그것을 대체한 주자학마저도 본질적으로 권력적이었다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르네상스의 역사를 최초로 체계화한 부르크하르트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독일 역사(로 쓰여진 것)를 ‘승리사(勝利史)’라 비꼰 적이 있으나, 차라리 영웅사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천재사’ 역시 영웅사의 일종이다). 그 영웅사는 기원 직후 로마와 싸운 게르만민족 영웅의 이야기로 시작돼 루터를 거쳐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그리고 히틀러로 이어진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란 것이 기본적으로 독일을 모델로 한 탓에 독일식 영웅사관은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도 뿌리내렸다. 신채호의 영웅사관이나 민족사관도 그중 하나이리라.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는 영웅사관이 무너진다. 새롭게 쓰여진 독일 역사는 로마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원후 4세기, 마침내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나, 동시에 나라는 동서로 나뉜다. 동서 구분에 의해 기독교는 가톨릭과 그리스정교로 갈리고, 두 문명은 20세기의 냉전으로까지 이어진다. 동로마는 15세기 터키에 무릎을 꿇는다. 서로마는 북방민족의 침략에 의해 5세기 무렵 망한다. 그러나 북방민족은 로마식 통치를 이어갔으며 특히 교회를 통해 이념적 지배를 계속한다. 예컨대 지금 가톨릭 신부들이 입는 미사복은 로마 관리들이 입던 옷이다. 9세기 들어 서유럽은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모태가 된 두 지역으로 분할된다. 그러나 독일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건 16세기에 이르러서다. 이에 따라 최근 독일에서는 독일사를 15세기 이후부터로 잡는다. 뒤이어 나타난 16세기의 영웅이 바로 루터다.

    16세기경 독일 인구는 약 1000만명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늘 “주여, 저희들을 페스트와 굶주림, 전쟁으로부터 구원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전쟁은 기아를 낳고, 기아로 약해진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그런 위기 속에서 지배자였던 교회와 세속 권력은 반목을 거듭하였으며 마침내 독일이라는 민족이념이 발생한다.

    민족이념이 발생한 것은 독일뿐만이 아니었다. 유럽 전역에서 나타났다. 독일의 경우에는 휴머니스트나 정치가가 아닌 종교개혁가 루터에 의해 민족이념이 확립된다. 이에 제동을 건 사람이 에라스무스(1469~1536)다.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은 13세기부터 나타났다. 루터도 오직 성서와 신앙을 통한 신의 은총을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 영혼의 부정한 거래, 성직자들의 권력 남용,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교회의 독점권 등을 부정한다. 다른 종교개혁가들과 달리 루터는 권력의 지지를 받아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그래서 이미 당시 사람들로부터 ‘독일의 헤라클레스’로 불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독일은 하나의 국가가 아닌 분산된 지방권력을 뜻하며,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민족국가의 형성을 촉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형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빚었다.

    우리는 세계사 수업을 통해 루터와 에라스무스 모두 그저 ‘종교개혁가’라 배우나, 사실 두 사람의 사상은 적대적이다. 에라스무스에 대한 또 한가지 ‘암기사항’은 그가 ‘우신 예찬’을 쓴 휴머니스트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 책은 ‘바보’라는 이름의 여자가 뻐기는 이야기다. 바보 여자의 바보다운 제 자랑 수다인 것이다. 책의 본래 이름도 ‘바보 자찬’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바보를 왜 ‘우신(愚神)’이라는 이상한 말로 번역했는지, 또 ‘자찬’을 왜 ‘예찬’이라고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책이 세계사 시간에까지 등장하는 것일까?

    “바보의 말을 들으라”

    이 책은 40세의 에라스무스가 이탈리아를 돌아보고 와 지은 것이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본 것은 르네상스의 찬란함이 아니라 낭비와 사치에 젖은 온갖 타락이었다. 그 실망감을 장난스럽게 표현한 소품이 ‘바보 자찬’이다.

    에라스무스는 학문적으로 심각한 내용의 두터운 저서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잊혀져 버렸으며 남은 것은 이 작고 무례한 풍자집, 치기 어린 방종과 경망스러움이 가득한, 순간의 바람기로 생긴 사생아 같은, 바보를 예찬한 책 한 권뿐이다. 이는 볼테르가 180여 권의 저서를 남겼지만 남은 것은 역시 짧은 풍자소설 ‘캉디드’뿐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바보 자찬’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바보니까 바보 같은 소리만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또한 바보이기에 정상인이라면 할 수 없는 소리도 곧잘 한다. “나 없이는 세상에 어떤 집단도, 어떤 사회도 편안하게 유지될 수 없다. 내가 없이는 민중이 군주를, 주인이 하녀를, 선생이 학생을, 아내가 남편을 … 즉 인간이 인간을 견뎌내지 못한다. 상인은 그저 돈을 과대평가하는 일을 하고, 작가는 우쭐한 명예 때문에 글을 쓰고, 군인은 과대망상 때문에 싸운다. 따라서 나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바보는 자신을 예찬한다. “삶 속에서 우둔함에 사로잡혀 있는 자만이 진실로 인간이라 불릴 수 있다.”

    이 책은 에라스무스가 언제나 이중적이었던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대담하면서도 종종 불안해하고, 대단한 추진력으로 밀고 나가다가 마지막 결단에서는 우유부단해지며, 정신은 투쟁적이나 가슴은 평화를 추구하고, 저술가로서 자만하나 인간으로서는 비굴해보일 만큼 겸손하고, 이상주의자이면서도 회의적이다.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음이나, 역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보편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또한 이 책은 가톨릭에 대한 설명에서 별안간 비수를 던져버림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다. ‘역사적 저술’로 탈바꿈한 것이다. 에라스무스 자신은 가톨릭에 대한 반란을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평화와 합일의 종교를 꿈꿀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바보를 통해 던진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꿨다. 그것이 ‘바보 자찬’이 세계사 시간에 등장하는 이유다.

    세계사 교과서는 그를 휴머니스트로 소개한다. 휴머니스트란 무엇인가? 번역하면 인간(중심)주의자 정도인데, 그렇다면 인간주의란 또 무엇인가? 흔히 중세의 신 중심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라 하는데 인간 세상에 인간주의란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거기에 무슨 심오한 사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공정성, 인류의 가장 높은 이상

    에라스무스는 독창적인 사상가나 혁명가가 아니다. 면죄부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달성한 루터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로 유명한 ‘팡세’의 파스칼, 또는 ‘자연상태’니 ‘사회계약’이니 하는 개념으로 유명한 ‘에밀’의 루소가 여러 이미지를 갖고 있는 점에 비해, 에라스무스는 그다지 특징적인 면을 갖고 있지 못한 사상가다. 한마디로 말해 그에게는 혁명의 열정이나 사상적 심오함이 없었다.

    홀바인이 여섯 번, 뒤러가 두 번이나 그린 그의 초상화는 그저 단호한 지식인의 느낌만을 준다. 그림에서 그는 언제나 글을 쓰고 있다. 연약한 우울증 환자였던 그는 그러나 일을 할 때만은 거인이었다. 하루 무려 20시간씩 일을 했다. 이를 통해 11권에 이르는 대형 저작과 성서 및 신학, 문법, 수사학, 교육론, 역설과 웃음의 문학작품, 문명비판 등 지극히 넓은 분야를 섭렵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요사이 우리가 인문학이라 부르는 전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휴머니스트를 인문주의자, 인문학자라고도 하는데 에라스무스는 그야말로 ‘휴머니스트의 왕자’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그의 관심 분야가 넓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가장 혐오한 적은 특정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투쟁 및 전쟁을 일삼는 것이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헤게모니와 권력을 잡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파벌 다툼을 벌인다. 휴머니스트는 어떤 권력, 파벌, 투쟁에도 가담해서는 안된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함에 있어 편파적인 것이 권력투쟁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휴머니스트는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지킨다. 인류의 가장 높은 이상인 공정성은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휴머니즘이란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사고하고 이해하며 타협하고 결합하는 활동방식을 뜻한다. 편협함 속에 사는 옹졸한 자나 증오 속에 적의를 품고 사는 자는 휴머니스트일 수가 없다.

    또한 휴머니스트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며 그 세상을 사랑한다. 당연히 이데올로기에 매일 이유가 없다. 세상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휴머니스트는 그 다양성을 무시하고 억지로 공통점을 찾아내 모든 가치를 획일화하고 통일시키려는 태도에 맞서 싸운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휴머니스트는 때로 반민중적일 수 있다. 휴머니스트다운 낙관주의는 보통 지배하는 집단의 것이지 지배받는 민중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문교육을 받은 자들에 의한 과두정치나 귀족정치를 선호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허위의 정신(精神)제국’일 뿐이다.

    에라스무스와 마키아벨리는 모두 1469년생이니 500년도 더 전의 사람들이다. 알베르티보다 65년, 레오나르도보다는 17년 늦게 태어났다. 알베르티가 죽었을 무렵 태어났고 레오나르도와는 한 세대 차이가 난다. 알베르티, 레오나르도와 함께 마키아벨리는 모두 이탈리아 태생이나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 태생이다.

    에라스무스와 마키아벨리는 60세 전후인 1527년과 1536년에 각각 죽었다. 사상가답게 모두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얼굴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에라스무스의 굳게 다문 입술에는 숭고한 이상이 깃들어 있으나, 마키아벨리의 조소 머금은 얇은 입술에는 현실의 냉혹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에라스무스는 국경을 저주한 세계인으로 살았으나,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인류공동체사상의 상징이랄 수 있는 에라스무스는 권력자에게, 개인적 요구는 물론 국가적 요구마저도 인류공동체의 평화라는 이상 밑에 두어야 한다고 요구한 반면, 국민국가사상의 상징인 마키아벨리는 권력자의 권력의지를 최고 목표로 삼아 국시의 가차없는 관철을 지고의 과제로 상정한다. 국시의 관철,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에라스무스의 인류공동체론이 우리에게 아주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우리말로도 번역된 ‘에라스무스’에서 에라스무스가 죽자 마키아벨리가 득세해 정치는 윤리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즉 에라스무스는 정치를 도덕 밑에 두나,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도덕에서 떼어내버렸고, 이로 인해 정치는 이상과 실리, 윤리와 외교, 인류와 국가, 협력과 대립, 통합과 분열, 타협과 갈등이라는 차원으로 대립적 양상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에라스무스를 좋아하고 마키아벨리를 싫어한 츠바이크가 지어낸 소리에 불과하다. 에라스무스가 살아있을 때도 정치는 윤리와 무관했다. 아니 인류사의 처음부터 그랬다. 예부터 군주는 마키아벨리의 군주였지 에라스무스의 군주가 아니었다. 민주주의니 뭐니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마키아벨리식 군주의 득세다. 절대권력의 대통령, 그것이 군주와 다를 게 뭐 있는가?

    그러나 인류사는 또한 에라스무스의 역사이기도 하다. 철인정치를 주장한 플라톤으로부터 몽테뉴·볼테르·스피노자·칸트·톨스토이·간디·킹에 이르기까지, 인류애란 주제는 끊임없이 주장해온 가치였다. 약삭빠르고 냉혹한 마키아벨리가 어리석고 몽상에 젖어있는 에라스무스를 끝없이 조소해도, 게다가 현실은 늘 마키아벨리의 정확성을 입증해주고 있는데도 정당성은 언제나 에라스무스의 몫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아니다. 마키아벨리도 에라스무스도 오해받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의 아들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썩어빠진 현실을 개혁할 힘있는 민중적 군주를 대망했고, 에라스무스는 분열된 국가와 썩은 종교를 대체할 인류적 이상을 추구했다. 따라서 츠바이크 식의 대립적 사고만으로 두 인물을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다 현실을 개혁하려 했으며, 낡아빠진 전통을 부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써 실마리를 삼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주의란 현실에 영합하는 기회주의나 보수주의 또는 처세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부정 및 변혁으로서의 그것을 의미한다.

    에라스무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신학을 연구했다. 신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보다 파리대와 옥스퍼드대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신학자로서 에라스무스는 그다지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화’를 위해 그를 주목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수준이 의심되는 ‘우신 예찬’ 류의 중역(重譯)에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여러 차례 번역되었으나, 아직도 중역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만드라골라’의 번역도 마찬가지다.

    독재와 폭력을 부정하고 평화와 자유를 추구한 츠바이크가 히틀러 집권 1년 뒤에 쓴 ‘에라스무스’ 첫머리에는, 에라스무스가 어느 편이냐는 질문에 “그는 늘 자신만 대표한다”고 답한 당대인의 말이 인용돼 있다. 그렇게 에라스무스는 평생을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살았다.

    “나는 나만을 대표한다”

    그는 사생아, 그것도 신부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났다. 그나마 부모가 일찍 죽는 바람에 성당에 맡겨졌다. 언제 어디서(네덜란드는 분명하나) 태어났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다만 20세 무렵인 1488년 신부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주 관심사는 종교가 아닌 예술이었다.

    그는 평생을 신부로 살았다. 그러나 신부복을 입지 않았고 수도원에도 가지 않았으며 예배도 거부했다. 그에게 가톨릭은 감옥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제후·영주·대학에도 구속당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자기 위에 그 누구도 두지 않았다.

    평생 자유인이자 독립신자였던 그는,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권력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타협했다. 신부의 신분으로 교회에 저항한 혁명가 루터와는 전혀 달랐다.

    30세 무렵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국에 살게 되면서 그는 비로소 자기 영역인 학문과 예술을 발견한다. 50세경 유명해지기까지 그는 구걸해 얻은 빵으로 연명할지언정 자유와 독립을 지향하는 삶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묶으려는 특정 개인이나 대학에 묶이는 대신 인쇄소 교정원, 가정교사 등 ‘자유직’을 전전한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일 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유목민처럼 이곳 저곳, 이 나라 저 나라를 쏘다녔다. 모든 외부의 힘과 출세에의 유혹을 거부하고 기피했다. 그에게는 집도, 고향도 없었다. 오직 방랑과 방황뿐이었다. 항상 공허 속에 살았다. 삶은 오직 책 읽기와 글쓰기에 바쳐졌다.

    공허 속에 살기에 그는 투명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나 창조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넓은 정신을 지닌 ‘올바른’ 사상가다. 그는 몽테뉴에게까지 이어지는 16세기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열린 마음과 회의적 관용의 전형이다. 그들은 명료하되 경직되지 않은 시각으로 인간사를 관찰한다. 모든 학문의 이론적 가치를 실천의 관점에서 회의한다.

    에라스무스는 중세의 미신을 거부했다. 그러나 종교적 관행마저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종교는 인간의 실천적·지적 능력의 유한성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감수성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그가 비판한 것은, 기도문이나 교리에 대한 논쟁을 정치적 논쟁 혹은 죽기살기 식의 싸움질로 연장해가는 지적 독단론이었다. 그는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강한 비판을 가했다.

    에라스무스는 적대적 현실 속에서 유한성을 가르쳐주는 중용을 강조했다. 중용이란 단어에 대해 오해 없길 바란다. 여기서 중용이란 이도 저도 아닌 회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확고한 진리나 무조건적 확실성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다. 따라서 중용은 기본적으로 회의 정신이다.

    그런 회의에 따라 에라스무스는 괴테 사상과 같은 모호한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그에게는 파스칼의 ‘심연’도 없다. 루터나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영혼의 흔들림도 없다. 대신 그는 장난꾸러기처럼 권력과 종교를 조소하며 살았다. 스위프트·레싱·볼테르·하이네·니체·쇼가 뒤를 이었다.

    그는 권력의 더러움을 안다. 그러나 한칼에 모든 악을 베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버릴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오직 날카로운 눈과 경멸의 눈초리로 더러운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단테가 “보아라, 그리고 알았으면 가던 길을 계속 가라”고 한 그대로 묵묵히 자기 길을 간다.

    그의 조국은 세계였다. 여기서 세계란 유럽지역을 말한다. 당시는 아직 국가 간 대립이 격심하지 않던 때다. 그는 유럽을 조국으로 삼은 최초의 유럽인이자 최초의 비판적 평화애호 인문주의자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 투쟁에서 루터에게 패했다.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의 마지막에서 “다른 것들이 흥분해 소란을 피울 때, 이성은 침묵해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는 온다. 언젠가 다시 그 시대는 온다”고 썼다. 히틀러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쓴 1년 뒤 나치를 피해 망명하고 결국 남미에서 자살했다. 그러나 그가 되살려낸 에라스무스는 지금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부활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평화의 탄핵’에서 ‘전 세계는 공동의 조국’임을 선언한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영국이니 독일이니 프랑스니 하는 그 ‘바보’같은 이름들로 갈라져 있어야 한단 말인가? 에라스무스는 보편인, 공평한 사람, 자유롭게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그를 구현하는 인문주의의 표상이다. 이제 그는 야만 반대자, 모든 후진성과 전통주의를 퇴치하는 투사, 더 자유로우며 더 인도적이고 더 고양된 인간성의 예고자, 앞으로 올 세계시민의 안내자로 내세워지고 있다.

    그에게는 보편인의 또 다른 유형인 레오나르도나 파라셀수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대담한 가치 추구나 투쟁 등의 파우스트적 면모가 없다. 반대로 이성, 명료성, 인식가능한 것에 만족하는 성향, 도시적 본질, 온건한 개혁성, 온화함, 반폭력성, 통일성, 독선적인 독재에 대한 반대, 모든 전쟁에 대한 반대, 평화주의로 시대의 총아가 된다.

    그는 “가장 정당한 전쟁보다도 부당한 평화가 훨씬 낫다”라는 키케로의 말을 지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전쟁 중에 최고의 행운을 잡는다면, 그건 일부의 행운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파멸의 근원이다.”

    유토피아론의 명과 암

    나는 몇 년 전 전쟁기념관 건설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매국노로 찍혀 갖은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옳든 그르든 조국’이라는 무조건적인 애국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진정한 애국주의란 조국의 무엇이 왜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어야 한다. 즉 애국주의를 옹호하는 경우에도 그 이유, 예컨대 민주주의·자유·인권 등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애국주의자라 해도 국가가 그런 가치에 반(反)할 경우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애국은 조국을 사랑함은 절대 당연하다는 식으로 감정에 호소하고, 애국심이 없는 인간은 이 나라를 떠나라는 식의 배타적 독선에 입각한다. 성숙하고 책임 있는 자율적 판단이 결여돼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비이성주의다.

    에라스무스의 친구 중 영국의 토마스 모어가 있다. 모어는 대법원장까지 지냈으나 당시 헨리8세가 이혼문제로 로마교황과 대립했을 때 후자 편을 들어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카톨릭은 그를 순교자로 받든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라 그가 쓴 ‘유토피아’에 있다.

    유토피아란 비현실적 이상향을 뜻한다. 모어의 유토피아도 그렇다. 우선 사유재산이 없다. 집 자물쇠도 없으며 누구나 다른 이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집은 10년마다 추첨에 의해 바뀐다. 농업 담당도 교대제다. 누구나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시장에서 가져다 쓸 수 있고 돈이나 물물교환도 없다. 불로소득에 의존하는 귀족은 없으며 건강한 사람은 모두 일을 하고 사치품이 아닌 생필품만을 생산하므로 노동은 1일 6시간으로 충분하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이상한 구석도 있다. 예컨대 선거나 의회가 열리는 때를 제외하고는 정치에 대해 말하면 사형에 처해진다.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거나 혼자 멋대로 여행하는 것도 금지다. 특히 모두 같은 모양의 옷을 입어야 한다. 이래서야 교도소 생활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사치를 금하고 자원을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나온 아이디어이지만, 사회주의권 인민복처럼 반(反)개인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란 비난을 면키 어렵다.

    이런 발상은 르네상스인 모어가 깊이 경도된 플라톤의 ‘국가’ 중 아테네 비판-스파르타 찬양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공동식사제도가 그렇다. 같은 그리스를 모델로 삼는다 해도 아테네냐 스파르타냐는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플라톤과 모어, 루소는 스파르타파이지만 러셀은 아테네파다.

    그러나 사유재산 폐지와 그에 따른 계급 폐지, 여성에 대한 열린 태도, 공화제 옹호 등과 같은 모어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지극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것이 모어 혼자만의 공상이었을까? 그의 친구였던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당시 휴머니스트들이 공유했던 꿈은 아니었을까?

    에라스무스와 루터는 흔히 종교개혁의 두 아버지로 불리지만 평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츠바이크는 두 사람이 너무 달랐다고 했다. 정신 대 육체, 열광 대 회의, 온건 대 광신, 지성 대 야성, 이성 대 격정, 문화 대 원시, 대화 대 함성, 평화 대 전쟁, 세계시민 대 민족주의, 개혁 대 혁명. 루터는 스스로 “보헤미안처럼 처먹고 독일인처럼 마신다”고 할 정도로 건강하고 활기에 넘쳤다. 에라스무스는 지나치리만큼 유식했다. 폭넓은 시야를 갖췄으며 박학다식했다. 그러나 루터는 좁았다. 좁은 만큼 격렬했다. 그렇기에 둘의 싸움에선 루터가 승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대중작가 츠바이크의 과장이다. 루터는 그렇게 폭력적이지도, 에라스무스느 또 그렇게 부드럽지도 않았다. 루터는 무절제한 언어를 구사했으나 종교 문제로 무력을 사용하거나 권력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는 ‘인간은 술과 여자로 인해 타락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술을 금하고 여자를 폐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극단적인 종교전쟁은 루터의 후배들에 의해 벌어졌다. 한편 에라스무스는 루터보다 신랄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평화를 사랑했다.

    칼뱅은 제네바에 신권적 독재정권을 수립한 전체주의자라는 점에서 앞의 두 사람과 구별된다. 그는 신자들의 생활을 규제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추방했으며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래서 츠바이크는 그를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원조라 했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국가이성의 창조자라 할 수 있다. 국가이성이란 외국이 위협하는 상황에 놓인 국가 비상시에는 권력자가 국가의 존속을 위해 위법하고 범죄적인 모든 조치를 취해도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16세기 이래 이 학설은 권력엘리트에게 이용돼 타국의 위협을 구실로 한 사회의 군사화를 가져왔다. 사회주의 붕괴란 이러한 군사사회의 자멸을 뜻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인가 이상주의인가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과 루터의 신앙은 19세기 헤겔의 손에서 종합된다. 세계사를 통한 정신의 자기실현을 논한 헤겔 철학은 본질적으로 나폴레옹전쟁의 철학이었고, 그 핵심은 국가이성의 신격화에 있었다. 반면 헤겔은, 시민사회는 인권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낳았고 그것에 대한 열광이 프랑스혁명의 공포정치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테러를 유토피아론 탓이라 보는 현대의 학설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헤겔은 애덤 스미스를 따라 시민사회를 ‘욕망의 체계’로 설명하며 이를 ‘부르주아 사회’로 환원시켰다. 이 견해는 근대시민혁명을 단지 부르주아혁명으로만 본 마르크스에 그대로 원용됐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국가이성론도 그대로 계승했다.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이란 어디까지나 위기상황에 대한 것으로서, 인간은 위기 극복이라는 필연에 지배되나 자체 역량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와서는 권력자의 술수에 의한 국가통제라는 과제가, 과학기술에 의한 자연 통제와 그것이 초래하는 경제발전이라는 과제로 변형되었다. 즉 마키아벨리의 ‘필연’이란 마르크스에 와서 기술과 경제를 원동력으로 하는 역사적 발전의 법칙으로 치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론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이론이 마키아벨리와 헤겔을 거친 국가이성 이론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즉 근대적 기술로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인간집단을 통제해야만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국가의 사멸’을 약속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어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레닌의 10월혁명은 독일군 참모부가 꾸민 군사음모라는 설이 있다. 그를 혼란상황의 러시아로 보내 무력으로 입헌의회를 해산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닌은 독일의 ‘주구’였던 셈이나, 어쨌든 레닌은 자신의 행동을 ‘역사적 발전법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스탈린은 제국주의의 군사적 포위 상황을 이유로 공산당 독재를 국가이성이라 주장하며 역사적 필연으로 정당화했다. 이러한 국가이성과 기술이 초래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구 소련 붕괴의 도화선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또 다른 흐름으로 모어를 계승하는 유토피아적 시각이 있다. 이는 처음엔 좌익정치와는 무관한 일종의 사회개혁안으로 제기돼 미국의 에머슨 등에게 이어졌고,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도 전해졌다. 그 사회개혁안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구체성을 결여한 채 역사법칙이라는 신학적 도그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마르크스주의와 대비된다.

    19세기 유토피안 중 벨라미는 국영화된 산업화의 기계를 예찬하고 웰스는 플라톤류의 훈련된 지배계급이 다스리는 국가를 몽상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모리스가 있어 19세기 유토피아는 삭막한 전체주의의 악몽으로 그치지 않게 된다.

    물론 오언·푸리에·톨스토이 등의 계획처럼 실패한 사례도 많다. 그러나 J. S. 밀처럼 오언의 계획은 완전한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학자도 적지 않았다. 이는 어디까지나 실험에 의한 시행착오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처럼 절대를 신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유토피아적 공동체에 대한 실험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특히 푸리에나 오언이 협동조합운동이나 도시계획, 교육사상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음은 이들이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근거로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갔음을 보여준다.

    모든 유토피아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이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외쳤을 때의 그 ‘꿈’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그런 만큼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은 정치적 현실에 비추었을 때라 할지라도 무의미한 시도는 아니다. 단순한 꿈이 아닌, 실현 가능한 비전일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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