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노’라고 말하는 참모가 세상을 바꾼다

지도자와 명참모, 그 오묘한 관계

  • 이철희 정치평론가

    입력2004-08-31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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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역사라는 무대에 나선 숱한 배우들을 기억한다. 영웅호걸들이 출연한 장쾌한 드라마의 이면에는 그들을 움직인 숨은 조력자들이 있다. 탁월한 지도자들을 도와 역사를 움직인 명참모들. 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이상을 펼치려 했을까. 대통령 선거를 맞는 우리 정치권이 기대하는 바람직한 참모상은 무엇일까.
    재미있는 퀴즈 하나.

    삼국지의 영웅 조조, 명나라를 연 풍운아 주원장, 단종애사를 통해 집권한 패왕 세조.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답은 역사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이 어느 순간 누군가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대가 나의 장자방이다.” 조조에게는 순욱이, 주원장에게는 유기가, 세조에게는 한명회가 장자방이었다. 그들이 훌륭한 참모를 만나 ‘드디어 나도 장자방을 얻었다’고 희희낙락한 것은 장자방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능력 있는 참모’의 역할이 지도자의 성공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지도자가 성공하게 되는 요인은 여러가지다. 불굴의 의지, 출중한 외모, 유창한 언변, 넉넉한 친화력, 카리스마 등등. 더러는 운이 좋아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도자의 리더십과 참모의 역량이다. 지도자는 비전과 정치력을 겸비한 리더십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지도자들은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지 않고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창조적 상상력, 즉 비전을 제시했다. 또 막스 베버의 말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얻은 힘, 즉 정치력으로 비전을 실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성공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성공의 이면에는 반드시 훌륭한 참모들이 있었다.

    강태공, 관중, 장량(장자방), 소하, 제갈공명, 순욱, 야율초재, 유기, 정도전, 한명회…. 이들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성공을 만들어낸 명참모들이다.

    지도자 설득할 줄 아는 참모



    지도자와 참모가 성공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 즉, 지도자는 참모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하고, 참모는 지도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활용과 설득의 변증법이 성공의 요체다. 지도자의 성패는 참모를 제대로 활용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지도자는 때로 참모의 동지, 친구, 아버지, 아들, 장군, 이웃이 됨으로써 참모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

    참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모의 성공 여부는 지도자의 성패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한 발 먼저 시대와 흐름을 읽고, 아이디어를 지도자가 수용하도록 설득함으로써 지도자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끔 해야 한다.

    모든 책임을 지도자 한 사람에게 돌려버리면 편하긴 하나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물론 실패의 궁극적인 책임은 당연히 지도자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성패의 원인에 대해 참모의 역할 그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고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도 실용적 가치가 적지 않다. 그들의 사례는 오늘과 내일의 성공을 위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장자방(장량)이 누구인가? 그는 건달 유방을 도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를 제압하고 한(漢)왕조를 연 창업공신이다. 유방은 장량에 대해 “진중에서 계략을 꾸며 승리를 천리 밖에서 결정지었다”고 평가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용모가 여인 중에서도 미녀 같았던 장량은 전국시대 7웅(雄)의 하나인 한(韓)나라에서 역대로 재상을 지낸 집안의 사람이다. 장량이 유방을 도운 것은 사실 한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장량이 유방을 도운 사례는 수없이 많다. 주목할 것은 장량이 유방을 보좌한 방식이다. 급할 때 장량은 유방이 식사중이라도 거침없이 들어가 진언했고, 식탁에 있던 젓가락을 들고 이것 저것 가리키면서 알기 쉽게 설명했다. 사기(史記)에 남아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장량에게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이 있다. 그는 유방을 둘러싸고 있던 고향 출신 패거리들(소하, 조참, 주발 등) 이른바 ‘패(沛)마피아’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한나라 건국 후 패마피아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공신들이 팽(烹)당할 때 장량만은 살아남을 만큼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다. 들 때와 날 때를 알았기 때문이다. 사기에 장량은 병약했다고 적고 있다. 병약했기에 주위의 시기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독주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병약함을 핑계로 주위의 질시를 적절하게 비켜나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장량이 단순히 전투에서 이기는 계책만을 알고 있던 모신(謀臣)이 아니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장량의 진면목, 즉 경세가 혹은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이야기가 있다. 유방이 항우를 앞질러 관중에 입성했을 때다. 그때까지 항우에 비하면 세력이 미미하기 짝이 없었던 유방으로선 실로 처음으로 맞는 큰 승리였다. 관중에 먼저 들어가는 쪽에게 관중왕의 칭호를 주겠다는 진나라 회왕의 말을 생각하면 천하를 얻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이 유방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왜 그런가? 유방의 군대가 항우를 영수로 하는 군단의 일개 부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한 항우가 명분 때문에 순순히 천하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장량은 이러한 정세를 냉철하게 읽었다. 관중 땅에 먼저 입성하였다는 사실에 취해 전체 국면을 보지 못하면 대세를 그르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약탈을 일절 금하고, 장악하고 있던 관중 땅을 항우에게 내주자고 주장했다. 군세가 항우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관중 땅을 욕심냄으로써 항우를 자극하여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또 점령군으로서 은혜를 베풀면 인심을 얻게 된다는 정치적 계산도 했다. 뒤이어 입성한 항우군이 약탈을 일삼아 인심을 잃으면서 유방은 비로소 확실하게 황제 재목으로서 평가를 얻기 시작했다.

    장량은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큰 그림을 그렸다. 병법에도 공심위상(攻心爲上)이 최고의 전략이라고 했다. 유방은 관중 땅을 포기했지만 민심을 얻었고, 항우는 관중 땅을 얻었지만 민심을 잃었다.

    여기서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왕실을 침범하여 저지른 숱한 만행, 약탈로 민심을 잃은 사건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견훤의 참모 능환이나 최승우는 왜 장량처럼 대국적 안목을 갖지 못했을까. 유방이나 견훤이나 여자를 좋아하고, 도덕보다는 본능을 앞세웠던, 그야말로 비슷한 부류의 인물이었는데도 그 대응은 너무나 판이했다. 더욱이 욱일승천하던 견훤이 신라 왕실 침탈을 고비로 서서히 하락세로 반전하게 된 것을 반추해 보면 더욱 그렇다. 이렇듯 참모의 역량이 대세를 결정짓는 법이다.

    이제 시(時)의 고(古)에서 양(洋)의 서(西)로 시야를 돌려보자. 지도자를 도와 성공으로 이끈 참모 중에서 우선 독일의 한스 글로브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글로브케는 총리실장으로서 부처간 업무조정과 정보업무 등 핵심적인 일을 장악한, 수상 아데나워의 그림자였다. 그는 아데나워를 위해 내각의 각 부처와 정보부, 그리고 언론사 편집국, 이익단체에 물샐틈없는 정보망을 만들어 놓고 아데나워가 그들을 통해 세상 흐름을 일별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이 정보망을 통해 남보다 먼저 세부사항까지 파악했으며, 이를 토대로 내각회의에서 반대 그룹에 대한 맞대응 논리를 치밀하게 펴나갔다. 아데나워가 글로브케를 선택한 것은 그가 명석한 법률가이면서 행정가이기도 했지만, 나치 부역 전력 때문에 오직 아데나워에게만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로브케와 김대중 정권의 최고 실세인 박지원 비서실장은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박지원이 김대통령의 오랜 측근그룹인 동교동계의 적자가 아니라는 경력상의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 언론과 정보채널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정보망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점 등에서 둘은 비슷하다. 그런데 보좌의 내용에서 둘은 결정적으로 다르다. 글로브케가 제공한 서비스가 아데나워의 서방정책과 라인강의 경제기적 등 통치에 관련된 것이라면, 박지원의 그것은 이른바 국민의 정부의 정체성인 개혁정책보다는 특정인의 신변보호에 관련된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박지원과 관련된 수많은 의혹과 논란 중에 국정의 핵심 어젠더와 관련된 것이 있었던가. 비유컨대, 글로브케가 국정참모였다면, 박지원은 개인비서다. 어찌 박지원뿐이랴. 이기붕이 그랬고, 김형욱과 이후락이 그랬고, 차지철과 장세동이 그랬다. 그들에겐 단지 보스의 호오(好惡)와 안위가 문제일 뿐이었다.

    미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참모’ 인연으로 세 가지 사례를 꼽는다. 첫째는 우드로 윌슨과 에드워드 맨들 하우스, 둘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루이스 맥핸리 하우, 셋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셔먼 애덤스다. 이미 전설로 기록된 세 가지 아름다운 인연과 멋진 성공에 더해 역대 4명의 대통령을 보좌했던 데이비드 거겐은 클린턴과 딕 모리스의 인연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킹메이커, 해결사, 분신, 막후실세, 조타수, 마키아벨리스트, 충성심 넘치는 파수꾼, 지상의 정령 등 이 모든 별명은 단 한 사람 루이스 하우를 가리키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우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별칭은 루스벨트가 붙인 ‘노맨(No Man)’이었다. 이 별명 속에는 루스벨트를 성공으로 이끈 참모역할의 진수가 담겨 있다.

    루스벨트와 하우가 처음 만난 것은 1910~11년 즈음이었다. 당시 갑작스럽게 뉴욕주(州)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주상원에 진출한 루스벨트는 곧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는 태머니파(派)와 맞서게 된다. 이슈는 주상원에서 누구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루스벨트는 점차 반(反)태머니파의 숨은 리더로 부상했다. 이때 하우는 ‘뉴욕 헤럴드’와 ‘텔레그램’에 기사를 제공하기 위해 주상원이 있는 알바니에 체류하고 있었다. 뉴욕주 민주당내 혁신주의 그룹의 리더였던 오스본을 돕고 있던 하우는 다른 한편으로 반태머니파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우는 다른 의원들의 동향을 알려주었고,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안들을 코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리더인 루스벨트를 알게 됐다.

    하우가 루스벨트를 위해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부터다. 이 때 루스벨트는 28세였고, 하우는 39세였다. 뉴욕주 상원 선거에 두번째 도전한 루스벨트는 캠페인을 하우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루스벨트 자신이 장티푸스에 걸렸고, 부인 엘리너도 감염되어 중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보자와 후보자 부인은 집에 뉘어놓은 채 하우가 혼자서 선거를 치러냈다. 결과는 1631표 차로 당선. 캠페인이 끝난 후 엘리너는 하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나이는 자기가 이루지 못하는 야심을 남편을 통해서 이루려 하고 있다.”

    1912년 선거 이후 1928년 주지사 선거, 1932년 대통령선거를 거쳐 1936년 4월 하우가 사망할 때까지 루스벨트와 하우는 역사상 최고의 커플로 움직였다. 루스벨트는 설득력 있는 대중연설과 같은 일에 몰두했고, 사람을 만날 때나 정책을 제시할 때 자신의 개인적 매력을 고양하는 데 열중했다. 반면 하우는 비공개 활동, 언론 조종의 일을 떠맡았고, 지지자들과 후원자 조직을 구축해나갔다.

    하우는 탁월한 정치분석가 역할을 했고, 루스벨트의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유능한 비판자 역할에 충실했다. 때론 하우가 틀릴 때도 있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루스벨트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게으름을 질타하고, 생각의 폭을 넓히도록 자극했다. 이런 일은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루스벨트가 실수를 할 때면 기꺼이 그 책임을 뒤집어쓰는 희생양이 되었다. 대중의 신뢰는 루스벨트의 몫이었고, 비난은 하우의 몫이었다.

    하우는 루스벨트의 최측근 참모로서 요구되는 핵심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루스벨트의 결점에 대해서도 충성을 아끼지 않았으며 결코 루스벨트와 경쟁하지 않았다. 하루 24시간 을 루스벨트에게 맞춰 조정했고, 면종복배(面從腹背)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무서울 정도로 일에 열정적이었고, 루스벨트를 즐겁게 해주는 유머감각도 있었다.

    유난히 작은 키에 상대를 쏘아보는 빛나는 눈, 보기에도 섬뜩한 얼굴의 깊은 흉터, 낮고 메마른 느낌을 주는 목소리, 손질이 되지 않아 더러운 머리에 담뱃진으로 노랗게 물든 손톱, 45kg이 조금 넘을 정도의 바싹 마른 체구에 볼품없는 하우! 스스로 자신을 뉴욕의 4대 추남 중 하나라고 소개하는 하우를 루스벨트는 평생의 참모로 여겼고, 단 한번도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우는 왜 루스벨트를 선택했을까? 처음 일을 함께한 1912년부터 루스벨트가 해군차관을 거쳐 부통령으로 대선에 나설 때인 1920년까지는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라고 치자. 그러나 1921년 8월 루스벨트가 소아마비로 쓰러져 장장 7년 동안 공직에 나서지 못하고 있던 이른바 ‘열화의 시련기’에도 하우는 루스벨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유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에겐 루스벨트의 정치생명이 소아마비로 인해 끝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물론 이런 신념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기최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하우는 루스벨트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를 재기시켰고, 루스벨트는 마침내 주지사·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문자 그대로 그는 ‘킹메이커’였다.

    참모로서 하우가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노(No)’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보스 앞에서 ‘노’라고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견해를 말했고, 보스의 뜻을 그냥 추수하지 않았다. 사례 하나. 루스벨트가 루시 마사라는 여비서와 바람을 피우더니 급기야 엘리너와 이혼을 결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하우가 단호히 ‘노’하고 제동을 걸었다.

    “이 시점에서 다섯 아이가 있는 엘리너와 이혼하고 가톨릭 신도인 루시와 재혼한다면 당신의 정치적 생명은 끝난다.”

    그는 시니컬한 말투로, 하지만 불같이 냉철한 눈으로 가차없이 보스의 결정을 가로막고 나섰다.

    참모 하우에게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은 루스벨트의 정치기반을 형성해낸 능력이다. 하우는 농민과 노동자라는 거대한 집단을 루스벨트의 지지기반으로 만들어주었다. 그것도 어느 순간 갑자기 거래를 통해 노동자·농민 지도자들과 일시적 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벽돌을 쌓듯 정치적 연합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손때를 묻혀가며 일군 확실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하우는 루스벨트가 출마한 주상원 의원 선거 캠페인에서 루스벨트와 농민을 하나로 만들었다. 하우는 루스벨트에게 농민의 사투리를 가르쳤다. 소며 돼지며 사료 등 농민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가르쳤고, 가능한 한 저속한 말씨를 쓰라고 요구했다. 하우는 “좀더 위엄을 가져요. 목소리의 톤을 낮추고요. 왝왝 소릴 질러선 안돼요. 한 사람씩 농민에게 주입시키듯이 말해야 해요”라며 세세한 것까지 주문했다.

    루스벨트와 노동자를 하나로 묶는 작업이 본격화된 것은 루스벨트가 해군차관으로 재직할 무렵이다. 전시라 노동계와 관계된 일이 대단히 많았다. 하우는 루스벨트의 비서, 보좌관으로서 노동계급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그는 해군과 관련된 각종 노동관계 일을 통해 조직노동자들의 친구가 되었다. 노조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꾸준하게 유지했다. 그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일일 8시간 노동, 주 48시간 노동, 남녀 평등급여 보장 등 노동개혁법안을 지지했다.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루스벨트의 주지사·대통령 시절에도 이어졌다. 하우가 농민·노동자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개혁적 태도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들 세력의 정치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우는 1928년 뉴욕주 지사 선거를 총괄 지휘했다. 그의 별명이 ‘작은 보스’였을 만큼 루스벨트를 실질적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그는 1929년 1월 주지사 취임식이 끝난 뒤 주정부 내에서 어떤 공직도 맡지 않았다. 전임자인 알 스미스로부터 물려받은 인재들, 예컨대 플린이나 로젠맨, 퍼킨스 같은 사람들은 중용됐다. 그런데 정작 하우에게 주어진 자리는 없었다. 그것은 주정부에서 하우가 할 수 있는 일, 특히 정책적 일에 관해서는 하우의 몫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16년 동안 루스벨트로 향한 모든 접근로를 통제했고, 자신이 모른 채 진행된 일이 단 한 가지도 없었던 하우로서는 참기 힘든 수모였을 것이다.

    하우는 달라진 상황을 이해했다. 새로운 참모들의 충성심을 끊임없이 테스트하곤 했지만, 그간 자신이 참모로서 독점해오던 일, 영향력, 그리고 루스벨트와 나눴던 친밀한 우정을 그들과 공유했다. 하우는 심지어 몰리 같은 새로운 사람을 루스벨트에게 천거하는 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우의 역할과 위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루스벨트의 사택에 거주했고, 주지사 관저에 자신의 방을 확보하고 있었다. 범죄위원회에 계속 몸담고 있으면서, 일주일에 한번 주정부 청사를 방문하여 루스벨트에게 보고했다. 언제나 모든 일을 챙기는 팔방미인이었고, 루스벨트에게 ‘돼지머리’ ‘물에 빠져 뒈지쇼’라고 악담을 퍼부을 정도로 ‘노맨’의 역할에 충실했다. 하우는 밤이든 낮이든 루스벨트를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고 어떤 문제든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루스벨트가 어떤 대중적 행동을 취하기 전에 사전조사를 하는 것도, 교묘한 정지작업을 행하는 것도 하우의 몫이었다. 하우가 가장 집중했던 일은 대선 준비와 전국적 정치무대에서 루스벨트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는 하우처럼 처신한 참모가 눈에 띄지 않는다. 대통령이 된 보스에게 ‘자리’를 요구하지 않은 참모를 발견할 수 없었다면 이것이 무지의 소치일까. 보스에게 할 말은 하고 할 일은 다하면서도 자리와 명예를 탐하지 않은 하우 같은 참모가 없다는 사실에서 우리 정치사의 비극이 비롯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1930년 주지자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하우는 루스벨트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우의 의도대로, 주지사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루스벨트는 민주당의 12년 야당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최적의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로 공화당의 지지도가 바닥을 헤매고 있었기에 민주당의 승리가 분명한 시점이라 당내 경쟁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우는 팔리, 플린과 더불어 전국적인 세규합에 돌입해 ‘루스벨트의 친구들’을 조직했다. 팔리로 하여금 18개 주를 순회하도록 했고, 루스벨트의 지지자들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건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1932년 루스벨트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대선 후 하우는 대통령의 비서라는 직책을 받았고, 백악관에서 루스벨트와 함께 살았다. 대중의 눈앞에 나서지 않은 채 수시로 대통령과 이야기했고, 그의 마음을 읽었다. 수없이 찾아오는 민원인, 특히 루스벨트와 남다른 관계를 갖고 있던 이들을 맞이해 모양 좋게 돌려보내고, 시위대의 대표를 만나고, 쇄도하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는 등 루스벨트의 시간을 빼앗을 만한 일은 그가 도맡아 처리했다. 그리고 부처간이든 사람간이든 다양한 정권 구성원들이 갈등을 야기하지 않도록 조정했다. 민감한 일에는 루스벨트의 에이전트로 직접 나서 일을 해결했다.

    하우는 정권의 조종자였고 해결사였다. 정치업무의 실무는 팔리에게 넘기고 자신은 뉴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큰일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1934년 중간선거와 1936년 대선을 준비했다.

    그러나 1936년 최고재판소에서 뉴딜개혁의 11개 주요 입법 중 9개가 위헌 판결을 받아 어수선한 위기의 순간 하우는 루스벨트의 곁을 떠나야 했다. 그해 4월 다가올 대선을 걱정하면서 하우는 힘겹게 눈을 감았다.

    루스벨트를 보좌하면서 하우가 고수한 원칙이 있다. 루스벨트의 정치적 기반을 극대화하면서도 루스벨트가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고, 정책과 세력관리에서 결코 균형을 잃지 않도록 했다.

    하우가 죽은 뒤 많은 이들이 하우의 이런 역할을 그리워했다. 하우는 루스벨트의 대표 정책인 뉴딜정책 수립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주로 몰리, 터그웰, 퍼킨스, 홉킨스 등 소위 ‘브레인 트러스트’의 몫이었다. 그러나 놓치면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우가 뉴딜정책을 통해 루스벨트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용의주도하게 개입했다는 점이다. 하우는 개혁정책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 루스벨트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릴 우려가 있을 때에는 어김없이 참견해 ‘노’라고 말했다. 요컨대 하우는 뉴딜정책(New Deal Policy)의 건설자는 아니었지만 뉴딜연합(New Deal Coalition)의 관리자였다. 뉴딜연합은 이후 30년이 넘게 민주당시대를 지속시킨 미국정치의 기본 틀이 되었다.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강력한 2인자로 기록되는 하우가 우리 정치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하우는 자리를 탐내지 않았다. 대중의 사랑을 욕심내지 않았고 언론에도 아첨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든지 ‘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보스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참모원칙에 끝까지 충실했다. 이런 참모가 우리 주위에도 있었다면 우리 정치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고용된 총잡이’ 딕 모리스!

    1996년 미국 대선이 한창일 때 매춘부와의 스캔들로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다. 그는 칠삭둥이인데 우리역사의 칠삭둥이 한명회처럼 불리한 전세를 뒤집고 보스에게 승리를 선물한 참모다. 사람들의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린다. 조선의 유학자 송시열이 노론으로부터는 ‘송자’라고 숭상받은 반면, 남인들로부터는 개의 이름을 ‘시열이’라고 지을 정도로 비난을 받았는데 모리스에 대한 평가도 이와 흡사하다. 어찌됐건 그가 1996년 미국 대선에서 지옥에 빠진 클린턴 대통령을 구출해 재선에 성공시킨 이 시대 최고의 전략참모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모리스의 직업은 정치 컨설턴트다. 선거만 100번 이상 치른 선거도사다. 클린턴 선거 캠페인에서도 약 2년 동안 그는 전략과 메시지, 미디어(광고), 여론조사를 관장했다. 정치 컨설팅만 놓고 보면, 1988년 부시의 전략참모인 리 애트워터, 1992년 클린턴을 당선시킨 제임스 카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최고의 반열에 속해 있다.

    모리스라는 참모를 적절하게 활용한 클린턴도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전략·전술적으로 매우 뛰어나다. 둘째, 나에게 항상 직설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직했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가리지 않고 말했고 가능하면 나쁜 소식을 먼저 이야기했다. 셋째,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넷째, 그는 언제나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함께 일했기 때문에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신의 손’ 모리스의 장점은 흔히 아이디어에 있다고 한다. ‘뉴스위크’도 이런 점을 높이 사고 있다.

    “그가 10개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7개는 쓸모없고, 1개 내지 2개는 위험하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 내지 둘은 정치적 천재의 통찰력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클린턴은 이것을 분별할 줄 알았다. 이 한두 개가 클린턴의 선거운동을 움직이는 동력이었고 나라를 변화시켰다.”

    이 때문에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과 경쟁했던 보브 돌 진영의 캠페인 매니저 스코트 리드는 모리스를 위대한 세일즈맨이라고 했다.

    1977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모리스는 30세, 클린턴은 주 법무장관으로서 31세였다. 당시 그들은 아칸소주의 주지사로서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데이비드 프라이어의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1979년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여 승리한 후 클린턴은 모리스를 해고했다. 그러나 1980년 클린턴의 재선이 불투명해지자 부인 힐러리가 모리스에게 긴급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모리스가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너무 늦었다. 클린턴은 떨어졌다. 모리스는 곧바로 클린턴을 부활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다음 선거에서 그는 너끈하게 클린턴을 당선시켰다.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클린턴과 모리스는 밀월관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밀월은 1988년부터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모리스는 클린턴이 1988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고, 사업적으로도 거래선을 공화당으로 넓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 클린턴의 주지사 선거 당선을 도운 후 그들은 다시 결별했다. 그리고 1994년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클린턴은 모리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정치 운명을 맡겼다. 모리스는 무대 밖으로 나가떨어진 클린턴을 무대 안으로 복귀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방법은 ‘정파를 뛰어넘어 폭넓게 움직여라’는 것이었다.

    클린턴은 워싱턴 경험이 없었다. 당내 기반도 취약했다. 때문에 취임 초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다수당이었던 민주당과 손발을 맞추어 움직이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의 성공보다는 자신의 지지기반, 지역구 이권에 관심이 더 많은 민주당 의원들의 포로가 되었고 당파싸움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그 결과로 당초 목표한 개혁플랜은 실패하고 말았다. 때마침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소수당으로 전락하자 모리스는 클린턴에게 전통적 민주당 지지기반을 뛰어넘어 공화당, 무당파의 지지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자유롭게 뛰어다니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중간선거에서 국민적 불만정서를 등에 업고 불기 시작한 공화당 바람에 대해서는 그 바람이 빨리 지나가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건의했다.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공화당이 1994년 중간선거에서 제기한 이슈들이 신속하게 추진되도록 도와줌으로써 공화당에게 승리를 안겨준 국민적 불만을 완화시키는 일이다. 파도가 해안을 휩쓸고 가도록 내버려두어야만, 그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소진된다.”

    이런 차원에서 공화당이 제기한 재정적자 축소, 복지정책 개혁, 규제개혁 등의 어젠더를 수용하되, 클린턴식 대안을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클린턴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관 참모들,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은 클린턴에게 공화당과의 정면대결을 요구했고, 클린턴도 결심을 못하고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모리스는 끊임없이 클린턴을 설득했고 마침내 클린턴도 이를 수용했다.

    중간선거의 열풍이 채 식기도 전인 1994년 12월 클린턴은 ‘중산층 권리장전’이란 연설을 통해 중도정책들을 제시했다. 연설의 핵심은 클린턴이 지향하는 ‘가치’를 공화당이 주장하는 ‘수단’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었다. 감세(減稅)정책이 좋은 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나, 노인들의 복지 등은 민주당이 오랫동안 고수해온 가치였다. 대신 대학등록금에 대해서는 세금을 깎아주고, 퇴직 후 노후를 위한 개인연금에 대해서는 과세를 하지 않는 등 감세정책이란 공화당의 수단을 빌렸다. 대통령의 여론지지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 연설과 같은 기조의 1995년 시정연설로 클린턴은 게임의 무대에 복귀했다.

    모리스와 백악관 참모들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중도로 이동하라’는 모리스의 요구가 백악관을 장악하고 있던 골수 리버럴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물론 공화당 쪽을 도왔던 모리스의 전력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지만, 본질은 권력투쟁이었다. 하지만 모리스가 용의주도하게 백악관의 여론주도자인 스테파노풀러스를 끌어들여 동맹을 맺고, 영부인 힐러리와 부통령 고어의 지원을 이끌어내면서 모리스는 클린턴 캠프에 안착했다. 모리스로서는 백악관 참모들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스테파노풀러스의 위상이 필요했고, 식어가는 대통령의 관심에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스테파노풀러스로서는 클린턴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 있는 모리스의 힘이 절실했던 것이다.

    클린턴이 기력을 회복하고, 분명한 입장을 갖게 된 데에는 1995년 4월부터 6월 중순까지 발생한 일들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클린턴은 오클라호마 폭탄테러 현장에서 연설을 했고, 러시아의 옐친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깅리치의 인기도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가고 있었다. 1995년 가을부터 모리스는 캠페인을 확실하게 리드해 나가기 시작했다.

    클린턴과 모리스가 1996년 대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은 것은 조기 TV 광고와 ‘예산전쟁’이었다. 1995년 7월 중순부터 16개월 동안 클린턴과 모리스는 융단 폭격에 가까운 광고세례를 퍼부었다. 특히 부동층이 몰려 있는 주(州)에 광고가 집중됐다. 이들 주의 유권자들은 1년 반 동안 사흘에 한 번, 평균 150~180번 광고를 볼 정도였다. 광고에 쏟아부은 돈은 1992년 선거의 2배가 넘는 약 8500만달러나 됐다.

    가치 어젠더를 내세우다

    ‘예산전쟁’은 1995년 9월부터 1996년 1월 초까지 진행되었다. 당초의 쟁점은 균형예산을 달성할 것인지 여부였다. 클린턴은 균형예산 노선이 불가피하게 복지정책의 축소를 가져올 것이라며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모리스의 판단은 달랐다. 균형예산은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압도적 승리를 가져다준 원동력이 될 정도로 국민적 공감대를 얻고 있기 때문에 이에 맞서는 모양새는 공화당을 이롭게 할 것이라는 논리로 클린턴을 설득했다. 클린턴은 모리스의 견해를 수용함으로써 균형예산안에 대한 쟁점은 사라질 것으로 보였다. 더욱이 협상이 계속되면서 공화당은 광범위한 예산삭감을 포기하고, 대통령의 주장보다 약간 더 삭감하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그런데 사태는 이상하게 흘렀다. 싸움은 오히려 격화되었고, 급기야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해 정부가 문을 닫는 사태까지 진전했다. 왜 그랬을까?

    핵심은 상황판단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클린턴이 균형예산안이라는 컨셉트를 수용하자 공화당 강경파들은 그것을 항복의 시작으로 보았다. 때문에 계속 밀어붙였다. 하지만 클린턴은 컨셉트 수용이란 수세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균형예산안을 제출하며 반격에 나섰다. 이로써 클린턴 진영은 전선을 바꿔 버렸다. 이제 누가 여론의 지지를 얻느냐 하는 홍보전으로 상황이 변한 것이다. 클린턴 진영은 자신의 논리를 TV광고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공화당의 예산삭감에 의한 폐해를 구체적으로 알림으로써 홍보전에서 승리했다. 예산전쟁은 공화당의 상원 원내총무이자 유력한 대선주자인 보브 돌이 백기를 들면서 공화당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로써 1996년 대선의 성패는 이미 갈린 것이었다. 정치속담에 ‘처음을 규정한 자가 결과를 지배한다’고 했던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사례다.

    클린턴의 승리에 기여한 모리스의 핵심 전략은 ‘가치 어젠더’(value agenda)라고 할 수 있다. 가치 어젠더는 정교한 여론조사를 통해 세심하게 마련된 전략이다. 여론조사를 통해 파악된 국민정서는 이랬다. 국민들이 임금 동결, 빈부 격차 등에 관심을 갖고 있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매우 자신에 차 있었다. 경제에 대한 만족도가 지난 10년 이래 최고였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았고 클린턴을 불신했으나 생활수준에 대해서는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10~20%의 유동층에서 확연하게 보였다.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기반이 약 40%라고 할 때, 이들 유동층의 선택은 결정적이었다. 이들은 경제보다 도덕 결핍증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마약과 범죄, 10대 임산부, TV의 폭력성과 선정성, 각박한 사회 분위기 등 이른바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가치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흐름을 민감하게 읽어낸 모리스는 클린턴에게 수용하라고 설득했다.

    가치 어젠더란 이처럼 변화한 생활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이슈 중에서 가치와 관련된 것을 추출하고, 그에 대한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규모 패키지가 아니라 작은 정책들을 많이 개발하는 것이었기에 일부 언론에선 루스벨트의 뉴딜에 빗대어 ‘스몰딜(Small Deal)’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치 어젠더는 1995년 4월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에 대한 대응에서 단초가 발견되기 시작해 1995년 7월부터 본격화되어 1996년 시정연설에서 집대성되었다.

    1996년 클린턴을 승리로 이끈 모리스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참모는 무엇보다 지도자가 당파싸움에 매몰되거나, 자신의 신념체계에만 빠져 고립되거나, 이런저런 소리에 우왕좌왕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도자의 성공여부는 의회의 다수의석이 아니라 국민적 지지를 얼마나 얻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정책들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어프로치(스몰딜)가 실제로 효과가 높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가야할 방향을 견지하면서도 능수능란하게 대중의 요구에 맞추는 탄력적·창조적인 대응능력을 갖춘 참모야말로 능력 있는 참모다.

    1997년 5월,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와 참모들은 승리의 눈물을 흘렸다.

    대처리즘의 폭풍에 휘말려 4번 연속 총선에서 패배하고, 18년 동안 야당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영국 노동당을 살린 지도자는 토니 블레어다. 블레어를 도운 참모들은 피터 만델슨을 필두로 캠벨, 파월, 밀리반드 등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필립 굴드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노동당의 여론조사 담당 전략참모로서 블레어혁명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굴드가 노동당에 입문한 것은 1984년이다.

    정치입문 당시 32세였던 굴드는 현대적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 기법으로 노동당 이미지를 개선하고 당선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갖고 있었다. 만델슨과 굴드는 환상의 팀이었다.

    굴드는 당 ‘현대화(Modernization) ’작업만이 노동당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1985년부터 굴드가 한 일은 현대화의 이론적·실질적 근거를 찾아내 그것을 체계화하고 이를 노동당의 노선과 정책에 반영해 캠페인 슬로건과 공약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굴드가 블레어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1994년 5월 노동당 당수 존 스미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새로운 당총재 선출을 위한 선거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였다.

    현대화 그룹에서는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때 굴드는 인간적으로 브라운과 더 가까운 사이였으나 냉철하게 판단했다. 굴드는 “지금 이 순간에는 모든 전략적 결정이 국민정서와 당내 분위기에 기초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블레어를 지지했다. 블레어의 대중적 소구력을 더 높게 보았던 것이다. 마침내 블레어가 당수에 선출됨으로써 좌파와의 지난한 당내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남은 것은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뿐!

    굴드는 1997년 총선전략으로 ‘변화전략’을 제시했다. 37~39%인 기존 고정표를 다지는 ‘공고화 전략’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층으로 접근해 들어감으로써 42~43%를 얻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변화전략의 핵심이었다. 보통사람들이 자신들의 열망을 노동당이란 수단을 통해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하는 방안으로 포퓔리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굴드 전략의 요체는 변화와 대중주의를 결합한 신(新)노동당 창출이었다.

    굴드를 비롯한 현대화 그룹의 핵심 논지는 “정당의 토대는 대중이며, 이념적 신념이 아니라 대중의 실질적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처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몰아친 신자유주의 정치환경 속에서 노동당이 집권하는 길은 변화한 정치지형에 순응하고, 그 전제 위에서 정책·인물요인 중심의 능력대결을 펼쳐야 한다는 논리였다.

    신노동당 노선에 걸맞은 인물인 블레어를 지도자로 내세움으로써 노동당의 승리는 확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굴드는 여기서 또다시 블레어의 결단을 요구했다. 즉, 노동조합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세금을 인상하고, 범죄나 국방문제에 허약하게 대응한다는 낡은 이미지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했다. 변화된 정책을 반복적으로, 그리고 꾸준하게 재확인해야 대중의 불신을 털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97년 5월 노동당은 44%의 득표율로 유례를 찾기 힘든 대승을 거두었다. 굴드가 주창한 변화전략이 목표한 수치와 노동당의 실제 득표율은 단 1%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오해 중 하나는 영국 노동당의 현대화 그룹이 단지 블레어라는 40대의 젊고 새로운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는 시각이다. 이런 요인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나 전체에서 보면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노동당의 현대화 그룹은 당헌상의 국유화 조항을 철폐하는 등 낡은 교조와 과감하게 절연했다. 이 과정에서 당내 좌파와 끊임없는 노선투쟁과 권력투쟁을 벌였다.

    1997년 대승은 전체 현대화 그룹에게 18년, 굴드에게 13년, 블레어에게 11년이 걸린 당내 개혁의 산물이다. 오랜 투쟁을 통해 당을 완전히 새롭게 재건한 결과로 얻은 승리, 이것이 블레어혁명의 본질이다. 블레어혁명은 결코 블레어 개인에 의한 것도, 개인을 위한 것도 아니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변화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한쪽은 다가올 승리를 확신하면서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변할 의사가 있으나 모든 것을 대선승리에 종속시키면서 변화의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민정당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민주당이 국민회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들 중 누구도 향후 정치의 주도세력이 될 수 없다. 변화는 지도자에게만 맡겨진 과제가 아니다. 참모들에게도 똑같은 몫으로 주어져 있다.

    하우, 모리스, 굴드 이들은 과거를 모방하거나 상황을 쫓아다니거나 지도자의 처분만 바라보는 수동적 자세의 참모가 아니었다. 역사의 흐름과 대중의 정서에 맞춰 변화를 선도함으로써 성공을 만든 명참모였기에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다. 우리 정치권의 참모들도 이들처럼 역사를 생각하며 움직여야 한다. 하우처럼 평생을 같이한 측근이든, 모리스처럼 돈을 받고 하는 컨설턴트든, 굴드처럼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소속된 당료든 참모라면 피할 수 없는 명제다. 모름지기 참모라면 앉아서 승리를 구할 수 없고 눈 감고 성공을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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