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전전긍긍 부실 금융기관 전직 임원들

아내의 변심, 날아간 재산

  • 강기택 머니투데이 금융부 기자 acekang@moneytoday.co.kr

    입력2004-09-01 17: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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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금보험공사가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의 퇴직 임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요구하며 책임을 묻자 금융권이 크게 술렁이고 있다. 해당 임원들은 가압류에 대비해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 도피를 시도하는 한편 “정부가 국민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벌이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나섰다.
    월6일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생시킨 6개 은행에 손해배상 청구소송 대상자 명단을 통보했다. 전직 시중은행장인 L씨는 이 명단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은 물론, 상속받은 문중 자산까지 가압류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시중은행의 J 전 행장은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고 가슴 졸일 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던 것.

    예보가 금융기관의 부실책임 여부를 조사, 각 금융기관에 귀책대상자를 통보하고 손해배상소송을 요구하면서 요즘 금융권 분위기는 침통 그 자체다. 외환위기를 전후해 은행장이나 임원이던 선배, 동료들이 감독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은 데 이어 이번엔 손배소에 대비해 죄인처럼 재산 숨기기에 급급한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보는 이미 귀책대상으로 통보한 제주은행을 포함, 7개 은행(제일·우리·조흥·서울·평화·경남·제주은행), 2개 보험사(대한생명·서울보증), 1개 투신사(대한투신)에 귀책대상자 명단을 통보한 데 이어 한국투신, 수협, 농협, 광주은행 등에 대해서도 귀책대상자 심사를 벌일 예정이어서 관련자들이 가슴을 졸이고 있다.

     



    금융권을 휘몰아친 재산 숨기기 소동의 배경은 지난해 11월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감사원이 공적자금 특별감사를 벌이면서 공적자금에 대한 책임문제가 불거진 것. 뒤이어 예보가 금융기관 퇴직 임원들로 소송대상자 범위를 확대하고 재산을 가압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따라 자신이 가압류 대상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관계자 10명 중 9명은 재산을 빼돌렸다는 게 금융권의 정설이다. 부실책임을 덮어쓰느냐 마느냐는 훗날 법원에서 가려주겠지만, 일단 대비하고 보자는 생각에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을 빼돌렸다고 한다.

    전직 시중은행 임원으로 지방은행장을 역임한 P씨는 주식, 채권, 골프회원권 등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자산은 모두 현금화했으며, 부동산도 친인척 명의로 옮겨놨다. 또다른 은행의 퇴직 임원은 명의를 이전하지 않은 대신 자기 명의의 아파트 등 부동산을 담보로 최대 한도까지의 대출을 받아냄으로써 가압류를 당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능적인 수법을 동원했다.

    부인 명의로 재산을 이전한 후 ‘위장이혼’을 하는 방법도 사용됐다. 그러나 C씨의 경우 위장이혼을 한 후 부인이 변심하는 바람에 ‘실제 이혼’이 돼버려 가정을 잃고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험한 꼴 당하기 싫다”며 아예 이민을 간 사례도 있다. 지방은행장 출신으로 경영부실과 관련, ‘주의적 경고’를 받았던 K씨는 최근 미국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취업 제의가 들어오자 전재산을 처분하고 출국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우리은행 김진만 전 행장처럼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본인 명의의 재산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김 전행장은 “고의나 악의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불법행위를 했다면 모르겠으나, 정책상의 요구 또는 경영상의 판단에 대해 금융감독원 제재나 면직 차원을 넘어 재산상의 책임까지 묻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신탁상품 손실보전과 주식 손절매 규정위반 등으로 손실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대상자 명단에 올라 소송에 앞서 전재산이 가압류될 처지에 놓였다.

    사실 김 전 행장의 정서는 다른 은행 퇴직 임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와 예보가 자신들을 속죄양 삼아 공적자금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게 이들의 기본 시각이다. 감사원 감사 후 예보가 소송 대상자 범위를 금감원으로부터 ‘문책적 경고’를 받은 이들에서 ‘주의적 경고’를 받은 사람들로 확대하고 귀책조사와 소송제기를 통해 ‘면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시중은행의 한 현직 검사부장은 “예보는 소송 대상자 명단만 선정해 해당 금융기관에 통보하면 끝”이라며 “소송진행과 그에 따른 비용은 은행이 부담해야 하고, 소송을 하지 않으면 그 책임도 은행이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전직 임원에 대해 소송을 해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해임권고’까지 받은 사안임에도 소송을 제기한 대한투신이 1심 재판에서 패소한 경우에서 보듯 금융기관의 승소 가능성이 높지 않아 고민스럽다”고 털어놨다.

    “금융권이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국민들의 악화된 정서를 누그러뜨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금융계를 상대로 면피용 귀책조사를 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당사자인 예보는 “소속 변호사들이 승소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해서 결정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예보 류연수 이사는 “예금자보호법과 공적자금 관리법에 따라 금감원으로부터 받은 행정적 제재의 경중과는 무관하게, 해당기관에 손실을 끼쳐 승소 가능성이 높은 사안에 한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요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금융인은 많지 않다. 금융권에선 “명백한 위법이나 뇌물수수 등이 전제된 금융부실에 대해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책적 필요성이나 고도의 경영상 판단에 기초한 의사결정이 부실을 야기했다는 이유로 행정적 제재를 넘어 손해배상소송까지 제기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항변한다.

    한 전직 시중은행장은 “현 정부 들어서도 기업회생을 명분으로 정책적 판단에 따라 여신심사 기준상 40점짜리에도 지원한 경우가 있다”며 “금융당국에서 묵인해온 관행을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주장했다.

    퇴직 임원들이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자 예보는 8월6일 6개 은행에 대한 손배소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당초 문책대상인 것으로 알려진 대우자동차, 한보, 삼성자동차 부실여신 관련자들에 대해선 뇌물수수가 있었던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다 대상에서 뺐다는 후문이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대우차, 한보, 삼성차 등은 금융지원 과정에서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이 드러날 경우 관료들에 대한 책임논란이 야기될 수 있으므로 예보가 소송대상에서 제외했다”며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반면 정부가 직접 개입하지 않고 은행별로 중소기업 대출실적 순위를 매기거나 일정 비율 이상의 신용대출 또는 중소기업대출을 하도록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사실상 정책여신을 유도한 경우는 손배소 대상에 포함됐다. 이 경우 관료들의 직접적인 개입혐의를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부실여신에 대한 책임은 은행 임원들이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한 전직 시중은행장은 “외환위기를 전후해 고금리와 같은 변수에 의해 예기치 못한 적자가 발생, 재무구조가 일시적으로 나빠진 경우 기업을 살리기 위해 금융지원이 불가피했다”며 “그때는 이를 독려했던 정부가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은행이 수익을 내려면 규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정도의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외환위기 이후에야 FLC(미래의 채무상환 능력에 따른 자산건전성 분류기준)나 CRRS(신용위험 평가시스템) 등이 도입됐으며, 그전에는 이런 기준이나 시스템이 미비했기 때문에 신용조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따라서 무조건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판단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게 퇴직 임원들의 한결같은 논리다.

    한 증권사 사장은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에 대한 환란의 책임을 묻는 재판에서도 무죄판결이 나왔다”며 “한 국가의 CEO나 CFO(최고 재무책임자)가 결정한 정책상의 판단이 존중돼야 한다면 금융기관 CEO의 경영상 판단도 존중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번 가압류 대상자 명단선정에서 이미 형사소추돼 있거나 뇌물수수, 배임, 사기 등 범법행위가 명백한 경우로 대상을 한정하고 옥석 가리기를 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는 게 금융권의 불만이다.

    이에 대해 예보는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소송 대상자 심사에 신중을 기했다고 강조한다. 예보의 정혁진 변호사는 “감독당국이 부실하게 조사하지 않았다면 행정제재를 받은 것은 하나의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있다”며 “승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고 밝혔다.

    금융권에선 제일은행 P 전 상무의 경우가 금융부실 문책이 빚은 딱한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참여연대가 제기하고 제일은행이 승계받아 진행한 한보철강 부실대출관련 손배소에서 패소하는 바람에 전재산을 날렸다. 설상가상으로 P 전 상무는 이번에 예보가 제일은행에 통보한 귀책대상자 명단에 도 포함됐다. 제일은행은 그의 재산이 이미 경매에 넘어간 상황에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지만, 그의 삶은 이미 망가졌다.

    지난해 말 P 전 상무는 L 전 행장, S 전 행장, L 전 전무 등과 함께 받은 재판에서 패소했는데, P 전 상무와 L 전 전무는 각각 1997년에 이미 가압류돼 있던 부동산(경매예상가 4억원), 종중재산을 모두 내놔야 했다. 법원에서 가압류를 집행할 당시 본인 명의의 재산이 없었던 L 전 행장과 S 전 행장은 뇌물수수로 구속까지 됐지만, 이들은 결과적으로 부실에 대한 민사적 책임을 한푼도 지지 않았다. 결국 뇌물수수를 통해 대출 결정을 했던 은행장들은 빠져나가고 그 밑에 있었던 전무와 상무가 책임을 다 짊어진 셈이다.

    당시 직접 여신업무를 담당하지 않은 데다 여신담당 상무가 사망한 상황에서 수석상무라는 이유로 소송대상에 포함됐던 P 전 상무는 현재 경매로 넘어간 부동산과 소송비용 등으로 5억원의 재산을 날리고 출가한 딸들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고(故) 김성인 전 제주은행장의 경우도 안타까운 사례로 거론된다. 김 전 행장은 고려무역 등에 대한 부당여신 지급건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진행중이던 지난 4월2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주은행 창업자의 아들인 그는 당시 우울증이 심해져 입원 치료중이었다. 제주은행이 부실은행으로 지정된 후 주식이 전량 소각돼 지분과 경영권을 모두 잃은 데다 연이은 문책경고 조치, 재산 가압류,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에 극심한 심적 타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게 제주은행 직원들의 얘기다.

    그의 부실책임 여부에 대해서는 법원이 판단하겠지만, 뇌물수수나 위법사실 등은 없었으며,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린 결정은 없었다는 게 금융계의 시각이다. 김 전 행장 관련소송은 그의 사후(死後)에도 계속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금융기관 퇴직 임원들에 대해 민사상 책임을 묻기 시작한 이후 보신주의가 만연, 은행의 대금업체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지난 6월말 현재 여신 중 가계금융이 차지하는 비율은 서울은행이 63%, 국민은행이 62% 등으로 절반을 넘어섰으며, 우리은행과 조흥은행도 각각 45%, 44%로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 대표적 기업금융 은행이던 우리은행과 조흥은행에서마저 가계금융 비율이 급상승하면서 사실상 산업은행·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을 제외하곤 모든 은행이 가계금융에 주력하는 ‘대금업체’가 됐다.

    한 시중은행장은 “은행들의 가계금융 치중현상은 직접금융이 활성화된 게 주요한 이유지만, 우리·조흥·외환은행 등 기업금융 은행들이 외환위기를 거치며 부실과 이에 따른 책임문제에 노출된 게 또다른 이유”라고 진단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결과를 두고 책임만 지우는 현실에선 리스크를 안고 기업금융을 하기보다 부실 우려가 적은 가계금융을 확대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은행의 기업대출 기피현상은 개별 금융기관이 정부의 정책 의지와 충돌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지난 4월 하이닉스 매각 MOU(양해각서)를 채권단 찬반투표에 부쳤을 때 조흥은행 이사회가 한동안 하이닉스 신규지원을 반대한 것이나 투신권이 막판까지 반대입장을 천명했던 게 좋은 예다. 조흥은행은 결국 MOU에 대해 구두로 먼저 찬성의사를 표시하고 늦게나마 채권단 회의에 참석했지만, 이사회에서 지나치게 낮은 회수율과 이에 따른 사후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져 의사결정이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투운용과 한투운용의 경우 하이닉스의 청산가치인 25.5%보다 회수율이 낮아 투신업법의 선관주의(고객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것)를 위반하게 돼 막판까지 완강하게 반대의사를 고수했다. 찬성표를 던질 경우 투자자들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하거나 감독당국에서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결국 두 투신사는 정부로부터 유·무형의 압박에 시달리며 채권단 회의에서 MOU에 찬성하긴 했지만, 이들 금융기관들이 ‘반란’을 시도한 것은 정부의 매각의지를 따를 경우 사후 책임을 뒤집어쓸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당시 대한투신 김종환 전 사장이 대우채 편입에 따른 손실책임 문제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을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금융권에선 “최근 산업은행이 GM대우차에 대해 신규 지원을 요구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시중은행들이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보신주의는 금융권의 일반 직원 개개인에게도 스며들어 은행의 기업대출 심사역은 가장 꺼리는 보직이 된 지 오래다. 외환위기에 따른 부실여신으로 징계를 받고 명예퇴직 1순위가 되는 사례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외환은행 황학중 부행장은 “여신업무 파트로 가라고 하면 직원들이 알레르기반응을 보인다”며 “업무량이 많아 야근이 잦은 데다 책임에 따른 스트레스도 심한데, 누가 같은 월급 받으며 그 일을 하려 들겠냐”고 고개를 저었다.

    시중은행의 한 차장급 은행원은 “임원들이 가압류에 대비해 재산을 빼돌린다지만, 혹시라도 먼 훗날 책임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비, 행원 시절부터 유동성 자산이나 부동산은 물론, 심지어 자동차까지 아내 이름으로 해두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요즘 은행 분위기를 전했다.

    예보가 가압류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나서면서 억울한 사례가 생기고 형평성 시비 등이 제기되고 있지만, ‘외환위기-공적자금 투입-부실책임 추궁’이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금융기관들의 경영 및 심사의 투명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금융기관들이 정부의 요구나 CEO의 전횡에 대비할 수 있도록 대출심사협의체를 구성하거나 컴플라이언스(준법감시) 제도를 도입하고 선진적인 전산시스템을 마련한 것이 단적인 예다.

    조흥은행 한병락 여신담당 상무는 “여신의 경우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여신라인을 통해 이뤄지던 대출결정이 협의체를 통해 이뤄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행장, 여신담당 임원, 부장 등이 전결로 대출하던 것을 여신심사위원회를 통한 협의체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비유하자면 행장의 ‘개인방어’에서 ‘집단방어체제’로 시스템을 바꿔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대한 내구성을 높였다는 것. 한상무는 “담보보다 FLC와 현금 흐름(cash flow)을 중시하고 위험관리와 사후 모니터링 제도를 도입해 여신심사와 관리수준이 한 차원 높아졌다”고 말했다.

    투신사들 역시 업계 전체가 컴플라이언스 제도를 도입, 외부의 회사채 인수 압력 등에 대비하고 투명성과 수익성을 향상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투운용 현봉오 상무는 “외부 압력이나 불법적인 펀드운용을 할 경우 책임문제가 불거질 뿐 아니라 수익성도 떨어져 회사나 임원 개인의 커리어가 흔들린다”며 “외적 경쟁요소와 더불어 컴플라이언스 제도 역시 의사결정을 신중하게 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기관 직원들의 행동방식도 변했다. “책임추궁 문제가 뒤따르고 실적을 평가해서 성과급을 지급하므로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분위기가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는 게 한 심사역의 전언이다. “관료 앞에서는 작았지만 은행 내부에서는 ‘제왕’이었던 행장들의 지시에 따라 대출심사 결과가 담당자의 소신과 무관하게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일은 이제 옛일이 돼가고 있다”는 것.

    “한국에서 가장 무서운 법은?” 요즘 금융기관 직원들은 이 질문에 “국민정서법”이라고 답한다는 의미심장한 우스개가 있다.

    금융권은 부실에 대한 문책은 당연하고 동의할 만하지만, 합리적 책임추궁이 아니라 여론몰이에 따른 ‘마녀사냥’이 될까봐 우려하고 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윤태수 홍보선전국장은 “국민감정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판단에 따라 당사자들이 승복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공적자금 투입과 금융부실 문책 문제가 정치쟁점화하고 있는 사회적 흐름을 경계해야 한다는 게 금융권뿐 아니라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한국경제연구원 금융재정연구센터 이인실 소장은 “공적자금 문제는 여야 할 것 없이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좋은 정쟁도구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은행 임원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공적자금 회수 차원에서도 의미가 없을 뿐더러 은행원들의 업무의욕을 떨어뜨려 금융산업 발전 측면에서도 부정적”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 문제가 정치쟁점화하는 것은 예보에게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다. 예보의 한 관계자는 “일부 언론들이 공적자금 7조원이 빼돌려졌다며 왜곡보도를 하고 정치쟁점화해 예보의 운신 폭을 좁게 만들었다”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부실을 초래한 임직원들을 상대로 소송을 해서 회수되는 공적자금 액수는 미미하다”며 “예보의 목적은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투명한 경영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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