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진홍 철쭉숲 피내음에 취하고 청정도량 해인의 薰香에 깨다

고요와 평안을 찾아 떠나는 여로, 경남 합천

  • 글: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사진: 김성남 기자 photo7@donga.com

    입력2003-05-27 17: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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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여름 합천은 더없이 아름답다. 말간 핏빛의 철쭉꽃이 온산을 덮고, 부처님 오신 달 해인사의 밤엔 수많은 연등이 저마다 고운 빛깔을 내뿜으며 어둠을 밝힌다. 하지만 합천의 진짜 매력은 숨가쁜 현대인들에게 마음속 평안과 여유를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진홍 철쭉숲 피내음에 취하고 청정도량 해인의 薰香에 깨다

    만개한 진홍빛 철쭉이 황매산 정상을 뒤덮었다.

    ‘합천’ 하면 대개 해인사를 떠올린다. 하지만 합천은 철쭉 군락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자리한 황매산 군립공원엔 전국 최대 규모인 15만여 평의 철쭉 군락지가 펼쳐져 늦봄 무렵이면 산 전체가 진홍빛으로 물든다.

    서울에서 경부·88고속도로를 이어 타고 4시간 남짓 내리달려 합천에 닿았다. 남부지방이라 그럴까. 초여름 햇살이 제법 뜨거워 조금만 걸어도 이마에 땀이 송송 배어났다. 읍내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다시 서쪽으로 30분쯤 달려 황매산 군립공원에 도착했다. 황매산 정상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었다.

    산 정상의 철쭉 군락지가 눈에 들어오자 ‘핏빛은 참 묘한 매력을 지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말간 핏빛의 만개한 철쭉꽃들이 저물녘 노을과 어우러져 그 붉은 기를 더욱 강렬하게 내뿜었다. 마치 철쭉꽃에서 비릿한 피내음이 묻어나는 듯했다.

    보는 이의 가슴마저 발갛게 달아올라 허둥지둥 산을 내려오다 알프스 산자락에나 있을 법한 2층짜리 목조건물 앞에 가까스로 멈춰섰다. 1996년 설치미술가 최영호씨가 지어놓은 ‘바람흔적미술관’이다. 건물 안에는 방문객들의 회화작품이 전시돼 있고, 바깥에는 풍차 등 최씨가 만든 20여 개의 설치작품들이 자리를 틀었다. 명함을 꺼내들고 인사를 건네려는데, 최씨가 입을 다물라는 듯 냉큼 쑥개떡 하나를 내민다. 미술관 앞 곱게 깔린 잔디에서 어린이 방문객들과 맨발로 축구를 하던 그는 “이곳에선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바람처럼 왔다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둘러보니 30명 남짓한 관람객들이 신발을 벗어들고 잔디를 밟으며 자연을 만끽하고 있었다.

    산을 다 내려오니 어느덧 밤이 깊었고, 종일 돌아다닌 탓에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왔다. 합천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는 토종 돼지. 묘산면에서 대규모로 방목하는 토종 돼지는 숙성시키지 않은 생고기가 별미다. 합천댐 근처의 토종 돼지고기 전문점 황강호식당을 찾았다. 합천 토박이라는 주인 장태경(57)씨는 토종 돼지고기 맛의 비밀은 새끼를 낳지 않은 암퇘지에 있다고 했다.



    “수퇘지나 새끼를 낳은 암퇘지는 노린내가 나고 육질이 질기지. 하지만 출산 경험이 없는 암퇘지는 고기가 연하고 냄새도 없어. 게다가 오늘 잡은 돼지를 오늘 바로 구워먹으니 입에서 살살 녹는 거지.”

    그의 말마따나 비계가 잔뜩 붙은 부위도 역한 냄새가 없고 느끼하지 않아 쫄깃쫄깃 잘도 씹혀 넘어갔다. 장씨와 동동주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합천에서의 첫날밤이 후딱 지나갔다.



    누가 뭐래도 합천의 최고 볼거리는 해인사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세워진 해인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고려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으며, 현재 5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중이다. 합천읍에서 24번, 26번 국도를 차례로 탄 후 1084번 지방도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쯤 올라가면 해인사를 품은 가야산 국립공원에 다다른다. 가야산의 짙은 녹음과 시원하게 물방울을 튀기는 계곡을 보니 완연한 여름 느낌이다.

    석가탄신일 직전에 해인사를 찾은 터라 수많은 연등의 대열이 사찰 입구에서부터 대웅전까지 이어졌다. 각각의 연등은 저마다 ‘건강기원’이며 ‘사업발전’ ‘학업성취’ 같은 불자들의 소원을 담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온 한 무리 학생들의 틈을 비집고 오랜 세월 팔만대장경을 보존해온 장경판전으로 들어갔다. 팔만대장경은 1236년 몽고군의 횡포를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만든 것. 산돌배나무와 돌배나무가 목판의 주재료로 밝혀졌는데, 이를 바닷속에 3년간 담갔다가 그늘에서 다시 3년을 말린 후 대장경을 만들었기에 오랜 세월 원형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1996년 유네스코는 대장경판과 판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산자락에서 산채한정식을 지나칠 수 없었다. 백운장식당은 1970년대 초부터 해인사 앞에서 산채한정식을 전문으로 해온 음식점. 더덕, 가죽나물, 참취, 고사리 등 가야산에서 자생하는 산나물을 뜯어다 만든 20여 가지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낸다. 산채 특유의 향이 살아 있는 데다,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고 간장으로만 조리하기 때문에 담백한 맛을 낸다. 이집 주인 장정길(47)씨도 합천, 그것도 해인사가 있는 가야면 토박이다. 할아버지가 해인사 스님이었고 부모님대부터 열어온 음식점을 물려받았다. 가야산 국립공원 입장료와 주차비가 너무 올라 손님이 많이 줄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고향인 해인사를 떠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름다운 가야산과 장엄한 해인사에 안겨 살다보면 마음의 평안과 삶의 여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자식에게도 식당을 물려주고 싶은데 장사가 잘 안 돼 걱정이에요. 그나마 최근 들어 방문객들이 다시 서서히 느는 걸 보면 각박한 세상에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이 많아지나 봐요.”

    늦은 점심이라 식사를 마치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합천 전경이 내려다보인다는 오도산(해발 1133.7m) 정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오르니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들 너머로 태양이 붉은 빛을 흩뜨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합천에서의 셋째날, 아침부터 굵은 비가 쏟아졌다. 이 빗속을 뚫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합천에 왔으니 합천 최고의 특산물인 전통한과를 맛봐야 하지 않을까. 절로 입맛을 다시며 합천읍 금양리 ‘합천전통한과’를 찾았다.

    “옛날부터 가야산 찹쌀로 만든 한과가 맛있기로 유명했죠. 왕실에 진상하는 명품이었는데, 점차 맥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1980년대 초부터 합천 각 문중을 찾아다니며 한과의 맛을 재현하려 애썼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땅에서 기른 무공해 원료로 만든 합천 전통한과는 요즘 사람들 입맛에도 잘 맞아요. 한국전통식품 1호로 지정됐을 정도니까.”

    김상근(56) 대표의 합천 한과 자랑이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군 중 하나인 합천의 인구가 6만밖에 되지 않는다는 주민의 말이 떠올랐다. 반세기 전만 해도 인구 18만의 지역 중심지였다는데. 그러고 보니 논밭이나 공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고령층이다. 도시 사람들은 고요와 안정을 찾아 합천에 온다지만, 정작 합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젊은 활기인 듯하다.



    진홍 철쭉숲 피내음에 취하고 청정도량 해인의 薰香에 깨다


    1. 전통한과가 합천 최고의 특산품이 된 데에는 ‘합천전통한과’ 김상근 대표의 역할이 컸다.

    2 쫄깃쫄깃한 육질이 일품인 토종 돼지고기

    3 백운장식당의 산채한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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