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치고 때리고 나가다 보니 먼동이 터오는데…”

김두한이 말하는 긴또깡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입력2002-11-04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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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김두한 열풍’이 불고 있다. 장군의 아들에서 주먹대장으로, 정치테러리스트에서 국회의원으로 변신을 거듭한 드라마틱한 삶이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2002년 가을, 다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모으고 있다. 도화선이 된 것은 SBS 월화드라마 ‘야인시대’의 폭발적인 인기.

    지난 7월29일 밤 9시55분 김두한의 ‘국회오물투척사건’을 서두로 첫 전파를 탄 이 드라마는 9월 셋째 주 3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이후 9월30일과 10월1일 시청률은 각각 44.1%, 48.3%(닐슨미디어리서치·전국기준)에 이르러 50%에 육박했고 다소 주춤했던 10월7일과 8일 방영분도 여전히 40%대를 유지하며 1위를 지켰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그 역사적 배경과 김두한을 둘러싼 네티즌들의 논란도 거세지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커뮤니티에는 이미 지난 9월 말에 ‘야인시대’를 주제로 한 카페가 100개를 돌파했고, 관련된 카페까지 합친다면 300개를 넘어섰다. ‘의송 김두한 공식 홈페이지(www.kimdoohan.org)’ 또한 쇄도하는 네티즌들로 붐벼 10월15일 현재 방문자 35만을 돌파하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김두한을 소재로 다룬 대중매체는 모두 큰 인기를 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5년 제작된 영화 ‘김두한 1~4편’을 필두로 1990년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장군의 아들 1~3’ 시리즈 등 10여 편의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다. 홍성유의 ‘김두한’, SBS드라마의 원작이 된 이환경의 ‘야인시대’ 등 소설은 물론, ‘의협 김두한’ ‘협객 김두한’ 등 만화 또한 줄을 이어 출간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드라마 ‘야인시대’에 열광하는 주 시청자 층이 10~30대 젊은 계층이라는 것.



    이전 영화·소설의 인기가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공유하고 있는’ 중·장년층의 반응에 힘입었던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김두한 열풍’은 그의 삶이 갖고 있는 극적 흡입력이 세대를 뛰어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야인시대’의 작가인 이환경씨는 그동안 인터뷰에서 “드라마를 집필하기 위해 1963년 발간된 김두한씨의 회고록 ‘피로 물든 건국전야’와 동아방송을 통해 방영된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김두한 편’의 녹취분을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69년 10월14일부터 이듬해 1월26일까지 방송된 ‘김두한 편’은 1일 방송량이 12분 내외로, 총 60분짜리 테이프 22개의 방대한 분량.

    ‘신동아’가 이번에 공개하는 부분은 이중 가장 흥미롭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다섯 회다. 1969년 10월18일 방송된 5회 ‘소년시절 걸어온 이야기’, 10월21일 방송된 7회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 10월23일 방송된 9회 ‘장충공원에서 일본깡패와 겨루던 일’ 등은 종로를 누비던 김두한의 성장기를 보여준다.

    같은 해 11월2일 방송된 18회 ‘연애 이야기’에서는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실패한 첫사랑 추억담이 담겨 있다. 12월2일 방송된 39회는 ‘여운형 집 폭파’. 광복 이후 좌우익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절 몽양 여운형의 가회동 자택을 폭파했던 암살미수 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떠돌이 소년, 원노인을 만나다

    김두한은 1918년 음력 5월15일에 출생했다.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였던 아버지 김좌진이 몸을 숨기기 위해 담을 넘었던 집에서 어머니를 만나 ‘혁명적 로맨스’를 통해 자신을 잉태했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다(김두한 회고록 ‘피로 물든 건국전야’ 9페이지). 이러한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에 대해 학계 일부에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또한 김두한은 ‘노변야화’ 4회 방송분에서 “아버지는 원래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양아들이어서 나는 김옥균의 손자인데, 일제 때 족보가 조작됐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 또한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김두한의 회고에 따르면 김좌진 장군은 자신이 태어나던 해 만주로 떠났다. 그 당시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지만 여섯 살(회고록에는 일곱 살로 기록) 무렵 외할머니와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아버지를 만났다는 증언이다.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극심한 탄압에 부딪히자 ‘하나밖에 없는 씨앗을 보존하기 위해’ 이듬해 2월 아버지가 자신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는 것. 이후 서울에서 ‘부잣집 귀공자’로 자라던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일본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투옥되고 외삼촌이 집과 땅을 모두 팔아먹은 후 떠돌이 거지생활을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바로 이 시점, 떠돌이 생활을 하던 와중에 부친에게 신세를 졌던 설렁탕집 ‘사동옥’의 원노인을 만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원노인의 도움을 받던 성장기가 주된 내용. 자신이 왜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 으뜸가는 주먹이 되기 위한 자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김두한식’ 해석도 확인할 수 있다.

    원노인이 세상을 떠난 1930년대 후반 김두한은 본격적으로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김두한이 구마적, 신마적 등 종로를 장악하고 있던 주먹들을 제압하고 건달계의 ‘오야붕’으로 자리잡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종로는 우미관, 조선극장, 단성사 등 밀집해 있는 극장가를 중심으로 ‘건달 혹은 어깨들의 세력권’이 형성돼 있었다. “자동차 바퀴가 터지면 왼손으로 차를 들고 바른손으로 빵꾸를 때우던” 천하장사 구마적, 구마적을 능가하는 힘의 소유자로 공존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신마적, “전신주에 달려있는 외등을 뛰어서 깨는 장기를 갖고 있던” 뭉치, “구루마를 길이로 세워두고 뛰어넘던” 제비 등 쟁쟁한 건달들에 관한 김두한의 설명은 흡사 무협지를 듣는 듯 흥미진진하다.

    재미있는 것은 대결당시를 묘사하는 김두한의 화법. 마치 변사가 된 듯 “잠깐 봅시다” “임마 왜 그래” 같은 말을 직접 인용하거나 “선배가 후배를 사랑하지 않으면, 후배도 선배를 존경할 수 없다”는 식의 고색창연한 대사를 날리는 그의 육성에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현장감이 흐른다.

    하야시 패와의 장충공원 대회전

    조선인 건달계를 제패한 김두한은 이후 충무로를 장악한 채 도박, 건축업, 영화 등을 주무르던 일본계 주먹들을 상대하기 위해 나선다. 당시 시민극장 건너편에 있던 ‘아사히 비루회관’에서 붙은 1차전에서 승리한 김두한은 “한달에 500원씩 보내라, 싫으면 한판 붙자”는 최후통첩을 하야시 패거리에게 보낸다. 하야시 패거리가 이를 거절하자 일전을 위해 선택한 장소가 바로 장충공원. 세번째 에피소드는 ‘일본도나 곡괭이 없이 주먹 대 주먹으로 맞붙기로’ 했던 새벽 6시 장충공원에서의 패싸움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승부를 계기로 김두한과 하야시는 형님동생 사이가 되었다고 김두한은 회고하고 있다. 하야시가 매달 1000원씩 김두한 앞으로 돈을 보내왔다는 것. 조선 건달들과 일본계 건달들의 이러한 공존관계는 세상에 알려져 있는 ‘민족적 대립’구도와는 모양새가 다르다.

    김두한의 당시 활동이 이후 ‘저항 민족주의’ 혹은 ‘민족의식의 고취’로 미화된 데에는 “민족적 고난에 대한 기억을 지속적으로 재현해 사회적 내부갈등을 봉합하려는 지배세력의 ‘기억의 정치’가 작용하고 있다”는 게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 오유석 연구원의 분석이다(신동아 10월호 ‘야인시대 주인공 김두한은 협객이었나’ 참조).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아픔

    영화나 소설을 통해 소개된 김두한의 연애담은 상당부분 작가가 창작한 것이다. 본인의 회고록이나 ‘노변야화’ 방송 등 남아있는 직접자료 가운데 그의 여성편력에 관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여기 소개되는 ‘정동로터리에서 만난 첫사랑 이야기’가 유일하다.

    이미 전국 주먹계의 우두머리로 자리잡은 김두한은 우연히 곤경에 빠진 남매를 구해주다 ‘박씨 성을 가진 양가집 규수’에게 반하게 된다. 이후 여러가지 방법으로 구애하던 그는 한강에서 벌인 ‘힘자랑’ 탓에 여인의 인심을 잃고, 더욱이 일본 헌병대와의 시비(회고록에는 ‘3년 만의 예비검속 때문이었다’고 돼 있다)로 감옥에 가게 되면서 완전히 헤어지게 됐다는 이 에피소드에는 ‘무적 김두한’의 인간적인 측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운형 암살미수사건 전모

    김두한이 광복 이후 혼란기에 우익 정치테러의 선봉에 섰던 일은, 그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게 되는 계기인데도 일제시대의 이야기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이른바 ‘백색테러’에 나서게 된 명분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좌익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암살됐다’는 것. 8·15 직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참여하기도 했던 김두한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우익으로 말을 갈아타 1946년 유진산이 조직한 우익 행동조직 ‘대한민주청년동맹’ 감찰부장이 된다. 이후 그는 우익정치세력과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살인, 방화 등 백색테러의 구심점이 된다.

    다섯번째로 소개되는 에피소드는 그가 여운형을 암살해 추진중이던 좌우합작을 좌절시키려고 시도했던 사건을 본인의 육성으로 풀어내는 대목이다. 전회에서 “야심한 시각 귀가하던 여운형의 자가용을 덮쳐 살해하려던 계획이 실패하고, 대신 여운형이 내 손에 있던 푸른 점을 기억하게 되면서 오히려 미 군정당국에게 쫓기게 됐다”는 데까지 설명했던 김두한은 이 39회에서 장택상 등 우익계 인사들과의 교감 하에 여운형의 자택을 폭파하는 암살공작을 벌이던 당시 상황을 긴장감 넘치는 목소리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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