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빔 벤더스와 최근작 ‘밀리언 달러 호텔’
1962년 26명의 젊은 영화감독들은 오버하우젠 선언에 서명한다. 그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새롭고 창의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며 이른바 ‘뉴 저먼 시네마’라 불리는 운동을 시작한다. 고다르가 누벨 바그의 대표주자라면, 빔 벤더스(1945~ )는 바로 이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 감독 중 하나다.
벤더스의 영화 세계를 살펴보기 위해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미국문화에 대한 매혹이다. 확실히 벤더스는 미국영화와 그 문화로부터 영화적 자양분을 섭취한 감독이다. 그는 “미국영화와 미국 록음악이라는 구명대(救命帶)가 없었다면 유년기를 미치지 않고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미국문화에 대한 이렇듯 지나친 탐닉은 단지 개인적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벤더스에 따르면 자신이 어릴 때, 즉 패전 이후의 독일인들은 대개 어느 정도는 영화와 록, 추잉 검과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포함하는 미국문화에 동화되어 있었으며, 이는 그들이 나치즘의 수치스런 기억을 망각하고자 하는 데서 생긴 ‘구멍’을 메우려는 노력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벤더스와 미국문화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대사가 ‘시간의 흐름 속으로’(1976)에 나오는 “양키들이 우리의 잠재의식을 식민화했어”라는 대사다. 하지만 이를 미국문화에 깊숙이 침탈당한 독일인의 심성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것으로만 보는 것은 좀 곤란하다. 지금껏 벤더스는 미국적인 것에 대해 얼마간 비판을 가한 적은 있어도, 완전히 등 돌린 적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예컨대, ‘미국인 친구’(1977) 같은 경우는 유럽에 남아 있는 미국인이 과연 어떤 악행을 일삼고 있는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니콜라스 레이와 새뮤얼 퓰러 같은 미국영화의 거장들에 경의를 표하는 미국식 스릴러 영화이기도 하다.
느리고 아름답고 탐색적인
또 다른 예로 ‘파리 텍사스’(1984)는 현대인의 고독과 상실감을 그린 영화지만, 동시에 미국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혹적 정경, 그 황량한 아름다움을 그린 우수 어린 블루스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존 포드의 ‘수색자’(1956)에 바치는 벤더스의 오마주로 볼 수 있다(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고는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황야로 떠나는 ‘파리 텍사스’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수색자’의 주인공 이산과 닮은꼴이다). 최근 벤더스는 LA에서 ‘폭력의 종말’(1997)이나 ‘밀리언 달러 호텔’(1999) 같은 영화들을 찍기도 했다. 아무래도 벤더스와 미국문화 사이의 관계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또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심지어 그것에 대한 증오를 포용하기까지 하는 관계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벤더스에게 영향을 끼친 미국영화 중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평론을 쓰던 젊은 시절 벤더스는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리뷰를 남겼다. “이것은 아름답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화다. 두 대의 커다란 모터사이클이 지나가는 땅이 아름답고, 우리가 듣는 음악이 아름다우며, 데니스 호퍼가 연기할 뿐 아니라 연출까지 맡은 것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벤더스가 이런 글을 썼다 해서 주로 로드 무비를 만들어온 그의 영화경력 자체를 ‘이지 라이더’의 리메이크로 본다면 너무 단순한 도식에 빠지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글에서 벤더스가 옹호하는 영화, 또 그가 지향하는 영화가 어떤 타입의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땅(풍경)이 아름다운(돋보이는) 영화, 그리고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다(벤더스의 영화들을 보면 확실히 그는 스토리텔링보다는 이미지 메이킹 쪽에 더 재능이 있고 또한 음악 사용에 남다른 감수성을 갖고 있는 인물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더 확대하면, 벤더스의 로드 무비란 우리가 보고 듣는 것, 그것의 ‘묘사’에 치중하는 영화다. 자연히 벤더스의 영화는 서술의 방법론에 의해 구축되는 영화들에 비해 다소 느린 리듬을 가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