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남태평양의 진실과 허구

인도네시아에 발리하이는 없다

  • 권주혁 이건산업 부사장jhkwon@eagon.com

    입력2004-09-07 1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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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인이 만들었다는 이스터섬 모아이의 비밀은 허구다. 얍 환초 원주민은 돌 돈을 만들기 위해 무동력선을 이끌고 무려 400㎞를 항해했다. 남태평양 곳곳에 점점이 박혀 있는 섬들의 비밀은 무엇인가. 20여 년간 남태평양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필자의 체험담을 통해 그 비밀을 벗겨보자.
    필자가 남태평양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대학교 1학년이던 1970년대 초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남태평양’이라는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환상적인 경치를 지닌 남태평양의 섬을 무대로 한 이 영화는 태평양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미남 배우 로사노 브라지와 미녀 배우 밋지 게이노가 주연한 뮤지컬 영화다.

    영화의 원작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해군 소령으로 남태평양의 뉴헤브리디즈(1980년 ‘바누아투’란 국명으로 독립함) 섬에 근무했던 제임스 미치너가 쓴 소설집 ‘남태평양 이야기(Tales of the South Pacific)’에 실린 단편소설 ‘4달러(Fo’ Dolla’)’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발리하이(Bali Hai)’란 제목의 음악은 더없이 감미롭고 스크린에 펼쳐지는 경치는 한없이 낭만적이었다. 영화를 본 젊은 우리는 남태평양의 섬을 지상 낙원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필자는 대학을 졸업한 후 합판회사에서 일하면서 20여 년간 남태평양의 나라들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업무차 태평양 이곳 저곳에 박혀 있는 작은 섬들을 방문하면서 견문을 넓힌 필자는, 태평양전쟁의 흔적을 추적해 ‘헨더슨 비행장’이란 제목의 단행본을 출간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남태평양에 대해 잘못 알려져 있는 것들을 바로잡고자 한다.

    칠레령인 이스터섬을 방문하기 전 필자는 우리나라의 잡지와 신문에서 이 섬을 미스터리의 섬으로 묘사해놓은 기사를 많이 읽었다. 기사는 천편일률적으로 ‘큰 석상(모아이)을 만들 수 있는 돌이 이스터섬에는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모아이가 세워져 있는가’라는 의문을 적고 있다.

    어떤 잡지는 한술 더 떠서 ‘이스터섬에는 이 섬에는 물론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도 없는 돌로 만든 석상이 즐비하게 서있다’며, ‘이 석상은 외계인이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과장하고 있다. 이런 잡지들은 대개 이스터섬의 석상은 세계 몇 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스터섬은 지구에서 가장 고립되어 있는 섬 중의 하나다. 이 섬은 종주국인 칠레와도 3700km나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섬인 핏캐인까지의 거리는 1900km이고, 휴양지로 유명한 타히티섬과는 4050km 떨어져 있다.

    이스터섬은 밑변이 20km, 짧은 변이 15km인 이등변 삼각형 모양이다. 1888년 이후 칠레의 영토가 되었는데, 현지인은 이 섬을 ‘큰 섬’이라는 뜻을 가진 ‘라파누이’라고 부른다. 3000여 명 정도인 현지인은 섬 남서쪽에 있는 ‘항가로아’ 마을에 모여 살고 있다.

    이 섬의 명물은 앞서 말한 대로 석상(石像)인 모아이(Moai)다. 화산암으로 만들어진 모아이는 높이가 2m에서 10m 정도인데, 이스터섬에는 지금도 1000여 개가 넘는 모아이가 이곳 저곳에 서있거나 넘어진 상태로 남아있다. 모아이의 유적을 찾아 돌아다니다 보면 이 섬에서는 모아이를 만들 수 없다는 기사는 완전 거짓임을 깨닫게 된다.

    섬 동쪽에는 사화산(死火山)인 ‘라노라라쿠’ 산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모아이의 제조 공장이다. 산 기슭 곳곳에는 각기 다른 모양을 한 모아이가 놓여 있는데, 그 수가 4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모아이를 만든 재료는 바로 이 산에 묻혀 있는 화산암이다. 산 도처에서 큰 화산암을 파서 모아이를 만들다 중단한 현장을 볼 수 있다. 만들다 중지한 모아이는 당연히 수평으로 누워 있는데, 큰 것의 길이는 21m, 무게는 50t에 이른다.

    이스터섬 사람들이 모아이를 많이 만들어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라노라라쿠산의 화산암이 무른 데 있다. 돌이 단단하지 않아 쉽게 떼어내 조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 설명했으면 우주인의 모아이 제작설은 완전 허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천연 동굴이었던 곳인데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콘크리트를 보강해 지하 방어진지를 만들었다. 진지 옆에는 포탄과 폭탄에 견디도록 콘크리트로 두껍게 지붕을 만들고 그 위에 흙까지 덮은 벙커들이 있다. 지금은 벙커 위에서 자란 큰 나무들이 벙커 밑으로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다. 벙커 앞에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탱크와 야포들이 부서진 채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관광 가이드는 관광객들 앞에서 바로 이곳을 가리키며 ‘일본군 최후의 사령부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사실이 아니다. 일본군 최후의 사령부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4k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이판 방위사령관 사이토 요시쓰구(齊藤義次) 육군 중장과 진주만 기습시 일본 해군의 기동부대 사령관을 맡았던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해군중장은 사이판이 함락되자 그곳에서 자결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일본군의 진짜 사령부는 잊혀지고, 관광지 근처에 있던 진지가 최후의 사령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러한 일이 반복되다 보면 남태평양에 대한 역사 인식마저도 왜곡될 것이다. 과거의 왜곡을 풀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래가 풀어야 할 왜곡을 만들어가는 것이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스터섬 사람들은 모아이를 라노라라쿠산에서 어떻게 끌고 내려왔을까? 이러한 궁금즘도 현장을 둘러보면 간단히 풀린다. 라노라라쿠 산에서 잘라낸 통나무를 밑에 깔고 모아이를 올려놓은 후, 조금씩 밀고 당기며 해안 쪽으로 내려오면 되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한 다음에는 ‘아후(Ahu)’라고 부르는 30m 정도의 돌로 만든 바닥 대(臺)에 놓고 일으켜 세운다. 그렇게 해서 ‘우주에서 옮겨왔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던 거대한 석상이 되는 것이다.

    거대한 모아이를 아후 위에 세우는 방법도 간단하다. 섬 주민들은 이 섬에서 자생하는 ‘하우하우’라는 관목으로 만든 밧줄을 이용해 모아이를 세웠다. 밧줄로 묶어 모아이의 한쪽을 위로 약간 잡아당긴 후, 모아이 밑에 잽싸게 통나무를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한쪽이 들려진 모아이 밑에 흙을 퍼붓고 통나무를 살살 굴려 빼낸다. 이러한 작업을 반복하면 수평으로 누워 있던 모아이는 서서히 일어서게 된다.

    물론 모아이가 직립(直立)할 때까지 계속해서 흙을 퍼붓고 밧줄로 당길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세워졌다고 판단되면 밧줄을 당겨 모아이를 바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모아이 세우는 데 특별한 비밀은 없는 것이다.

    진짜로 우리가 놀라워해야 할 것은 섬 주민들이 이렇게 많은 모아이를 세웠다는 점이다. 섬 주민들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모아이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 목적 때문에 모아이는 하나같이 등을 바다 쪽으로 돌리고 있다.

    이스터섬의 모아이를 파괴한 것은 유럽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아이는 ‘이방인’인 유럽인보다는 이 섬의 부족들로부터 더 큰 수난을 받았다. 16∼17세기 이 섬에서는 부족끼리의 싸움이 있었는데, 이때 부족들은 경쟁적으로 상대편 땅에 있는 모아이를 부수거나 넘어뜨렸다.

    이스터섬에는 엄청나게 큰 활주로가 있는 비행장이 있다. 1989년 우주왕복선 발사에 들어간 미국의 항공우주국(NASA)은, 우주왕복선이 미국이 아니라 태평양으로 귀환해야 할 경우에 대비해 1500만달러를 투자해 남태평양 외딴 곳에 있는 이 섬의 활주로를 폭 3300m로 확장했다. 지금도 이 섬에는 NASA에서 지은 관측소에 요원이 근무하고 있다.

    이스터섬의 남쪽 부분, 즉 공항 활주로의 동쪽 끝을 따라서 가다보면 해안가에서 항공유를 저장한 큰 유류탱크를 볼 수 있다. 이 유류탱크 부근에 축대를 쌓듯이 큰 돌을 쌓아올린 세 개의 석조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후 비나푸(Ahu Vinapu)’라고 불리는 곳이다.

    아후는 6세기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원래는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던 제단이었다. 장례터나 제사터로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다. 주민들이 정치 행사와 종교의식을 행하던 중심지인 아후는 주로 해안가에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난 부족 싸움으로, 아후 또한 모아이만큼이나 많이 파괴되었다.

    오래 전 필자는 우리나라의 한 잡지에서 ‘이스터섬은 육지와 이어져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아후 비나푸다. 아후 비나푸의 한쪽 끝은 바닷속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는 아후 비나푸를 이고 있던 땅이 바다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고 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필자는 이 기사를 생각하며 아후 비나푸를 찾아갔다가 엉터리 기사였음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아후 비나푸의 한쪽은 바다 속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

    칠레의 고고학자 곤잘로 피구에로아에 따르면, 아후 비나푸의 축조 방법은 페루에 있던 옛 잉카제국 유적지인 마추픽추의 석조물 축조방식과 똑같다고 한다. 이스터섬에는 남미대륙에서 왔다는 ‘긴 귀 부족’의 후손과 폴리네시아에서 왔다는 ‘짧은 귀 부족’의 후손이 17세기에 서로 싸워서, 짧은 귀 부족이 승리했다는 역사가 전해진다. 아후 비나푸는 남미대륙에서 건너왔다는 긴 귀 부족이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타히티섬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중심지로 인구의 70%에 달하는 15만명이 이 섬에 살고 있다. 이 섬 서북쪽 해안에 있는 수도 ‘파피테’에서 서쪽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 40km 정도 달려가면, ‘파페아리’란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프랑스가 낳은 대표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갱의 박물관이 있다.

    타히티에 도착한 고갱은 이 박물관 자리에서 몇 년간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타히티의 원색에 매료된 고갱은 빨강·노랑·파랑의 삼원색을 사용해 정열적이고 화려한 색면(色面) 구성 작품을 제작했다. 이러한 고갱의 화풍은 유럽의 회화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박물관은 고갱이 세상을 떠난 지 62년째이던 1965년 건립됐는데, 여기에는 고갱의 작품은 물론이고 말키저스 제도의 히바오바섬에 있던 고갱의 작업실과 고갱이 사용하던 물건이 전시돼 있다. 고갱은 이곳에서 66점의 그림을 그리고 열 개가 넘는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1980년 이전까지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이 박물관에 전시돼 있었으나 전부 파리로 옮겨가고, 지금은 모조품만 전시돼 있다.

    고갱박물관에는 고갱이 일본 그림을 많이 모방했다며, 그 증거들을 작품별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 작가가 그린 일본 여자 두 명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림 옆에는 고갱이 그린 타히티 여자 두 명이 이야기하는 그림이 있다. 두 그림은 옷과 배경만 다르지 기본 구도가 똑같다. 이런 식으로 박물관은 고갱의 그림과 일본 그림을 비교하며 고갱이 일본 그림을 모방하였음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고갱박물관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92년이다. 이후 필자는 우리나라 화가들이 타히티의 고갱박물관을 방문하고 쓴 글을 여러 편 읽어보았으나, 그 누구도 고갱이 일본 그림을 모방하였다고 쓴 것을 보지 못했다(이미 썼는데도 필자가 과문해서 읽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반일감정 때문에 고갱이 일본 그림을 모방했다고 쓰지 않았다면 이는 옳지 못한 태도다. 현지에서 만천하에 공개된 사실을 우리만 모르고 있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한 프랑스인 친구에게 “고갱이 일본 그림을 모방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예술가는 산과 하늘과 바다 같은 자연물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물에서도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든다. 고갱이 일본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든 것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우리도 예술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속해 있는 소시에테 제도의 한 섬인 ‘모레아’는 타히티에서 서쪽으로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타히티섬의 파피테항구에서 매일 출발하는 연락선을 타고 30분쯤 항해하면 하트 모양으로 생긴 이 섬 동쪽의 ‘바이아레’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모레아섬에는 높은 산이 없다. 그러나 서북쪽에서 오푸나후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봉우리는 꽤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 유명한 뮤지컬 영화 ‘남태평양’은 바로 이곳에서 촬영하였다. 이후 이 봉우리가 있는 지역은 영화 속의 이름을 따서 발리하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리하이는 공식 명칭이 아니다.

    발리하이는 원작인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남태평양 이야기’에 나오는 가상 섬의 이름일 뿐이다. 이곳에서 발매되는 지도에는 발리하이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속 발리하이는 이름이 비슷한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 자주 등장한다.

    언젠가 발리섬의 여행 안내서를 읽다 한 호텔의 이름이 발리하이로 나와 있어, 그들의 장삿속에 실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 가보면, 호텔뿐만 아니라 맥주와 유람선에도 발리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말 대단한 장삿속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은 발리하이와 전혀 상관이 없다. 발리하이는 미치너의 소설에 나오는 가상 섬이고, 영화 ‘남태평양’을 찍은 곳은 모레아섬이다.

    소설 ‘남태평양 이야기’에는 가상 섬 발리하이가 솔로몬 군도와 바누아투 사이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섬은 주위가 높은 절벽으로 이뤄져 있고, 절벽 한쪽에 아름다운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태평양’은 발리하이섬에 사는 통킹 여인의 딸 ‘리앗’이, 요충지인 헨더슨 비행장을 점령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 벌인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한 미국 해병대 중위 케이블과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 속의 리앗은 케이블과 결혼하지 못하고 프랑스인 농장주 버누아와 결혼하게 됨으로써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소설의 원작자인 미치너는 모레아섬을 모델로 발리하이를 그리지 않았다. 미치너가 발리하이의 모델로 삼은 섬은 바누아투 동쪽에 있는 ‘암베’라는 작은 섬이다. 또 발리하이의 해안과 절벽을 묘사하는 데 아이디어를 준 섬은 서부 솔로몬 군도에 있는 ‘모노’ 섬이라고 한다.

    1521년 3월 마젤란의 탐험대가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괌 남부 해안에 상륙했을 때 그곳에는 원주민 차모로족이 살고 있었다. 차모로족은 바다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견고하고 빠른 카누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었다. 생선가시나 큰 조개 껍데기로 만든 미끼로 고기를 낚는 기술도 발달했다.

    이러한 차모로족의 문화 가운데 이목을 끄는 것이 ‘라테 스톤(Latte Stone)’이라는 돌이다. 이 돌은 석회암으로 된 아랫부분과 석회암 또는 산호석으로 된 윗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라테 스톤도 우리나라에는 잘못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1월 대한항공 비행기를 탄 필자는 대한항공의 기내지 ‘모닝캄’에 나온 라테 스톤 이야기를 읽고 실소했다. 이 기사는 ‘괌에는 무덤인지 제상(祭床)인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라테 스톤이라는 돌기둥이 있다’고 적고 있었다. 이러한 미스터리성 기사는 독자들에게 괌에 대한 환상을 심어줄 수 있겠지만, 그릇된 지식을 알려준다는 문제가 있다.

    라테 스톤은 무덤도 제상도 아니다.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돌이다. 차모로족은 통풍이 잘되는 집을 짓기 위해 라테 스톤을 놓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올렸던 것이다(그림 참조). 차모로족은 라테 스톤을 해안선과 나란히 배치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었다. 때문에 지금도 괌에 가보면 해안선을 따라 나란히 놓여 있는 라테 스톤을 볼 수 있다.

    라테 스톤 중에는 높이가 7m에 이르는 것도 있다. 따라서 의문을 품어야 할 것은 이렇게 큰 라테 스톤을 어떻게 옮겨왔느냐 하는 점이다. 라테 스톤은 괌섬에 있는 채석장에서 만들어져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옮겨온 방법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설이 없다.

    라테 스톤은 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이판과 티니안 등 마리아나 제도의 다른 섬에도 라테 스톤이 있다. 현재 티니안섬에는 라테 스톤 위에 만든 라테집이 있는데, 지표에서부터 지붕까지의 높이가 무려 15m에 이른다.

    서부 태평양에 있는 마이크로네시아 연방(FSM)은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다가 1990년 독립한 조그만 나라다. 이 나라는 네 개 주(州)로 구성돼 있는데, 이중 가장 서쪽에 있는 얍주는 15개의 환초섬으로 이뤄져 있다. 인구 1만2000천여 명의 얍주의 중심지는 얍 환초다.

    얍 환초에서는 ‘스톤 머니(Stone Money)’라고 하는 큰 돌로 만든 돈(石錢)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 돌 돈은 현지에서는 ‘라이(Rai)’라고 불리는데, 돌 돈은 실제 화폐로 사용됐다고 한다. 지금 마이크로네시아의 공식 화폐는 미국의 달러지만, 땅을 사고 팔 때나 이웃과 보상문제를 해결할 때는 여전히 돌 돈을 화폐로 사용한다.

    돌 돈은, 직경 70cm, 가장자리 두께 3cm 정도의 작은 것에서부터 직경 4m, 두께 30cm에 이르는 큰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 돌 돈 중에는 중심부와 가장자리의 두께가 같은 것도 있으나, 보통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가장자리를 얇게 만들었다(중심부는 가장자리보다 2∼4배 두껍다). 이러한 돌 돈은 통나무를 끼워서 운반하기 좋도록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 이 섬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이 통치하던 1929년 얍 환초에는 1만3000여 개의 돌 돈이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가면서 많이 부서져 그 수가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지금도 적잖은 돌 돈이 집 밖이나 마을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마 밑에 놓여 있는 돌 돈은 그 집의 부(富)와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돌 돈을 만든 돌을 얍 환초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돌은 400km 서쪽에 떨어져 있는 팔라우 제도 한가운데 있는 ‘바위 제도’에서 카누에 실어 운반해온 것이다. 얍 환초의 원주민은 옛날부터 삼각 돛을 단 아웃리거(outrigger : 경주용 배) 카누를 타고 멀리 항해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들은 카누를 타고 마리아나 제도나 팔라우 제도·남부 일본·캐롤라인 제도의 동쪽 섬·뉴기니섬의 북쪽까지 가서, 진기한 조개껍데기를 가져와 화폐로 사용하였다.

    얍 주민들은 카누를 타고 400km 떨어진 ‘바위 제도’로 가, 석회암 채석장에서 큰 돌을 잘라냈다. 그리고 물을 부어가면서 클램 조개껍데기로 문질러 돌 표면을 가공하였다. 당시에는 좋은 연장이 없었으므로 여러 명이 달려들어도 돌 돈 한 개를 만드는 데 일년여의 세월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만든 돌 돈을 카누에 싣고 이들은 얍 환초로 되돌아왔다.

    보통 크기의 돌 돈은 카누에 실어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아주 큰 돌 돈은 카누에 실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이때는 대나무나 아주 가벼운 목재로 뗏목을 만들고 그 위에 돌 돈을 실었다. 그리고 해류가 팔라우 제도 쪽에서 얍 환초 방향으로 흘러갈 때를 택해 뗏목을 띄워 보냈다. 이중에는 얍 환초에 도달하지 않은 뗏목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운 좋게 얍 환초 해안에 도착하면 젊은이들이 달려가 마을로 운반하였다.

    400km 떨어진 섬까지 가서 돌 돈을 만들고, 그 돌 돈을 싣고 얍 환초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할까. 얍 환초 부근의 바다는 매년 6월이 가장 잔잔하다. 1992년 6월 얍 환초의 주민 여섯 명은 선조들이 바위 제도에서 돌 돈을 만들어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길이 10m의 카누에 돛을 달고 얍 환초를 출발해 3일 만에 바위 제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한 달 동안 현대식 도구를 사용해 돌 돈 세 개를 만들어 카누에 싣고 다시 얍 환초로 돌아온 바 있다.

    통가왕국은 남태평양에서는 유일한 입헌군주국이다. 이 나라는 피지 동쪽에 2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수도인 ‘누쿠알로파’가 있는 빈대떡처럼 평평하게 생긴 ‘통가타푸’ 섬 동쪽 끝 해안에는, ‘하몬가마우이’라고 불리는 삼석탑(三石塔)이 있다.

    삼석탑은 곧게 선 두 돌 위에 한 개의 돌을 얹어 놓은 모양이다. 탑은 서기 1200년쯤에 세워졌는데, 청동기시대에 세워진 영국의 스톤헨지와 그 모양이 흡사하다. 삼석탑의 높이는 5m이고, 밑바닥 긴 면의 길이는 4m에 달한다. 돌 하나의 무게는 30t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석탑을 이루고 있는 돌은 산호 석회암인데 이 돌은 통가타푸 섬에서 나오지 않는다.

    삼석탑을 만든 산호 석회암은 통가 제도의 다른 섬에 있는 바닷가에서 발견된다. 산호 석회암은 모래와 조개 껍데기 그리고 해안 토양의 성분이 칼슘 카보네이트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단단하게 뭉쳐진 것이다. 이러한 바위는 모래사장과 바다가 만나는 수면 바로 밑에 형성되는데, 그 두께는 보통 30cm에서 1m에 이르고 있다.

    운반 수단이 변변치 않았던 13세기, 통가인들은 어떻게 이 돌을 통가타푸 섬으로 옮겨왔을까. 모아이를 제조하고 운반해온 것이 더 이상 미스터리가 아니듯이, 삼석탑을 만든 수수께끼도 하나씩 풀리고 있다.

    산호 석회암은 단단한 층과 부드러운 층이 교차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부드러운 층에 충격을 주면, 단단한 층을 분리해 떼어낼 수가 있다. 옛날 통가의 석공들은 이웃 섬에서 산호 석회암을 발견하면 그 가장자리를 15∼20cm 폭으로 파내려 갔다. 그리고 단단한 층이 끝나고 부드러운 층이 나타나면, 크고 단단한 조개나 나무로 만든 지렛대를 넣고 용을 써 바위를 떼어냈다.

    이렇게 떼어낸 다음에는 분리한 돌 밑으로 줄을 집어넣고 두 척의 카누로 하여금 줄 양쪽을 붙잡고 있게 한다. 이러한 일은 해안가의 산호 석회암이 물 위로 드러나는 썰물 때 이루어졌다. 그리고 밀물이 들어와 카누가 떠오를 때 줄을 잡아당기면, 바위는 부력을 받아 위로 들려진다. 이렇게 들어올린 바위를 끌고 살살 통가타푸 섬으로 카누를 몰고와, 원하는 석탑을 만든 것이다(그림 참조).

    그러나 통가인들이 삼석탑을 세운 이유는 정확지 않다. 최근에는 옛날 통가인들이 하지와 동지를 알기 위해서 삼석탑을 만들었다는 학설이 나왔다. 통가는 남위 15도에서 23도 사이에 있어 옛날에는 하지와 동지를 정확히 구분해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통가인들은 그들의 주식인 얌을 하지에 맞춰 수확하고 잔치를 열었다. 따라서 하지와 동지를 구분하기 위해 삼석탑을 세웠다는 학설이 나왔으나 아직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미국령인 괌섬을 제외한 마리아나 제도는 독일령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은 재빨리 독일령 마리아나 제도를 장악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 사이판인데, 1934년 일본은 사이판 섬 남쪽의 아슬리토(Aslito)에 군용 비행장을 만들었다.

    일본 해군 기동부대가 진주만을 기습한 1941년 12월8일 바로 다음날 새벽, 아슬리토 비행장에서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20여 대의 일본군 항공기가 이륙했다. 오전 6시, 이 항공기는 미국령인 괌 상공에 도달해 하갓냐 시내와 항구를 폭격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도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60년 전 미국령인 괌을 폭격하기 위해 일본 전투기가 이륙했던 비행장이 오늘날에는 사이판의 국제공항이 되었다. 사이판을 방문하는 독자들은 국제공항 활주로 동쪽 끝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일본군이 만들어놓은 방공호 윗부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944년 6월15일 오전, 해병대 제2사단과 제4사단, 육군 제27보병사단을 주력으로 한 미군 6만7000여 명이 일본군의 해안 방어망을 뚫고 사이판 서남부 해안에 상륙하였다. 사이판섬에는 제43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3만2000여 명의(해군 6200명 포함) 일본군이 있었다.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전차 48대와 포병대를 효율적으로 배치하며 공격하는 미군에 패퇴해 섬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사이판 북단에 있는 말피곶으로 가기 직전 길 오른편 언덕엔 당시 격전을 치르며 희생된 젊은 영혼을 위무하는 위령탑 군(群)이 있다. 이 위령탑 중에는 1981년 10월1일, 해외 희생동포추념사업회와 사이판 한인회가 협조해 세운 ‘태평양 한국인 위령평화탑’도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그 옆으로 오키나와인과 일본인 위령탑이 서있다. 위령탑 뒤 절벽으로 된 언덕에 일본군이 쓰던 지하 진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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